민주화이후로 ‘민주주의’는 발전되었지만, ‘자유주의’는 그와 더불어 발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입지가 좁아지고 그 위상이 축소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자유주의가 민주주의와 항상 친화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반자유주의도 민주주의와 연계가능하다는 사실, 즉 ‘반자유적 민주주의(illiberal democracy)’도 가능하다는 사실을 직시한다면, 자유주의의 위축 문제는 성찰의 대상이다. 한국사회에서 자유주의는 그 역사가 일천하지만, 그것이 헌법적 가치 가운데 핵심적 요소를 차지하고 있음은 분명하다. 한국의 자유주의가 위축되고 있는 데는 각기 진보주의와 보수주의로부터 강력한 도전을 받고 있음이 주요 원인이다. 물론 도전의 정도는 다르다.
특히 10년 전부터 국가권력을 장악할 정도로 강성해진 진보진영으로부터 끊임없이 제기되는 압박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가하면 보수주의자들로부터 오는 도전도 만만치 않다. 이 도전은 진보의 지속되는 헤게모니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국의 자유주의가 진보와 보수의 격렬한 갈등 속에서 샌드위치와 같은 처지가 되고 있다면, 애석한 일이다.
한국의 진보와 보수를 생각할 때, 하늘을 향해 나르는 새보다 더 적절한 은유적 표현은 없을 것이다. 새는 좌우로 날지만, 일정한 고도도 유지해야 한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이카로스는 자신에게 밀납 날개를 붙여준 다이달로스로부터의 충고를 무시한 채 높이 날다가 태양열에 날개가 녹아 추락하고 말았다. 지금 한국사회에서 왼쪽으로 날고 있는 진보주의자들은 이른바 ‘이카로스의 문제’에 봉착하고 있다. 권력을 장악한 진보는 이상을 앞세우며 개혁을 추구해왔지만, 그 이상이 21세기의 현실과 맞지 않는 20세기의 낡은 패러다임이라는 것이 문제다.
특히 진보주의자들은 ‘이상적 비전’을 과도하게 ?i는 과정에서 국정을 책임지고 있다는 현실을 무시하고 맡은 바 ‘역할’을 소홀히 하고 있다. 참여정부가 진보적 성향을 표방하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물론 이상이 현실을 견인할 수 있으며, 또 정책의 원동력이 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진보주의 이상에만 함몰되어서는 곤란하다. 정치공동체의 운명 전체를 총괄적으로 책임지는 정부라면 수행해야 할 현실적인 ‘역할’도 막중한데, ‘늦깎이 진보’의 이상만을 추구하는 나머지 구성원들의 욕구와 필요 충족, 즉 통합의 과제를 소홀히 하는 것은 직무유기가 아닐 수 없다.
진보주의자들이 ?i고 있는 이상적 비전은 여러 가지다. 주류세력교체론, 친일잔재청산론, 반미?주체론, 역사바로세우기론 등으로 규정할 수 있겠는데, 사실 이들은 이름만 다를 뿐, 서로 상통하고 있다. 주류세력교체론은 이제까지 대한민국을 경영하는데 핵심적 역할을 담당했던 세력들이 분열세력이며 또 친일파 등, 반민족주의 세력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이것은 적어도 건국세력과 산업화세력을 반칙과 특권만을 향유한 부패집단으로 낙인찍으며 민주화진보세력의 정통성만을 인정하겠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대한민국의 건국은 이 땅에 노예생활과는 다른 자유의 가치가 살아 숨 쉬는 풍토를 조성해준 셈이고 산업화는 그것이 번성하는 계기를 만들어 준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외면하고 건국세력과 근대화 세력을 진보세력으로 교체해야한다는 주류교체론은 반자유주의적 함의를 가질 수밖에 없다.
