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107
1월18일[연중 제1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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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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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Iq2DJOaRHLA9
[인천교구 유성현 베드로(연안성당 주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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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이런 예수님이 너무 좋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오 복음사가로 추정되는 세리 레위를 당신 제자로 부르시는 광경이 참으로 파격적이고 경이롭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레위를 수많은 제자들 가운데 한 명으로 선발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72 제자단의 하나로 뽑으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제자들 가운데 가장 핵심 제자단이라고 할수 있는 12사도 가운데 하나로 선택하셨습니다.
이런 광경을 목격한 둘러서 있던 사람들, 특히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은 화들짝 놀랐습니다. 동시에 쯧쯧 하고 혀를 찼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단은 희망할 것도 기대할 것도 없다고 여겼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세리라는 신분에 대한 이미지는 최악이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직무상 벌어들이는 수입은 짭짤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워낙 평판이 좋지 않았습니다. 매국노, 로마 앞잡이, 수전노, 인간 말종...이런 레위를 핵심 제자 가운데 하나로 뽑으시는 예수님의 처신을 그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더 놀라운 일이 있었습니다. 자신 같은 죄많은 사람에게도 기회를 주신 예수님의 크신 자비에 크게 감사하며, 그는 예수님을 위한 성대한 저녁 만찬을 준비했습니다. 동료 세리들과는 송별회를 겸한 잔치였습니다.
자연스레 그 잔치 자리에는 당대 뒷골목을 주름잡던 유명 인사들이 줄줄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그들 가운데 앉으셨던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포도주 잔을 부딪치며 건배도 하시고, 맛나게 음식을 잡수셨습니다.
바리사이파 율법학자들에게는 이보다 더 큰 스캔들이 다시 또 없었습니다. 가슴에는 성경과 율법서를 간직하고, 얼굴은 짐짓 거룩한 표정을 짓고, 늘 가방끈 긴 자기들끼리만 어울리던 그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절대 상종하지 말아야 할 세리나 죄인들과 태연하게 어울리는 예수님의 모습에 그들은 화가 단단히 나 제자들에게 따졌습니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귀 밝기가 보통이 아니셨던 예수님은 그들의 세상 구려 터진 생각과 마음들을 즉시 파악하셨습니다. 그들을 향해 귀가 번쩍 뜨이는 은총의 말씀을 건네셨습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이런 예수님이 너무 좋습니다. 당대 잘 나가는 고관대작들이나 주류 세력들이 아니라 어딜 가나 인간 대접 못 받던 세리, 죄인들과 마주 앉아 허심탄회하게 담소를 나누시던 모습이 너무나 감동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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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6Ur__gv27x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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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들이 죄인인 줄 아는 공동체에 머물라>
어제 복음은 네 명의 믿음이 있는 공동체 안에 머무른 병자가 죄도 용서받고 병도 치유 받는 내용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세리 레위가 예수님께 부르심을 받는 내용입니다.
내용이 전혀 상관없는 것 같지만 마르코는 여기서 레위가 어떤 공동체에 머물렀는지를 알게 합니다. 바로 ‘죄인이며 병자임을 깨닫게 하는 공동체’에 머문 것입니다.
반면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은 자신들이 죄인이며 병자임을 인정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속한 공동체는 무엇이 죄인지 알게 할 수 있는 빛이 없기 때문입니다.
영화 ‘이끼’(2010)는 한 타락한 형사가 사람들을 따르게 만드는 힘이 있는 목사와 협력하여서 한 시골 마을을 만드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 형사는 큰 죄를 지은 이들을 자기 마을에 살게 하며 자신은 이장으로 권력을 누립니다. 그러나 깐깐한 목사가 눈엣가시입니다. 목사가 죽자 그들에게 평화가 찾아옵니다. 그들이 아무리 나쁜 짓을 해도 그 마을에서는 그들에게 벌을 내릴 아무 사람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냥 그들과 어울리며 자신들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들을 몰아내면 그만입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이 세상 공동체는 모두가 다 자신들이 죄인임에도 그것을 감추고 의인인 것처럼 살아갑니다. 그런 분위기에서는 누가 들어와도 다 의인처럼 자신을 여깁니다. 그러면 죄를 용서해 주러 오신 분이 필요 없어집니다. 예수님은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라고 하십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미리내 천주성삼 수도회 임언기 신부가 임종 직전 한 냉담자에게 병자성사를 주러 갔었습니다. 본인이 청한 것은 아니고 주위 신자들이 청했던 것입니다. 병자는 이미 배에 복수가 차 있고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는 죽음을 목전에 둔 간암 말기 환자였습니다. 사실 당사자는 오랜 냉담을 하고도 병자성사를 거부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신부님은 말을 할 수 없는 처지인 줄 알고 일일이 십계명을 읊어주며 해당하는 것에 고개만 끄떡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병자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신부님은 고해성사와 병자성사를 거부하는 것에 대해 확신하고 방을 나섰습니다. 그때 신부님의 뒤에서 환자가 크게 외쳤습니다. “나 죄 없어!”
물론 외적으로는 죄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서 의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는 죄가 무엇인지 깨닫게 하는 공동체에 머물 줄 몰랐습니다. 구원을 위해 자신들이 죄인임을 아는 공동체가 절대적으로 요구됩니다.
모두가 눈 하나만으로 생활하는 마을에서는 오히려 눈 두 개를 사용하는 사람이 병든 것입니다. 눈을 고치려면 두 눈으로 정상적으로 사는 마을로 가야 합니다.
예수님은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라고 하십니다. 내가 죄인임을 인정하게 하지 못하는 공동체는 구원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2020)란 영화 제목이 있었습니다. 조직 보스인 형을 죽인 한 킬러를 동생 킬러가 복수하기 위해 쫓는다는 내용입니다. 그게 다입니다. 황정민, 이정재는 모두 킬러입니다. 황정민은 이정재의 형을 죽였고 이정재는 그래서 황정민에게 복수하기 위해 쫓습니다.
