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傳說의 女主人公]
『네, 제가 바루 고영훈입니다.』
『아, 영……영훈씨……』
동굴동굴한 느낌을 주는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네, 제가 고영훈……』
『저어, 저는……절 몰라보시겠어요?』
누구의 음성인지, 통 기억이 없다.
『글쎄올시다. 도무지 기억이 없습니다.』
『그러실 거야요. 몰라보실거야요.』
『누구신데요?……』
『저는 정말……제가 누구라고 알으켜 드리기가 무서워요. 고선생은 저를……』
전화의 목소리는 영훈을 무척 반기면서도 한편 또 무척 망서리고 있었다.
『………………』
그 순간, 고영훈은 아득한 기억의 실마리 같은 것을 한 오락 후딱 붙잡아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십년 전 일이다. 그럴 리는 또한 있을 수도 없었다. 부질없는 기억의 실마리였다고, 영훈은 마음속으로 돌이돌이를 했다.
『옛날 이야기에 나왔던 인물……』
『뭐라구요?……』
『영훈씨에게 뺨 한대 얻어맞고……울면서 떠나가던……』
『아, 역시 ‥…?』
『아시겠어요?』
『아, 알 것 같습니다.』
한 토막 전설인 양 까맣게 녹 쓸었던 기억이었다. 그 아득한 기억이 그 유달리 동굴동굴한 목소리 속에서 아직도 한 오락 살아 있는 것이 영훈에게는 기적과 같았다.
『기억해 주셨다니, 고마워요.』
『………………』
『영훈씨!』
『………………』
『왜 대답이 없으세요?』
『………………』
대답을 하기는 쉬웠다. 그러나 어떤 종류의 말로 대꾸를 해야만 될는지, 영훈은 좀처럼 종잡을 수가 없다.
『왜 그처럼 잠자코만 계셔요? 영훈씨! 고선생!……』
여자의 음성이 차차 격해졌다.
『연숙씨, 어서 말을 하세요.』
영훈의 어조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차츰차츰 열을 띠워 왔다.
『한번 만나 뵙고 싶어서……』
『아니, 이북서 언제 오셨습니까?』
『삼년 전, 일사 후퇴 때…… 그동안 쭉 영훈씨의 처소를 찾아 봤지만 통 알 수가 없어서…… 며칠 전에야 거기 계신 줄을 알았어요.』
『지금 어디 계십니까?』
『서대문 어떤 약방에서 걸고 있어요. 저 같은 것, 만나기 싫으시겠지만……한번 만나 주실 수 있으면……저 종로로 지금 나갈가 해요. 종각 앞에서 만나요. 거기서 제가 기다리고 있겠어요.』
『아, 종각 앞에서……』
『형편이 어떠실는지……?』
『………………』
영훈은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열두 시 십분 전이다. 은주에게서 전화가 걸려 올 것만 같아서 잠시 망서리다가
『그럼 저도 그리로 가지요.』
『그럼 꼭……』
영훈은 전화를 끊었다.
『흥, 종각 앞에서 … 이야기가 약간 로맨틱한 걸! 비단결 같아!』
최부장은 빙글거리며
『종각 앞에서 기다리는 여인! 신문 소설의 소제목은 확실히 될 거요.』
『하하핫……』
부원들은 명랑하게 웃었다.
그러나 고영훈은 웃지를 못했다. 은주의 생각으로써 통일이 되어 있던 명랑한 감정이 점점 두 갈래로 쪼개지기 시작하였다.
『연숙이가 왔다!』
영훈의 감정이 차차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였다.
책상 앞에 앉아서 영훈은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한번 했다. 그리고는 훌쩍 일어서면서 모자를 썼다.
청명한 가을 날씨였다. 정오의 태양이 가로수에 눈부시다. 네거리 한가운데서 교통순경은 여전히 춤을 추었고 확성기는 끊임없이 아우성을 쳤다.
