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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무기자 스크랩 영화로 보는 한국전쟁① <포화속으로>- 포항여중전투
호박조우옥 추천 0 조회 94 15.06.30 23:1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어머니, 제가 오늘 죽을지도 모릅니다."
 

  

포스터 속의 한마디가 벌써 가슴을 아프게 합니다. '오늘 죽을지도 모른다'고 어머니께 고하는 저 문장은

2010년 개봉한 한국영화 <포화속으로>의 명대사이자, 실제 포항여중전투 당시 학도병 이우근의 수첩에서 발견된 부치지 못한 편지 중 일부입니다.
 

영화 <포화속으로>는 1950년 8월, 포항으로 남하하는 북한군과 이를 막으려는 국군 제25연대 및 제3사단 학도병 사이에 벌어진 전투인 '포항여중전투'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실제 벌어진 전투를 그려냈다는 점과 전쟁에 희생된 71명의 학도병을 소재로 했다는 점에서 개봉 당시 많은 관객들의 가슴을 울린 영화입니다.


먼저, 영화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한국전쟁이 발발한 이후 압도적인 화력으로 무장한 북한군은 파죽지세로 남한으로 진격한다. 더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남측은 연합군의 도착을 기다리며 낙동강 사수에 모든 것을 내걸고 남은 전력을 낙동강 전선으로 총집결시킨다.


이때, 포항을 지키던 강석대(김승우)의 부대도 낙동강을 사수하기 위해 집결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하지만 이제 전선의 최전방이 되어버린 포항을 비워둘 수는 없는 상황. 강석대는 어쩔 수 없이 총 한 번 제대로 잡아 본 적 없는 71명의 학도병을 그곳에 남겨두고 떠난다. 총알 한 발씩을 쏴보는 것으로 사격 훈련을 마친 71명의 소년들은 피난민도 군인들도 모두 떠난 텅 빈 포항에서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 채 석대의 부대가 다시 돌아오기만을 기다린다.

 

한편 영덕시 전투에서 혁혁한 공헌을 세운 인민군 766부대의 대대장 박무랑은 낙동강전선을 우회하여 포항으로 진격한다. 최강의 무기와 혁명정신으로 무장한 박무랑의 인민군과 오합지졸에 불과했던 71명의 학도병은 학교를 둘러싸고 공방전을 펼친다.


 


영화는 71명의 어린 학도병들이 극한의 전쟁 상황에서 느끼는 섬세한 감정과 고통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또한, 초반에 서로 다투고 싸움을 하던 학도병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전우애와 우정을 느끼게 되는 과정을 그려집니다.

특히, 유일하게 전투에 따라가 본 적이 있다는 이유로 중대장으로 임명된 장범(최승현)과 소년원에 끌려가는 대신 전쟁터에 자원한 갑조(권상우) 무리의 갈등과 화해, 우정은 관객들에게 감동을 선사합니다. 


 

영화와 실제 전투 사이에는 몇 가지 차이점이 있습니다.


 

1. 영화에는 국군 3사단이 낙동강 방어선으로 이동하기 위해 포항을 떠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으나, 포항전선 역시 낙동강 방어선의 일부로, 3사단은 포항을 떠난 적이 없습니다. 포항여중 전투가 벌어질 당시 3사단 병력은 영덕 인근의 장사동 해안에 포위되어 있었으며, 북한군은 수도사단과 3사단의 전투지경선을 파고들어 포항에 침입한 것입니다. 이후로도 3사단은 포항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2. 71명의 학도병 중에 "소년원 대신 입대"를 선택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3. 포항을 통한 북한군의 부산 진격 시도는 현장지휘관의 독단에 의한 것이 아니라 상부의 명령이었습니다.

4. 포항여중 전투는 정오가 아닌 새벽 4~5시경에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실제 한국전쟁 당시 상황으로 
들어가보겠습니다! 

1950년 8월 10일 오전 7시.

포항역에 도착한 71명의 '수도사단학도의용대'출신 학도병들은 임시 숙소로 지정된 포항국민학교로 이동했습니다. 이곳에서 한국군 제3사단 작전처 보좌관인 '김치련'대위와 만났으며, 이후 제3사단 후방사령부가 위치한 포항여자중학교로 숙소를 이동하였습니다.

