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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실록(3)
5.거란의 3차 침입과 강감찬의 맹활약.
거란은 2차 침입에서 회군하는 조건으로 두 가지를 내걸었다. 첫 번째는 고려국왕의 거란 입조(거란왕실에 찾아감)
이며, 두 번째는 강동 6주의 반환이었다. 하지만 고려는 왕이 와병중이라는 핑계를 대며 거란에 입조하지 않고 대신
형부시랑(형부상서 바로아래 직책) 진공지를 보냈다. 또한 강동 6주의 반환도 거부하였다.
이렇게 되자 거란은 고려의 서북국경을 중심으로 무력시위를 벌이면서, 거란의 성종은 강동 6주를 무력으로 차지하
겠다고 공식 천명하여 압박을 가하는 한편, 야률행평과 이송무를 잇따라 보내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하였다.
서경의 장락궁을 찾은 거란 사신 야율행평은 여느 때처럼 여섯 개의 성을 내놓으라고 말했다.
하지만 고려가 이를 수용하지 않자 1014년 소직렬을 보내 통주를 침략했다가 흥화진 장군 정신용과 별장 주연에게 패
배하여 물러났다.
하지만 거란의 침략은 계속되었다. 그들은 이듬해 정월 압록강에 다리를 놓고 다리 양 옆에 고려 침략을 위해 성을
구축하였다. 이에 고려는 군사를 동원하여 공격을 가하였으나 패하여 퇴각하고 말았다. 거란은 이 여세를 몰아 이번에
는 포위하였다. 그러나 거란군은 장군 고적여, 조익 등에 의해 격퇴당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번에 걸쳐 다시 통주
를 공략하였다. 그리고 여진이 거란을 도와 배20척을 이끌고 구도포를 침략하였다. 하지만 그들은 번번이 실패햐여 퇴
각하였다.
한편, 제2차 거란 침입때 공을 세운 김질,최질 등의 무신들이 난을 일으켰는데(김훈.최질의 난),1014년 음력 11월부터
1015년 음력 3월까지 4개월간 지속되었다.
김훈과 최질은 고위무관으로서, 김훈은 당시에 강조의 패전이후 진격하던 거란군을 상대로 완항령에서 같은 좌우기
군 장군인 김계부,이원,신녕한과 더불어 기습공격을 하여 잠시 퇴각시킨 바 있고, 최질도 통주에서 중랑장으로 있던
중, 포로로 붙잡힌 후 거란측의 강요로 통주에 항복을 권유하러 온 행영도통판관 노전과 합문사 마수를, 홍숙과 함께
체포하여 억류하여, 성안의 백성들의 두려움을 진정시킴과 동시에,항전을 주장하여 같이 있던 방어사 이원구,부사 최
탁,대장군 채온겸, 판관 시거운관 함께 성문을 닫고 굳건히 지켜 거란군을 물리쳤다. 통주성 전투에서 승리하므로써 고
려는 거란군의 남진을 지연시키고 그뒤 행영도통사 양규장군의 작전으로 그들을 반격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러나, 최질은 공을 세웠음에도 문관직을 얻지 못해서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이 와중에 중추원 일직인 황보유의와
중추원사 장연우가, 파괴된 궁궐을 수축하고 거란과의 전쟁으로 크게 불어난 재정으로 문관에게 지급할 봉급이 부족해
지자, 군인들의 영업전을 빼앗아 문관들에게 나누어 주자는 것이었다. 그러자 무관들은 격분하였다.
그들은 황보유의와 장연우를 잡아 궁궐로 난입하여 왕앞에서 이들을 매질하고 억울함을 호소하며 “무신도 공이 있으
면 문신처럼 높은 품계를 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하였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현종은 수용하고 황보유의와 장연우
를 귀양보냈다.
