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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더가 왕 앞에 나아감으로 말미암아 왕이 조서를 내려
하만이 유다인을 해하려던 악한 꾀를 그의 머리에 돌려보내어
하만과 그의 여러 아들을 나무에 달게 하였으므로.
무리가 부르의 이름을 따라 이 두 날을 부림이라 하고 유다인이 이 글의 모든 말과 이 일에 보고 당한 것으로 말미암아.
뜻을 정하고 자기들과 자손과 자기들과 화합한 자들이
해마다 그 기록하고 정해 놓은 때 이 두 날을 이어서 지켜
폐하지 아니하기로 작정하고. 각 지방, 각 읍, 각 집에서
대대로 이 두 날을 기념하여 지키되 이 부림일을 유다인 중에서
폐하지 않게 하고 그들의 후손들이 계속해서 기념하게 하였더라'(에스더 9:25-28)
[ JESUS WAVE ]
지저스웨이브는 나라와 민족과 열방을 향한 주님의 마음을
시원케 하기 위해 선교하는 통일한국, 제사장 나라의 꿈을 꾸는 자들이 외치는 부르짖음의 파도입니다.
이 파도가 죽은 자들 가운데 잠들어 있는 남한 곳곳의 교회를 깨우고 다이스포라 교회를 흔들어 깨워, 북한 우상숭배의 진을 무너뜨리고 만주와 연해주를 넘어 땅 끝까지 밀려갈 수 있도록 저희는
기도할 것입니다. 한민족을 깨울 파수꾼들이 더 많이 일어나
인간의 일이 아닌 하나님의 일을 도모하는 거룩한 대한민국이
재건될 수 있도록 동역을 부탁드립니다.
[김성욱 대표 약력]
연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 졸업
연세대학교 법과대학 대학원 석사/박사(수료)
미국 Faith International University graduate school(신학석사)
'한반도에 지저스웨이브가 온다' 외 저서 14권
현재 지저스웨이브 대표
https://youtu.be/EemBPJm_RuM?si=ENUFDRGSdc_AmRi6
<아직 장대에 달리지않은 하만의 10아들>
''역시, 이문열!''
*학창시절 김성욱대표님은 책을 아주 많이 읽었는데
이문열작가님의 작품은 거의 다 읽었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저역시 사춘기시절 음악만 아니라 문학에 푹 빠졌었는데
김성욱대표님처럼 저 역시
'이문열작가님이 쓴 소설'' 신작이 나오면
바로 학교 근처에 있는 서점에 달려가 구입 해 틈날적마다 읽어댔던 기억이 납니다
사춘기시절 저는 합창부활동 문학부활동을 겸해서 했던 기억납니다
합창부 활동도 하고 가을이면 교내 ''시화전'에 저의 詩도 전시되었었죠
한때 방송부 오디션도 봐서 합격해서 아주 짧은기간
교내 점심시간에
제 목소리로 교실마다 학생들이 음악듣도록 음악을 소개하고 DJ를 했던 추억도 있습니다.
음대진학을 목표했기때문에 방송부 활동 접고 합창부 활동에
더 치중했었죠
지금도 제 삶에 기회가 쥐어진다면
레디오에서 진행자로 활동하고싶을 정도로
방송진행자의 매력을 넘 잘알고있습니다
대학에선 대학축제행사와
과에서 학기말때마다 발표하는 작품발표에서도
제가 MC를 맡아 진행했습니다.
대학졸업후,
한때 드라마작가가 되고싶어
모 방송사 드라마작가과정 아카데미에 등록 해
열정을 쏟았을 때도 있었습니다
방송사마다 작품 공모에 도전했고 나의 실력부족으로 작품을
방송사가 선택 안해주더라구요
*재미나는 추억은 고교시절 저는 남녀공학 아니었는데 선배들이 주선해서 '첫미팅''단체미팅에 나갔어요 ㅋㅋ
상대학교에 남학생들은 ''의과대학'입학을
목표로한 범생이 학생들였고
저와 첫미팅 상대는 듬직하니 공부 잘하고
음악과 문학을 좋아해서 처음부터 저와 대화가 술술 풀렸죠
그남학생이 제가 학교서 시화전에 작품이 내걸렸다니깐
꽃다발을 들고 용감하게 저를 만나러 여학교 교정에 들어섰는데 그모습보고 짖궃은 여학생들이
교실 창문을 열고 그남학생향해 휘파람을 불러대고 ㅋㅋ
그래서 당황한 그남학생
운동장에서 넘어질 뻔했습니다.
