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지금 요코는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성실하게 살아온 요코의 마음에도 빙점이 있었다는 것을! 제 마음은 얼어 버렸습니다. 요코의 빙점은, 너는 죄인의 자식이다, 라는데 있었던 거예요." (580쪽)
참 슬픈 이야기다. 서로를 믿었기에 건넸던 말 한마디가 가정 전체를 얼어붙게 만들줄이야. 사람은 믿음의 대상이 될 수가 없다. 아무리 친한 친구 사이라도 내가 뱉은 말 한마디가 언젠가는 돌아돌아 당사자의 귀에 전달 된다는 사실을. 이것이 사실이 아닌 거짓말일때에는 후폭풍이 크다는 사실을.
매사에 의심이 많은 의사이자 병원장인 요코의 양아버지 게이조. 게이조의 번뇌하는 모습 속에서 그의 약한 심성을 볼 수 있다. 단호하게 끊고 맺는 결단력이 부족한 그의 심성을. 외모가 빼어난 아내를 둔 남편이 가질 수 밖에 없는 의심 정도라 보기에는 결코 가볍지 않은 아내에 대한 지나친 의심은 그의 가정에 먹구름을 씌운다. 그의 의심은 독자들도 앞으로 그의 가정에 너무나 불행한 결과가 있을 것이라는 것을 예측하게 만든다. 결국 게이조의 성향은 이 책의 스토리 전체를 암울하게 이끌어 가는 큰 줄기로 자리매김한다. 대학시절 잠깐 영어 공부를 위해 교회를 잠깐 다닌 적이 있었던 게이조는 성경에서 감동을 받은 구절 '원수를 사랑하라'를 실천하기 위해 친구로부터 양녀를 소개받아 집으로 데리고 온다. 하지만 그의 본심은 아내를 향한 복수였지 성경 구절을 실천하기 위한 의도는 아니었다. 의심스러운 아내에게 고통을 안겨주고자 하는 계획은 치밀했다. 아내가 외도를 했을 것이라는 불쾌한 자신의 생각을 아주 오랫동안 간직한다. 어찌보면 게이조에게 있어 빙점 즉 그의 마음을 얼어붙게 만드는 빙점은 '아내의 외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아내의 외도가 결국 사랑하는 딸을 잃게 만들었고, 아내의 외도가 가정에 불운을 가져오게 했다는 합리적 의심을 끝까지 가져간다. 게이조의 빙점이다!
요코의 양어머니 이자 게이조의 아내 나쓰에를 보면 참으로 한심스럽기 짝이 없어 보인다. 아니 어떻게 남편을 두고 그것도 남편과 함께 근무하는 젊은 의사에게 마음을 둘 수 있을까. 나중에는 자신의 아들의 친구에게 조차도 은밀한 유혹의 추파를 던지는 모습 속에 나쓰에의 빙점은 비뚤어진 욕정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어느 누구나 사랑할 대상에 대한 자유가 있다. 그러나 사랑도 아름다운 모습으로 비춰지기 위해서는 분명한 경계선이 필요하다. 유부녀를 사랑한다는지 반대로 유부남에게 접근한다든지 하는 그런 모습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 욕정을 참지 못하는 모습에 불과하다. 나쓰에도 사랑하는 딸을 잃고 모든 어미처럼 가슴 아픈 나날을 보낸다. 잃은 딸을 생각하며 양녀로 데리고 온 요코를 진짜 딸처럼 키우지만 결국 범인의 딸이라는 잘못된 정보를 알게 되면서 증오의 대상으로 둔갑시킨다. 사람이라면 그럴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지만 나쓰에가 요코에게 보이는 악한 모습들은 지나쳐보인다는 느낌이 든다. 물론 내가 그런 입장에 놓인다면 나 또한 악독한 모습으로 변하지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없을 것 같기는 하지만.
저자 마우라 아야코는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빙점'들을 보여주고 있다. 사람들 각자가 내면 깊숙히 가지고 있는 약점, 이성을 잃게 만드는 그 지점들을 파헤쳐 보여주고 있다. 요코는 자신의 정체성이 범인의 딸이라는 정보를 접하게 되면서 그동안 살아왔던 모든 모습들을 놓아버린다. 친딸이 아니라 데리고 온 딸이라는 사실도 요코에게는 빙점이 될 수 없었다. 양엄마 나쓰에의 구박도 빙점이 아니었다. 친오빠처럼 여겼던 도루의 이성적인 접근도 빙점이 아니었다.
우리에게도 빙점이 분명이 있다.
나에게도 빙점이 있다.
한순간에 나의 마음을 얼어붙게 만드는 빙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