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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출생 – 사망 : 1863.12.12. ~ 1944.1.23.
에드바르 뭉크(Edvard Munch, 1863~1944)는 노르웨이의 뢰텐(Løten)이라는 지역에서 태어났다. 군의관인 아버지와 이지적이고 자상한 어머니를 둔 뭉크는 누나와 3명의 동생들 사이에서 자랐다. 그가 잘 따랐던 누나 소피에(Sophie)와 뭉크는 어머니의 예술적 재능을 물려받아 어릴 적부터 그림을 잘 그렸다고 한다. 뭉크가 다섯 살 되던 해인 1868년에 어머니가 결핵으로 사망하면서 남겨진 아이들은 이모인 카렌과 아버지가 돌보게 되었고, 누나인 소피에 역시 같은 병으로 1877년에 사망한다.
어린 시절 경험한 가족의 죽음과 이로 인한 공포는 그의 전 생애에 걸쳐 작품의 주제가 되었다. 허약 체질로 태어나 잔병치레가 잦았던 뭉크는 어머니의 죽음 이후 변해가는 아버지와 계속되는 가난 때문에 더욱더 고통스러웠다. 뭉크의 아버지는 슬픔을 신앙의 힘으로 극복하려 하며 점점 더 광적으로 변했고 종종 아이들을 꾸짖으면서 어머니가 천국에서 지켜보며 슬퍼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려주곤 했는데, 이런 영향으로 뭉크는 악몽을 꾸거나 무시무시한 환상을 보기도 했다. 뭉크는 후에 “나의 아버지는 신경질적이고 강박적이었다. 그런 아버지로부터 나는 광기의 씨앗을 물려받았다. 공포, 슬픔, 그리고 죽음의 천사는 내가 태어나던 날부터 나의 옆에 서 있었다”, “나는 인류의 가장 두려운 두 가지를 물려받았는데 그것은 병약함과 정신병이다”라고 술회하였다.
뭉크의 여동생 중 한 명은 어린 나이에 정신병 진단을 받았으며, 5형제 중 유일하게 결혼했던 남동생 안드레아마저 결혼식을 올린 지 몇 달 만에 죽었다. 뭉크 또한 류머티즘, 열병, 불면증 등에 시달리고 있었고, 이런 성장 환경은 뭉크를 죽음의 미학에 몰입하게 만들었다.
뭉크의 가족은 1864년에 지금의 오슬로인 크리스티아니아(Kristiania)로 이사하지만, 아버지의 벌이가 신통치 않아 자주 이사를 해야만 했다. 이런 생활 속에서 10대의 뭉크에게 미술은 가장 큰 취미였으며, 이때 그린 드로잉과 수채화의 소재는 주로 집안의 내부나 약병 따위의 물건들, 그리고 풍경이었다.
화가로서의 출발과 첫사랑
뭉크는 아버지의 바람대로 기술대학에 들어가서 공학, 물리학, 화학, 수학 등을 공부하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제대로 공부할 수 없었고 이윽고 학업을 중단하게 된다. 이듬해 아버지의 실망을 뒤로 한 채 학교를 떠나 화가가 되기로 결심한 뭉크는 1881년 크리스티아니아에 있는 예술학교(Royal School of Art and Design of Kristiania)에 등록하여 그림공부를 시작한다. 그러나 1년 후 학교를 떠나 젊은 동료들과 함께 도심의 칼 요한 거리에 있는 스튜디오를 빌려 작업실을 차리고, 1883년 산업미술전에서의 전시를 시작으로 뭉크의 화가로서의 인생이 펼쳐진다. 그런 와중에 젊은 작가들을 후원해오던 화가 프리츠 탈로(Frits Thaulow)가 뭉크의 재능을 알아보고 그를 파리로 보낸다. 이 때 파리에서 머문 3주간의 경험은 뭉크로 하여금 그의 모든 감각을 기민하게 일깨우는 계기가 된다.
