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사단이 현지에 도착하였을 당시 묘안에 있던 유물은 도굴된 당시 이미 다 없어진
상태 였고 벽화만 남았다. 그래도 남은 얼마 안되는 유물은 성서성 고분 연구소로 옮겨졋다.
"부여태비의 묘지석" 은 2장으로 한벌(옛법) 인데 개석 아래 지석이 있는데 세조각으로
깨져있는 상태이지만 그외엔 상태가 아주 양호하였다.
비석에 831자중 3자만 판독이 어렵고 나머지는 온전하여 "부여태비 휘(왕의 어머니)
태비 扶餘씨 諱(휘) 라는것이 선명하다.
장위인 (부여태비 고분 발굴자)- "부여태비는 부여 덕장의 딸이고 부여웅의 손녀이며
그녀의 증조부는 "부여의자" 라 한다 거대한 배당 묘장(황제)은 부여웅과 부여의자는
당나라 역사서에 백제왕이라고 명확하게 기재 되어있다. 따라서 부여 태비는 백제왕
실의 후예임이 확실하다" 라고 증언하였다
청계천 문화관 김영관 관장- "이것은 전혀 몰랐던 사실이며 의자왕 손자 까지는 당나
라 사서에 나와 알지만 그 이후는 알지 못했다. 부여태비 묘지석 발굴을 통해 의자왕
증손녀의 존재가 최초로 알려졌다" 고 한다
그녀가 묻혀진 근방에는 거대한 묘가 많은데 <부여태비 고분 발굴자 장위인>의 설
명에 의하면 그 곳에는 당고조 이연의 무덤 현릉이 있는곳이고 그곳에 의자왕 증손
녀가 당고조 무덤 근처에 함께 묻혀있다는 사실 이다
부언 하면 이연은 당나라를 세운 황제이며 당태종은 이세민 이다 .
황제의 배장묘는 주로 북쪽과 동쪽에 분포되어 있고 배장묘지에 묻힌 사람은 황제의
자녀와 친족이다 그리고 이곳에 묻히는것은 매우 영광스러운일이다
헌릉의 조사는 너무 방대해 아직도 진행 중이다.
그렇다면 부여태비 휘는 어떻게 왜 이곳에 묻혔나? 라는 궁금증이 생기게 된다
황제의 배장묘지에 묻힐수 있었다는것은 그녀의 신분이 매우 높았다는 사실이며
황족임을 의미 하는데 어떻게 백제인이 황족이 될수 있다는 말인가?
김영관 청계천 문화관장왈 - 백제 왕족들이 당나라에서 높은 지위를 유지 했다는
사실이 이로써 증명되는것이다 ...
백제가 망한후의 역사는 우리가 잃어버린 역사의 고리 였다
백제 멸망후 백제국민 왕족들은 어떠한 삶을 살았으며 어떻게 사라 졌는지 조차
도 알지 못했고 그 기록도 우리나라에는 없다.
우리나라는 의자왕 이후 왕가계도도 몰랐으나 묘가 나타나고 묘비를 읽으며 의자왕
가계도 (직계)가 밝혀 진것이다 맏아들 "융" 이란것만 알고 있고 그것이 전부였고
그외는 명쾌히 아는바가 없었다.
부여의자왕- 부여웅- 부여덕장- 부여태비 휘 까지 직계 4게도가 최초로 밝혀진
사실이다
서울대 규장각에도 백제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없고 아무곳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ㅡ계속 ㅡ
첫댓글 여기 올린 글은 다큐멘트를 보며 그것을 다 기록한것입니다
하여튼 선배님의 기억력은 photographic memory 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습니다.
과찬을 하여주면 정말인줄 알까 걱정입니다 아니 정말 그밤을 지새웠습니다 나는 어쩔수 없는 대한민국의 여자임을 확인 하였답니다 그리고 백제인들이 그곳에서의 생활을 상상하며 가슴이 아파서 가슴이 아파서 눈물을 줄줄이 흘리며 기록을 하였답니다
백제의 역사는 거의 아는게 없으니, 도무지 이렇다 저렇다 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이 듭니다. 새로운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글세 말입니다 오히려 유럽 역사 년도를 구슬 엮듯 말을 할줄 아는데 정말 삼국의 역사에 너무 문외한이였던것이 더욱 부끄럽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