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7일(수) 이사야 12:1-6 찬송 436장
1. 그 날에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는 내게 노하였사오나
이제는 주의 진노가 돌아섰고 또 주께서 나를 안위하시오니
내가 주께 감사하겠나이다 할 것이니라
2.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신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3. 그러므로 너희가 기쁨으로 구원의 우물들에서 물을 길으리로다
4. 그 날에 너희가 또 말하기를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의 이름을 부르며
그의 행하심을 만국 중에 선포하며 그의 이름이 높다 하라
5. 여호와를 찬송할 것은 극히 아름다운 일을 하셨음이니 이를 온 땅에 알게 할지어다
6. 시온의 주민아 소리 높여 부르라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가
너희 중에서 크심이니라 할 것이니라 (개역 개정)
- 여호와의 구원에 대한 성도들의 감사 찬양 -
‘이새의 뿌리에서 난 한 싹’(11:10), 곧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기치 하에
선민 이스라엘의 남은 자를 포함한 세계 만민이 회개하고 돌아와
평화의 왕국을 이루게 될 것이라는 어제 말씀의 예언에 이어
회개하고 돌아와 구원받은 자들의 감격어린 감사 찬양을 기록하고 있다.
이 찬양과 함께 넓게는 제1-12장까지의 예언이,
좁게는 북이스라엘과 앗수르에 대한 심판과 선민 이스라엘의 회복 및
메시야 왕국의 도래에 대한 예언을 주 내용으로 하는 제7-12장의 예언이 마감된다.
이러한 오늘 말씀은 메시야를 통해 구원을 주신
하나님의 자비에 감사하는 찬양(1-3절)과
메시야의 구원 복음을 만국에 알리고 만민으로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케 하라는 권면의 내용(4-6절)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편 이 찬양은 바벨론에서의 포로 귀환을
제2의 출애굽 사건으로 표현한 11:16과 연관시켜서 생각해 볼 때
마치 이스라엘이 출애굽하여 홍해를 건넌 직후에 불렀던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모세의 감사 찬양(출15:1-21)과 유사하다.
그러나 모세의 노래는 대적으로부터 구원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주로 찬양한 반면
여기서는 범죄한 백성에 대한 진노를 멈추시고 자비를 베푸신 사실과
그로 말미암은 기쁨을 주로 찬양하고 있는 점이 서로 다르다.
택함받은 모든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영원히 멸망할 사망의 구렁텅이에서 건짐받은 후에 부르게 될 노래는
이 두 가지 내용을 다 포함할 것이다.(엡2:3-10)
그것은 성도의 구원은 한편으로는 대적 사탄에 대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승리에 의해,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의 대속에 근거하여 죄인에 대해
하나님께서 진노를 거두심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원에 대한 감사 찬양, 이것은 아무리 강조한다 해도,
또 아무리 많이 부른다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실로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는 그만큼 크고 놀라운 것이다.(요3:16; 롬5:8; 요일4:10)
5절) 「여호와를 찬송할 것은 극히 아름다운 일을 하셨음이니
이를 온 땅에 알게 할지어다」
이스라엘이 여호와를 찬송해야 할 이유가 나온다.
그것은 곧 여호와께서 극히 아름다운 일을 행하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여호와께서 행하신 ‘극히 아름다운 일’이란 무엇인가?
그 일이 얼마나 아름답기에 ‘극히’라는 말까지 사용하여 강조하며
하나님을 찬양해야 할 근거로 삼고 있는가?
여기서 하나님이 행하신 ‘아름다운 일’이란
일차적으로 이스라엘을 이방의 압제에서 구원하신 일을 말한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고,
앗수르의 손에서도 건져냈으며, 바벨론 포로에서도 구출하셨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하신 일이
왜 그처럼 ‘극히 아름다운 일’이 되는가?
여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일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왜 이방 나라의 포로로 전락하는 신세가 되었는가?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악을 행하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자신들의 악에 대한 정당한 보응을 받은 것이다.
그들은 다시 회복되지 못한다고 해도 하나님을 향하여 아무런 원망도 할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을 외면하시지 않았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배반과 불순종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한번 당신의 백성으로 삼으신 그들을 여전히 사랑하시고 긍휼이 여기셨다.
다른 모든 악한 이유들이 있음에도 그들을 선택하시고
그들과 맺으신 언약을 지키시기 위하여 그들에게 구원을 베푸신 것이다.
이스라엘의 구원과 회복은
하나님의 신실하시며 크고 놀라운 사랑과 긍휼의 산물이다.
그러므로 그 일이 극히 아름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둘째는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놀라운 일을 행하셨다.
예를 들어, 이스라엘이 바벨론에서 해방되어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에서 회복된 것은 기적과 같은 일이다.
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부터 해방될 당시 바벨론은 결코 무너질 나라가 아니었다.
당시 아무도 바벨론이 무너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당시 바벨론은 제국을 건설한지 불과 80여년 정도밖에
되지 않은 나라로서 아직은 건실한 상태였다.
그러한 바벨론이 동방의 작은 나라들로서 자신들의 지배하에 있던
메대와 바사에 의해 저항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허무하게 무너지고 만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을 회복시키시려는
하나님의 강권적인 역사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처럼 당신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의 모든 나라들까지도
세우고 무너뜨리시는 하나님의 이러한 면모는
그 백성들에게 있어 너무나도 기이하고 아름다운 것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이러한 이스라엘 구원 사건 이상으로 극히 아름다운 사건이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사건 이상으로
놀랍고도 극히 아름다운 일을 행하셨다. 그 일이 무엇인가?
바로 우리 죄인들을 당신의 아들의 죽음이란 대가를 치르고 구원하신 일이다.
세상에 이보다 더 아름다운 일은 없다.
우리들은 본래 ‘죄의 삯은 사망’(롬6:23)이라는 말씀과 같이
그 죄로 인하여 다 죽어 마땅한 존재들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 죄인들이 그냥 허무하게 죽는 것을 두고 보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사랑과 긍휼을 베푸셔서
우리를 영원한 멸망으로부터 구원하시고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시기 위하여
우리가 상상할 수도 없는 엄청난 희생을 마다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우리 죄인들을 위하여 당신의 외아들을 희생시키는 대가를 치르셨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이 세상 전부와도 바꿀 수 없는
당신의 아들의 생명을 희생시키는 대가를 치르신 것이다.
이 모두가 우리를 사랑하시고 긍휼히 여기신 까닭이다.
세상에 이보다 더 아름다운 일이 어디 있는가?
세상에서도 대가를 바라지 않고 타인을 위하여 희생하면
그를 아름다운 사람으로 추앙(推仰)하고 기린다.
하물며 창조주가 피조물을 위하여, 그것도 죄인들을 위하여
자기의 아들을 희생하신 행사가 얼마나 아름다운 일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이 아름다운 일을 기려야 한다.
이 아름다운 역사를 자랑하고 증거해야 한다.
이 아름다운 일을 행하신 하나님께서
영원토록 찬양과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임을 전해야 한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요3: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