여기서는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지 구별이 되지 않습니다. 도대체 어떤 악에서 구해달란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누구나 다 죄인이지만 서로 남의 탓을 하며 자신이 죄인인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황정민이 자신의 딸을 만났을 때는 상황이 달라집니다. 자신이 살아온 삶이 어린 딸의 순수한 눈에 죄인으로 비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도와주는 트렌스젠더도 있습니다. 세상에서 죄인으로 인정받는 사람입니다.
황정민은 그에게서 세상 사람들보다 더 나은 면을 발견합니다. 내가 그보다 나을 것이 없음을 깨닫게 합니다. 결국, 황정민은 딸을 위해 희생하고 그에게 딸을 맡깁니다.
죄로 물든 이 세상 공동체 안에서는 내가 죄인인 줄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서로 자신들의 죄를 눈감아주고 타인을 죄인이라 여기며 살기에 누가 들어가도 그곳에서는 의인이 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공동체는 모든 이들이 자신을 죄인으로 여기는 공동체입니다. 그 안에 들어와 혼자 의인인 체할 수 없습니다. 나로 사는 이상 죄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교리서는 “완덕의 길은 십자가를 거쳐 가는 길이다. 자아 포기와 영적 싸움 없이는 성덕도 있을 수 없다.”(2015)라고 하고, “예수님께 마음을 기울이는 것은 ‘자아’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다.”(2745)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기를 버리는 길은 ‘기도’이기 때문에 “기도와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분리될 수 없다. 이 두 가지는 모두 같은 사랑의 문제이며, 그 사랑에 따른 자아 부정과 관련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2745)라고 말합니다.
자기가 죄인 줄 알아야 ‘자아 부정’이 가능해집니다. 예수님은 선이시고, 선을 받아들이려면 악인 나는 죽어야 합니다. 이 진리를 품은 공동체에 머물러야만 그리스도의 구원이 필요한 사람이 됩니다.
‘나’가 죄이고 ‘그리스도’만이 선인 줄 모르는 공동체에 머물면 결국, 내가 의인인 줄 착각하고 살다가 그 공동체와 같은 운명을 맞을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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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대화 중에 이런 질문이 있었습니다. “성당에 다니지 않는 분도 하느님 나라에 갈 수 있나요? 종교가 다른 분도 하느님 나라에 갈 수 있나요?” 예전에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종교는 ‘진리’라는 바다로 흐르는 강과 같습니다.” 내가 타고 있는 배만이 진리라는 바다에 도달할 수 있다는 생각은 ‘오만과 편견’에서 비롯됩니다. 오만은 자기의 능력이나 가치를 과신하거나 타인을 과소평가하는 태도입니다. 편견은 충분한 이해 없이 내린 선입견이나 고정관념입니다. 인류는 ‘오만과 편견’으로 소중한 이웃에게 아픔을 주었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일을 거침없이 행하였습니다. 노예제와 인종차별이 있습니다. 이는 특정 인종이 다른 인종보다 우월하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태입니다. 유럽 제국주의 시대에 아프리카인들을 노예로 삼고 비인간적으로 대우했습니다. 오만과 편견이 자본주의를 만나면서 힘없는 우리의 이웃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습니다.
홀로코스트가 있습니다. 아리안 인종 우월주의와 히틀러의 독재적 태도는 유대인들을 죽음의 수용소로 몰았습니다. 유대인, 집시, 장애인 등을 열등하거나 위험한 존재로 낙인찍었습니다. 600만 명 이상의 유대인이 학살당하였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얼마나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는지 보여주는 극단적인 사례입니다. 여성 억압과 성차별이 있습니다.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다는 고정관념이 있습니다. 여성의 정치적, 사회적 권리를 제한하고 교육과 일자리에서 배제하기도 합니다. 스마트폰은 새로운 모델이 나오면 예전에 쓰던 모델은 사용하지 않게 됩니다. 새로운 모델이 더 많은 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담을 창조한 후에 하와를 창조하였습니다. 아담은 흙으로 만드셨지만, 하와는 아담의 뼈로 만드셨습니다.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다는 것은 잘못된 판단입니다.
종교 재판과 마녀사냥이 있었습니다. 교회의 권위와 교리를 절대화하고 개인의 신앙을 억압했습니다. 이단이나 마법을 행한다는 혐의로 많은 이들이 처형되었습니다. 유럽에서 많은 이들이 종교의 이름으로 희생되었습니다. 종교적 권력이 지나치게 오만해지면서 발생했던 비극입니다. 십자군 전쟁이 있었습니다. 기독교 세계가 이슬람 세계를 이단으로 간주하고 자신들이 신의 뜻을 따른다는 확신으로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무슬림, 유대인, 심지어 동방 정교회 신자들까지 희생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수백 년간의 종교적 갈등과 상호 불신이 생겼습니다. 종교적 오만과 편견이 평화를 해치고 많은 희생을 초래하였습니다. 종교 개혁과 분열이 있습니다. 교회의 부패와 권위주의, 그리고 개혁자들의 강경한 태도로 가톨릭과 개신교 간의 상호 배척과 전쟁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건들은 인류가 오만과 편견을 극복하지 못했을 때 나타나는 결과를 보여줍니다. 동시에,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닫게 합니다.
