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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진리는 하나가 아니다…소설로 포스트모더니즘 대중화에 기여
김호기 |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기호학·철학·역사학·미학 등 다방면에 걸쳐 전문적 지식을 갖춘 이탈리아의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이후 최고의 르네상스적 인물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소설이 사상이 될 수 있을까. 소설의 주제가 사유 방식의 탐구에 있다면 그 소설은 당연히 훌륭한 사상이 될 수 있다. 20세기 전반기에 발표된 토마스 만의 <마의 산>이 계몽주의의 성찰을 담았다면,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는 의식의 흐름을 펼쳐 보였다. 지난 70년간 사상가로서의 소설가 위상을 보여준 두 사람은 조지 오웰과 움베르토 에코(Umberto Eco·1932~2016)다. 오웰의 <1984>가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을 다뤘다면, 에코의 <장미의 이름(Il nome della rosa)>은 다원주의의 상상력을 옹호했다.
1980년 에코가 <장미의 이름>을 출간했을 때 서구 지식사회는 두 번 놀랐다. 당대를 대표하는 기호학자가 소설을 발표한 게 첫 번째 놀라움이었다면, 작품의 완성도가 매우 높았다는 게 두 번째 놀라움이었다. 놀라움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장미의 이름> 발표 이후에 에코는 <푸코의 진자> <전날의 섬> <바우돌리노> 등을 연속 발표함으로써 세계적인 화제를 불러모았다.
에코의 작품들은 흔히 포스트모더니즘 소설로 평가된다. 기호학자이자 중세학자인 에코를 포스트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사상가라고 보기는 어렵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을 살펴보는 데는 철학자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와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가 더 적절할 수 있다.
하지만 에코의 소설은 밀란 쿤데라, 토마스 핀천의 소설과 함께 포스트모더니즘을 대중에게 알리는 데 크게 기여했다. 에코의 <장미의 이름>,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핀천의 <49호 품목의 경매> 등이 보여준 다원주의 상상력은 20세기 후반 포스트모더니즘이 전달하려는 가장 중요한 메시지였다. 이 기획에서 에코의 <장미의 이름>을 다루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장미의 이름’과 진리의 복수성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 보듯이 희미해서 진리는 우리 앞에 명명백백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우리는 이 세상의 허물을 통해 그 진리를 편편(片片)이 볼 수 있을 뿐이다.”
<장미의 이름> 프롤로그에 나오는 말이다. 신약성서 고린도전서를 인용해 쓴 구절이다. 진리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인가 여럿인가. 분명한 것인가 모호한 것인가. <장미의 이름>을 통해 에코는 포스트모더니즘이 강조하는 이성의 한계를 주목하고 사유의 복수성을 옹호한다.
<장미의 이름>은 에코가 존경해온 아르헨티나 작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바벨의 도서관’ 이야기와 영국 추리작가 코넌 도일의 ‘셜록 홈스 시리즈’를 차용하는 포스트모던 기법을 활용한다. 소설은 1327년 프란체스코회 수도사 윌리엄과 멜크 수도원 수련사 아드소가 의문의 살인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이탈리아의 한 베네딕트 수도원에 도착하면서 시작한다. 묵시록에 예언된 것처럼 연쇄 살인사건이 발생하고, 윌리엄과 아드소가 사건의 중심에 있는 장서관의 비밀을 풀어내는 게 소설의 내용을 이룬다.
이 소설의 절정은 ‘웃음은 예술이며 식자(識者)들의 마음이 열리는 세상의 문’이라는 내용을 다룬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2권이 장서관에 존재한다는 ‘사실 아닌 사실’을 밝히는 데 있다. 존재하지도 않는 <시학> 제2권을 에코가 앞세운 것은 비극을 높이 평가한 <시학>에 대한 저항 또는 해체를 함축한다. 에코에게 진리란 여럿이며, 그러기에 애매하고 불확실한 것이다. 이렇듯 <장미의 이름>은 에코의 다원주의 사상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포스트모더니즘과 새로운 중세
<장미의 이름>은 추리소설 기법을 활용해 14세기 중세를 다룬 역사소설이다. 그동안 <장미의 이름>에 대해선 문학적·기호학적·철학적 시각에서 다양한 해석들이 제시돼 왔다. 사상의 측면에서 볼 때 <장미의 이름>은 포스트모더니즘을 대표하는 소설의 하나로 파악할 수 있다. 비극에 대응해 희극을 내세운 에코의 의도는 절대주의와 단원(單元)주의에 맞서 상대주의와 다원주의를 부각시키려는 데 있었다. 상대주의와 다원주의는 포스트모더니즘을 지탱하는 사상적 지반이다.
흥미로운 것은 전후 현대에 대한 에코의 분석이다. 에코는 엘리트주의적 모더니즘에 맞선 반엘리트주의적 포스트모더니즘에 더 큰 공감을 표시했다. 동시에 그는 현대가 ‘새로운 중세’로 나가고 있다고 진단했다.