『그 사람이 왔다.』
찾아와서는 아니 될 백연숙(白蓮淑)이가 찾아왔다. 그것은 진정 꿈과 같은 일이었다. 꿈길을 거닐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 한 증거로, 가로수에 반사되는 태양이 지나치게 눈부시다. 소란한 잡음이 일순간 영훈의 청각에서 중단되기도 했다. 통행인의 팔고비를 건드리다가 논총도 한두 번 맞았다.
진부한 어투나마 헤어진 지 이삼 년 동안은 오매에 그리던 백연숙이었다. 그것은 영훈에게 있어서나 연숙이에게 있어서나 글자 그대로의 첫사랑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아름다웠던 첫사랑은 그들 두 사람으로 하여금 비극 소설의 주인공을 만들어 버린채 간단히 막을 닫쳐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십여년 전 일이다. 고영훈과 백연숙은 가난한 전문학교 학생과 부유한 집의 딸이라는 자격을 가지고 사랑을 속삭여 왔다.
고향이 황해도인 백연숙은 학교 기숙사에서 무슨 연애 소설에 등장하는 여주인공이나 된 것처럼 낮이면 푸른 하늘 가를 바라보고, 밤이면 조각달을 하염없이 쳐다보면서 지나치게 살지고 기름진 자기의 젊은 꿈을 어루만져 보곤 하였다.
그러나 백연숙의 가슴속 한구석에는 연애 비극의 주인공이 되어 보고 싶은 지극히 낭만적인 아봔츌이 숨어 있었는지도 몰랐고 또는 그와 반대로 꿈과 현실을 칼로 베이드시 구별할 줄을 아는 지극히 현실적인 인물인지도 몰랐다.
어쨌든 비극은 왔다.
백연숙과 같은 고향인 황해도 출신인 김 모라는 대지주의 장남이 청혼을 해 왔을 때, 연숙은 자기와 영훈의 애정 문제를 한낱 아름다운 신화인 양 과거의 사실로 흘러보내고 말았다.
그것은 그 누구처럼 부모의 강요로서 이루워진 것도 아니었고 무슨 피치 못할 딱한 사정이 있는 것도 또한 아니었다. 모두가 연숙 자신의 또렷한 계산 밑에서 나온 행동이었다. 영훈과의 한 토막 꿈을 청춘의 금자탑처럼 가슴속 한구석에 곱게 모셔 둔채 백연숙은 대담하게도 김석호와 결혼을 했다.
말하자면 백연숙은 연애 비극의 주인공인 동시에 비극의 작자이기도 했다.
시를 좋아한다는 가난한 사나이와 냄비 밥을 끓여 먹으면서 일생을 낭비하는 것과 같은, 그런 종류의 사랑은 영화나 소설에서 밖에 더 생각할 수 없는 연숙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종류의 순정을 처음부터 배척하는 것과 같은 삭막한 인생도 또한 연숙의 생리에는 어울리지 않았다.
『꿈은 꿈이고 현실은 현실이고……』
그렇게 생각한 연숙이었기에 영훈과 최후의 작별을 하는 날, 자기가 흘린 눈물의 가치를 결코 과소평가 하지도 않은 대신 황해도 부호의 며느리가 되어 가는 날 느낀 일종의 행복감도 또한 거짓 감정은 아니었다.
『영훈씨는 저를 마음껏 원망해도 좋아요. 이 넓은 세상에서 자기가 그 누구에게 애정의 원망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마다 행복을……저는 끝 없는 행복 같은 것을 느끼면서 살 수가 있으니까요.』
『누구나가 다 하는, 판에 박은 말이다! 네가 싫어져서 내가 간다는 말은 아무도 하지 않는 법이다.』
영훈은 단지 그 한마디 뿐, 별반 연숙을 원망하지도 않았다.
아니, 원망할 이유를 갖지 못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이에게 배반을 당했다고 해서 그를 원망한다는 것은 이미 낡은 도덕에 속하는 감정이었다. 애정의 일방적 강요라는 것은 벌써 한낱 봉건적인 유물로서 밖에는 더 대우를 받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더구나 어렸을 적부터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연숙의 안일한 육체와 화려한 감정은 넉넉한 살림살이를 베풀 수 있는 결혼 생활을 원하는 것은 개인의 행복 추구 자체로 본다면 당연히 일이 아닌가.
