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의 人魚]
종각 앞에서 기다리고 섰을 옛날의 애인 백연숙과 광교 다리에서 우연히 만난 약혼자 은주와 ─ 이 두 사람의 여인 사이에서 오지도 가지도 못하고 영훈은 우두머니 서 있었다. 거리가 멀기나 하면 또 모르거니와 종각과 광교 다리는 지척 지간이다. 한은주는 어딘가 다소 미심한 표정으로 종각 쪽을 핼끔 바라보며
『정말 누굴 만나려는 거 아냐요?』
『글쎄 만나긴 누굴 만나?……』
아까는 혀끝이 무의식적으로 돌아 주었지만 이번은 의식적이다. 일단 부정했던 말을 새삼스럽게 인정하기가 어쩐지 싫었다.
『다소 수상하긴 하지만 관용하지!』
은주의 표정이 다시금 평온해졌다.
『관용을 하다니……무슨 말인데……?』
다소의 불안을 느끼며 영훈은 물었다.
『관대하게 용서한다는 말, 모르세요?』
『죄 없는 사람을 용서한다는 법두 세상에 있었나?』
『죄가 없음 다행이지만 죄가 있어두 용서를 한다는 밖에……』
『오늘은 또 만나기가 바쁘게 왜 자꾸만 죄인 취급이야?』
『글쎄 죄인이라두 용서를 함 되잖아요? 엄벌주의 보다 관용주의가 결과로는 언제든지 효과적인 걸요』
『허어, 이러다간 정말로 죄인이 되구마는 걸!』
고영훈은 다소 초조한 눈동자로 또 한번 멀리 종각 쪽을 후딱 바라보고 나서
『어쨌든 은주는 명랑해서 좋아.』
『난 영훈씰 만남 명랑해지는 버릇을 가졌으니까요. 나쁜 버릇이죠?』
『음 나쁜 버릇이야.』
물론 농담이었다.
그러나 영훈의 그러한 농담을 은주는 어째 그런지 종전처럼 농담으로는 받아 주지 않고 잠시 영훈을 말똥말똥 쳐다만 보다가
『인제부턴 그 나쁜 버릇을 고쳐야겠어요.』
은주의 표정이 약간 어두어졌다.
순간, 영훈은 어린애처럼 귀여운 일찰나를 약혼자의 그 어두어진 표정 위에서 불현듯 느끼는 것이다.
『저번에 지어다 주신 약을 잡수시구 어머니가 인제 아주 쾌차 하셨어요. 그래서 치사도 할겸 같이 진고개로 나가서 점심을 한턱 할려구 온 것이예요.』
『아 점심을……』
영훈은 가슴이 덜컹했다.
어머니의 병환이 쾌차하다는 것은 기쁜 소식임에 틀림 없었다. 그리고 은주와 식사를 나누는 것도 또한 유쾌한 일임에 틀림 없었다.
그러나 백연숙과의 약속을 어떻게 처리해야만 할 것인가?……영훈은 적지 않게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대문 쪽에서 전화를 걸었으니까 자기처럼 빨리 오지는 못했을 백연숙을 영훈은 생각해 보고 있는데 은주의 다짐이 다시 튀어나왔다.
『점심 아직 안 하셨죠?』
『아, 아직……』
『제가 점심 사 드릴테예요. 영훈씨가 좋아 하시는 오이스터·후라이와 맥주 한 병……』
『아, 고……고맙소. 그런데……』
마음의 당황을 보이지 않으려고 영훈은 일부러 밝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왜 그리 표정이 크세요? 암만 해두 다소는 수상한 걸요?』
방글방글 웃어 넘기면서 은주는 힐난을 하여 본다.
그러나 방글방글 웃고 있는 그 얼굴 한 껍질 밑에는 종각 앞에서 영훈을 기다리고 있을 그 어쩐 미지의 여자와 열심히 씨름을 하고있는 또 하나의 심각한 얼굴을 은주는 분명히 자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한은주는 오늘의 약혼자 고영훈이가 이처럼 당황하는 이유를 빤히 알고 있었다.
은주가 오늘 영훈을 데리고 진고개로 나가서 점심을 한턱 하겠다고 생각한 것은 벌서 한 주일 전부터 품어 온 달콤한 플랜이었다. 그리고 바로 어제가 은주의 월급날이다. 그래서 오늘은 아침부터 명랑한 기분으로 출근할 수 있었던 은주였으며 오정 때까지의 몇 시간을 지극히 행복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던 은주였다.
