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6. 5 – 6. 13 예술의전당한가람미술관(T.02-580-1300, 서초동)
상황에서 시원으로_임철순 개인전
글 : 박영택(경기대교수, 미술평론가)
임철순의 작품을 공식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첫 번째 자료는 <테>(1977)다. 제주 감귤을 담은 나무박스를 가득 쌓아놓은 장면을 화면에 꽉 차게 그린 것이자 극사실기법으로 그린 회화다. 원근이 형성되지 않고 깊이감이 사라진 자리에 캔버스의 평면성을 은연중 부각시키면서도 일루젼과 손에 의한 회화의 복원, 그리고 모종의 주제의식을 동반한 서사가 두루 얽혀있는 회화라는 인상이다. 이는 당시 한국의 극사실주의 회화들의 보편적인 소재, 관심이었다고 본다. 벽이나 드럼통, 철길, 자갈밭 등의 풍경은 그런 의미에서 차용된 소재들이었다. 나무의 색감과 결, 질감이 구체적으로, 생생히 드러나 있으며 상자의 표면에 부착된 종이, 종이에 도장이나 문자와 숫자가 기입되어 있고 부분적으로 뜯겨나간 자취 등이 실감나게 드러난다. 안에 담긴 내용물은 볼 수 없고 대신 나무의 결과 색감만이 화면을 단색조로 가득 채우고 있는 화면은 재현이면서도 다분히 추상적인 효과를 자아낸다. 아울러 한쪽에 방치되어 쌓여진 일상의 나무박스라는 존재는 이른바 일상적 오브제를 차용하고 있으면서도 이를 통해 소외 등을 연상시키는 내용을 거느리는 소재로 다루어지고 있다. 감귤박스는 사물이자 오브제다. 나무상자가 화면을 꽉 채우고 있기에 원근이 형성될 수 없는 화면은 당연히 납작하고 평면적으로 다가온다. 더구나 사각형의 나무상자들이 반복해서 쌓여있기에 그 내부를 채우고 있는 작은 사각형 공간들이 반복해서 병렬하고 있고 이는 사각형의 화면 안에 무수한 사각형의 꼴을 만들어낸다. 이 사각형의 변주는 불가피하게 사각형의 화면 안에서 그림이 그려지고 있다는 사실을 지속적으로 환기시켜준다. 결국 당시 작업은 극사실주의의 유행에 따른 작업의 일반적인 성향을 노정하면서도 모더니즘의 평면성과 단색조의 틀 안에서 이를 모두 아우르는 식으로 구현하고 있다. 이 초기작품은 임철순 회화의 근간이 되어 지속적으로 작동한다. 이처럼 그의 작업은 사실적인 재현에 기반 한다. 정교한 재현에 힘입은 구상이 중심이다. 그리고 작품의 주제는 일상에서, 현대사회에서 추출하고자 한다. 주제의식을 끌고 간다는 얘기다. 그러면서도 회화의 평면성을 유지한다. 동시에 이미지는 다분히 오브제의식 아래 차용된다. 그려진 이미지와 실제 사이의 놀이가 감행되고 화면은 그 이질적인 것들 사이의 긴장감 혹은 둘의 관계 사이에서 지탱되고 있다.
이후 1980년 작업은 구체적인 사물에 보다 근접한 시선의 변화를 보여준다. <상황-이미지>라는 제목의 그림들은 특정한 구조에 묶여 있는 천, 커튼의 일부를 보여준다. 기하학적으로 날카롭고 선명하게 구획된 화면은 밝고 어둠의 극단적인 대조를 이룬다. 부드러운 천이 긴장감 있게 감겨있고 끈은 정교하게 재현되어 있다. 반면 후경에 자리한 창문은 녹슨 철물을 재현한 것 같긴 한데 죽죽 흐르는 물감의 흐름으로 인해 추상적인 효과로 두드러진다. 부분적으로 드러나는 천의 주름과 끈 부분이 모종의 힘과 압력에 의해 연출된 상황을 암시하는 것도 같다. 전체적으로 짙은 어둠과 녹슨 부위 등이 실내의 어느 한 부분에서 묘한 조형적인 구성을 발견한 것인데 여기서도 강한 오브제성이 감지된다. 