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광서 목사(47). 그의 인생 경력은 남다른 데가 있다. 1974년 서울대학교에 입학해서 2학년 때인 1975년 '대통령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제명 당했다. 옥살이를 하고 나와 1977년 건국대학교에 입학했으나 과거 경력이 문제가 되어 1978년 입학허가가 취소되었다. 1979년 한국신학대학에 입학하고 1980년 '서울의 봄'을 맞아 서울대학교에 복학했다. 그러나 다시 5·18 하루 전인 1980년 5월 17일 '포고령 위반'으로 구속되어 세 달간 옥고를 치렀다. 감옥을 나오니 그를 받아주는 학교가 없었다. 한신교역과 2학년에 편입해 그때부터 모교회인 서울제일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1984년 다시 서울대에 복학해 수학교육학과를 졸업했으나 과거 경력이 문제가 되어 교사 임용을 받지 못했다. 1988년 목사 안수를 받은 그는 1994년 중국 용정에 선교사로 파송되어 경로원을 운영하다가 1999년 한국에 돌아왔다.
한국 현대사의 굴곡을 엿볼 수 있는 개인사이다. 그런 그가 이제는 정광서 목사가 아닌 '기사'로 불리고 있다. 올해 1월부터 정광서 목사는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장애인콜택시의 운전봉사자이다. 1999년 한국에 돌아와 동부교회에서 1년 간 부목사로 일하던 그는 1년 가까이 무직으로 지내다가 한달 동안 택시 운전을 했다. 그 때의 경험이 힘이 되어 지난해 말 서울시가 모집하는 장애인콜택시 운행수탁자 모집에 지원했고 지금은 하루 10시간 이상 서울 시내를 누비고 있다.
정광서 목사를 만나기로 한 것은 2월 8일 오전. 약속 장소인 천호역 지하주차장으로 가려는데 엘리베이터 앞에 부착된 게시판이 눈에 들어왔다. "이 엘리베이터는 장애인·노약자·시민이 함께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 별 것 아니라고 넘길 수 있는 짧은 문구였지만 장애인과 시민을 나누어놓은 그 구분법이 왠지 장애인에 대한 고정관념을 대변하고 있는 듯이 보였다. 게시판을 지나 지하주차장으로 들어서니 노랗고 커다란 택시 뒤로 정광서 목사가 환하게 웃음을 지으며 악수를 청했다.
현재 서울시에서 운영하고 있는 장애인콜택시는 모두 100대. 5개조로 나누어 운행하기 때문에 하루 중 운행하는 차가 가장 많은 시간의 경우 80대가 운영되는 셈이다. 오늘 정 목사의 운행 시간은 오전 10시부터 밤 10시. 다른 날은 10시간 운행을 하지만 운행 시간이 끝나도 콜이 들어오면 택시를 몰고 가다보니 보통 하루 11∼12시간은 운행한다. 장애인콜택시는 서울시가 처음으로 운영하는 제도이고 현재 부산에서도 도입을 추진중이다. 그러나 제도를 운영한지 한 달이 조금 지났기 때문에 아직 제대로 정착되지 못한 측면이 많다.
운전봉사자들에 대한 급여 문제만 해도 그렇다. 현재 서울시에서 택시당 매달 95만원의 보조금을 지원하지만 이것으로 40∼50대의 가장이 생활을 이끌어 가기에는 무리가 있다. '4대보험'이 해당되지 않아 신변 보장이 어려운 것도 문제다. 제도를 본격적으로 시행하기 전에는 운행 수입에 기대를 걸었지만 지난 한달 간 운행한 결과, 대부분의 기사들이 적자를 면치 못했다. 일반 택시 요금의 40% 정도에 해당하는 요금으로 LPG 값도 뽑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장애인을 돕겠다는 기사들의 봉사 정신을 훼손하지 않으려면 최소한의 생활은 보장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최초 선발된 운전봉사자 100명 중 30명 가량이 벌써 그만 둔 것은 가장 큰 이유가 생활 보장이 안되기 때문이다.
정 목사와 함께 천호주차장을 나서니 바로 콜이 들어온다. 서울 방이동에서 택시를 부른 사람은 윤봉덕 씨(51·시각 1급). 고불고불 골목길을 지나 윤 씨 집 앞에 택시가 섰다. 그의 목적지는 고덕동에 위치한 수영장. 윤 씨에게 장애인콜택시에 개선할 점이 있냐고 묻자 "운전 기사 중에 지리를 잘 모르는 분들이 있다"고 답했다. 목적지를 잘 몰라 길을 헤매면 요금도 많이 나올 뿐만 아니라 서로 마음이 불편하게 된다는 것. 그래도 일반 대중 교통을 이용하던 이전에 비하면 요즘은 천국이다. 과거에는 운전 기사가 무조건 반말을 해서 기분이 상한 적도 많았고 버스를 잡기 위해 뛰어다니다가 속이 상해 운 적도 많았다. 처음부터 장애를 겪은 것이 아니라 4년 전에 시력을 잃었기 때문에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는 것이 더욱 어려웠다.