김훈과 최질은 무관이 문관을 겸하게 하는 한편, 어사대,삼사를 각각 금오대, 도정서로 바꿔버리면서 권력을 장악하
게 되었다. 그러나 이자림의 제안책으로 김훈.최질이 주살되게 되는데, 화주방어사에서 임기를 마치고 개경으로 온 이
자림(李子琳)은 김훈.최질이 현종의 권력을 탈취했다고 판단,매우 분노를 느꼈다. 이자림은 현종에게 한고조 유방의 ‘운
몽의 연회’(한고조가 한신을 잡기 위하여 운몽에서 제후들과 연회를 연다고 하여 한신을 오게했다.)를 귀뜸하여 현종은
그 뜻을 알고 서경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이자림을 서경유수판관으로 보냈다. 현종은 이자림의 배후에서 조용히 계획
을 세웠고,자림은 모든 준비를 끝마쳤다.현종은 김훈,최질 등 당시 권시들을 데리고 서경의 장락궁에 가 연회를 열었
다. 이자림은 그들이 취하자 19명을 죽였고,그들의 가족을 체포, 귀향보냈다. 이로써 무신들의 정변을 막을 내렸다.
이 난은 문신들이 무신들을 천시한 문제로 벌어진 반란이다. 훗날 150년 후인 1170년의 무신정변의 시초라고 하겠
다.
거란은 고려의 이러한 사실을 탐지했고 3차침입에 대한 주장이 거란 조정에서 힘을 얻게 됐다.1015년 4월에 다시 야
률행평을 보내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고려도 강하게 반발하며 야률행평을 억류하여 돌려보
내지 않았다. 그러자 그해 9월 다시 이송무를 보내 같은 요구를 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고려는 냉담했다.
거란과의 전면전을 예상한 고려는 우선 거란의 후방 병력을 묶어놓기 위해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 거란의 침략에 대
비하라는 언질을 준다.
마침내 거란의 성종은 1016년 야률세량과 소굴렬에게 고려 침공을 명령하였고, 이들이 고려군의 저항에 밀려 퇴각하
자 이듬해에 소합탹을 보내 다시금 침입을 감행했으며, 마침내 1018년 12월 소배압이 지휘하는 10만 대군을 동원하여
대대적인 침략을 해왔다.
고려 역시 거란의 대대적인 침략을 예상하고 20만 군대를 조성하였다. 20만 군대의 상원수는 평장사(문하시중 바로
아래 직위)강감찬이 맡았다. 강감찬은 병력을 이끌고 흥화진으로 나아가 소가죽을 꿰어 흥화진 동쪽으로 흐르는 냇물을
막았다. 그리고 거란군이 건너기를 기다렸다가 물을 터뜨리고, 복병으로 하여금 흩어지는 거란군을 공격케 하여 크게
승리하였다. 흥화진 전투에서 엄청난 사상자를 낸 소배압은 무모하게도 개경을 향해 계속 진군하였다. 이에 부원수 강
민첨이 뒤를 추격하여 자주(자산)의 내구산에서 거란군을 격파하였고, 시랑 조원이 이끄는 고려군이 남하해온 거란군을
대동강 근방에서 다시 한 번 크게 섬멸하였다.
이렇듯 계속되는 패배에도 불구하고 소배압은 개경 입성의 망상을 버리지 않았다. 이듬해 정월 그는 자신의 직할대
를 이끌고 개경에서 백여 리 떨어진 황해도 신은현(신계)까지 진출했다.
이때 강감찬은 이미 병마판관 김종현에게 군사 1만을 주고 도성으로 돌아가, 방어하도록 해둔 상태였다. 또한 소배
압이 무모할 정도로 빠르게 개경을 향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현종은 성 밖의 백성들을 모두 성 안으로 불러들이고
들판의 작물과 가옥을 전부 철거하도록 명령했다.(청야작전)
이 때문에 막상 개경 밖에 도착한 소배압의 병력은 탈진한 상태에서 개성공략을 포기하고 말머리를 돌려야만 했다.
거란군이 회군하려는 기색을 보이자 강감찬은 곳곳에 아군을 매복하여 급습하도록 했다. 그리고 마침 구주에서 소배압
의 거란군과 강감찬의 고려군은 정면으로 맞딱뜨렸다.
처음에는 양 진영이 팽팽히 맞선 채 대등한 형세를 이뤘지만 김중현의 부대가 가세하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더구나
그때 갑자기 풍향이 바뀌어 비바람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불기 시작하자 남쪽에 진을 치고 있던 고려군의 기세는 한층
높아졌다.