제가 음대 진학하도록 레슨해주시던 교수님께서 음악회를 한다니깐
거기까지 와서 음악회 감상을 했던 그남학생
뚝심으로 공부 잘해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했고 저는 음대입학에 실패 재수를 했죠 ㅋㅋ
저와 첫미팅한 그남학생은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졸업 후
아주 실력있는 의사선생님이 되었습니다.
삶에 가끔씩 떠올리면 미소짓게 만드는 순수라는 이름의
아름다운 추억이 제뇌리에 이렇게 남아있습니다
<사춘기때부터 저의 이상형은 ''범생이''타입였죠>
그래서 제가 한동훈장관님을 각별히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ㅋㅋ
학창시절부터 제 이상형은 한동훈장관님 같은 타입였죠 ㅎㅎ
제가 공부를 지지리도 못해서 제 이상형은 공부 잘하는
반듯한 남학생 모범생타입였습니다
<저는 지금 항암주사치료받고있고 그것도 부족해
척추와 다리문제까지 심각해서 스틱없이는 일상도 어려운 상황입니다>
하루에도 수십번 좌절하고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살다가도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하고!!
그래도 오늘 김성욱대표님Jesus Wave TV 시청하다가
학창시절 좋아한
'이문열작가님'' 인터뷰 내용통해
제 삶에 이렇게 아름다운 추억이 제 뇌리에
남아있어 그추억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을 수 있습니다
이것도 하나님께 감사해야죠
제 삶에 순수의 시대라는 그 추억에 아름다운 페이지를
오늘 열어볼 수 있었으니깐요!
이문열 “反국가세력 겨냥한 尹 대통령의 이념전쟁, 용기있고 위로된다” [송의달 LIVE] (chosun.com)
<이문열''反국가세력 겨냥한 尹대통령의 이념전쟁
용기있고 위로가 된다>
조선일보 송의달이 만난사람 인터뷰 이문열작가!
[좌파에 맞선 우파의 기둥]
그는 이른바 1987년 체제 수립 이후 자유우파(自由右派) 목소리를 확실히 내 온 논객형(論客型) 작가이다. 2001년 7월 김대중 정부의 보수 언론사들에 대한 세무 사찰(査察)을 보며 그는 ‘신문 없는 정부를 원하나’ ‘홍위병을 떠올리는 이유’라는 글을 발표했다. 이에 발끈한 좌파 진영은 그해 11월 그의 경기도 이천 집 앞에서 ‘책 장례식’을 열었다. 현존 작가에게 가해진 전무후무(前無後無)한 폭거를 이겨낸 이문열은 2016년 말 탄핵 국면 이후 우파 진영의 보루(堡壘)이자, 기둥으로써 좌파 진영의 창궐(猖獗)에 맞섰다.
윤석열 정부 출범 1년 4개월을 맞은 현 상황을 그는 어떻게 보고 있을까? 기자는 이런 궁금증을 품고 이달 21일 낮 경기도 이천시 마장면 장암리에 있는 ‘부악문원(負岳文院)’을 찾아가 4시간 가까이 이문열 선생을 만났다. 객사(客舍)를 겸하고 있는 문원에는 50대 작가 5명이 묵으며 창작 활동을 하고 있었다.
-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가?
“작년 상반기에 3개월 동안 심하게 앓았다. 사흘은 혼수 상태에 빠졌다. 기억력은 별 영향 없으나 그 이후 기력이 좀 떨어진 상태이다. 담배는 50세에 끊었고 요즘은 술도 자제하고 있다. 그러나 매일 유심히 세상사를 살펴보고 있다.”