열한 시 반쯤 되었을 무렵에 은주는 「신여인」사에 전화를 걸었다. 그랬더니 만나려는 영훈은 나오지 않고 그대신 능글맞은 굵다란 목소리가 튀어 나오면서 하는 말이
『아, 인제 방금 당신을 만나러 나갔답니다. 하하하……』
하고 지극히 유둘 유둘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오지 않는가. 그래 은주는 영문을 모르고
『네? 저를 만나려구요?……』
하고 물었더니 그 기름끼가 뚝뚝 흐르는 것 같은 능글능글한 목소리가
『왜 이러십니까? 아니, 고새를 못 참아서 또 걸었군요! 하하하……종각 앞에서 만나자구 지금 막 뛰쳐 나갔답니다요. ── 쳇, 오늘은 아침부터 신세가 왜 이리 따분할가?……』
『네? 뭐라구요?……』
『아하하……아니 올시다. 마지막 한 마디는 날 두고 하는 팔자 한탄입죠.』
그 순간 딸칵하고 전화는 끊기었다.
『종각 앞에서 그이가 어떤 여자와 만난다구?』
은주는 보르르 가슴을 떨었다. 은주의 안색이 해말쑥해졌다. 아침부터 명랑해졌던 고만큼 은주의 마음은 어두워졌다. 들어서는 아니 될 말을 은주는 들은 것 같았다.
『망할 녀석 같으니! 누가 절더러 그런 얘기꺼정 하랬나?……』
그 유둘 유둘한 목소리를 은주는 나무래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는 어쩌면 좋을가고, 요리조리 망서리는 습성을 은주는 갖지 못했다. 은주는 부리나케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양재점 「샹하이」를 뛰쳐나온 것이다.
『스톱!』
지나가는 택시 한 대를 잡아타면서
『종각 앞까지 대지급으로! 삼분에 감 요금은 배를 드려요!』
『오·케! 이분이면 넉넉하지요.』
사실 종로 삼가에서 종각까지는 이분이면 충분하다.
그러나 한은주는 딴 여자와 만나러 가는 영훈을 굳이 막아 보려는 심경은 아니었다. 어떤 종류의 여자인지, 그것이 은주는 알고 싶었다.
『고새를 못 참아서 전화를 여러 번 걸었다는 여자!』
그것이 은주는 궁금해 죽을 지경이다. 은주 이외에는 여자 교제가 하나도 없다던 영훈이가 아니었던가. 그래서 다소 괘씸도 했다.
『스톱!』
화신 앞에서 뛰어내리기가 바쁘게 은주는 토끼처럼 깡충깡충 종각 앞으로 건너갔다.
그러나 종각 앞에는 영훈도 보이지 않고 또 영훈을 기다리는 그럴 상 싶은 여자도 보이지 않는다.
『그만 놓쳤네!』
은주는 발을 동동 굴었다. 운전수에게 삼분의 여유까지 준 것이 후회가 났다.
『왜 일분동안에 가 달라고 그러질 못 했을가?……』
시간과 거리에 대한 자기의 관념이 다소 루우즈했던 것을 은주는 뉘우쳤다.
『에라 모르겠다!』
아침부터 지니고 있던 긴장이 탁 풀리면서 은주의 하이·힐이 페이브의 조악돌 하나를 톡 찼다.
『하는 수 없는 것은 하는 수 없는 것이지 뭐야!』
단념하는 데 있어서는 남보다 시간이 훨씬 덜 걸리는 은주의 성미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양복천을 재단하다가 가위질을 잘못하여 엉뚱한 데를 썩둑 베어 버렸을 때처럼 그렇게 간단히
『에라 모르겠다!』
고 단념해 버릴 수는 도저히 없는 그 무엇이 한줄기 젖가슴 밑에서 뭉클거리고 있는 것을 은주는 어쩌는 도리가 없다.
『행여나?』
하는 일념이 은주로 하여금 전자 길을 건너서 을지로 쪽으로 거닐게 하였다. 좌측 통행이고 보면 이편에서 우측통행만 하면 영혼을 혹시나 만날는지도 몰랐다.
『그렇다. 차가 너무 빨리 달려 온 것이 아닐가?』
거리와 시간에 대한 계산을 다시 한번 고쳐해 보면서 걸어가다가 마침내 영훈을 붙잡는 요행을 은주는 가졌던 것이다.