오늘 성서 말씀은 오만과 편견을 극복하기 위해서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지 말해 주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우리에게는 하늘 위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사제가 계십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지켜나갑시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우리 삶의 중심에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오만과 편견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두 부류의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의인으로 여겨지던 바리사이파와 율법 학자 그리고 죄인으로 취급당하던 세리와 레위입니다. 의인으로 여겨지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의로움은 자신들의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표징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의 표징과 권위는 마귀에게서 온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들은 오만과 편견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죄인으로 여겨지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를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의 권위를 놀라운 눈으로 보았고, 예수님께서 보여주시는 표징에서 새로운 희망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원 없이 풍족하게 살았던 부자는 죽어서 어둠의 세계로 들어갔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난하게 살았던 라자로는 아브라함의 품에서 빛의 세계로 들어갔습니다. 그렇습니다. 좋은지 나쁜지 쉽게 판단할 일이 아닙니다.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이 있다면 나에게 주어진 운명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면 사랑하는 마음으로 어려운 이웃들을 성심껏 도와주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오만과 편견을 극복해야 하는 이유를 말씀해 주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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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의정부교구 김동희 모세 신부님]
일치 주간의 첫째 날 우연히도 우리는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마르 2,14)의 소명 이야기를 복음으로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인 레위를 기꺼이 당신의 제자로 뽑으셨고, 이어 그의 집에서 많은 세리와 죄인과 함께 음식을 잡수셨습니다. 물론 그분께서는 ‘죄인들의 친구’로 낙인찍히셔야 하였지만, 그렇게 해서 하느님 나라의 문턱은 눈에 띄게 낮아졌습니다.
대학교 졸업과 동시에 대신학교에 들어가려고 준비하던 저는 막상 신학교 지원을 앞두고 많이 망설였습니다. 저녁 미사를 드리는데 그날 복음이 바로 오늘 복음과 같았습니다. 복음이 봉독되면서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2,14) 하는 말씀을 들을 순간부터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영성체를 어떻게 하였는지, 미사가 어떻게 끝났는지도 몰랐습니다. 미사가 끝난 뒤에도 한참을 앉아 있다가 ‘신학교에 가야겠다.’고 마음을 굳히며 일어섰던 기억이 납니다.
그 뒤 신학교에 입학하였고, ‘마르코 복음 청년 성서 연수’에 참여하여 오늘 복음을 다시 만났습니다. 세관에 앉아 있던 레위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습니다. 물질적으로는 그럭저럭 넉넉하니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만 그렇다고 온전히 행복하지만은 않은, 좀처럼 충족되지 않은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레위의 마음도 제 마음도 바로 그러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독서의 히브리서 4장 12절의 말씀처럼 성경 말씀이 제 운명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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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2,13-17: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예수께서는 돈벌이에 대한 탐욕으로 가득 찬 레위가 세관에 앉아있는 것을 보셨다. 그가 받은 새 이름은 마태오였다. 마태오라는 이름은 선물 받은 사람이란 뜻으로 거룩한 은총의 위대한 선물을 받은 사람에게 어울리는 이름이다. 그는 탐욕에 젖은 세리를 떠나 주님을 따른 사람이다. “나를 따라라.”(14절) 이 말씀은 당신을 닮으라는 말씀이다. 발걸음으로 그분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생활방식을 따르라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다.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14절) 주님의 명령 한 마디에 마태오가 모든 것을 버리고 빈털터리이신 주님을 따랐다. 예수께서는 마태오를 부르시고 그와 함께 식사하시면서 많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하셨기 때문에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님을 비난한다. 예수께서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17절) 말씀하신다.
그분은 의로운 이들을 건강하다 하시고, 죄인들을 병들었다 하셨다. 여기서 문제는 건강하지도 않으면서 스스로 건강하다고 생각하여, 의사를 찾지도 않을 뿐 아니라 성가시게 여기며 때리기까지 한다. 자기 병을 제대로 알고 고치기 위해서는 그만한 고통이 따른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3) 우리는 누구도 완벽하게 의로운 사람은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의인이 되도록 기도해야 한다. 우리가 간절히 바라고 그렇게 노력하면 그렇게 되어 갈 것이다. 여기서 필요한 것이 성령의 은총이다. 성령의 은총으로 치유되고 도움을 받지 않으면 그러한 일이 이루어지기는 힘들 것이다. 예술가가 투박한 돌을 아름답게 조각하여 멋진 예술작품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그 돌을 귀하게 다룬다. 예수께서도 우리를 사랑하시는 까닭으로, 조각가이신 주님께서는 우리를 투박한 돌을 보시듯 하신다. 투박한 돌이 아니라, 앞으로 만드실 작품을 생각하시며 우리를 사랑하신다. 온전히 그분의 말씀을 따르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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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우리는 모두 하느님 앞에서 똑같은 죄인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호숫가로 나가셨다. 군중이 모두 모여 오자 예수님께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그 뒤에 길을 지나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게 되었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도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이런 이들이 예수님을 많이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리사이파 율법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3-17)
1) ‘알패오의 아들 레위’는 ‘마태오 사도’입니다.(마태 9,9) 예수님께서 마태오를 사도로 뽑으신 것은, 세리였기 때문이 아니라, 또는 죄인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사도의 자격’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사도를 뽑으실 때 그들의 과거나 직업 같은 것은 보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마태오를 사도로 뽑으신 일에 대해서, 죄인을 사도로 뽑으셨다고 표현하거나 ‘죄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뽑으셨다고 표현하는 것은, 그 당시의 사회적인 편견을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옳지 않은 일이고, ‘세리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뽑으셨다고 표현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옳습니다.
당시의 세리들이 사회적으로 죄인 취급을 받았다고 해서 오늘날의 우리까지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직업만 보면서 모든 세리들이 다 도둑이었고, 죄인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나쁜 편견입니다. 세리들 가운데에는 죄인이 아닌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복음서에,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꾸짖으신 말씀이 많이 있지만, 모든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전부 다 위선자였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나타나엘’은 율법학자였는데, 예수님께서는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라고 그를 칭찬하셨습니다.(요한 1,47)
또 바오로 사도는 바리사이였는데, 우리는 그가 위선자가 아니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처럼 세리들이 전부 다 죄인이었던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2) “나를 따라라.”는, “나의 제자가 되어라.”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마태오를 보자마자 부르신 것은 아닐 것이고, 그를 계속 눈여겨보시다가 적당한 때가 되었을 때 부르셨을 것입니다.
