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 샵과 고급술집이 즐비한 일본 도쿄의 긴자거리.
1980년대의 긴자는 온갖 사치와 허영심 그리고
돈에 대한 욕망이 뒤섞여 흥청거리고 있었다.
긴자클럽에서 호스티스의 팁으로
수억원에 달하는 가게와 온갖 보석이 오가는
환상같던 일이 벌어지던 장소가 버블경제시절의 긴자였다.
그 버블의 최대중심엔 부동산이 있었음은 물론이다.
영화 울트라맨, 고질라 등으로 미술감독으로는 최고의 명성과 명예를 쌓아온 스즈끼씨,
이제 사람들은 그를 개인파산자로만 기억하고 있다.
버블경제 시절 부동산버블의 최전선에 위치하고 있던 부동산버블전사 고지마 노부타카,
그러나 버블경제가 차츰차츰 사그라들면서부터 그는 일본 최고의 빚쟁이로 전락하고 만다.
돈으로 도배를하며 돈자랑을 일삼던 버블전사들은 모두 같은 시기에 부를 축적했지만,
공교롭게도 이들이 모두 파산하게 된 시점도 1991년으로 같은 해였다.
그들의 삶을 파라다이스에서 한순간의 나락으로 떨어트렸던
1991년 과연 그들에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현금 수백만엔을 시원시원하게 쓰는 고지마씨의 넒은 통큰 배포에 시중은행들은
너나 할것 없이 돈을 마음껏 대출해주겠다고 나섰다.
고지마씨의 가장 빛나던 황금기시절 그는 도쿄시내의 빌딩 70채를 소유할수 있었다.
그리고 그 빌딩들을 전매해서 또 다시 막대한 차익을 남긴다.
연간 매출액만 5000억엔 순이익만 1500억엔이 넘었었다.
증가하는 고지마씨의 매출액만큼이나 도쿄의 토지가격은 하늘높은줄모르고 계속 치솟았다.
83년이래로 일본의 땅값은 사상 유례없이 폭등하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인들은 백만장자가 되는 달콤한 꿈을 꾸기 시작한다.
남다른 럭키가이 고지마씨, 그도 버블시절 쌓아올린 재산만큼이나 엄청난 데미지를 입는다.
총 8개 은행에서 대출받은 천문학적인 돈이 고스란히 빚으로 남고 말았다.
이제 고지마씨에게 남은 건 블행한 파산의 노년뿐이다.
그는 자신의 인생이 곤두박질 치기 시작하던 1991년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1991년 그 해에 철옹성같이 단단한 위용을 자랑하던
일본 버블경제의 위력도 점차 힘을 잃어가기 시작한다.
1985년 9월 미국은 만성적인 대일무역적자를 해소하기 위해서 일본에 엔화절상을 요구한다.
플라자 합의를 의해서 이뤄진 일본엔화는 1년새에 2배까지 급격히 치솟는다.
수출에 적신호가 켜진 일본정부는
5%였었던 은행금리를 반으로 싹둑자른 2.5%로 인하하기에 이른다.
자국 기업의 방패막이가 되주기 위해서 시행된 일본 정부의 저금리 정책은
무려 3년 넘게 지속되면서 시중엔 돈이 풀리기 시작했다.
1985년 3.8%이던 통화증가율이 3년이 지난 1985년 13%까지 증가한다.
시중에 풀린 돈들은 고수익 투자처를 찾기 시작했고 곧 토지와 주식에 미친듯이 몰려든다.
특히나 일본사회에는 옛부터 토지불패의 신화가 전해져내려온다.
오르기는 해도 절대 하락하진 않는 다는 것이 에도시대때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일본인들의 땅에 대한 신뢰였다.
도쿄 중심부에서부터 시작된 부동산 열풍은
도쿄 외곽으로까지 확대되면서 더욱 더 지가상승을 부추긴다.
이런 부동산열풍의 이면엔 시중 은행들의 때아닌 대출경쟁이 있었다.
도쿄를 포함한 나고야와 교토 등지에서 일본의 6대 도시
지가가 거품경기가 지속되는 5~6년동안에 무려 5배까지 폭등한다.
도쿄를 팔면 미국을 살 수 있다는 우스갯소리가 유행하던 시절이였다.
일본의 부동산 투기 광풍은 이젠 자국을 넘어 해외부동산에까지 전면 확대되었다.
뉴욕시민들의 자랑이자 뉴욕의 심장부인 록펠러 센터의 인수는 제조업이
주된 수출종목이였던 일본에게 해외부동산의 큰손으로 출현하게 된 상징적인 사건이였다.
미국인들은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을수 밖에 없었다.
또한 일본의 대기업들과 부동산회사들은 해외부동산 시장에 뛰어드는것도 모자라
명화시장 경매시장에까지 뛰어들며 명화의 가격이 대폭등하기 시작했다.
일본의 거물들에 의해 도쿄의 땅값이 하늘높은줄 모르고 치솟는 동안
일본 서민들의 내집마련 꿈은 점점 물거품이 되가기 시작한다.
값싼 임대아파트 추첨의 당첨확률은 하늘의 별따기 처럼 요원한 일로 보였다.
부동산 버블로 인한 도쿄의 토지며 집값의 폭등으로 임대료가 천정부지로 치솟으며
내집마련을 하지못한 서민들은 멀리 도시외곽으로 밀려난다.