전세가 불리하다는 것을 깨달은 거란군은 북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고, 고려군은 맹렬히 추격하여 그들을 거의 섬멸
하였다. 이 싸움에서 살아 돌아간 거랸군은 적장 소배압을 비롯하여 불과 수천 명에 불과하였으나, 거란 역사상 가장
비참한 패배였다. 또한 겨우 목숨만 부지한 채 거란으로 되돌아간 소배압은 거란왕에 의해 징계를 당하고 관직에서
쫓겨났다.
흔히 구주대첩으로 불리는 이 싸움을 이끈 인물은 강감찬이었다. 그는 경주로부터 금주(시흥)로 이주해 와 금주 호족
으로 성장한 강여청의 5대손이다. 아버지는 고려 건국에 공로가 있어 삼한벽상공신에 오른 강궁진이다. 본관 금주에서
949년에 감찬을 낳았다. 자칫 무인으로 알기 쉬운 그는 성종대에 과거에 장원급제한 문인이며 누차에 걸쳐 승진을 거
듭한 끝에 예부시랑, 국자좨주, 한림학사, 승지, 좌산기상시(중서문하성의 정3품 관직), 중추사(중추원의 종2품 벼슬) 등
을 역임하고 거란의 3차 침입당시에는 정2품의 서경유수 겸 중서문하성 평장사에 올라 있었다.
구주대첩으로 거란에 씻을 수 없는 치욕적인 패배를 안겨다 준 그는 전란이후에는 개성 외곽에 성곽을 쌓을 것을 주
장하는 등 국방에 힘썼으며, 몇 권의 저서도 남겼으나 현재는 전해지지 않는다.몇 번에 걸쳐 은퇴를 청원하여 현종의
허락을 받아내 쉬기도 했으며, 1030년에는 벼슬이 문하시중에 올랐다. 그리고 1032년에 생을 마감하였으니 향년 84세
였다.
6. 고려 최초의 실록 ‘칠대실록’ 편찬 과정
1011년 거란의 2차 침입으로 개경이 함락되고 궁궐이 불타는 바람에 사초(역사기록의 처음의 자료)가 완전히 소실
되었다. 이에 따라 현종은 사료를 복원하기 위해 황주량에게 명령하여 태조에서 목종까지의 실록을 편찬하도록 했다.
이것이 고려 최초의 실록인 ‘칠대실록’이다.
어명을 받든 황주량은 전국 각지를 다니면서 사료를 수집하였다. 이 과정에서 사실적 근거가 없는 내용들은 나이 먹
은 노인들에게 물어서 보충하였다.
자료 수집 작업이 완료되자 1013년 9월 황주량, 최충, 윤징고, 주저 등 네 명이 수찬관((修撰官)책을 펴내는 관직 또
는 그 사람)에 임명되어 실록 편찬작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21년 후인 1034년(덕종 3년) 총 36권으로 편찬이 완료되었
다.
‘칠대실록’ 편찬 이후 고려는 각 왕대마다 실록을 편찬하는 전통을 가지게 되었다. 실록편찬 방식은 처음엔 사관의
수찬관이 직접 편찬하는 당나라 방식을 택하다가 인종대에 편찬된 제16대 예종실록 이후에는 실록편수관을 별도로 임
명해 편찬하는 송나라 방식을 택하게 된다.
이렇게 편찬된 ‘고려실록’은 이자겸의 난 때에 불에 탈 뻔하기도 하고, 원나라 침입 때는 원에 빼앗기기도 하였으나
가까스로 보존되어 조선초에는 태조에서 공양왕에 이르는 고려 34대 왕의 실록이 모두 편찬될 수 있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임진왜란 때 춘추관이 불타면서 소실되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고려실록’이 있었는지조차 알
지 못하게 되었다.
7. ‘현종실록’ 편찬 관련사항
‘현종실록’ 편찬에 대한 기록은 보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고려사>와 <고려사 절요>에 실려 있는 ‘최충의 찬’이 ‘현
종실록’에 인용된 사실을 감안할 때 ‘현종실록’은 최충 등에 의하여 편찬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최충이 수국사
로 재직하였던 1037년에서 1055년 사이에 편찬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훈요십조의 신빙성 의심
현재 전해지고 있는 ‘고려사’ 태조편에 ‘훈요십조’가 기재된 경위에 의혹이 있다.