마태오 사도 입장에서 생각하면, 어부 출신 사도들처럼 예수님을 알게 되고, 믿게 되는 과정이 먼저 있었을 것이고, 제자가 되기를 희망하면서, 또 부르심을 기다리면서, 부르심에 응답할 준비를 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누구인지도 모르는 분의 부르심에, 또는 믿지도 않는 분의 부르심에, 준비되어 있지도 않은 상태에서 갑자기 응답한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3)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식사를, 루카복음서 저자는 “레위가 자기 집에서 예수님께 큰 잔치를 베풀었는데, 세리들과 다른 사람들이 큰 무리를 지어 함께 식탁에 앉았다.”라고 기록했습니다.(루카 5,29)
마태오 사도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면서 직업을 버렸을 텐데, 과거의 삶에서 완전히 벗어나면서, 자기를 불러 주신 예수님께 감사드리기 위해서, 또 동료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려고 잔치를 베풀었을 것입니다.
그 잔치에 참석한 세리들 가운데에는 ‘죄인들’도 있었을 것이고, ‘죄인이었지만 회개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15절의 “예수님을 많이 따르고 있었다.”라는 말은, 세리들 가운데에서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믿었고, 회개했음을 나타냅니다. <진심으로 회개했다면 그들은 더 이상 죄인이 아닙니다.>
그래서 세리들 같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다고 예수님을 비난하는 율법학자들의 말은 직업에 대한 편견을 버리지 못한 ‘부당한 비난’입니다.
4)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라는 말씀은, “나는 병든 이들과 죄인들을 구원하려고 왔다.”라는 뜻이기도 하고, “나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왔다.”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건강한 이들과 병든 이들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의인과 죄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가 ‘병든 이들’이고, ‘죄인들’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구원하려고 오신 메시아입니다. ‘모든 사람’이 전부 다 예수님의 구원이 필요한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을 만나셨습니다. <특정 계층 사람들만 만나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리들도 만나셨고, 이방인들도 만나셨고,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도 만나셨습니다. 가난한 이들도 만나셨고, 부유한 자들도 만나셨습니다.
예수님 말씀에는 “너희는 건강하다고 자처하지만 너희도 ‘병든 이들’이다. 너희는 의인이라고 자처하지만 너희도 죄인들이다.”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회개와 구원이 필요한 ‘똑같은’ 죄인들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가리켜서 죄인이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일이고 죄를 짓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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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유다인들은 율법을 지키며 사는 것이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계명과 율법을 하느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문자로 기록해 주신 하느님의 뜻이라고 여겼고, 실제로 그런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백성에 걸맞게 거룩함을 유지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생활이나 음식이나 모든 일에서 부정해지는 것을 피하려고 애썼습니다.
특별히 복음서에 자주 언급되는 바리사이들은 어느 누구보다도 이런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에 몰두하였던 이들입니다. 유다인들의 의도는 좋은 것이었지만 거기에서 부정적이거나 배타적인 여러 모습이 생겨났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부정한 사람들과 접촉하지 않는 것도 포함되는데 그 대표적인 이들이 죄인과 세리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십니다. 바리사이들은 의문을 가집니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이들의 생활 방식을 생각하면 이런 질문이 생기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입니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바리사이들의 모습을 염두에 둔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죄인으로 여기는 이들을 부르러 왔다.’고 이해하는 것이 나을 것 같습니다. 바리사이들 또한 예수님의 구원에서 배제되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잘못은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것에서 시작되어 스스로 의인과 죄인을 구분하는 그릇된 결과를 가져옵니다. 어느 누구도 하느님 앞에서 스스로 의롭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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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 나를 따라라.”
우리에게 고통스러운 것을 꼽으라면 그 중에 하나가 이웃이 자신에 대한 악한 비판일 것입니다. 젊었을 때에는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라고 변명하기 바빴고 또 그렇게 보이지 않을까 큰 걱정을 안고 살았던 흔적을 회상해봅니다. 세상에 살면서 사람의 눈에서 자유롭지 못할 때, 더군다나 사랑의 마음보다는 미움과 편견의 시선을 느낄 때, 또 다른 고통을 체험하게 됩니다. 사람관계가 미묘해서 어제의 이해하고 가깝던 친구가 오늘은 남 보다 더 못되게 구는 사이가 될 때도 있는 것이지요.
오랫동안 들어서 익힌 M.Haydn 작곡 성가 27번 ‘이 세상 덧없이’의 2절 ‘출렁이는 바다의 물결 파도 같이 한결같지 못함은 사람의 맘 이네. 어젯 날의 우정도 변할 수 있으니, 변치 않을 분 홀로 천주 뿐 이로다.’라는 가사가 더 마음에 닿습니다.
만일에 정치할 기회가 주어지면 ‘어떤 사람과 함께 일하시겠는가?’라는 질문에 공자님께서 대답한 말이 떠오릅니다. 중국 고서 논어(論語)의 술이(述而)편에서 그 경우를 찾을 수 있습니다.
공자님의 대답이 ‘포호빙하(暴虎氷河)’, ‘필야임사이구 (必也臨事而懼)’라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맨손으로 범을 잡으려하고, 맨발로 황하를 건너다’는 기개의 사람이 아니라 ‘마땅히 일에 임해서는 두려워해야 한다.’라는 말대로 일에 있어서는 소심하고 두려워하는 사람이 함께 일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지요.
언젠가 바오로 6세 교황님께서 1970년 5월에 당신의 사제서품 50주년을 기념하여 사제서품을 집전하시고 새 사제들을 위해 바치셨던 기도 중에 한 부분이 떠오릅니다. “감수성 풍부하면서도 겁도 낼 줄 아는 어린이의 마음 같은 순결한 마음을 주소서.”