아울러 당시 1980년도의 암울한 정치적 상황에 대한 모종의 은유적인 메시지가 개입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1982년도부터 일정 시간 지속된, 작가 특유의 소재가 된 침대(흰 천)와 그 위에 놓인 작고 감각적인 빨간 과일(체리), 그리고 구조물과 직선, 전경과 후경의 분리, 광막한 공간감을 자아내는 배경, 전체적으로 푸른 색조가 자아내는 몽환적인 차가운 분위기 등으로 이루어진 <상황-이미지>시리즈가 출현한다. 누드가 부분적으로 등장하기도 하고 녹슨 철문이나 차가운 금속 침대 등이 반복해 등장하면서 밀폐되고 암울한 공간을 암시한다. 사람이 부재한 침대 위에 마른 식물만이 덩그러니 놓여있는 상황 속에서 죽음이나 부재 등을 연상시키는 다소 무거운 주제의식이 무겁게 내려앉아 있다. 한편 1980년대 중반에 이르면 화면 바탕에 과감한 질감으로 이루어진 효과가 적극 등장한다. 에어브러쉬로 세밀하게 조율된 화면에 이질적인 효과가 개입하고 대담한 붓질도 스치듯 지나간다. 이 텍스츄어에 대한 관심은 이후 더욱 가속화되어 1987년에 이르면 생지 마대 화면 바탕으로 인해 강한 마대의 텍스츄어가 적극 노출된다. 그리고 우드락을 화면에 부착하고 그 표면을 불로 태워 미묘한 색감이 감도는 질감효과를 극대화하는 동시에 바탕에서 일정한 두께를 지니고 튀어 올라와 부조적 효과를 보여주는 그만의 연출이 시도된다. 일정한 두께를 지닌 층이 비정형의 형태를 지니며 부착되어 있고 그 위에 그림이 그려졌고 이에 따라 바탕 면과 그려진 화면을 동시에 인식시킨다. 실재와 그림이 동시에 공존하고 있고 화면 안에 또 다른 공간, 화면이 펼쳐진다. 그림 안에 그림이 담겨 있다. 이는 단일한 화면에 머물지 않고 화면을 다층적인 공간으로 확장시키며 평면 안에서 이를 부단히 교란하는 일련의 장치로 보인다. 그리고 이는 이후 실크스크린으로 얹혀진 화면 및 몇 개의 분할된 박스형 화면으로 이동한다.
개인적으로 임철순의 대표작, 그만의 방법론이 일정한 성과를 이룬 것은 1989년도 작인 <현대인을 위한 Signal>이다. 이 시리즈는 1990년까지 지속된다. 마대 천을 바탕으로 이 위에 물감이 매우 두껍게 올라와 있고, 몇 개의 면들은 분절되어 자리했다. 그 위로 물감을 흘리듯이, 드리핑 하듯 감각적으로 얹힌 표시들이 놓여있다. 단색의 물감 층이 각기 다른 표정을 지으면 단단하고 기념비적으로 물성을 극대화하고 있다. 그 한면에 실크스크린으로 여러 사람들이 집결한 모습, 그들의 하반신을 실크스크린으로 전사해서 올려놓았다. 사진과 회화, 구체적인 이미지와 물감의 물성, 흑백사진과 채색된 물감 등이 긴장감 있는 조화를 이룬다. 상당히 감각적인 연출력이 돋보인다. 그러니까 물질화된 화면의 추상화가 신선하고 물성연출, 실크스크린에 의한 프린트 기법 등이 어우러진 복합기법이 감각적이다.
1990년을 지나면서 부터는 도시인, 현대인들을 보여주는 이미지는 사라지고 대신 자연풍경이 등장한다. 거대한 나무 이미지(사진)는 이후 지속적으로 화면의 중심부를 차지한다. 실크스크린으로 전사된 숲/나무이미지와 마대의 생생한 질감, 두텁게 발라진 안료와 물질감 간의 결합이 특별하다. 그 위로 선묘, 장식적인 선이 종횡으로 지난다.
1993년도부터는 성황당의 나무, 민화와 오방색 등의 관심으로 무게 추가 이동한다. 이른바 한국적인 그림 내지는 전통에 대한 관심이 적극 개입되고 있다. 이는 <심상의 풍경-Life>를 거쳐 <기원-삶>시리즈로 전이된다. 이때부터 그림에 장식성이 강조된다. 커다란 성황당의 신목과 화려하고 강렬한 오방색, 목어(풍경), 연꽃, 색동천으로 감싼 오브제(나무) 등이 프린트 되고, 그려지고 오브제로 화면에 부착되었다.
2001년도에 와서는 화면에 박스가 설치되고 오브제가 부착되는 등 다양한 연출이 과감하게 시도된다. 이른바 <풍경을 위한 드로잉-흔적> 혹은 <풍경을 위한 드로잉-사이> 시리즈다.