그는 “한창 때에는 새벽 4시까지 작업하다가 오전 11시쯤 일어났으나 지금은 오전 2시쯤 취침해 오전 7~8시에 일어난다. 쓰고 싶은 작품은 몇 개 있지만 나이 때문인지 힘이 부친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고 했다.
- 작년 6월말 애지중지하던 물건들을 모아놓은 고향 영양(英陽)의 광산문학연구소가 불에 타 전소됐는데.
“뜻밖의 화재였다. 다행히 최근 경상북도와 영양군이 예산을 들여 재령(載寧) 이씨 문중(門中) 소유의 1300여평 문학연구소 부지를 공시지가(公示地價) 기준으로 매입해 갔다. 그 분들이 새로 문학관을 짓겠다고 하니 지켜볼 일이다.”
“<최악은 지났지만 아직 갈 길 멀다”>
- 요즘 시국(時局)을 진단한다면?
“지난 몇 시절과 같은 암담했던 최악은 지나갔고 이제 풀려가고 있는 중이라고 본다. 내 개인적으로도 좀 풀린 기분이 든다. 하지만 아직 욕심대로 다 된 것 같진 않다. 더 희망적, 아주 희망적이 되려면 아직 갈 길이 멀다.”
- 2022년 3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일찌감치 윤석열 후보를 공개 지지했는데.
“윤 대통령은 1980년대 서울대 법대 재학시절 5·18 광주민주화운동 유혈 진압에 대한 모의재판에서 검사역을 맡아 전두환 당시 대통령에게 사형을 구형(求刑)했었다. 그때부터 소문으로 나는 그의 이름을 들어 알고 있었다. 나름 오래 전부터 주의깊게 봐 왔다. 적어도 이재명 후보가 (대통령이) 되어서는 절대 안 된다고 보고 망설이지 않고 그를 지지했다.”
“선방하는 尹 대통령...점수로는 80점 이상”
- 취임 1년 4개월이 넘은 윤 대통령의 국정 운영 성적을 점수로 매긴다면?
“100점 만점에 80점 이상은 줄 수 있을 것 같다. 무엇보다 그가 내걸고 있는 큰 방향은 옳아 보인다. 정치 초보 치고는 무난하게 잘 하고 있고, 40% 가까운 지지율도 나쁘지 않다고 본다. 전체적으로 선방(善防)하고 있다.”
그의 이어지는 말이다.
“윤 대통령의 뚝심과 끈기, 과단성, 과감성은 인정할 만하다. 민노총 총파업 대응과 한미일(韓美日) 동맹 복원, 후쿠시마 오염처리수 대처 등에서 그러하다. 다른 어느 보수 대통령처럼 촛불 시위대에 밀리거나 처량하게 산에 올라가 눈물짓는 모습을 그는 보이지 않을 것 같다. 다만 치밀함이 약간 부족한 측면과 인사 풀(pool)이 좁은 점은 보완했으면 한다.”
- 요즘 우리나라 사회를 진단한다면?
“무엇보다 말[言]의 수준이 많이 떨어졌다. 소란스럽고 시끄럽기만 할 뿐 좋은 영향을 주거나 신뢰를 높이는 말이 사라졌다. ‘정자언야(政者言也)’라는 글귀도 있지 않나. 정치는 말이 사실상 전부인데….”
그는 “김대중 대통령 같은 이는 야당(野黨) 시절에도 책을 많이 읽어선지 ‘말을 아는’ 사람이었다. 지금 어느 야당 대표와 같은 잔인성, 표독성, 사기(詐欺)성과는 거리가 멀었다. 정치권 전체를 둘러 봐도 여·야 모두에 인물이 없다”고 했다.
‘좌파·진보가 곧 正義'라는 착각
- 작년 11월 모 월간지와의 인터뷰에선 “윤석열 대통령 당선으로 대한민국이 제도적으로 망하는 것은 간신히 막았다. 그런데 이게 원상으로 돌아가는 것은 거의 10년 안에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지금도 같은 생각인가?