중세시대의 강고한 요새와 같은 독점 대기업, 현실로부터 유리된 수도원과 같은 대학, 요새와 수도원 밖에서 질병과 범죄에 시달리는 중세 민중과 같은 무력한 현대인들이 새로운 중세의 특징이라는 게 에코의 주장이었다.
에코의 소설들에 찬사만 쏟아진 것은 아니다. 시민들은 에코 소설에 열광했지만, 적지 않은 평론가들은 에코 소설이 지나치게 관념적이며 지루하다고 비판했다. 이러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이 에코 소설을 즐겨 읽는 이유를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한다. 에코 작품에는 무한한 박식과 관념적 유희가 주는 지적 즐거움에 더해 기존의 사유를 전복하고 성찰하려는 지적 도전이 담겨 있다. 이러한 도전에 독자들은 공감한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진리는 통약불가능하고, 결국 부재한다는 포스트모더니즘의 상대주의 세계관에 쉽게 동의하긴 어렵다. 하지만 21세기에 들어와 우리 인류를 위협하고 있는 것의 하나는 근본주의적 절대주의 세계관이다. 이 세계관이 낳아온 폭력을 지켜볼 때, 상대주의는 매우 중요한 가치다. 민주주의는 개인주의와 자유주의, 그리고 다원주의를 기반으로 한다. 민주주의가 소중한 가치라면, 다원주의 상상력은 이 민주주의를 배양시키고 성숙시킨다. 오웰의 <1984>와 더불어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 사상을 담은 소설의 고전으로 평가될 수 있는 까닭은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
■한국어판 저작은
<장미의 이름>은 소설가이자 번역가인 이윤기에 의해 우리말로 옮겨졌다. 이윤기는 여러 차례 수정해 번역본의 완성도를 높였다. <장미의 이름>의 탄생 배경에 대해선 1983년에 출간된 <장미의 이름 작가 노트>를 읽어보는 게 좋다. 이 역시 이윤기에 의해 번역됐다.
■문화로서만 존재, 제도로선 부재했던 한국 포스트모더니즘
우리 사회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 본격적으로 토론되기 시작한 것은, 1990년대 ‘문화의 시대’가 열린 게 중요한 계기를 제공했다. 포스트모더니즘에 담긴 의미가 고급문화와 대중문화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혼성모방 기법이 적극 활용되며 상품 소비가 이미지 소비로 나타난다는 데 있다면, 1990년대 우리 문화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이 관찰된다고 볼 수 있었다. 당시 유하의 시, 김경욱의 소설, 열린음악회, 각종 광고들은 그 구체적인 사례로 제시됐다.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의 등장은 한국 자본주의의 구조변동과 밀접히 관련돼 있었다. 소득 향상에 따른 소비계층의 확대와 소비양식의 세계화는 여가활동·영상·레저 등을 새로운 대량 소비품목으로 등장시켰다. 1997년 외환위기가 발생하기 이전까지 소비 취향이 다양해지고 내적 스타일 분화가 증가한 셈이었다. 이러한 현상을 망라하는 개념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이란 말이 널리 통용됐다.
주목할 것은, ‘문화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이 이렇게 실재했더라도 ‘제도로서의 포스트모더니티’는 부재했다는 점이다. 우리 사회 근대화 과정을 돌아볼 때 ‘포스트모던’이 아니라 ‘모던’이 중대한 과제라는 주장이 지식사회 안에선 다수의 견해를 이뤘다. 그 대표적인 연구의 하나가 <한국의 근대와 근대성 비판>(1996)에 실린 임현진 서울대 명예교수의 ‘사회과학에서의 근대성 논의’였다.
임현진은 광복 이후 근대화 프로젝트를 검토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이끌어냈다.
첫째, 국민국가가 미완의 상태이고, 둘째, 자본주의가 자립적이지 못하며, 셋째, 민주주의의 실질적 제도화가 필요하다는 점에서 근대화는 여전히 미완의 과제라는 주장이었다.
이러한 논리는 1996년의 시점에서 볼 때 현실 분석의 적실성을 가졌다.
1990년대 포스트모더니즘을 둘러싼 토론은 ‘한국적 이론 소비’의 한 전형을 보여준다. 대학에서 연구되는 학문의 상당수가 서구에서 발전된 만큼 우리 지식사회는 서구 이론에 민감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한국적 현실을 고려하지 않고 수입되고 적용되는 각종 이론들은 유행이 끝나면 시야에서 빠르게 사라져 버린다.
21세기에 들어와 포스트모던 상황이 지구적으로 강화되는 현실 속에서 이미 소비된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은 그 생명력을 회복하기 어려웠다. 서구 이론에 대한 개방적이면서도 주체적인 태도는 여전히 중요한 과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