문헌에 의하면 일찍이 ‘고려사’태조편에 편찬되어 있었지만 현종시대(1010-1011)에 거란군 40만명이 쳐들어 왔을 때,
모두 불타고 없어졌다. 그래서 태조가 죽은 지 80년이 지나서 ‘고려사’를 다시 편찬했다. 이때 감수국사가 최항이고,수
국사가 김심언,주도자 황주량, 지원자는 최충이었다. 최제안이라는 인물이 최량의 집에서 발견했다며 가져온 것이 왕
건의 유서라며 소위 말해서 ‘훈요십조’라는 것을 들이 밀고 실록에 끼워 넣었다.
이미 불타고 없었던 ‘훈요십조’가 80년의 세월이 지난 뒤에 복원되었고 이를 주도한 사람들이 신라출신 관리들의 후
손이라는 점에서 훈요십조의 진위가 의심스럽다. 왕실의 중요한 문서가 어떻게 사가(私家)에 보관되어 있었을까?
#.거란족-거란족은 4세기에 등장해 5세기 중엽부터 랴오허강 유역과 랴오허강 상류인 시라무렌강 남쪽에서 유목생
활을 하고 있던 여러부족(8개)으로 이루어진 민족이다. 반농반목과 수렵채집생활을 하여왔다. 선비에서 갈라져 나왔다
고 하며, 흉노족과도 혼합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선비족이 중원으로 진출한 후, 선비족이 있던 자리를 차지했다. 북위
(386-534)때부터 이름이 알려졌으며,고구려 광개토대왕때인 391년 거란을 토벌했고, 그들이 납치해간 고구려 백성 1만
명을 구출했다(392년 9월),거란족이 세운 나라로 추정되는 비려국를 쳐부수고 역시 붙잡혀간 고구려 백성을 구출했다
(395년), 장수왕 때는 출복부 등 그 일부가 고구려에 예속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수와 당나라는 거란 추장에게 당의 국
성인 이씨성을 하사하기도 하고, 공주를 시집보내기도 하는 등, 거란을 고구려로부터 멀리 떨어지게 하기 위해 또한 많
은 식량과 물자를 공급해 왔다.
#.이진충의 난-거란은 당나라가 고구려를 공격할 때, 보급과 군대를 동원하는 데 도왔다. 하지만,거란은 이제는 당나
라의 속국이 아닌 자주적인 국가로서 동등한 위치를 원했다. 그후 27년이 지난 695년, 당나라는 영주도독부를 설치하
여 사민정책으로 고구려 유민과 말갈인들을 요서지역에 있는 영주에 집결하여 거주하게 하였는데, 본래 그곳은 거란인
들이 살고 있는 지역으로 거란인들과 혼거하는 상태였다. 하지만 당나라 영주(營州)도독 조홰(趙翽)는 탐욕한 자여서
몇 년동안 흉년이 들어 비참한 상황에서도 가혹한 과세로 인해 민심이 흉흉해졌는데, 이때를 기회로 거란족 추장인
이진충이 난을 일으켰다. 조회를 죽이고 거란의 독립을 선포 당의 지배에서 벗어나려고 저항했다. 여기에 고구려 유민
과 말갈이 연합해 세력이 커져 유주(幽州:베이징)까지 내려왔으나, 당시의 당의 집권자 측천무후가 놀라 많은 인원과
장비를 투입하고, 돌궐을 자기편으로 끌여들이니, 거란의 세력은 점차 약해져 실패하였다.
이 난으로 당의 통제력이 약화되어 대조영,걸사비우 등이 이끄는 고구려 유민 말갈족들이 당의 영토에서 탈출해 동
모산(지린성 둔화시)에서 발해를 세우는데 영향을 주었다.
#.고구려 유민-이 반란의 여파로 영주지역에 붙들려 있던 대다수의 고구려 유민들과 고구려계 말갈인들이 집단 탈주
가 일어났다. 이들은 요동까지 도주하여 크게 두 무리로 갈라졌으며, 말갈계 대다수와 소수의 고구려인들은 만주에 발
해국을 건국했으며, 대다수의 고구려인 도주민들은 자신들의 고향인 옛고구려의 3경중 두 곳인 한성(패서) 및 평양성
인근으로 귀향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후 패서지역의 새로운 구심점이 된 송악의 왕건이 고려왕조를 건국할 때 대부분
흡수되었다.