“제가 볼 때 사회 분위기상 우리나라의 절반 이상 왼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자기가 좌익(左翼) 활동하는 줄 모르면서 좌익 노릇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다. ‘좌파·진보가 곧 정의(正義)’라고 자동입력돼 있다는 느낌까지 든다.”
- 사회 전반의 좌경화(左傾化)가 심각한 것 같다.
“나이 든 기성 세대라서 그런지 몰라도 우리나라는 지금 극렬한 간첩 활동만 아니면 좌익에 대해 굉장히 관용하는 사회가 됐다. 예전에 골수 좌익만 하던 발언을 지금은 우리가 예사롭게 듣고 대하는 세상이다. 전체적으로 국민들이 너무 (좌파와 전체주의 위협에) 둔감해져 있다. 그러니 우파적 생각에 투철한 사람들은 더 외골수가 된다. 전체적으로 좌·우파가 극단으로 갈리고 있다.”
“좌파와 균형 이루려면 우파 더 대동단결해야”
- 좌파와 우파의 균형을 맞출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무엇인가?
“지금 우리 시대에선 우파(右派) 노릇을 하는 게 솔직히 갑갑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윤석열 대통령이 북한의 주체사상을 믿는 좌파들을 반(反)국가 세력, 전체주의자라며 이념 전쟁을 벌이고, 자유민주주의 성향을 분명히 하는 것은 위로(慰勞)가 되고 용기있는 행동이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자유우파 세력이 작은 의견 차이와 갈등은 접고 큰 차원에서 마음을 모아 대동단결해야 한다.”
- 문재인 정부 5년은 어떤 시대였는가?
“그때부터 언어, 말이 상하기 시작했다. 또 전체주의(全體主義)화가 진행되고 북한에 대한 경계심이 허물어진 시대였다. 전체주의화는 부지불식(不知不識)간에 사람들이 거의 감지하지 못하게 이뤄졌다는 점에서 더 심각하다.”
이문열 작가의 아버지는 일제 시대 동경(東京) 농대(農大)를 졸업한 엘리트였다. 그러나 해방후 좌익 활동을 하다가 6·25 전쟁이 발발한 1950년 9월 홀로 월북했다. 이문열 작가의 본명은 ‘열(㤠)’인데, 1948년 출생한 아들에게 아버지가 ‘열렬한 사회주의 투사가 돼라’며 붙인 것이다. 어머니와 이 작가를 포함한 5남매는 ‘빨갱이 가족’이란 딱지를 붙인 채 살았다. 이 작가는 1979년부터 이름 앞에 ‘문(文)’자를 추가해 이문열이라는 필명을 쓰고 있다.
“북한에 대한 한국의 우위는 ‘자유’”
- 아버지에 대한 콤플렉스랄까, 여러 감정이 있었을 것 같다.
“젊은 시절에는 일부 그랬을 수 있으나 지금은 그런 느낌이 전혀 없다. 내 스스로 그동안 완전한 자유시민(自由市民)이 됐다는 확신이 든다.”
그는 “북한에 대한 한국의 문화적 우위를 꼽는다면 단연 자유(自由)”라며 이렇게 말했다.
“남북한 교류 건으로 북한 인사들을 만날 때마다 그들이 자유가 박탈된 나라에 살고 있다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70년 넘게 자유민주 진영에 속한 대한민국에는 자유와 민주라는 현대 문명의 가치가 축적돼 있다. 자유에 관한 한 우리는 확실히 북한에 대해 우위에 서 있다. ‘한국이 미국의 졸병(卒兵)’이라는 식의 시각에도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 그런데 우리나라 문화예술계는 좌파 진영 세상이지 않나?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다. 내가 많은 작품을 내고 활동했지만, 좌파 진영 문예지인 ‘창작과비평’과는 무관하게 보냈다. 내 작품이 32개국에 25개 언어로 번역돼 팔리고 있지만, 그들이 수십 년동안 나를 거론조차 않고 있어서다.”