『왜 무슨 볼일이 있어요?』
『아니……』
『그럼 점심 먹으러 가요. 맥주 한 병이 모자른 담 두 병 사죠. 어제가 월급날인데……』
『고맙소.』
『고맙다는 말을 벌써 몇 번이나 하세요? 이담 결혼을 해 가지구 조반 상만 들여 옴 아마 절두 하겠네요?』
『아, 하하핫……』
『필요 이상으로 감사의 뜻을 표하는 건 다 이유가 있어서 하는 거라구……그렇지만 이건 제 얘기가 아니구 우리 집 마담의 교훈이래요.』
『으와. 하핫……』
영훈은 찔렸다.
『왜 실없이 웃기만 하세요? 여자배(女子輩)한테서 점심 얻어 잡수시는게 쑥스러워서 그러세요?』
그만했으면 실토를 할 것 같은데 그냥 바재고만 있는 영훈이가 은주는 저으기 괘씸해졌다.
괘심해져서 휙 돌아서 버려야만 은주의 포오즈가 서기는 했다. 그러나 은주의 총명은 돌아서 버린 후에 있어서의 감정의 처리가 도리어 문제여서 최후의 순간까지 유화 정책을 쓰기로 작정을 한다.
『그래 어딜 가시댔어요?』
『나 누구 좀 만날가 하구……』
『바쁜 일 아님 점심 잡수시구 가세요.』
『아, 조금 바쁜 일인데……』
『삼십 분임 될텐데 뭐가 그리 바쁘세요?………적어두 약혼잔데! 약혼자에게 삼십 분의 시간두 못 주세요?』
은주는 마음속으로 깨보숭이 처럼 고소한 웃음을 향락하면서 영훈의 애정을 정밀히 계산해본다.
『은주는 무슨 말을 그처럼……? 삼십 분이 아니라, 세 시간이라고 무방한데……』
『정말?……』
은주의 눈이 반짝하고 빛났다.
『언제 내가 거짓말을 했소?』
『그럼 돌아서 봐요.』
『어디루 돌아서요?』
『저리루……진고개 쪽으로……』
『자아, 돌아섰소.』
영훈의 후리후리한 키가 은주의 눈앞에서 휘익 돌아섰다.
『인제 걸어가 보세요. 성큼성큼, 뒤는 절대로 돌아보아서는 아니 돼요!』
『자아, 이렇게 말이오?』
영훈은 도로 을지로를 향하여 성큼성큼 걸어갔다.
『한 번이라도 뒤를 돌아 봄 맥주는 안 살테예요.』
『오·케!』
『베리·나이쓰!』
죄수를 앞세운 여간수 모양 은주는 영훈의 발꿈치 뒤로 또박또박 걸어갔다.
은주는 흡족하다. 행복이란 이런 걸 두고서 하는 말인가?……역시 임벌주의 보다는 관용주의가 승리를 하는 것이라고, 자기의 총명을 은주는 생각한다.
『하나, 둘, 셋, 넷……』
『그건 뭐요?』
그러면서 영훈이가 돌아다 보려는 것을 은주는 두 손으로 막아 바로 세우며
『돌아다 봄 안 돼요! 뒤에는 나밖에 없으니까 돌아볼 필요는 조금도 없어요. 내 신호에 보조나 잘 맞추세요. 자아, 하나, 둘, 셋, 넷……』
그 말에 영훈도
『하나, 둘, 셋, 넷……하나, 둘, 셋, 넷……』
했다.
『부부는 보조가 잘 맞아야만 한다구 지금부터 연습을 해 두는 거야요.』
『은주는 귀여워!』
뒤는 못 돌아보고 영훈은 말했다.
『암, 두말할 필요조차 없죠.』
『인어(人魚)같애. 거리를 헤엄쳐 다니는 귀여운 인어 ─』
『그리구 때때로는 죄수를 몰구가는 여간수가 될 수도 있는 인어 ─』
『응?……』
『안돼 안돼! 뒤를 안 돌아다 보아도 말소리는 들릴텐테……』
인어는 죄수를 또 바로 세워 놓았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한은주 자신은 걸핏하면 뒤를 돌아다 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종각이 점점 멀어 짐을 따라 은주의 행복감은 차츰차츰 더 크고 더 화려하게 부풀어 올라가고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