#, 야율아보기-거란족은 이진충의 거사이후 부족단위 형태로 전락하였는데, 부족장 중에서 선출된 가칸은 3년 이상 하
지 못하도록 규정했다. 하지만 야율아보기는 질랄부의 부족장인 아버지를 이어 부족장이 되었고, 이후 가칸으로 선출되
어 3년이 지나도 물러나지를 않았다. 야율아보기가 태어난 872년 무렵에는 거란이 예속돼 있는 당나라는 절도사,관료
들의 부패로 황소의 난이 일어나는 등 쇠락하고 있었다.
야율아보기는 반대파인 부족장들을 잔치에 초대해 죽이고 여타 부족장들의 지지를 받아 가칸에 올랐다. 이후 활발한
정복활동을 전개해 영토를 급속도로 넓혔다. 여진 세력 일부를 물리쳐서 요동일대를 얻었다. 916년에 황제라 칭했고
랴오허강 상류인 임황에 도읍하여 국호를 거란이라 하였다.(916년). 그해 7월 군사를 이끌고 서쪽의 돌궐, 탕구트, 사
타족 부락을 평정하고 8월부터 11월 사이에는 중국 황하 이북을 원정해 큰 전과를 거뒀다. 922년에는 막 궁예를 몰아
내고 세워진 신생국가였던 고려에 사신을 보내기도 했다. 그는 주위의 나라들에게 조공을 바치도록 했으며,중국의 문물
을 받아들여 한자를 본따 거란 문자를 창제했고, 농업을 발달시켰으며, 황제를 종신제로 하여, 유목민의 한계를 청산하
고 요나라의 기초을 다졋다. 이때 후당의 장종 이존욱과 충돌하였으나 이존욱 역시 만만치 않은 군사적 재능을 가지고
있어서 큰 성과 없이 물러났다.
아보기는 먼저 몽골지역을 정벌하기 위해 서방 정책을 실시했다.924년 5월 조바심을 느낀 발해국왕 대인선이 거란 동
부를 공격하는 사태가 일어났고,마침 서방 정책이 마무리가 된 때인 925년 9월 야율아보기는 발해 침공을 준비하여,
같은 해 12월에 출정명령을 내리고 발해를 기습공격하였다. 거란의 발해 공격은 상경용천부와 가깝고,거란도의 거점이
었던 부여부를 공격하면서 시작되었다. 부여부는 3일만에 함락되었고, 계속 진격하여 수도인 상경이 다음해 1월9일 포
위되었으며 발해는 3일이 지난 1월 12일에 항복했다. 926년 1월 14일 발해는 정식으로 항복하면서 멸망했다.아보기는
그곳에 ‘동쪽의 거란국’이라는 뜻의 ‘동란국’을 세웠다. 동란국의 수도는 멸망한 옛 수도 상천용천부였다가 928년 요동
의 남경(현재 랴오닝 성 랴오양(요양)으로 천도했다. 10여년 뒤 936년 결국 허울뿐인 이름도 없애고 거란 본국에 병합
된다. 나중에 발해 유민들이 발해를 다시 찾기 위해서 후발해, 정안국, 흥료국 등 여러국가들을 건국한다.
첫댓글 북진정책을 추구했던 고려가 원인이 된듯 싶은
거란의 침입으로 발해의 탄생 까지
역사 공부를 다시하게되었네요^^
추일슬풍님
대단하셔요
감사합니다
거란도 대단한 나라였네요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부터
일제 강점기 까지 셀 수도 없을만큼
많은 외세의 침략을 받았네요.
조그마한 땅덩어리 대한민국
하지만 지리적으로는 전략적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
제 생각도 그래요
우리 보쳉언니 늘 댓글도 엄지 척👍
@리즈향
내일 용방산행에 비가 많이 내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적당히 구름도 들고 햇볕도 가려주면서
무덥지 않는 행사가 되었으면 합니다 ~
@보쳉 그러게요.
비님 께서 조금만 내려주었으면 좋겠어요^^
굿밤 되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