문학 소멸할지 모른다는 걱정 들어”
- 그런 점에 억울하거나 서운하지 않는가?
“꼭 그렇게 억울하게 생각하지는 않는다. 김지하를 비롯해 그쪽의 상당수 사람들과는 잘 지냈다. 항상 문제는 자주(自主)라든가, 평등, 민족을 내세우는 일부 바람잡이들이다. 그렇게 악다구니질할 필요 있을까 싶은데 그런 걸 앞세워 색칠한 깃발 들고 나서는 사람들 때문에 문제가 된다.”
그는 “지금 좌파 진영에서도 그들이 특별히 내세우는 작가가 안 보인다. 제대로 활동하는 문학 단체도 없다”며 “전체적으로 이러다간 글로 하는 시대, 즉 문학이 소멸하는 거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든다. 이로 인해 우리 사회에서 생각하는 힘이 파편화하고 있다”고 했다.
- 후배 작가들에게 조언한다면?
“두 가지다. 시대는 변해도 문언(文言·글과 말)은 패배하지 않는다는 말을 먼저 하고 싶다. 우리나라는 세계적인 문언의 나라이니 거기에 대한 믿음을 버리지 말라. 또 하나는 우파 작가라고 크게 떠들어 댈 필요는 없지만 각 사안에 대해 우파적 논리로 당당하게 나서면 어떨까 한다. 왼쪽 날개로만 새가 날 수 없듯, 세상에 우파도 꼭 필요하다.”
이 작가는 그러면서 “우리나라의 20~30대는 50~60대와 크게 다르다”며 이렇게 말했다.
“우리 사회에서 좌파적 유행이 쉽게 사라지진 않을 것이나 20~30대는 태어날 때부터 자유(自由)를 체화(體化)한 세대이다. 좌파는 어느 정도 갈 때까지는 괜찮게 보이지만 자기의 빛이나 본래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 꼭 있다. 자유가 몸에 밴 이들을 좌파로 만드는 일은 쉽지 않다. 이들은 반공(反共) 교육을 받은 세대가 아니다. 최근 우파 전향을 선언한 50~60세대가 제법 된다. 주사파(主思派)가 우리 사회에 깊은 영향을 미치진 못하는 것 같다.”
- 그런 점에서 희망을 가질만한가?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사(史)가 1970년대부터라도 해도 50년이 넘는다. 우리가 겪은 군부 독재는 얼마나 가혹했나? 우리가 쟁취한 자유에 대한 경험도 세계적으로 흔치 않다. 그런 우리가 최소한 싸구려 민주주의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세계 인류사적으로도 최상위 30% 안에 든다. (대학 진학률이 70%대인) 우리나라의 교육 수준은 세계적으로 높다.”
“내년 4월 총선은 5% 차이 박빙의 대결”
- 2003년 한나라당 공천 심사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내년 4월 총선을 전망한다면?
“이겨도 5%, 져도 5% 차이로 승패가 갈리는 진짜 박빙(薄氷)일 것이다. 윤 대통령과 여당은 여러 고비를 잘 극복해야 지금보다 좀 올라갈 수 있다. 윤 대통령에겐 자신에 대한 믿음이랄까, 뿌리 같은 게 있어 보인다. 그래서 야당에게 쉽게 당하지만은 않을 것 같다.”
이 작가는 그러면서 “정책으로 ‘우파가 잘했다’ ‘좌파 정권 보다 지금 정권이 더 낫다’는 거를 증명하고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용서와 조화의 세상 언젠가는 오길”
-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한 월간지에 자전적 대하소설 <둔주곡(遁走曲) 80년대>를 2017년 시작해 1980년 5월 직전까지 다루다가 2018년 연재를 중단한 상태이다. 이걸 다시 이어 완성하는 일 등 몇 가지 있다. 그런데 작년에 크게 앓고 난 뒤로 글을 제대로 쓸 수 있겠다는 자신(自信)이 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