교황님께서는 이어서 그리스도의 심장과 고동을 함께 하며 “온갖 유혹과 시련, 온갖 싫증과 피로, 온갖 환멸과 모욕을 견디어 내는 넓고 강한 마음을 주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덕이라는 것은 여러 가지 시행착오도 하고 대인관계에서 실망과 고통을 겪고 나서야 얻는 결실이라고 하겠습니다. 비 온 뒤에 땅이 굳듯 사람도 시련과 실망을 겪은 연후에야 진정한 우정도 대인관계도 맺을 수 있는 것입니다.
히브리 서간의 저자는 이렇게 말씀을 전합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하늘 위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사제가 계십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지켜 나아갑시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히브리서 4,14-15)
생각보다 많은 사람들이 상대가 한 번도 넘어지지 않는 완전한 의인이라는 허상을 만들어 너무 쉽게 이웃을 형편 없이 비판하는 모습을 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 성령의 인도로 마귀에게 유혹을 받으셨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큰 힘을 줍니다. 또 많은 이들에게 버림을 받고 모퉁이의 돌이 되셨다는 사실도 또한 우리의 버팀목이 되기도 합니다.
시편 저자가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이는 주님께서 이루신 일 우리 눈에 놀랍기만 하네.”(시편 118,22.23)라고 노래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죽음을 예고하시며 포도밭 비유의 말씀을 하시는 중에 이 시편을 인용하십니다.(루카 20,17)
마르코는 주님께서 세관에 앉아 있던 마태오를 부르신 대목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세리는 돈의 여유는 있을지는 몰라도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멸시와 증오의 대상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아울리시며 꼴 보기 싫은 마태오를 제자로 부르셨다는 사실은 당시 상식으로서는 이해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한 그들에게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의미 있는 말씀을 해 주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르코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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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김동희 모세 신부님]
일치 주간의 첫째 날 우연히도 우리는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마르 2,14)의 소명 이야기를 복음으로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죄인인 레위를 기꺼이 당신의 제자로 뽑으셨고, 이어 그의 집에서 많은 세리와 죄인과 함께 음식을 잡수셨습니다. 물론 그분께서는 ‘죄인들의 친구’로 낙인찍히셔야 하였지만, 그렇게 해서 하느님 나라의 문턱은 눈에 띄게 낮아졌습니다.
대학교 졸업과 동시에 대신학교에 들어가려고 준비하던 저는 막상 신학교 지원을 앞두고 많이 망설였습니다. 저녁 미사를 드리는데 그날 복음이 바로 오늘 복음과 같았습니다. 복음이 봉독되면서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2,14) 하는 말씀을 들을 순간부터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습니다. 영성체를 어떻게 하였는지, 미사가 어떻게 끝났는지도 몰랐습니다. 미사가 끝난 뒤에도 한참을 앉아 있다가 ‘신학교에 가야겠다.’고 마음을 굳히며 일어섰던 기억이 납니다.
그 뒤 신학교에 입학하였고, ‘마르코 복음 청년 성서 연수’에 참여하여 오늘 복음을 다시 만났습니다. 세관에 앉아 있던 레위의 마음이 고스란히 느껴졌습니다. 물질적으로는 그럭저럭 넉넉하니 행복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만 그렇다고 온전히 행복하지만은 않은, 좀처럼 충족되지 않은 그런 마음이었습니다. 레위의 마음도 제 마음도 바로 그러하였습니다.
그런데 오늘 독서의 히브리서 4장 12절의 말씀처럼 성경 말씀이 제 운명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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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마르코.2,17)
오랫동안 냉담 중이던 어떤 형제님을 오랜만에 만나 요즈음 어떻게 지내시는지 물었습니다. 그 형제님은 경제적으로도 살기가 조금은 버거운 형제님이었기에 염려도 되었습니다. 뜻밖에 형제님은 제게 이런 말을 건냈습니다. "신부님 저는 성당에 다시 나가고 싶지만, 지은 죄가 너무 많아서 못 나갈 것 같습니다."
착하게 좋은 양심으로 살아 왔던 그 형제님은 하느님께 죄를 지어 면목이 없어 그분을 만나기 부끄러워서 성당에 못가겠다니 얼마나 순수한 표현입니까! 사실 이런 그의 순수한 마음은 이미 하느님을 만나고 있었지만, 단지 하느님에 대해 가진 왜곡된 개념이 장애물이었습니다.
그 형제님은 하느님을 벌을 주시는 두려운 분으로만 생각하고, 그분께 가까이 가지 못했습니다. 죄를 지은 것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것은 영적 진보를 위해 필요하지만, 지나친 죄의식과 두려움때문에 하느님께 가까이 가지 못한다면 그것은 주님을 잘못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선인과 악인 의인과 죄인의 공동체입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선과 악, 그리고 의로움과 죄 사이에 끊임없는 혼돈에서 식별을 하며 걸어 가야할 존재입니다. 그 혼돈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분은 사랑의 하느님입니다
고등학교 때 딸의 귀가가 늦자 아버지가 ‘너 한번만 더 늦게 들어오면 네 다리를 부러뜨릴거다!’ 라는 호된 꾸중을 듣고 그 뒤로도 늦었지만 자신의 다리가 아직 그대로 있는 것을 보고 문득 사랑의 아버지를 깨달았다는 어떤 자매님이 생각납니다.