1885년 여름 뭉크는 프리츠 탈로의 형수인 밀리 탈로(Milly Thaulow)에게 빠지게 되는데, 이는 그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경험하는 감정이었다(뭉크의 일기에서 하이베르그 부인으로 회상됨). 뭉크는 밀리에게 매우 순정적인 사랑을 바치지만, 그녀는 매우 자유분방한 보헤미안 기질의 여인이었다. 1889년 26살 무렵 파리로 유학을 떠날 때까지 이런 그녀와 연애를 하면서 뭉크는 끝없는 의심과 질투로 정신적 고통에 시달렸고, 결국에는 여성 전체를 가증스럽게 여기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에게 여성은 마돈나이자, 메두사의 얼굴을 뒤에 숨긴 존재였던 것이다.
1886년에 열린 화가들의 축제에서 크리스티아니아 보헤미안의 악명높은 리더이자 허무주의자인 한스 예거(Hans Jaeger)를 만난 뭉크는 인생의 전환점을 맞게 된다. 예거를 알게 되면서 뭉크는 자신의 ‘영혼의 일기’에 생각들을 기록하기 시작했고, 성장기의 기억, 사랑, 죽음 등에 관한 기록들은 작품들의 모티브가 되었다. 뭉크는 1889년에 크리스티아니아에서 개인전을 열게 되고, 이 덕택으로 파리의 레옹 보나 밑에서 2년간 공부할 수 있는 장학금을 받는다.
파리, 베를린에서의 생활과 걸작의 탄생
뭉크는 파리에서의 수업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해 몇 개월 지나지 않아 그만두었으나, 이때 접한 고갱, 반 고흐, 로트렉을 비롯한 유럽 작가들의 작품에 매료당하기도 했다. 그해 겨울 뭉크의 아버지가 무일푼인 상태로 죽자 뭉크는 가족의 생활비를 담당하게 되고, 아버지의 죽음으로 깊은 우울증에 빠져 자살 충동을 느끼기도 했다.
1892년에는 독일 베를린 미술협회의 초청으로 개인전을 갖고 55점의 작품을 선보인다. 그러나 베를린의 언론들은 뭉크의 그림을 혹평했고, 개인전을 지속할지를 놓고 회원 총회의 찬반 표결까지 벌어졌다. 결국 뭉크의 개인전은 8일 만에 중단되었는데 이는 후에 ‘뭉크 스캔들(Munch Affair)’이라고 불리게 된다. 뭉크는 정작 이 ‘뭉크 스캔들’ 덕분에 유명해지고, 이후 4년을 더 베를린에서 지내며 ‘생의 프리즈’와 관련된 스케치를 하게 된다. 뭉크는 베를린의 예술가 모임에서도 유명한 인물이 되어 ‘검은 돼지’라 불리는 보헤미안 모임에까지 가입해 아우구스트 스트린드베리 같은 사람들과 친분을 쌓는다.
1893년에 그려진 [절규]는 소리 지르면서 절규하는 뭉크 자신의 내면적인 고통을 그린 것으로, 그의 작품 중 가장 유명하다. 뭉크는 인물을 S자 모양으로 비틀어 입을 크게 열고 눈을 크게 뜬 채 경악하는 자신과 현대인의 불안한 모습을 담고 있다. [절규]의 배경은 다리 위의 거리이지만 내면세계를 활보하는 자아의 모습인 것이다. 뭉크가 이 작품에 대해 얼마나 많은 애착이 있었는지는 변형시킨 작품의 수가 50종이 넘는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이같은 내면세계에 대한 탐구, 잠재의식에 관한 관심, 자아에 대한 발견은 뭉크가 평생에 걸쳐 심혈을 기울인 주제들이다.
