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옥정 (張禧嬪) <1>
신분사회에 맞선 장희빈(張禧嬪)
소녀 장옥정은 자신이 처한 현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숙부 장현(張炫)은 비록 중인이었지만 ‘숙종실록’에 ‘국중(國中)의 거부’로 기록될 정도로 부자였다. 그런데 서녀(庶女)였던 장옥정 자신은 종모법(從母法·자식의 신분은 어머니를 따르는 법)에 따라 천인이었다.
어머니 윤씨가 조사석 집안의 여종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돈을 주고 속환(贖還)받아 여종 신세는 벗어났지만 천인 딱지는 뗄 수 없었다. 양반가의 여종 출신으로 중인의 첩이 된 어머니 윤씨의 신산스런 삶이 자신의 미래였다.
장씨는 이런 신분제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무슨 일도 마다하지 않으리라고 결심했다. 그녀가 궁녀가 된 것은 다른 여성들처럼 호구를 위해서는 아니었다. 그녀의 숙부 장현은 남인 계열 종친 복창군과 함께 유배된 적이 있을 정도로 정치색이 강한 인물이었고 사실상 남인 당인(黨人)이기도 했다.
장현이 장옥정을 입궁시킨 것은 남인 정권획득의 일환이었다. 남인의 후원으로 자의대비전 나인(內人)이 된 옥정은 대비의 후원으로 그리 어렵지 않게 숙종을 만날 수 있었다. 열 한 살 때 얻은 동갑 부인 인경왕후 김씨를 잃어 외로움에 젖은 스무 살(1680년) 청년 숙종이 실록에 ‘자못 얼굴이 아름다웠다’ 고 기록된 미녀 옥정에게 빠져든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옥정은 후궁에 봉해지기도 전에 숙종의 모후 명성왕후 김씨에게 강제로 쫓겨났다. 명성왕후는 옥정이 남인의 간자(間者)라는 서인들 주장을 사실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옥정은 이듬해(1681년) 숙종과 서인 영수 민유중 딸의 국혼 소식을 궐밖에서 들어야 했다.
그녀의 하염없는 기다림은 2년 후인 숙종 9년(1683) 명성왕후 김씨가 41세로 세상을 떠나면서 끝났다. 복상 기간이 끝나자마자 입궁한 그녀를 숙종은 내명부 종4품 숙원에 봉했다. 정식으로 후궁이 된 옥정은 남인의 계획대로 인현왕후 민씨와 대결했다.
서인들이 편찬한 ‘숙종실록’ 은 곳곳에서 인현왕후의 부덕(婦德)과 장씨의 패덕(悖德)을 비교하고 있지만 민씨가 장씨의 종아리를 친 사실이 기록돼 있을 정도로 민씨의 격렬한 질투가 행간에 남아있다. 숙종은 명문가 출신 민씨가 아니라 여종의 딸을 더 총애했다. 후궁 장씨에 대한 서인들의 증오는 증폭됐다. 서인들은 숙종 13년 6월에 발생한 수해를 장씨 탓으로 돌리고, 조사석이 장씨 모친 윤씨의 애인이기 때문에 우의정에 제수됐다는 말까지 지어냈다.
그러나 장씨는 서인들의 이런 저주를 비웃기라도 하듯 숙종 14년 10월 아들을 낳았다. 그러자 이 아이가 왕이 될 지 모른다고 판단한 서인들의 반응은 더욱 격렬해졌다. 서인 소속의 사헌부 관리들은 장희빈의 산후 조리를 돕기 위해 궁중에 들어오는 모친 윤씨의 옥교(屋轎:지붕이 있는 가마)를 빼앗고 꾸짖었다. 장씨는 이를 갓난 왕자에 대한 공격이자 왕권에 대한 도전이라고 판단했다.
숙종은 서인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갓난 왕자를 원자로 정해, 자신의 후사임을 내외에 천명했다. 그런데 이미 종묘 고묘까지 마친 이 사안에 대해 서인 영수 송시열이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로써 숙종과 서인 사이에는 화해할 수 없는 기류가 흘렀다. 숙종은 재위 15년 서인들을 내쫓고 남인들을 등용하는 기사환국(己巳換局)을 단행했다. 나아가 서인 계열 왕비 민씨까지 쫓아냈다.