예수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따스한 분이십니다. 우리가 스스로 죄도 없고 의로운 존재라 믿는다면 하느님은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습니다. 연약한 인간이기에 죄를 범하며 사는 불완전한 존재임을 깨닫고 고백하는 만큼 우리는 더욱 큰 사랑의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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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초등학생 때의 일 하나가 생각납니다. 선생님께서 저를 앞으로 불러서 숙제로 제출했던 저의 글을 직접 읽으라고 하셔서, 또박또박 그리고 큰 소리를 읽었습니다. 다 읽고 난 뒤에 선생님의 말씀을 통해, 잘 썼다고 친구들 앞에서 읽으라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쓰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시려고 읽게 하셨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곧바로 저 다음 다른 친구를 불러서 그 친구에게도 직접 쓴 글을 읽으라고 하셨습니다. 이번에도 이렇게 쓰면 안 된다는 말씀을 하실 줄 알았는데, 이렇게 글을 써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모릅니다. 글을 써서 단 한 번도 상을 받아본 적이 없는 저였습니다. 그에 반해 제 다음에 발표했던 친구는 계속해서 상을 받았습니다. 이 친구는 “이렇게 쉬운 것을 왜 못하는지 모르겠다.”라고 제게 말해주었습니다. 하지만 제게 있어 글 쓰는 것은 너무나도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벌써 40년도 훨씬 전의 일입니다. 그렇다면 당시에 글을 잘 써서 상도 받고 칭찬도 받았던 그 친구는 뛰어난 작가로 살고 있을까요? 아닙니다. 전혀 글을 쓰지 않고 그냥 평범한 회사원으로 바쁘게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신부가 된 후 20년 넘게 꾸준히 글을 쓰고 있고, 책도 여러 권 출판했습니다.
만약 선생님께 지적받은 것을 계속 기억해서 ‘나는 글재주가 없어.’라면서 글 쓰는 것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저는 있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재능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재능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재능보다 더 필요한 것은 꾸준함이 아닐까요? 어떤 경우에도 포기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때 새로운 자기를 만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리인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곧바로 일어나 주님을 따릅니다. 사실 당시의 세리는 로마제국을 위하여 일하고 있었기 때문에, 세속적이고 물질적으로 풍족한 삶을 누리고 있었지만, 동포인 유다인들에게 매국노, 부도덕한 사람 취급을 받았습니다.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하느님의 일을 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사람이고, 예수님과 함께할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만약 그가 사람들의 말을 따랐다면, 우리는 마태오 사도를 알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예수님을 따릅니다. 완전히 다른 새로운 자기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자격 운운합니다. 때로는 성당에 나올 자격이 없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 앞에는 누구에게나 똑같은 자격이 주어집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할 수만 있다면, 그분의 뜻을 따르려는 마음만 갖는다면, 지금과 다른 새로운 자기를 만들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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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람을 따르는 사람들>
마르코 2,13-17 (레위를 부르시고 세리들과 음식을 드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호숫가로 나가셨다. 군중이 모두 모여 오자 예수님께서 그들을 가르치셨다. 그 뒤에 길을 지나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예수님께서 그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게 되었는데, 많은 세리와 죄인도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이런 이들이 예수님을 많이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사람을 따르는 사람들>
“이런 이들이 예수님을 많이 따르고 있었기 때문이다.”(마르 2,15)
사람을
사람들이 따릅니다
가르쳐주는 사람을
못 배운 사람들이 따릅니다
눈여겨보는 사람을
보잘것없는 사람들이 따릅니다
불러주는 사람을
잊힌 사람들이 따릅니다
부드러운 사람을
약한 사람들이 따릅니다
품어주는 사람을
외로운 사람들이 따릅니다
용서하는 사람을
죄 짓은 사람들이 따릅니다
위로하는 사람을
상처 입은 사람들이 따릅니다
들어주는 사람을
울부짖는 사람들이 따릅니다
채워주는 사람을
모자란 사람들이 따릅니다
받아주는 사람을
쫓겨난 사람들이 따릅니다
따뜻한 사람을
헐벗은 사람들이 따릅니다
베푸는 사람을
주린 사람들이 따릅니다
인정해주는 사람을
버림받은 사람들이 따릅니다
다독여주는 사람을
웅크린 사람들이 따릅니다
일으켜주는 사람을
쓰러진 사람들이 따릅니다
북돋아주는 사람을
짓밟힌 사람들이 따릅니다
자유롭게 하는 사람을
얽매인 사람들이 따릅니다
이끌어주는 사람을
길 잃은 사람들이 따릅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는 사람을
사람이고픈 사람들이 따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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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나는 사랑받는 죄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길을 가시다가 세관에 앉아있는 레위를 보시고 “나를 따라라”(마르2,14)고 말씀하셨습니다. 레위는 마태오라는 세리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세리는 세금 징수를 위임받은 사람입니다. 이들은 세무 당국과 계약을 맺어 세금을 징수했는데 정한 액수보다도 더 많이 거둬들여 차액을 착복하는 경우가 많았고, 이들은 돈밖에 모르는 탐욕스러운 사람으로 따돌림받았으며 직책상 죄인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유다교를 올바로 믿으려면 세리직을 떠나야 했습니다. 하필 그런 세리를 예수님께서 부르셨습니다.
그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이기에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와 함께 음식을 나누며 당신의 삶을 보여주셨습니다. 이스라엘에서 음식을 나눈다는 것은 단지 거기에 함께한 사람들끼리의 친교만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친교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결코 죄인들과는 한자리에서 식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죄인들이 하느님과의 친교를 뜻하는 식사에 참여한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자주 이러한 죄인들과 함께 식사 하셨고, 이 행위 자체가 그들에게 용서를 베풀어 주신 행위였습니다. 그는 죄인이어서 행복하였습니다. 의인을 자처하는 바리사이 율법학자가 아니어서 행복을 차지했습니다. 세상에는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구원을 받는 겸손한 죄인과, 자신에게는 죄가 없다고 믿으며 자신이 실천한 외적인 의로운 행위로 상급이 마땅하다고 믿는 교만한 죄인”이 존재합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내가 죄인이기 때문에 부르십니다. 내가 건강하지 않기 때문에 의사로써 오십니다. 따라서 레위가 일어나 예수님을 따랐듯이 오늘 내가 예수님을 따라나서면 인생이 바뀝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행하면 행복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실 자기를 안전하게 지켜 주었고 모든 것을 보장해 주던 익숙한 자리를 버리고 따른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어쩌면 하나의 인생 도박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네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 나는 너를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내리며, 너의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창세 12,1)고 아브람에게 말씀하셨을 때 그는 그대로 행하였고 오늘 우리는 그를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릅니다.