1893년 베를린에서 열린 전시에서 뭉크는 [시리즈의 연구: 사랑]이라는 제목으로 여섯 작품을 선보였다. 이는 그가 후에 [생의 프리즈 - 삶, 사랑, 그리고 죽음의 시]라고 부르는 연작의 시작이 되었다. 뭉크는 그의 작품세계를 대변하고 있는 [생의 프리즈]를 1888년부터 스케치하기 시작하여 30여 년 동안 작업을 이어갔다. 부분적으로 소개되었던 [생의 프리즈]는 1902년 베를린 분리파전을 통해 처음, 체계적으로 완성된 형태를 갖추어 발표되었다. (이 연작 시리즈에는 위에서 소개된 [마돈나(Madonna)], [흡혈귀(Vampire)], [절규(Scream)] 등이 포함되어 있다).
툴라 라르센과의 만남과 고독한 말년
다시 크리스티아니아로 돌아온 뭉크는 또 한 번의 상처를 안겨준 여인, 툴라 라르센(Tulla Larsen)을 만난다(1899). 34살이 된 뭉크는 상류층의 툴라 라르센과 깊은 관계로 발전하면서 자신의 예술적 황금기를 맞게 되지만, 그녀의 끈질긴 결혼 요구에 못이겨 결별하고 만다. 이에 툴라 라르센은 꾀병으로 뭉크를 불러 권총으로 위협하였고, 마침내 총이 뭉크의 손가락을 관통하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둘은 완전히 갈라선다. 이에 뭉크의 여성혐오가 더욱 심해지고, 몇 년 후 [마라의 죽음]과 같은 작품을 탄생시킨다. [살인녀] 또한 이 사건과 관련된 작품이다.
이후 과도한 음주와 싸움 등으로 인해 불안증세는 더욱 심해졌고 환각증세까지 겪던 뭉크는 의사 야콥슨(Dr. Daniel Jacobson)의 병원에 입원해 8개월 동안 요양을 하면서 치료를 받았다. 병세가 호전된 후의 작품들은 그의 작품을 인상적으로 만들었던 신경증적이고 비관적인 느낌이 줄었으며 보다 밝고 다양한 색으로 칠해졌다.
뭉크는 그간 작품을 팔아 번 돈으로 스퀘옌(Skøyen)의 에켈리(Ekely)라는 지역에 넓은 땅을 사들여 그 곳에서 그림을 그리며 20여 년을 보낸다. 그림은 대개 풍경이었고, 여러 점의 자화상을 그리기도 했다. 뭉크에게 있어 작품은 그의 자식과도 같았기 때문에, 한 점의 작품이 팔리면 똑같은 소재의 작품을 다시 제작하였다고 한다. 이는 현재 뭉크 미술관이 그의 전 작품을 소장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뭉크는 또한 엄청난 양의 판화작품들을 제작하였는데, 판화의 가치가 뭉크에 의해 높아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80세의 생일을 맞이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1944년 1월 23일 뭉크는 눈을 감는다. 그의 유언에 따라 모든 작품들이 시에 기증되었는데, 유화 약 1,100여 점, 판화 약 18,000여 점, 드로잉과 수채화 약 4,500여 점, 조각 6점, 그리고 92권의 스케치북과 편지, 수많은 석판 원들 등 엄청난 양의 작품과 자료들이었다.
그가 탄생한 지 100주년이 되던 1963년에 뭉크 미술관이 개관하였다.
에드바르트 뭉크(Edvard Munch)
출생 : 1863년 12월 12일
출생지 : 스웨덴-노르웨이 연합 왕국 뢰텐시 오달스브루크동 (현 노르웨이 인란데주 뢰텐시 오달스브루크동)
사망 : 1944년 1월 23일 (향년 80세)
사망장소 : 노르웨이 국가판무관부 오슬로시 위을레른구 스쾨옌동 (현 노르웨이 아케르스후스주 오슬로시 위을레른구 스쾨옌동)
직업 : 화가
사조 : 표현주의, 상징주의
목차
1. 개요
2. 일생
3. 기타
1. 개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활동한 노르웨이의 표현주의 화가이자, 그림 그리기와 인쇄법을 사용한 작품으로 유명한 아티스트이다. 그는 주로 심볼리즘과 표현주의의 영향을 받아 자신만의 독특한 예술적 언어를 개발했고, 독특하고 특별한 작품으로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그의 예술적 영향은 현대 미술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노르웨이뿐만 아니라 국제 미술사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어릴 적 어머니와 누이의 죽음, 그리고 연속된 사랑의 실패를 겪은 뭉크는 당대 유행하던 풍경화를 위시한 자연주의의 경향에서 벗어나 인간의 삶과 죽음의 문제, 그리고 존재의 근원에 존재하는 고독, 질투, 불안 등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표현주의 양식을 주로 채택하였다 그래서인지 그의 그림은 전반적으로 우울하거나 신경증적인, 불안의 느낌이 나는 우중충한 작품이 대부분이나, 《태양》이라는 작품처럼 밝고 화사한 작품도 그린 바 있다.