숙종 16년(1690) 10월 여종의 딸인 장씨는 드디어 왕비 자리에 올랐다. 서인 명문거족들과 맞서 거둔 승리였다. 서인 영수들은 불귀의 객이 됐다. 남인들이 장악한 조정에서 원자는 당연히 세자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그녀가 적으로 돌린 상대는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쫓아낸 적이 있는 서인이었다.
송시열이 사사 당하던 날 서울의 남문 밖 우수대(禹壽臺)에는 천여 명이 넘는 서인 사대부들이 모여 눈물을 흘렸는데, 이 눈물은 장씨와 남인에게 향하는 것이었다.
숙종 19년 무렵 궁녀 최씨가 숙종의 승은(承恩:임금을 밤에 모심)을 입은 것을 계기로 서인들은 정권탈환에 나섰다. 최씨 역시 장씨처럼 미천한 신분이었는데, 궐 밖의 폐비 민씨가 그녀를 서인으로 포섭했다. 최씨가 숙종 20년 연잉군(延▩君:훗날의 영조)을 낳자 서인들은 본격적인 행동을 개시했다. 폐비 민씨와 귀인 김씨, 숙안공주·숙명공주 등 명문거족들은 막대한 정치자금을 제공했다.
숙종 20년(1694) 3월 말 서인들의 이런 움직임을 간파한 남인들이 서인들을 역모로 고변하자 서인들도 남인들을 역모로 맞고변했다. 숙종은 4월 1일 비망기를 내려 남인들을 전격적으로 축출하고 서인들을 등용했다. 이것이 갑술환국(甲戌換局)이었는데 이후 기사환국과 똑같은 상황이 전개되었다. 숙종은 왕비 장씨를 별당으로 내쫓고 폐비 민씨를 불러들였다. 남인들이 쫓겨난 조정에서 후궁으로 격하된 장씨가 기댈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숙종 27년 인현왕후가 3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자 장씨는 재기를 꿈꿨다. 서인들은 장씨의 목숨을 끊어놓지 않으면 언제 기사환국과 같은 일이 재발할지 모른다고 판단했다. 서인들은 숙빈 최씨를 시켜 ‘민비의 죽음은 장희빈의 저주 때문’ 이라고 밀고하게 했다. 숙종은 장씨를 희생양으로 삼기로 결심했다. 그는 장씨가 중전을 한번도 문병하지 않고, 취선당 서쪽에 신당을 설치해 저주했다고 비난하면서 자결을 명령했다.
14세의 세자가 대신들에게 어머니를 살려달라고 빌었다. 그러나 노론 좌의정 이세백은 옷자락을 붙잡고 매달리는 세자를 외면했다. 여종의 딸로 신분제에 맞섰던 장씨는 당쟁을 이용해 왕비까지 올랐으나 역시 당쟁 때문에 비참하게 생애를 마감하고 말았다. 남은 것은 증오였고 그에 따른 보복의 비극뿐이었다.
장희빈의 아들 경종 / 재위 4년만에 숨져 독살설
장희빈 소생인 세자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
서인들은 이후 세자를 제거하려는 노론과 보호하려는 소론으로 나뉘었다. 최씨 소생의 연잉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싶었던 숙종은 재위 말년 노론 영수 이이명과 세자 교체를 논의했다. 하지만 소론의 반발 때문에 실패하고 세자가 끝내 즉위했으니 그가 바로 경종이다.
노론은 즉위 초부터 경종을 윽박질러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케 하고, 나아가 왕세제 대리청정을 밀어붙이다가 소론 강경파 김일경 등에게 역습을 당해 정권을 빼앗겼다.
그 후 노론이 경종을 살해하려 했다는 고변이 이어지면서 많은 핵심당인들이 사형 당했다. 경종이 재위 4년 만에 세상을 떠나자 노론이 독살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연잉군이 임금(영조)에 즉위한 지 4년 후(1728) 이인좌 등은 경종의 복수를 다짐하며 군사를 일으키기도 했다. 정치 보복이 보복을 낳는 악순환의 계속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