그물을 손질하고 있던 어부를 부르시고 그들을 당신의 제자로 삼으셨고, 세관에 앉아있던 레위를 부르셔서 인생을 새롭게 하였듯이 오늘도 구체적 삶의 자리에서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내 처지나 상황이 어떠하든 상관없이 다양한 방법으로 나를 부르시고 당신의 모든 것을 주시고자 하십니다. 그러므로 부르심에 응답하고 감사할 수 있길 소망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인생의 주관자이십니다. 충만한 자비를 주시고자 부르시고, 기다리시는 주님품 안에서 행복할 수 있길 기도합니다. 하느님의 자비에도 불구하고 함께하지 못할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완고함이 문제 아닐까요?.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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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따름의 여정>
- “자녀답게, 제자답게” -
스승이신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해 따라 나선 제자들입니다. 예나 이제나 똑같습니다. 주님의 제자로서 주님의 제자답게, 또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아가는 것이 책임적 존재로서 합당한 처신입니다. 오늘 옛 현자의 말씀도 제자직의 삶에 좋은 도움이 됩니다.
“공부란 매일 보던 풍경을 낯설게 보며 새로운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다산>
“가난하면서도 아첨하지 않고, 부유하면서도 교만하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공자가 말했다. “가난하면서도 즐겁고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것만 못하다.”<논어>
참으로 제대로된 제자라면 이처럼 늘 새롭고 자유로울 것입니다. 주님을 찾고 따르는 진리 추구의 여정이 우리를 새롭고 자유롭게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레위를 부르시고 레위는 주님을 따라나섭니다. 주님의 부르심이 선행하니 말그대로 부르심의 은총입니다. 그러나 부르심에 선행하는 부름받은 자의 주님을 찾는 갈망입니다. 주님을 찾는 갈망이, 열망이, 그리움이 성소의 동기가 됩니다.
길을 지나시던 길이신 주님은 세관에 앉아 있는 알페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세관에 홀로 외롭게 앉아있는 레위의 갈망을 한눈에 알아채셨음이 분명합니다.
“나를 따라라.”
레위를 구원한 말씀입니다. 레위는 즉시 일어나 주님을 따라나서니 그의 갈망을 반영합니다. 주님을 만남으로 삶의 방향을 찾은 레위입니다. 삶의 방향을 찾지 못해 삶의 의미를, 삶의 중심을 잃고 방황하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레위를 부르신 주님은 오늘 우리를 부르십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한 현재로 현존하시며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이십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명쾌하게 주님의 정체를 밝힙니다.
“우리에게는 하늘 위로 올라가신 위대한 대사제가 계십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우리가 고백하는 신앙을 굳게 지켜 나아갑시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 그러므로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그리하여 자비를 얻고 은총을 받아 필요할 때에 도움이 되게 합시다.”
우리가 따르는 전능하신 주님은 하느님 어좌에 좌정하시면서 동시에 우리와 함께 하시는 초월(超越)과 내재(內在)의 주님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은 레위를 부르시어 제자공동체에 합류시킵니다. 과거는 불문에 붙이시고 오늘부터 늘 현재를 살게 하십니다. ‘홀로’의 고립단절의 방향없는 삶에서 이젠 ‘더불어’ 주님을 따르는 제자공동체에 속한 레위입니다.
흡사 교회공동체에서 더불어 주님을 따르는 우리의 처지와 흡사합니다. 그러니 주님을 따르는 여정은 혼자가 아닌 더불어의 여정임을 깨닫습니다. 주님 역시 우리와 함께 하시는 더불어의 주님이십니다.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식탁공동체에 이의를 제기하는 바리사이파 율법학자들에 대한 주님의 답변이 오늘 복음의 절정입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예수님을 통해 환히 드러나는 자비로운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우리 모두가 부름받아 치유받아야 할 병자들이요, 용서받아야 할 죄인들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나서 부른 것이 아니라 병자요 죄인이라 부르신 것입니다. 세상에 병자아닌 사람, 죄인아닌 사람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이런 주님께서 불러주신 은총에 대한 자각에서 저절로 샘솟는 겸손과 감사의 마음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은, 우리의 따름은 하루이틀에 끝나지 않는 평생과정입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살아있는 그날까지 주님은 우리를 부르시고 우리는 겸손과 감사의 한결같은 자세로 주님을 따릅니다. 죽어야 끝나는 부르심과 따름의 여정입니다.
삶은 은총이자 과제입니다. 부르심의 은총에 응답하여 끝까지 한결같이 따르는 과제를 이행해야 하는 우리들입니다. 기도와 더불어 말씀 공부가 필수입니다. 말씀은 생명이자 빛이자 주님의 현존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내발에 등불, 나의 길을 비추는 빛입니다. 히브리서 저자가 말씀의 본질을 명확히 밝힙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같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어떠한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 눈에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었습니다. 인간의 본질은 말씀입니다. 저절로 자녀다운 삶, 제자다운 삶이 아닙니다. 살아 있다고 다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 평생 말씀 공부로 하느님의 말씀과 영혼이 일치되야 비로소 진실하고 투명한 살아 있는 삶니다. 비로소 하느님의 자녀다운 삶, 주님의 제자다운 삶입니다. 날마다의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하느님의 자녀답게, 주님의 제자답게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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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죄에 갇히지 않고 은총에로 나아가는>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 그러므로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오늘 독서와 복음은 우리의 믿음을 다시 생각게 합니다. 나는 진짜 하느님을 믿는가? 믿는다면 하느님을 어떤 하느님으로 믿는가?