지금도 무척 유명한 화가지만 생전에 두 지역의 넓은 땅을 구매해서 거기서 살며 그림을 그렸을 정도로 돈을 많이 벌었고 노르웨이 왕실에서 기사 작위를 받을 정도로 인정받은 화가였다.
2. 일생
뭉크는 군의관 아버지와 예술적 소양을 갖춘 어머니 사이에서 5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뭉크의 가족 사진
그는 본인 스스로가 일생에서 죽음과 함께 있었다라는 말을 했을 정도로 어린 시절부터 불운이 몰아쳤다. 그는 5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사랑하는 어머니가 폐결핵으로, 14살에는 어머니를 대신해줬던 큰 누나 소피에마저 동일한 병명으로 세상을 떠나는 걸 목격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동생 라우라는 정신병을 앓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가족들의 연이은 죽음으로 인한 충격을 이기지 못한 아버지는 종교에 의존하다 못해 광신도가 되버려 아이들에게 공포 소설을 읽어주고 종교적 행위를 강요하는 등 정신적 학대를 아이들에게 일삼았다. 이런 불운한 가정사와 유년시절은 큰 트라우마가 되어 뭉크는 평생동안 자살충동과 불안, 강박장애로 고생했었다.
그러던 도중 뭉크는 자신을 돌봐준 이모를 통해 그림을 접하게 되고 자신의 감정을 캔버스에 담아내며 어두운 현실을 잊고 견뎌내곤 했다. 18살에 아버지의 강요로 기술학교를 가게 되었지만 병약한 체질 탓에 학교를 자주 결석했다. 또 그림에 대한 열망을 끊을 수 없던 그는 기술학교를 그만두고 국립 왕실 미술 학교를 가게 된다. 당시 뭉크는 미술에 탁월한 재능을 보여 학생 시절 개인전을 열고 프랑스 유학생으로 선발되기까지 했다.
이때 프랑스 유학 시절 뭉크는 후기 인상주의, 특히 고흐의 화풍에 큰 영향을 받고 자신의 화풍을 자신의 마음을 대변하는 표현주의으로 노선을 정하게 된다. 이후 한 화가의 추천으로 독일로 가서 첫 개인전을 열지만 당시 독일 화풍과 정반대이다 못해 우중충한 분위기의 뭉크 그림은 사람들에게 여러 혹평을 받는 걸 넘어 전시회도 도중 중단 되는 여러 수모를 겪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의 내면을 그려내는 뭉크의 화풍은 큰 찬사를 받게 되며 이후에 노르웨이 왕실로부터 기사 작위까지 받는 등 큰 성공을 거두게 된다. 뭉크는 말년까지 재산이 많았는데, 적어도 이 시점 이후로는 죽을 때까지 먹고 살 걱정은 안 하고 산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이런 성공과 별개로 뭉크의 연애사는 그의 그림들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만큼 우중충했으며, 뭉크는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그러나 그에게도 여자와의 관계가 아예 전무했던 건 아니었으며, 밀로 탈로, 다그니 유엘, 툴라 라르센이라는 세 여자와 각별한 인연이 있었다. 다만 셋 중 어느 누구와도 제대로 이어지지 못했고 오히려 이 사랑으로 큰 트라우마를 얻게 된다.
