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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현대사회 ‘체계와 생활세계’로 양분…‘계몽의 옹호자’ 자처
김호기 |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위르겐 하버마스의 ‘의사소통행위 이론’
비판이론의 전통을 이어받은 프랑크푸르트학파 2세대 대표주자인 위르겐 하버마스는 서구 지성사의 한 획을 그은 논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인간 이성이 지닌 긍정적 가능성을 높게 평가한 독일의 사상가이다.
사상은 논쟁을 통해 성숙하고 풍요로워진다. 논쟁은 메마른 사상에 따뜻한 피를 돌게 해 설득력과 공감을 높인다. 전후 ‘사상 70년’에서 뜨거웠던 논쟁들 한가운데 서 있던 대표적 지식인은 독일의 위르겐 하버마스(Jurgen Habermas·1929~)다. 아도르노·포퍼·알베르트가 참여한 실증주의 논쟁, 가다머와의 해석학 논쟁, 루만과의 체계이론 논쟁,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비판 등 하버마스는 전후 주요 논쟁과 토론들에서 주역을 맡았다.
하버마스는 호르크하이머·아도르노·마르쿠제 등 비판이론 제1세대를 계승한 비판이론의 제2세대를 대변하는 이론가다. 동시에 그는 호네트·오페 등 비판이론 제3세대까지를 포함해 프랑크푸르트학파로 알려진 비판이론을 대표하는 철학자이자, 나아가 미국의 롤스, 프랑스의 푸코와 함께 전후 사상을 대표하는 사상가다. 사유의 깊이와 포괄성, 그리고 사회적 영향력을 고려할 때 하버마스는 20세기 전반 독일적 학문 전통을 대표해온 베버와 프로이트를 계승하는 위대한 사상가임에 분명하다.
1962년 교수자격 논문인 <공론장의 구조변동>을 출간한 이래 하버마스는 지식사회 안팎에서 큰 관심을 모은 저작들을 잇따라 발표했다. <인식과 관심>(1968), <후기 자본주의에서의 정당성 문제>(1973), <의사소통행위 이론>(Theorie des kommunikativen Handelns·1981),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1985), <사실성과 타당성>(1992) 등 그의 주요 저작들은 이 기획에서 모두 개별적으로 다뤄도 좋을 만한 문제작들이다. 이 가운데 하버마스 사상을 대표하는 저작을 한권 꼽으라면 그것은 <의사소통행위 이론>일 것이다.
■현대사회와 생활세계의 식민화
<의사소통행위 이론>은 2권으로 이뤄져 있다. 제1권 제목은 ‘행위합리성과 사회합리화’이며, 제2권 제목은 ‘기능주의적 이성 비판을 위하여’다. 이 방대한 저작에서 하버마스는 독일의 비판이론적 전통과 영미의 사회이론적 전통을 검토하고 재구성해 독자적인 이론을 제출한다. 그것이 ‘체계-생활세계’ 이론이다.
하버마스는 근대화에 따른 사회의 내부 분화에 주목해 현대사회를 행정체계와 경제체계로 구성되는 ‘체계’와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으로 이뤄지는 ‘생활세계’로 양분한다. 각기 독립적인, 그러나 상호작용하는 두 영역은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그 관계가 변화한다. 그에 따르면 근대화의 진전과 고도화에 따른 체계의 복합성 및 강제성의 증대는 생활세계를 위협하는 병리 현상을 야기한다.
이 병리 현상은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1) 체계의 과도한 발달이 생활세계의 일상적 실천을 위협하고 파괴하는 양상이 첫번째라면,
2) 두번째는 지식생산이 제도화돼 등장한 전문가문화가 시민들의 문화적 참여를 차단함으로써 초래되는 생활세계의 문화적 빈곤 양상이다.
하버마스가 진단하는 현대 서구사회의 위기는, 대량 실업·생태 위기와 같은 체계의 기능 혼란이 생활세계의 하부구조에 전가되는 것, 다시 말해 체계의 기능 상실이 상징적 재생산의 영역에서 혼란을 낳고 이것이 다시 의미상실·아노미·노이로제와 같은 정신적 병리 현상을 증폭시키는 것으로 구체화된다.
체계에 의한 생활세계의 이러한 병합 현상을 하버마스는 ‘생활세계의 식민화’로 개념화한다. 그리고 이 생활세계의 식민화에 맞설 수 있는 정치적 대안으로 환경·여성·평화운동 등과 같은 신사회운동들을 제시한다.
하버마스는 <의사소통행위 이론>을 통해 생산을 중시하는 마르크스주의, 기능을 중시하는 기능주의 사회학, 행위를 중시하는 현상학 등의 이론적 한계들을 넘어서려고 한다.
비판이론은 <의사소통행위 이론>에 와서 사회제도와 일상생활을 포괄하는 일반 사회이론으로 정립된 셈이다.