왜 이런 생각을 또는 성찰을 하게 됐는가 하면 오늘 히브리서가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가자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시 묻습니다. 나는 확신을 가지고 있는가? 나는 은총의 어좌로 나아가고 있는가?
우리가 확신을 가지고 하느님을 믿는다면 존재에 대한 확신도 있어야겠지만 하느님이 우리를 너무도 사랑하신다는 것을 무엇보다 확신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아무리 존재하셔도 나를 사랑하지 않으신다면 무슨 소용이 있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해도 내가 그 사랑을 믿지 못하고 느끼지 못한다면 그 사랑이 내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또 믿는다고 해도 하느님이 사랑이심을 믿어야 하는데 하느님을 무서운 심판관으로 믿는다면 그 믿음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주님께서 적절하게 드신 비유가 있습니다. 종들에게 각각 한 미나를 주고 떠난 주인이 다시 돌아와 셈을 합니다.
다른 종들은 그것을 열심히 활용해 주인이 돌아왔을 때 불려 되돌려드리는데 마지막 한 종은 그것을 그대로 되돌려드리고 왜 그랬느냐고 추궁을 당하자 주인이 주지도 않고 빼앗아 가는 냉혹한 분이라고 믿기에 그랬다고 답합니다.
결국 그 종은 믿음대로 냉혹한 심판을 받습니다. 그 종은 은총의 어좌로 나간 것이 아니라 냉혹한 심판관의 어좌로 끌려갔던 것입니다.
우리는 연약하기에 유혹에 쉽게 넘어가 죄를 짓곤 합니다. 그리고는 자기의 죄 때문에 하느님을 무서운 심판관으로 만듭니다. 하느님이 무섭기 때문이 아니라 자기 죄 때문에 하느님이 무서운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은총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고 미성숙한 사람은 하느님 사랑과 은총에 나아가지 못하고 자기의 죄에 갇힙니다.
이는 아담과 하와가 죄지은 다음 한 짓이고 그 후예인 우리가 이어 하는 짓입니다. 그런데 다윗이 성왕인 이유는 죄를 짓지 않아서가 아니라 누구보다 많이 죄지었지만 자기 죄에 갇히지 않고 그 죄를 가지고 늘 자비하신 하느님께 나아갔기 때문인데, 우리가 잘 아는 유명한 시편 ‘Miserere’가 바로 주님께 나아가며 바친 시편입니다.
그는 이 시편에서 “하느님 자비하시니”를 제일 먼저 입에 올리고, 자기 죄를 감추는 대신 오히려 두 손으로 받쳐 들고 나아가 히솝의 채로 깨끗이 씻어 달라고 주님께 간청합니다.
이렇게 할 때 주님께서는 단죄하시는 분이 아니라 씻어주시는 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레위가 부르심을 받는 얘기도 이것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죄를 안 지었다고 생각하며 레위를 단죄하던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들은 주님께서 죄인들과 어울린다고 비난하지만 주님은 오히려 그를 제자로까지 삼으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독서와 복음에서 가르침을 제대로 받는 우리는 하느님 자비하심에 대해 확신을 가지고 믿읍시다. 그래서 자기 죄에 갇히지 말고 하느님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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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2,17ㄷ)
<하느님께 감사!>
오늘 복음(마르 2,13-17)은 '예수님께서 레위를 부르시고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드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라."(마르 2,14ㄴ)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예수님을 따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그 레위의 집에서 많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드십니다.
그 모습을 보고 바리사이파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말합니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마르 2,16ㄴ)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17)
이것이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이유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당신 백성을 구하시려고 많은 예언자들을 보내셨지만, 백성은 그들이 전하는 하느님의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 주신 것입니다. 우리를 살려주시기 위해서. 죄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느님께 감사!'
때문에 우리는 나약한 사람들과 죄인들과 부족하다고 여겨지는 이들을 업신여기거나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그들이 바로 예수님의 친구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내가 죄인이라고, 허물이 많은 약한 존재라고 위축되거나 예수님께로 나아가기를 주저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 우리를 위해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땀 흘리시고, 수난하시고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을 위해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오늘(1.18)부터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인 1월 25일까지를 '일치 주간'으로 정하고, 그리스도인들의 일치를 간구하는 공동기도를 바칩니다.
일치는 주님의 뜻입니다.(요한 17,6-26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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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 2, 17)
예수님께서
우리를
부르십니다.
병들어도
괜찮고
죄인이어도
괜찮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음식을
먹듯 우리는
사랑을 먹으며
성장합니다.
사랑을 먹고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사정을
너무나
잘 아십니다.
우리를
부르신다는 것은
삶의 한간운데로
나오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살아가길
간절히
바라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삶을
산다는 것은
행복한 삶의
주체가 되는
것입니다.
남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음식을 먹는
것도 우리요
물을 마시는
것도
우리자신입니다.
의인이
결코 아닌
우리를
기쁘게
부르시는
예수님을
통하여
삶이 조금씩
아름다워지기
시작합니다.
조금 늦어도
많이 더뎌도
괜찮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아름다운 삶을
배워나갑니다.
배우고
익히며
행복한 사람이
됩니다.
그 누구도
아닌
예수님께서
우리를
만들어가십니다.
음식을 씹으며
물을 마시며
감사를 드립니다.
죄인이기에
병들었기에
우리는
예수님께
더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행복은 이렇기에
더 행복할 수
있는 선물입니다.
예수님을
따르고
예수님을
필요로 하는
우리는 행복한
죄인입니다.
행복한 죄인은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시간이
행복입니다.
행복한 부르심
행복한
식사의
참기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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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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