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얼마전 영주에서 지역신문 대표자 경북도회의에 참석했다가 어디로 가는 줄도 모르고 견학을 따라 나섰다. 풍기 시내를 지나 소백산 자락의 한 공장에 도착했고, 긴팔 남방 차림의 왠 젊은이가 나와 마중을 했다.
공장의 외관상 첫인상은 일반 공산품을 생산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별 대수롭게 생각하지는 않아 집중하지 않았는데, 잘못들었는지 ‘산삼세포를 분리해 대량복제’를 한다는 말도 되지 않을 것 같은 신기한 목소리가 들려와 무슨 소린가 집중하기 시작했다.
가슴이 떨려왔다. 울진신문을 16년째 발행해 오면서 나는 두 번 크게 떨었다. 한번은 정주영 현대그룹회장이 대선에 출마하여 울진을 찾아, 현 문화원 건물 군민회관 연설회장 안으로 들어가기 직전 선 채로 약 10분간 직격인터뷰를 할 때였다.
그런데 이 공장에서 지금 설명하는 사람이 산삼배양근을 대량생산하는 기술을 개발하여 시판에 들어가 금년 매출예상액이 1백억원에 달한다며, 식물의 대량복제 기술 수준이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데는 다시한번 감전되었다.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겐가? 산삼을 공장에서 인공적으로 생산하다니. 그것도 서울도 아닌 풍기 같은 시골에서. 그리고 대량생산을 하여 시판을 하고 있다니. 그렇다면 인류의 식량문제는 벌써 해결된 것 아닌가? 처음 듣고 믿을 사람은 없었다.
공장안으로 들어 갔을 때 대형탱크가 늘어서 있었다. 홍보 영상물을 약 10분간 보고, 탱크 위로 올라가 유리로 만든 창을 통해 탱크 안을 드려다 보니 거기에는 실제 산삼뿌리 같은 것이 가득히 자라고 있었다.
설명을 하는 사람이 그 기술을 개발한 손성호(48세) 박사 장본인이었다. 1백년에서~1백20년 된 산삼을 구입, 세포를 분리해서 전혀 오염되지 않은 1백미터의 지하수를 뽑아 올려 그 삼이 자생했던 자리의 흙을 가져와 분석한 성분들을 투입, 배양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공장에서 생산하는 산삼 성분과 실제로 자연상태에서 백년 묵은 산삼과 어떻게 유전적으로 그 성분이 같은가? 그것 또한 굉장한 의문이었다.
손박사는 배양실의 온도를 영상 2℃에서~23℃까지 올렸다가 내리는 온도변환처리 과정을 통해서 식물이 겨울과 여름으로 인식케 하여 연륜을 더 하게 만드는데, 이 방법으로 1주일에 1백년의 나이를 식물이 먹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서울대 미생물연구소에서 유전자 감식을 통한 분석에서 모삼과 유전자적으로 98.8% 동일하다는 결과를 얻었다고 밝혔다. 그리고 산송이 복제와 대량생산도 가능하고, 상황버섯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후 울진에 돌아와 만나는 사람마다 영주의 놀라운 산삼 공장 이야기를 했더니,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 ‘비트로시스’라는 회사 이름과 제품을 아는가 하면, 개발자가 손성호 박사라는 것을 아는 사람도 있었다.
나만 몰랐던가? 그러고 보니 어디에선가 ‘산삼배양근’이라는 드링크류를 먹어본 기억이 나는 것도 같았다. 그러나 그때는 무덤덤했다. ‘산삼’이라는 것은 신이 내린 영약이다. 아주 특별한 사람들과 관계가 있는 물건임으로 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고로.
그리고 ‘산삼‘이라는 인식이 있었다하더라도 워낙 짝퉁과 과대광고로 현혹하는 세상이니, 주니까 그냥 먹었을 뿐 더 이상의 관심은 없었다.
그러나 손박사를 만나고 나서 이러한 사실은 나와 마찬가지로 대부분의 울진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할 만한 이웃 동네 영주에서 일어나는 특보 뉴스감임을 확신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중에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회사와 제품에 대한 소개가 잘되어 있었고, 특히 그동안 매스컴에 보도된 기사들이 많았다. 역시 나는 울진에서 세상천지 돌아가는 사정을 모르는 시대에 뒤떨어진 꼰대에 불과했음을 뼈저리게 느껴야 했다.
견학이 끝난 후 바로 단독으로 잠시 손박사를 찾았다. 울진신문 창간 16년 동안 울진사람과, 울진과 관련이 있는 소식만 전해 왔는데, 처음으로 박사님을 저희 신문 지면에 모시고 싶다는 뜻을 밝혔을 때 흔쾌히 응락했다.
그는 합천 출신으로 가정이 어려워 자신을 특별히 아껴주던 지도교수(박용구 박사)의 배려로 겨우 경북대 농과대학을 졸업했지만 성적만은 수석이었다. 학부와 대학원을 졸업할때까지 6년간을 연구실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한귀퉁이 야전침대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대학원 과정에서 그는 서로 다른 두 식물체에서 원형질체를 분리하여 융합에 의한 제3의 식물체를 만들어 내는데 성공하여, 이를 국제 학술지에 발표한 것을 계기로 미국 아이오와 주립대에 장학생이 될 수 있었다.