 

오후 10시. 

학도병들은 M1소총과 개인당 실탄 250발을 지급받았고, 투표를 통해 중대를 편성한 이후 자정 무렵에 이르러 취침에 들어갔습니다.

새벽이 밝아오면 인민군이 쳐들어오는 상황에서, 학도병들은 잠을 이룰 수 있었을까요?

비장한 기운이 감도는 포항여중 숙소의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집니다. 


8월 11일 새벽 3시.

포항시내에 총성이 울렸습니다.


한국군 제3사단 후방사령부 지휘책임자인 사단인사참모 김재규 소령은

남은 사령부 병력을 이끌고 시내쪽으로 들어갔고, 학도병에게 사령부 방어를 지시합니다.

 

그리고 작전처 보좌관인 김치련 대위에게 행정요원 60여 명으로 편성된 2개 소대를 지휘하게 하여 학교 뒷산에 배치하는 한편, 일부 병력으로 사단 보급품과 기밀문서를 후송하게 하였습니다.

학도병들은 학교 울타리를 따라 제1소대는 학교 정문 우측부터 강당 측면까지, 제2소대는 정문 좌측부터 본관 측면까지를 경계했습니다. 
 

긴장된 상황이 이어졌습니다. 

새벽 4시.
소티재방향에서 녹색 신호탄이 발사되었습니다.

학교 정문 100m 전방에 소속 불명의 병력이 나타났습니다. 

당시 3사단 학도의용군 중대장 김용섭은 적군과 아군이 구분되지 않는 상황에서 암구호 질문을 고민하였으나 이내 시야로 들어온 병력이 인민군임을 판단하여 20m 거리에서 일제 사격을 했습니다.

빗발치는 총알 속에서 학도병들은 쓰러져갔지만 끝내 조선인민군 첨병대를 제압하였습니다.

 

새벽 6시.
조선인민군은 공격을 재개하였으나 실패하였습니다. 학교 뒷산에 배치된 한국군 제3사단 행정요원 2개소대는 인민군의 공격으로 30여명이 전사하는 피해를 입고 후퇴했습니다. 조선인민군 제5사단 제12연대는 오전 9시에 이르러 대량의 포격과 함께 공격을 재개하였고 15:00경에 방어선이 무너지면서 분산되었습니다.


 

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 아무리 적이지만 그들도 사람이라고 생각하니, 

더욱이 같은 언어와 같은 피를 나눈 동족이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하고 무겁습니다.

어머니, 전쟁은 왜 해야 하나요? 

이 복잡하고 괴로운 심정을 어머님께 알려드려야 내 마음이 가라앉을 것 같습니다.


....
어머니 저는 꼭 살아서 다시 어머님 곁으로 가겠습니다.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 찬 옹달샘에서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냉수를 한 없이 들이키고 싶습니다.

아! 놈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어머니 안녕! 안녕!

아, 안녕은 아닙니다, 다시 쓸테니까요, 그럼...

- 학도병 이우근의 수첩에서 발견된 부치지 못한 편지 중에서

 

포항여중전투는 오로지 학생들만으로 편성된 보병 제3사단의 학도의용군 71명이 동해안을 따라 밀고 내려온 북한 제5사단 및 766유격대에 맞서 포항시가를 사이에 두고 혈전을 벌인 전투였습니다.

총 71명 가운데 48명이 전사하는 막대한 희생을 입어 가면서도 학도병은 이곳을 끝까지 사수했습니다. 


오합지졸에 불과했던 71명의 학도병이 전쟁의 두려움과 고통 속에서도 목숨을 걸고 최후의 전선을 지켜낸 것입니다.


포항여중전투 이외에도 학도병은 '학도의용군'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전쟁 전반에서 맹활약을 펼쳤습니다. 학생의 신분으로 구국을 위해 국군으로 참전한 의용병. 그들의 용기와 희생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사진출처 네이버 영화 http://movie.naver.com/movie/bi/mi/photoView.nhn?code=51386&imageNid=6183249>





 

 

 
< 취재: 청춘예찬 대학생기자 김유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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