버블로 인해 도쿄 위성도시들의 인구가 갑자기 300만명이나 대폭 증가한다.
버블경제가 주는 막대한 이익은 결코 모두에게 고루 나눠지지 않았다.
일본의 국민들은 이상황이 뭔가 잘못된 쪽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원성과 불만의 목소리가
여기저기 곳곳에서 터져나오기 시작한다.
버블경제의 최후는 실로 비참했다.
모든 경제지표가 하향곡선으로 돌아서고 있었고,
시중엔 자금이 바닥나면서 주가가 곤두박질치기 시작했으며
시중은행들의 대출규제로 인한 투기성 매물이 마구 쏟아지며 지가는
점점 하락하기 시작한다.
일본의 1991년은 에도시대부터 믿어왔던 토지불패라는 신앙이 최초로 깨어진 한해로 기억된다.
버블의 때 아닌 몰락은 맨 처음 버블전사였던 부동산의 큰손들을 강타하며 휘몰아친다.
망조가 깃든 1991년 일본의 지가는 크게 상승해나가던만큼이나 엄청나게 하락한다.
절망적인 타격을 입은 부동산회사며 건설업체들의 잇따른 파산은
시중 은행들에겐 천문학적인 부실채권만 남긴다.
버블의 몰락이후 시중은행엔 무려 12조엔의 공적자금이 투입됐지만
줄줄이 파산되는 은행곳곳의 연쇄부도를
막기엔 턱없이 역부족이엿다.
이에 일본정부는 채권회수를 위한 채권관리기구를 신설하기에 이른다.
돈을 받지 못한 사금융권들은 불법적이고 교묘한 방법으로 채권의 회수를 시작한다.
부실채권으로 인한 은행들의 적자도산은...
투기목적이 아닌 일반 시민 대출자들에까지도 영향을 미친다.
서민들중에도 파산된 피해자가 속출했고
결국엔 담보로 저당잡힌 집들이 경매처분을 당한다.
입을것 못입고 먹을것 못먹어가며 허리띠를 졸라매고
기껏 모은 돈으로 내집마련의 꿈을 달성한 서민들도
곧 버블붕괴의 피해자가 될뿐이였다.
버블붕괴후에 그들의 전부나 다름없는 소중한 집들은
한낱 깡통아파트로 전락하고 만다.
일본 전체 1억 중산층 사회란 자부심은 이미 흘러간 옛말이 되었고
그자리를 중하류 계층이 일본사회의 80%를 메우고 있었다.
소득이 줄면서 소비심리는 급격히 위축되었으며 당연하게도
일본 서민들의 주머니는 열리지 않게 되었고.
일본 경기의 악순환사이클만 반복될뿐 이였다.
얼핏 탄탄해보이던 일본경제 기반의 틀이 무너졌고
일본경제는 버블붕괴와 함께 한없이 깊은 경제침체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장기불황이 다가오면서부터
일본의 대기업들은 묘책으로 대량정리해고와 임금삭감을
통해 강도높은 구조조정에 들어가고 있었고, 투기는 물론
내집장만조차도 엄두를 낼 수 없었던 서민들도 구조조정의 명단에 올랐다.
마이너스 성장만 계속되던 90년대 후반이
흘러간 시점엔 자살자마저 증가하며 1990년대 일본사회가 가져온 버블붕괴는
점점 더 어두운 나락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첫댓글 궁금한게 저 때 돈을 벌어서 투자나 부동산같은거 안하고 그냥 평범하게 살았어도 망한수준?이 되었을까??
아마 아닐것 같아. 프라자 합의때 독일도 일본이랑 비슷한 수준으로 환율 올렸는데 독일은 저렇게 까지 되진 않았으니까...
요즘의 중국이 생각나네...
잃어버린 20년,,
한국전쟁 특수로 저렇게 된거면서
22
부동산 가장 비쌀때 팔아서 현금으로 가지고 있었으면 개이득이었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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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2 그니까 ㅋㅋㅋ 캡쳐보고 헉했다 뭐냐저게;;
부끄러운줄도 모르고.
팔아서 미국을 사지 그랬냐ㅋ
삭제된 댓글 입니다.
우리나란 버블이었던 적도 없는디...따흐흑
@칙칙한 촉촉칩 저거 다 빚으로 돌아왔잖아 버블 와봐야 좋을것도 없음
@모냥이 당연 안좋지 저런 말도안되는 고속성장이 없었으니 저런 고속파산도 없을것...
어찌보면 부럽다 만주족 몽골이랑 싸울일도 없고 유럽이랑 교류도 편하게 할수 있는 위치에
저런 버블속에서도 난 혜택 1도 못본 가난한 쪽이었을듯
염병 지금 버블 꺼진지 30년이 다되가는데 아직도 도쿄땅값 집값 다 비싸 내집마련 언제함ㅅㅂ
달러로 바꿔놨어야되나
재밌네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했어!!
일본의 버블은 말로만 들었는데.. 직접 이렇게 캡쳐된것만으로 간접적인 경험인데도 끔찍하네
저때 자살한사람들 엄청 많을거같아
진짜 흥미돋.... 저정도일줄은 몰랐어
나 이시대 글 재밌엌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