뭉크의 첫사랑인 밀리 헤이베르그는 해군 장교의 아내였으며 당시 신여성의 상징이자 사교계의 유명인사였다. 팜므파탈의 기질이 다분했던 유부녀이나 매력적인 여성인 밀리에 푹 빠진 뭉크는 그녀와 6년간 밀회를 한다. 하지만 밀리에게, 뭉크는 그저 놀이대상 이상 이하도 아니었으며, 결국 남편과 이혼 후 바로 다른 남자와 재혼해 뭉크에게 상처를 주고 떠난다.
첫 사랑에게 큰 상처를 받은 뭉크는 이후 여성에 대한 혐오와 두려움을 가지게 되며 이때 탄생한 작품이 <흡혈귀> 또는 <사랑과 고통>이라고 불리는 4점의 작품이다.
이후 뭉크는 베를린에서 살다가 자신의 소꿉친구이자 먼 친척인 다그니 유엘(Dagny Juel)을 만나 교제한다. 그러나 다그니는 뭉크를 포함한 여러 예술가들의 뮤즈였고 하필이면 뭉크의 친구이자 극작가 겸 시인인 스타니스와프 프시비셰프스키(Stanisław Przybyszewski)와 교재하여 삼각관계가 형성된다. 결국 다그니는 1893년 프시비셰프스키와 결혼식을 올리게 되고 뭉크는 배신감과 분노에 사로잡혀 '이별', '질투'를 그리고 자신을 떠나간 다그니를 모델로 한 '마돈나'를 그리게 된다.
그 후 한동안 좌절에 빠졌던 뭉크는 툴라 라르센(Tulla Larsen)이란 여자와 교제하게 된다. 그동안 뭉크를 떠나 상처를 주었던 여자들과 달리 툴라의 경우 그보다 4살 더 연상인 연상녀로서 예술 방면에 해박하고 성격도 적극적이어서 뭉크와 깊은 관계를 지녔지만 그 사랑이 너무 지나친 것이 문제가 되었다. 그녀는 뭉크에게 집착하기 시작했고 결혼을 요구했다. 점점 툴라를 멀리하는 뭉크에게 툴라는 자살하겠다고 협박한다.
뭉크는 결국 툴라에게로 돌아와 툴라를 말렸는데, 하필이면 이 때 총이 발사되면서 뭉크의 왼쪽 3번째 손가락(중지)이 관통당하는 사태가 생기고, 뭉크는 결국 영영 왼손의 중지를 잃고 만다. 이 일을 겪은 후 뭉크가 그린 그림이 '마라의 죽음'이다. 그래놓고 라르센은 3주 뒤 다른 화가와 결혼했다.
툴라와의 결별 이후 뭉크는 과도한 음주, 싸움 등을 하다 보니 불안증세가 더욱 심해졌고 거기에 더해 환각 증세까지 얻게 된다. 결국 뭉크는 야콥슨이란 의사의 병원에 가서 8개월 동안 요양치료를 받았는데, 이 때의 경험 덕분인지 요양치료 시기 이후의 뭉크의 그림에서는 특유의 신경증 + 비관적인 느낌이 줄어들고 색채가 좀 더 밝고 다양해졌다고 한다.
이후 뭉크는 그림을 그려 번 돈으로 두 지역(스퀘옌과 에킬리라는 지역)의 넓은 땅을 사서 그곳에서 풍경화나 자화상 등을 주로 그리며 20년을 살았다. 또 대량의 판화 작품도 제작했다고 하며, 자기 작품에 집착해서 한 작품을 팔고 나면 같은 소재로 작품을 또 그리는 일을 반복해서 작품의 숫자가 많아졌고, 현재의 뭉크 미술관이 그의 전 작품을 소장할 수 있게 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그는 1944년 1월 23일에 사망했는데, 나치에 의해 퇴폐미술로 지정된 자기 작품이 파괴될 것을 우려해서 유언으로 자기의 전 작품을 시에 기증했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여러 정신 질환을 앓아와서 몸이 건강하지 못했던 데에다 때때로 과음까지 하며 몸을 망쳤던 것에 비해 대단히 장수했는데, 향년 80세로 당시에는 웬만큼 건강한 남성도 80세를 넘기는 경우가 드물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상당히 의외인 부분.