그것이 역사바로세우기론과 연계되는 논리는 자명하다. 지난날의 역사가 잘못되었기 때문에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것이다. 진보주의자들은 이제까지의 한국의 현대사가 “정의가 패배하고 불의가 승리한 역사”라고 단정한다. 과연 그럴까. 최근의 역사만 보더라도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왔던 여야정권교체도 이루고 전직 대통령들을 처벌하며 대통령의 아들들도 구속했다. 또 이른바 ‘마이너리티 그룹’에 속했던 진보성향의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을 우리 손으로 뽑았으며, 정주영이나 이병철처럼 빈손으로 시작하여 부를 이루고 재벌이 될 수 있었던 우리 한국의 정치?사회?경제구조는 어떤 나라보다도 평등의 이상과 자유의 이상을 실현한 나라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놀랄만한 사실들에는 눈을 감고 과거는 처음부터 잘못되었으니, 그 과거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부족한 ‘자학사관(自虐史觀)’이며, 이 자학적 비전을 이상으로 삼으며 정책적 어젠다를 결정하고 현실을 견인하려는 시도는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오른쪽으로 날고 있는 보수주의가 자유주의에 제기하는 도전은 무엇일까. 진보와 달리 너무 낮게 날고 있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보수주의자들에게도 이상이 있었고 그 이상을 향해 높이 날랐다. 첩첩산중에서 나라를 세우고 또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고자 진력했던 것은 이상과 비전 없이는 불가능하다. 가난에 찌든 이 땅에서 “잘 살아 보자”는 보수의 비전은 국민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고 한국의 시대정신이 되었다. 그러나 비전이 실현되자 새로운 이상을 설정하지 못한 채 살아 왔다는 것이 문제다. 이상실현의 실적에 취한 나머지 기득권에 안주해버린 것이다.
근대화를 이루고 빵의 문제를 해결한 것이 보수주의자의 공적이긴 하지만, 사람은 빵으로만 사는 것은 아니다. 이상과 비전이 필요한데, 현실을 중시한 결과 변화와 변신에 둔감해졌다. 북한의 전체주의적 사정에 정통한 현실주의자가 되다보니 북한을 포용할 수도 있어야 한다는 발상의 전환을 하지 못했다. 또 미국의 은혜와 슈퍼파워를 너무나 잘 꿰뚫고 있는 현실주의자로서 미국에 할 말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는 처지가 되었다. 보수가 현실에 매몰되기보다 이상을 향해 높이 날려면, 그 이상의 내용을 견실한 것으로 채워야 한다. ‘보수주의자의 이상’이란 어떤 것일까. “부자되세요”나 “2만 달러시대 달성”이 보수의 이상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여기에는 어딘가 속물적 냄새가 나기 때문이다. 또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와 같은 거시적 명제들도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각론에 들어가면 모두가 십인십색이 아닌가.
보수주의자들은 대한민국의 정통적 가치를 믿고 있다고 말해왔지만, 정작 그 정통적 가치를 정교화하기를 소홀히 해왔다. 보수주의자들이 주장해온 반공은 소극적 내용일지언정, 이상으로 담아야할 적극적 내용은 아니다.
보수가 이상적 비전으로 삼아야 할 우선적 내용이라면 자유주의적 가치일 것이다. 인권, 자율, 관용, 가족의 신성성, 강제의 최소화 등이 그들이 아닐까. 특히 다원주의와 관용의 중요성을 강조해야 한다. 자유주의적 가치를 위해 감옥도 가고 자기 희생하는 모습도 필요하다. 또 말의 힘은 평지를 달릴 때 보다 언덕을 오를 때 알 수 있듯이, 그 이상에 진정성이 있음을 보여주려면 힘들 때 이를 위한 결단도 요청된다.
이루어야 할 이상이 없으면, 속물근성만 늘기 마련이다. ‘평등’을 내세우기 때문에 진보주의가 매력이 있다고 하지만, 사실 ‘자유’도 매력적인 이상이 될 수 있다. 다만 보수주의자들은 자유를 매력적인 비전으로 만드는 노력을 게을리 했을 뿐이다. 서구의 자유주의자들은 “자유 아니면 죽음을 달라”고 절규함으로 깊은 감명을 주었다. 이제 한국의 보수주의자들도 현실에 발을 딛고 있으면서도 그런 자유주의적 이상주의자가 될 수 있음을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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