■하버마스가 현대 사상에 미친 영향
하버마스의 전체 저작들을 관통하는 문제의식은 후기 자본주의 시대인 현대사회에 대한 철학적·사회과학적 분석과 이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사회에 걸맞은 새로운 ‘규범의 재정초’(refoundation)에 있다. <의사소통행위 이론>이 규범의 재정초를 위한 이론의 재구성을 겨냥했다면,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은 이를 위한 사상의 재평가를 시도했다. 그리고 <사실성과 타당성>은 규범의 재정초를 위한 정치적 대안을 모색했다. 이러한 일련의 탐구는 그가 비판이론가답게 평생 이론과 실천의 변증법적 통일에 얼마나 충실했는지를 생생히 증거한다.
하버마스는 그와 함께 전후 사상 70년을 대표해온 푸코, 기든스와 자주 비교된다. 푸코가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적 기초를 제공한 탈구조주의자로, 기든스가 ‘후기 현대’로 불린 ‘제2 현대성’ 이론가로 알려졌다면 하버마스는 현대성, 즉 계몽주의의 옹호자를 자처했다.
하버마스에 따르면 문제의 핵심은 계몽주의의 실패가 아니라 이에 내재된 비판적 태도의 상실에서 찾을 수 있다. 계몽의 본질은 어떤 전통이라 하더라도 비판하고, 이 비판을 전유하여 더 나은 진리에 도달할 수 있는 가능성에 있다. 그가 제시하는 현대성의 과제는 그릇된 계몽에 대한 계몽, 다시 말해 이성에 대한 신뢰와 자기 제한성을 발휘해 정치적 억압, 경제적 불평등, 문화적 소외를 극복하는 것에 맞춰져 있다. 그에게 현대성은 ‘미완의 기획’이다.
돌아보면 지난 20세기는 현대성의 드라마틱한 시험대였다.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를 양대 축으로 하는 현대성은 자유주의와 파시즘, 복지국가와 신자유주의에서 볼 수 있듯 빛과 그늘을 동시에 드러냈다. 계몽주의는 여전히 미완의 기획인가, 넘어서야 할 과제인가. 현대 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이 문제를 제대로 탐구하기 위해선 그 출발이 역시 하버마스 사상에서 시작해야 함은 너무도 자명하다.
■한국어판 저작은
<의사소통행위 이론> 1·2권은 철학자 장춘익 한림대 교수에 의해 우리말로 옮겨졌다. 1996년 하버마스가 우리나라를 방문했을 당시 이뤄진 강연들은 사회학자 한상진 서울대 명예교수가 편집해 <현대성의 새로운 지평>이란 제목으로 번역했는데, 함께 읽어볼 만하다.
■1996년 방한해 7차례 강연…‘신사회운동론’ 국내서 큰 반향
1970년대 후반 이후 프랑크푸르트학파에 대한 소개가 이뤄지면서 하버마스 사상에 대한 국내의 관심은 높아졌다. 그의 책들이 번역되고 그의 이론을 탐구한 논문들이 발표됐다. 특히 철학과 사회학 분야에서 하버마스 사상은 석·박사 논문들이 즐겨 다룬 주제의 하나였다.
하버마스에 대한 관심이 절정에 이른 것은 1996년 4월 그가 우리나라를 방문했던 전후의 시기였다. 한상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그가 국내에서 강연한 글들을 모아 <현대성의 새로운 지평: 하버마스 한국 방문 7강의>(1996)를 출간했다.
‘나는 왜 시민사회론을 주창하는가: 사회학적 성찰’, ‘민주주의의 세 가지 규범 모델: 언술정치를 향하여’, ‘유럽 국민국가에 대한 성찰: 세계화의 도전과 응전’, ‘현대성의 구상과 비판적 논쟁: 신고전주의의 관점’, ‘칸트의 영구평화론과 인권: 세계시민사회를 향하여’, ‘철학은 오늘날 무엇을 해야 하나: 지식인 역할의 재조명’의 강연 제목들이 보여주듯 한국에서의 강연들은 그의 이론적·실천적 관심을 망라했다.
당시 하버마스 사상에 대한 국내 연구들은 계명대 철학연구소·이진우가 편집한 <하버마스의 비판적 사회이론>(1996), 장춘익 외의 <하버마스의 사상: 주요 주제와 쟁점>(1996), 정호근 외의 <하버마스: 이성적 사회의 기획, 그 논리와 윤리>(1997)에 집약돼 있다.
하버마스 사상 가운데 국내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한 이론은 신사회운동론이다. 하버마스는 생활세계의 식민화를 저지하고 방어하는, 그리하여 합리적이고 실천적인 의사소통을 제도화하려는 일련의 사회운동을 신사회운동이라고 정의한다. 이 신사회운동은 체계에 대항하는 잠재력의 성격에 따라 ‘해방운동’, ‘저항운동’, ‘퇴각운동’으로 구별된다.
여성운동과 미국 민권운동이 해방운동의 사례라면, 환경·평화·시민주도·녹색당·공동체 등의 대안운동들은 저항 및 퇴각운동에 속한다. 이러한 하버마스의 논리와 분류는 1990년대 이후 크게 성장한 우리 사회 시민운동을 분석하는 데 유용한 문제틀을 제공했다. 하버마스의 시각에서 볼 때 한국 시민운동들은 자율과 연대를 추구한 참여민주주의의 정치적 기획이었던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