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1ljwVq2IVvA
마지막 멘트를 들어주시면 좋겠습니다.
1960년 4·19혁명으로 12년에 걸친 이승만 독재가 무너지자, 불교계에서는 이승만의 이른바 ‘정화 유시淨化諭示’로 종권 싸움에서 강제로 밀려났다고 여기고 있던 취처 측의 움직임이 새로운 분규의 불씨를 피우고 있었습니다.
혁명 직후인 5월 초부터 이미 본격적인 갈등이 불거져 신문에 “불교계에 소동 · 대처승들이 [부산] 대각사 점거”(동아일보, 1960. 5. 1.), “정변계기로 불교계 싸움 재연. 대처승들이 반격 · 사찰 운영권 내놓으라고 폭행까지”(동아 5. 3.), “대처승철수를 호소 · 비구승, 계엄사에”(동아, 5. 14.)와 같은 기사가 등장하였습니다. 이런 분위기가 몇 달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취처 측에서 서울지방법원에 비구 측의 종정 · 총무원장 등에 대한 ‘직무정지 가처분’ 신청을 내어 긴장을 고조시켰고, 앞서 ‘종헌 등 결의무효에 관한 판결’에서 패소했던 취처 측의 항소에 대한 11월 24일 대법원 재심 판결을 앞두고 위기감이 커질 수밖에 없었던 비구 측은 전국승려대회 개최를 결정하였습니다.
이 사진은 대법원 판결을 닷새 앞둔 11월 19일 비구 측의 결의를 내외에 천명하는 전국승려대회에 앞서 종로 안국동의 선학원에서 출발하여 서울시청 앞을 돌아, 김영삼 정권 시절인 1996년 완전 철거되어 이제는 사라진 중앙청 앞을 행진하는 장면입니다. “불법에 대처승 없다”고 쓴 펼침막 하나만을 앞세우고 있어서, 음향 장비를 갖춘 차량까지 동원되는 요즈음 시위와 비교하면 소박하게 보이지만 그들의 의지는 가볍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날의 시위에는 스님들뿐 아니라 재가 신도들도 동참하였고, 이튿날인 20일에는 구례 화엄사의 도명道明 등 일부 스님들이 “비구는 피로써 순교한다” ‧ “대처승은 회개하고 물러가라. 우리는 정법 위해 순교한다” 등의 내용의 혈서를 쓰고 순교단殉敎團 조직을 결의하였으며, 23일부터는 500여 스님들이 조계사 대웅전에서 단식에 들어가면서 교계 안과 밖, 특히 사법부에 단호한 의지를 전하고 있었습니다.
이날의 시위와 전국승려대회를 주최한 비구 측의 비장함은 “종권소송의 승패 여하를 막론하고 청정승려가 사원에서 물러나거나 대처식육帶妻食肉하는 속인들이 사찰에 침입하는 것을 전적으로 거절한다” ‧ “사법부에서 정의를 무시하고 대처식육하는 속인들에게 한국불교의 주도권이 넘어가게 하는 불법오판이 있을 경우에는 전국 비구 ‧ 비구니는 일제히 정의의 순교항쟁에 돌입한다” 등의 내용을 담은 결의문에서 잘 드러납니다.
전국신도 대표들도 결의문을 내어 승려대회 결의를 전폭 지지하면서 “왜식대처승제倭式帶妻僧制를 전적으로 부인한다” ‧ “비승비속非僧非俗의 대처중帶妻衆이 처자부양의 목적으로 종권과 사찰재산의 쟁탈을 위한 갖은 음모를 철저히 분쇄한다” 등의 결의로 비구승단의 뜻에 함께 하였습니다.
효봉曉峰 스님의 상자로 출가 생활을 했던 시인 고은은 ‘순교자의 노래-제2차 전국승려대회를 지내며’라는 시를 써서 새 날이 오기를 기원하는 마음을 이렇게 담기도 하였습니다.
‘오 홀로 빛을 기다리듯/ 기다리는 어둠이여 이제 이곳에 새이라./ … 이 온몸 이미 여흰(여읜) 뒤안에라도 이내 그 빛을/ … 오 이제 이곳에 새이라 어둠이여/ 오 이제 이곳에 새이라 어둠이여.’
그러나 이런 마음과는 어긋나게 24일 대법원에서 서울고법의 비구 측 승소 판결을 뒤집고 서울고법에 환송한다고 판결하면서, 비구승 400여명이 제지를 무릅쓰고 대법원 청사에 들어가 항의하고 그중 월탄 스님 등 여섯 비구가 할복을 시도하는 등 사태는 더욱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이어졌습니다.
오늘의 조계종이 있기까지 이와 같은 난관이 숱하게 많았지만 그때마다 대중의 지원을 받은 명분은 “불법에 대처승 없다”는 이 한 마디로 간단했고, 절대적으로 열세劣勢이었던 상황에서도 그 명분이 힘이 되고, 재가신도들과 일반 여론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명분名分을 내세우면 “그게 무슨 소용 있냐? 실리가 중요하지. …”라는 비판을 받기 쉬운 시절입니다만, 그럴수록 이 명분이 절실하고 한국 불교계의 거의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조계종에는 여전히 유효한 주문입니다. 명분은 도덕성과 정체성을 상징하니까요.
‘비승비속非僧非俗의 대처중帶妻衆이 처자부양의 목적으로 종권과 사찰재산의 쟁탈을 위한 갖은 음모를 철저히 분쇄한다’던 결의가 “다만 종권을 차지하는 구호에서 그치고 그 결의를 담았던 현수막이 사라지면서 함께 사라진 것은 아닌지?” 통렬痛烈한 자기 성찰이 있어야 더 밝은 앞날을 기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