윤 씨를 목적지까지 모시자마자 또 다시 콜이 걸려왔다. 이번 노선은 강동성심병원에서 남산까지. 두 번째 손님 박향숙 씨(49·시각 1급)는 시각장애인 문인(文人)모임에 가기 위해 택시를 잡았다. 박 씨는 차에 오르자마자 "이번에는 차가 빨리 와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그는 전화를 하고 한 시간이나 택시를 기다린 적도 있다고 했다. 서울시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서울에 400대의 장애인콜택시가 필요하다고 하는데 지금 운행하고 있는 택시는 겨우 100대이니 차가 잘 잡히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박 씨는 지방 장애인이 택시를 이용하지 못하는 현재 제도를 고쳐 서울 시민이 아니더라도 장애인이라면 누구든지 택시를 이용할 수 있게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시각장애인의 경우 안마사로 일하는 사람이 많은데 밤늦게 퇴근을 해서 택시를 타고 귀가를 하다보면 '버는 돈은 교통비로 다 나간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교통 요금 부담이 컸던 것이 사실이다. 그렇다고 전철이나 버스 같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윤 씨는 "장애인콜택시가 생긴 후 요금도 저렴하고 기사들도 친절해서 자주 이용하고 있다"며 "택시가 많이 증설되어 이용이 편리해졌으면 좋겠다"며 말을 맺었다
두 손님을 모시고 나니 어느새 시간이 정오가 훌쩍 넘었다. 점심을 먹으려고 식당을 찾는데 다시 콜이 들어왔다. 이번 행선지는 중앙대병원에서 목동아파트 단지까지. 손님은 1994년부터 뇌병변장애를 앓고 있는 분과 가족 2명이다. 일주일에 두 번은 병원에 온다는 이 가족은 이전에는 택시를 대절해 병원을 오가곤 했다. 오전 한나절을 빌리는데 드는 비용은 6만원. 비용도 비용이지만 휠체어에서 내리고 휠체어를 트렁크에 싣고 하는 과정이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장애인 콜택시에는 뒷부분에 리프트가 설치되어 있어서 오르내리기에 아주 편리하다. 가족 신영희 씨(60)는 "무엇보다 마음 편한 것이 가장 좋다"는 말로 장애인콜택시에 대한 소감을 밝혔다. 토요일 오후라 차가 막혀 도착지까지 40분 정도가 걸렸다. 요금은 5,100원. 이전에 비하면 양반이다.
1시 40분이 되어서야 오전 일이 끝났다. 점심을 먹자는 제안에 정 목사는 구청 지하식당이 싸고 맛있다며 양천구청으로 기자를 안내했다. 그는 지난해 라디오 방송을 듣다가 장애인콜택시에 대해 알게 되었고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지원을 했다고 한다. 계약서를 쓴 다음날 어느 교회에서 청빙이 들어왔지만 최소한 1년은 운전을 하겠다는 마음을 먹고 거절했다. 50대가 가까워오고 교회 자리 나기가 어려운 요즘 상황에서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택시를 운전하는 지금이 너무 행복하다고 말한다. 장애인들의 다양한 삶을 보면서 나중에 목회의 장이 허락되면 장애인들을 배려하고 사랑하는 목회를 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는 목회 자리가 없어서 쉬고 있는 목사들에게 가장 좋은 직업이 택시 기사라고 자랑을 늘어놓는다. 우선 목사들은 지리를 잘 알고 운전을 대부분 잘 하고 봉사 정신이 투철하니 택시 운전을 하기에 가장 좋다는 것이다. 자본이 필요 없고 취업과 이직이 자유롭다는 것도 장점이다. 더구나 운전을 하면서 만나는 다양한 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는 목회가 삶의 현장과 멀어지는 것을 막아주는 역할을 한다.
그가 한 말 중 두 가지가 머리에서 잊혀지지 않았다. "장애인이 편한 사회는 비장애인에게는 천국이다". "장애인의 활동성이 높아지면 그만큼 그들이 건강해지고 그러면 사회도 건강해진다." 장애인을 특별한 존재가 아닌 이웃으로 맞이하기 위해 가장 필요한 것이 있다면 장애인을 '일반인' 혹은 '시민' 범주에 넣지 않는 우리들의 고정관념을 깨는 일일 것이다. 그 고정관념을 부수기 위해 오늘도 정 목사는 서울 거리를 누비고 있다.
[시골에 살다보니 이동이 가장 어려운 문제로 다가옴니다.전국어디나 이렇게 장애인콜이 있읍 얼마나 좋을가요.시에서 운영하는 콜택시 넘 부럽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