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부, 외부, 내부와 외부를 관찰한다는 것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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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하시 사야도, 마음 거듭관찰과 법 거듭관찰 법문, p.521에서 인용
(*이 표시가 된 것은 역자의 설명입니다.)
볼 때마다 보는 것을 관찰하고, 그와 마찬가지로 들을 때마다 듣는 것, 맡을 때마다 맡는 것, 먹을 때마다 먹는 것, 움직일 때마다 움직이는 것, 생각할 때마다 생각하는 것을 관찰합니다.
관찰하면 ‘성품법들일 뿐이다’라고 지혜에 드러납니다. 볼 때 관찰하면 눈과 보이는 형색과 보아 아는 마음眼識이 보는 찰나에 생겨나서는 사라집니다. 들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각각 찰나에 귀와 들리는 소리와 들어 아는 마음耳識이 생겨나서는 사라집니다. 맡을 때도 관찰하면 코와 냄새와 맡아 아는 마음鼻識이 각각 찰나에 생겨나서는 사라집니다. 먹을 때도 맛을 알 때 <안다, 안다>라고 관찰하면 맛을 아는 장소인 혀 물질과, 맛 물질과, 아는 마음(舌識)이 알고 나서는 사라지고, 다시 알고 나서는 사라집니다. 감촉을 관찰할 때도 <부푼다>라고 부풀고 나서 사라지는 것, <꺼진다>라고 관찰하면 다시 사라집니다. <굽힌다>라고 관찰하면 굽힐 때마다, 굽힐 때마다 단계단계 사라집니다. <편다>라고 관찰하면 펼 때마다, 펼 때마다 단계단계 사라집니다. <간다>라고 관찰하면 움직일 때마다, 움직일 때마다 단계단계 사라집니다. 닿을 때도 <닿음, 닿음>이라고 관찰하면 닿는 곳에서 닿고 나서 사라집니다. 생각하고 숙고할 때도 <생각한다; 숙고한다>라고 관찰하면 생각도 생겨나서는 사라집니다. 숙고도 생겨나서는 사라집니다. 계획하는 것도 생겨나서는 사라집니다. 애착하고 즐기는 것도 생겨나서는 사라집니다. 화내는 것도 생겨나서는 사라집니다.
관찰하는 마음도 관찰하고 나서 사라집니다. 성품법*들이 생겨날 때마다 계속 사라지는 것을 경험해서 자신의 상속에서 관찰할 때마다 ‘성품법일 뿐이다’라고 드러납니다. 이것이 내부 법 거듭관찰ajjhatta dhammānupassanā입니다.(*여기서 성품법이란 볼 때 등에 생겨나는 일반적인 물질과 정신을 말합니다.)
“bahiddhā vā dhammesu dhammānupassī viharati(외부의 법에 대해서 법이라고 거듭 관찰하며 지낸다)”에 따라 관찰하는 경우 볼 때 보이는 형색을 관찰할 때 자신의 상속(의 형색)이 아니라 타인의 상속에 있는 형색을 관찰했을 때 그 형색이 휙 하고 사라집니다.(*타인의 형색은 직접 볼 수 있으므로 직접 관찰이 가능합니다.)
들을 때도 듣고 나서 사라집니다. 맡는 것도 맡고 나서 사라집니다. 이때는 숙고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경험하는 것을 말합니다.
내부 성품법을 관찰하면서 ‘외부도 이와 마찬가지다’라고 이해합니다. ‘다른 이의 상속들도 성품법들일 뿐이다’라고 이해합니다.(*이 부분은 문맥의 연결이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저본 그대로 해석했습니다. 굳이 설명해 보자면 타인의 형색, 소리, 냄새는 직접 보고 듣고 맡을 수 있으므로 직접관찰이 가능하지만 맛과 감촉과 마음의 대상인 법은 직접 경험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맛과 감촉과 법의 경우는 자신이라는 내부 성품법을 관찰하면서 타인이라는 외부의 맛과 감촉과 법도 이와 마찬가지라고 숙고해서 이해하는 것을 뜻한다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혹은 다른 방법으로는 “bahiddhā vā dhammesu dhammānupassī viharati”에서 “bahiddhā”를 “보이는 형색, 들리는 소리 등 외부의 성품법을”이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두 종류가 있습니다.(*자신의 형색을 외부에 해당한다고 해석하는 방법과 자신의 형색이므로 내부에 해당한다고 해석하는 방법. 소리 등도 마찬가지.)
어떤 곳에서는 한 종류만 해당합니다. 예를 들어 ‘감’의 경우 자신이 가는 것만 관찰할 수 있습니다.(*가는 모양을 관찰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갈 때 움직임, 이동함 등의 성품을 관찰하는 것을 말합니다.) 외부인 다른 이들이 가는 것을 <간다, 간다>라고 관찰할 수는 없습니다. 자신이 가는 것만 자신이 관찰할 수 있습니다. 이 경우는 내부 관찰만 가능합니다. 그리고 행복한 느낌을 느끼는 경우에도 자신의 상속에 생겨나는 느낌만 관찰할 수 있습니다. 외부인 다른 이들의 상속에 생겨나는 느낌을 관찰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습니다. 마음도 자신의 상속에 생겨나는 마음만 관찰할 수 있습니다. 타인의 상속에 생겨나는 마음은 관찰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경우들에는 관찰할 때마다 내부만 해당합니다. 외부는 해당하지 않습니다.
자신 상속의 법들이 생멸하는 것을 관찰하고서 ‘타인 상속의 법들도 이렇게 생멸한다’라고 숙고해서 이해합니다. 자신 상속의 느낌들을 관찰해서 생멸을 이해한 뒤 ‘타인 상속의 느낌들도 이렇게 생멸한다’라고 숙고해서 이해합니다. 자신에게 애착하고 좋아하는 마음을 관찰한 뒤 ‘타인 상속의 법들도 생멸하는 성품법일 뿐이다’라고 숙고해서 알게 됩니다.
내부를 관찰했다가 외부를 숙고했다가, 다시 내부를 관찰했다가 외부를 숙고했다가, 이렇게 관찰과 숙고를 번갈아가며 행하는 것을 “내부와 외부 둘 모두를 관찰한다”라고 말합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_()_
사두 사두 사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