하늘과 구름, 땅, 나뭇가지, 마른 열매와 인간, 자동차와 도로는 임철순 작업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이미지들이다. 이 상반된 이미지들은 단어처럼 놓여 상징적인 언어의 고리를 이룬다. 그 언어는 이질적이고 충돌적이면서도 기이한 조화 속에서 풍성한 울림과 파장을 전해준다. 무심한 구름이 떠있는 하늘에 썰매 타는 소년의 모습, 자동차와 도로의 풍경이 자리하고 있다거나 나뭇가지 옆에 마른 열매가 혹은 하늘을 배경으로 직립한 나무들의 모습이 연결되어 있다. 재현 회화와 사진, 오브제로 출몰하는 이 ‘단어’들의 만남/관계 속에서 그림은 이루어진다. 자연과 인공, 도시풍경과 나목, 유년의 추억과 현대인, 생명과 소멸 같은 내용의 대비뿐만 아니라 그림과 사진, 손에 의한 터치와 실크스크린 기법, 평면화면과 오브제, 붓질과 물성 등의 상반된 기법들이 한 화면에서 공존하고 모종의 형국을 긴장감 있게 만들어나간다. 이처럼 작가는 이원적 요소들의 공존과 조화를 즐겨 구사한다. 두 개의 상반된 요소들 간의 변증법적인 관계설정은 화면을 특이한 구조로 만들어나간다. 형상과 추상, 재현과 비재현, 회화와 오브제, 질량감과 선의 맛 등 모든 요소들이 동일한 화면/지지대에 평등하게 존재하는, 서로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상당히 감각적으로 화면을 운영해 나가며 계산된 구성으로 마감되는 그의 그림은 형식과 내용의 균형 속에서 만들어진다. 아울러 심리적인 잔상과 기억을 동반하며 서로 다른 상황, 공간, 시간대를 연결시키는 초현실적인 체험 역시 그에 뒤따른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오브제와 사진이미지는 인간이 의식하지 못하는 잠재의식을 추적하고 현상화 하는 도구, 언어적 도구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특별한 의도로 기능한다. 또한 내면의 심리적 흐름과 잔상, 현실에 감춰진 무의식과 꿈같은 것을 드러내기도 한다. 낯설고 상반되는 것들이 한 자리에 만나서 일으키는 의도된 조화/긴장은 단일한 하나의 진술이 아니라 다성과 다층적 의미망을 지닌 풍경/세계상이다. 바닥에 뉘여 놓은 캔버스/패널 위에 두툼한 마티엘(우드락, 몇 번의 겹칠과 젤미디움, 모델링 페이스트, 밀랍코팅 등)을 올려놓고 그 위에 전사한 나무이미지를 올려놓은 후 그 표면에 날카롭고 깊은 상처를 입힌다. 오브제도 부착했다. 작가 자신의 신체성을 보여주는 이 행위는 하나의 자립하는 선으로, 회화적 행위로, 자기 삶의 흔적이자 아울러 나무/자연에 가하는 현대문명의 폭력을 상징한다. 임철순의 작업의 근간은 다분히 몽타주에 기반 한다. 몽타주는 극단적인 환상과 극단적인 절제, 달리 표현하면 모니즘적 추상회화의 회화적 기술들과 사진적 단편의 리얼리즘을 절묘하게 종합해내는 것이다. 자연/현대문명, 현대인의 삶 등이 그의 주제, 내용이며 다분히 형식적인 미술어법의 하나로 활용되는 것이 그만의 몽타주 기법이다. 그는 현대사회의 총체적인 변화의 충격을 다소 정서적이고 서정적으로 감싸고 있고 여기에 그 몽타주가 기능한다. 파편화 된 세계의 모습, 일상의 불연속과 단절, 그리고 연속적인 삶의 이미지 대신 급속하고 다면적인 현실을 반영하는 이미지로, 혹은 재합성 된 이미지들로 제시되어 드러나는 그의 그림은 사진과 회화, 오브제를 기본 재료로 사용하면서 이질적인 여러 요소들을 조립하여 새로운 공간 속에 배치하고, 이를 통해 시각적으로나 의미적으로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역설적이지만 통일적이 아니라 분열적으로)에 걸려있다.
이후 2014년에서 최근에 이르러서는 이른바 <The Wings of Mother>시리즈를 선보인다. 다시 성황당의 커다란 신목이 화면 하단의 중심부에 기념비적으로 위치하고 있고 그 위로 한복과 날개가 연이어 잇대어 상승한다. 색채로 깊게 얼룩진 화면, 날카롭게 자리한 전사된 이미지(나무사진), 그 주변을 감싸고 있는 검은 물감의 흘림, 한복과 색동색감이 자욱한 부위 등이 어우러져 다분히 한국적인 분위기, 전통에 대한 모종의 관심을 적극 드러내고 있다. 그의 오랜 작업과정이 도달한 지점은 우리 전통 미감과 한국적인 미의식과 정신세계, 그리고 화려한 오방색이 지닌 색채감각이자 자연과 함께 공존했던 우리 선조들의 삶의 지혜에서 연유한다. 이미 1990년대 초반에 선보였던 작품에도 선명하게 드러낸 관심사다.
도시에서 살아가는 현대인의 소외의식을 비롯해 특정 상황을 예민하게 떠올려주던 작가는 이후 자신의 관심을 보다 한국의 기층문화에 주목하는 한편 작업의 추를 보다 근원적인 쪽으로 깊게 이동하면서 옮겨왔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방법론은 여전히 이질적인 요소들의 긴장감 있는 조화와 몽타주 기법, 오브제 차용 등 현대미술의 주된 방법론을 지속해서 원용해내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 저간에는 미니멀리즘과 극사실주의, 재현과 추상적 요소의 공존, 이미지와 오브제, 사실과 환영, 현실과 몽상 등으로 얽힌 복합적인 세계가 또한 숨 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