그러나 그것은 결국에 있어서 이성의 자기 설복을 의미했을 뿐, 영훈의 손길은 최후의 선물로 연숙의 뺨 한대를 보기 좋게 내갈기고 일어섰던 것이다.
그것은 그 해 가을 늦은 계절에 속하는 어느 날 밤, 서대문 네거리에 있는 어떤 조그만 중국 요정에서 생긴 일이었다.
그 해 겨울철에 영훈은 학도병으로 뽑히어 훈련을 받다가 이듬해 정월 초순에 북지로 출정하였다. 일제가 손을 들고 팔·일오 해방이 왔다. 영훈이가 서울로 돌아 온 것은 그 해 가을이었다.
그 후, 영훈은 신문사와 중학교를 비롯하여 여기저기로 직업을 찾아 다니는 동안에 여성과의 교제도 몇 번 있었으나 약혼까지에 이른 것은 한은주 뿐이었다. 「신여인」의 편즙장의 일을 맡아 보게 된 것은 대구서 환도해 오면서 부터였다.
『일·사 후퇴와 함께 남하한 백연숙이!』
그 연숙이가 삼 년 동안을 쭉 영훈의 처소를 찾고 있었다는 것이다.
십여년 동안에 있어서의 연숙의 변모를 영훈은 이것저것으로 머리에 그려보며 종로를 향하여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었다.
『혼자서 넘어 오지는 않았을테지. 가족이랑 남편이랑……』
그런 것을 생각하며 광교 다릿목까지 다달았을 때였다.
『아이, 잘 됐어요!』
한눈을 팔며 걸어가던 영훈의 코 앞에서 낯 익은 목소리 하나가 톡 떨어졌다.
『아, 은주 아니야?……』
하마트면 영훈은 은주의 구두 코를 밟을 번 했다.
『잘못함 놓칠 번 했어요.』
영훈의 아래위를 은주는 다행이라는 드시 훑어본다.
『허어, 무슨 소린데?……』
타원형의 달걀 같은 은주의 보드러운 얼굴이 약간 무르익어 있었다. 숨이 가쁜지, 두 손으로 젖가슴을 짚고 심호흡을 한두 번 했다. 발랄한 젊은 육체를 팽팽히 갑싼 선명한 그리인 빛 투·피스가 고영훈의 고색 창연한 낭만적 추억을 보기 좋게 깨뜨려 버리고 있었다.
『내 참, 계산은 잘했어! 빠름 광교 다리목, 늦음 종로 네거리에서 붙잡을 꺼라고 생각했죠.』
『그건 또 어떻게?……』
영훈은 어리둥절 했다.
『사에 전화를 걸었더니만 인제 방금 종로로 나갔다지 않어요?……아이, 참 난 놓질가 봐서 혼이 났네!』
온주의 눈꼬리가 방글방글 웃고 있었다. 영훈의 표정이 약간 당황을 하며
『놓질가 봐 혼이 나다니, 누구가 도망을 친댔어?……』
그리고 나서 영훈은 후딱 멀리 종각 쪽을 바라다보았다. 은주의 날샌 두 눈동자가 생글생글 코 앞에서 감시를 하고 있기 때문에 종각 앞으로 오락가락하는 통행인의 모습을 마음 놓고 골라 볼 여유가 영훈에게는 없다.
『누굴 찾으슈?』
은주의 감각이 너무나 예민하다. 한번 걸핏 종각 쪽을 바라다보았을 뿐인데 사냥개 모양 은주의 후각이 날새게 달려왔다.
『누가 누굴 찾는댔어?……』
저도 모르는 사이에 영훈의 혀끝이 거짓말을 했다.
그것은 진정 고의는 아니었다. 그러나 어째 그런지, 영훈의 혀끝은 영훈의 의식을 무시하고 움직이고 말았다.
『………………』
순간, 은주의 표정이 후딱 어두어졌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