3. 기타
엄청난 다작왕이기도 하다. 그가 기증한 작품들만 해도...
유화 약 1,100여 점
판화 약 18,000여 점
드로잉 + 수채화 약 4,500점
조각 6점
그 외 92권의 스케치북과 편지, 다량의 석판 등
아마도 그가 80세라는 긴 세월을 살면서 계속 화가 일을 해온 것도 있어서 그의 손에 제작된 작품도 많았고 뭉크는 워낙 자신이 그린 그림에 대한 애착심이 커서 팔린 그림을 또 다시 그리곤 했었다. 당장 대표작인 절규는 30개의 버전이 있으며 2012년 소더비 경매장에서 1억 1990만 달러라는 최고가를 경신한 절규는 파스텔 버전이었다.
뭉크의 대표작 중 하나는 "절규"(The Scream)로, 이 작품은 1893년에 제작되었다. "절규"는 뭉크의 불안과 고통을 표현한 작품으로, 그의 예술적 성취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작품 중 하나로 꼽힌다. 이 작품은 그의 삶과 작품에서 고요한 테마와 대조적으로 강렬한 감정을 담고 있다. 또한 절규 외에 "사랑의 새벽"(The Dance of Life), "포함된 여인"(Madonna), "생명의 나무"(The Tree of Life) 등의 작품으로 유명하며, 그의 작품은 종종 사람 간의 관계, 죽음, 사랑, 고통 등 인간의 복잡한 감정과 삶의 주제를 다뤘다.
금발이 많은 북유럽(노르웨이) 혈통임에도 불구하고 어두운색 머리이다. 사실 북유럽인은 천연 금발로 유명하지만 염색한 금발도 있고 흑발이나 어두운 색의 머리도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아니면 어릴적 금발이었다가 크면서 어두운색으로 변했을 확률도 있다.
에드바르 뭉크
노르웨이 1,000 크로네 지폐에 그려진 뭉크
신상정보
출생 1863년 12월 12일 (출생지 : 스웨덴-노르웨이 로이텐)
사망 1944년 1월 23일(80세) (사망장소 : 노르웨이 오슬로)
국적 노르웨이 노르웨이
사조 상징주의
주요 작품 : 절규
에드바르트 뭉크(노르웨이어: Edvard Munch, 1863년 12월 12일 ~ 1944년 1월 23일)는 노르웨이 출신의 표현주의 화가이자 판화 작가이다. 노르웨이에서는 국민적인 화가이다. 그의 초상이 1,000 크로네 지폐에도 그려져 있다.
처음에는 신(新)인상파의 영향을 받아 점묘의 수법을 사용하여 삶과 죽음에의 극적이고 내면적인 그림을 그렸다. 1892년 베를린으로 이주, 그곳의 미술 협회에 출품했다.
작품으로 <절규>, <병든 소녀> 등이 있다.
생과 죽음의 문제 그리고 인간 존재의 근원에 존재하는 고독, 질투, 불안 등을 응시하는 인물을, 인물화를 통해 표현했다. 표현주의적인 화풍의 화가로 알려져 있다.
스웨덴-노르웨이 로이텐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빈민가에 사는 의사였다. 그 빈민가의 절실한 생활은 그의 마음에 새겨졌으며, 어릴 때에 어머니는 결핵으로 사별하고, 이어 누나까지 사망하였다. 죽음과 병에 대한 환각(망상)은 그에게 마음의 벽을 쌓게 했다. 그는 파리에서 인상파의 영향을 받음으로써 색채를 강하게 바꾸어 그리는 화법을 구사하였다. 1892년에는 베를린 미술협회에 초청되어 대량의 작품을 출품했으나 그 이질적인 표현으로 공격을 받고, 다시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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