91년 아이오와대에서 식물복제의 산업화 관련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아 92년 대구효성대학교(지금의 대구카톨릭 대학) 교수자리를 제의받았으나 여의치 않아, 산림청 산하 현 ‘산림과학원’에 임시직으로 취직했다.
운 좋게도 그는 이듬해 당시 김영삼 대통령에게 자신의 계획을 직접 브리핑 하는 기회를 얻었다. 당시 이보식 산림청장의 적극적인 추천이 있었다. 대통령께 “생명공학의 현재, 과거 그리고 미래에 대한 비젼을 제시했다.
이때 김대통령은 손박사에게 큰 신뢰를 가지고 격려하며, 연구원에 생물공학과를 설치토록 하고, 실험장치 설치비용과 연구개발비 등 무려 약 80억원을 지원해 주었다. 드문 일이었다. 손박사는 지금도 1년에 한차례 김대통령을 찾아 뵙는다고 한다.
여기서 박사는 3년간 연구에 몰두하여 세계적인 발명을 해낸다. 당시 식물의 소량 복제술은 이미 보편화 되어 있었지만, 대량복제 기술은 그가 처음 개발했던 것이다. 드디어 한국에서 세계 최초로 식물분야 생명공학 산업화의 발판을 마련하는 순간이었다.
당시 식물 체세포 배양에 의한 항암제 ‘택솔’ 생산기술 개발과 화훼, 채소분야의 대량복제 논문을 많이 발표하여 학계와 매스컴의 주목을 받고 있던 중이었다. 임시직으로 출발한 공직에서 그는 5년 만에 서기관급인 생물공학과장으로 초고속 승진했다.
정부는 그가 이룬 업적을 인정하여 93년 근정포장/ 94년 녹색상/ 95년 대한민국 특허대상(충무공상)/ 등을 주었고, 한국일보는 99년 “21세기 한국을 빛낼 21인” 중에 그의 얼굴을 빼지 않았다.
잠시 충북대 연구교수를 거쳐 2002년 자본금 30억원을 모아 김진영 영주시장의 행정적 도움을 받으며, 지금의 자리에서 산삼 배양근을 대량생산하여 판매할 벤쳐기업 (주) 비트로시스를 창업했다.
자신이 연구원에서 개발, 특허등록하여 국가에 헌납했던 식물 대량복제기술의 통상실시권을 다시 국가로부터 돈을 주고 사들였다. 회사를 차린지 1년만에 이론이 아니라, 실제로 소량이었지만 산삼근 배양 제품을 생산해 냈다.
94년 그는 20톤 규모 19기, 총 380톤 규모의 세계최대 규모의 자동화 식물 배양기를 직접 개발`제작하여 한달에 1톤 정도의 건조된 산삼근을 생산, 산삼의 대중화의 길을 열었다. 비트로시스는 현재 전국에 10군데의 총판과 1백여 곳의 대리점 판매망을 갖추었다.
그런데 이 배양기를 우량종자나 우량종묘 생산에 활용하면 획기적인 농업발전도 가능하다고. 예를 들어 현재의 규모의 배양기로 두릅 종묘를 배양한다면, 한참에 20억개나 생산할 수 있다고 한다.
이제 그가 주목하는 것은 산삼 배양근이 아니다. 산삼보다 부가가치가 더 높은 산삼의 사포닌 성분을 이용한 항암, 당뇨, 치매 치료의 의약품 개발이다. 이미 항암제는 개발을 완료하여 임상실험에 들어갔는데, 조만간 시판될 예정이다.
그간의 항암제는 부작용이 많았는데, 손박사가 개발한 산삼 사포닌 항암제는 부작용이 전혀 없고, 지금까지 개발된 항암제 중 치료효과 면에서는 단연 최고효과의 약제임이 임상실험을 통해서 밝혀지고 있다.
나는 또 인터뷰 마지막에 그가 남긴 말에 귀를 의심한다. 식물공학을 이용해서 자신이 인류의 에너지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했다. 이미 착상을 끝냈고 시험에 들어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임을 시사했다.
모 월간지는 손박사 인터뷰 기사에서 “ 또 다른 한국의 희망” 이라고 표제를 달았다. 그를 두고 틀림없는 말이다. 나는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의 최초 전파자가 되기를 바란다. 손박사와의 만남이 나의 16년 동안 지역신문을 만들어 온 인생에 있어서 가장 큰 의미가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요즈음 초등 5학년인 둘째 아들 놈을 보고 아버지의 소원이 있으니, 동양대학교 생명공학부 교수 손박사의 조수가 되라! 고 한다.
/ 발행인 전병식
첫댓글 ‘산삼세포를 분리해 대량복제’를 한다는 말도 되지 않을 것 같은 신기한 목소리가 들려와 무슨 소린가 집중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