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화공주의 청을 들어 세운 미륵사
지금은 폐사지로 남아있는 동양 최대의 절 미륵사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기양리에는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의 설화로 잘 알려진 미륵사(彌勒寺)의 터 ‘미륵사지(彌勒寺址)’가 있다. 미륵사는 백제 무왕 2년(601)에 창건되었다고 전해지며, 당시 백제의 절로는 동양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절이었다고 한다. 기록에 따르면 미륵사는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크게 번성하였으나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점차 쇠락한 것으로 추정한다. 미륵사지는 1962년에 사적 제150호로 지정하여 관리하였지만, 현재는 과거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다만 ‘미륵사지석탑(彌勒寺址石塔)’과 ‘미륵사지당간지주(彌勒寺址幢竿支柱)’만이 외롭게 남아 있을 뿐이다. 미륵사지석탑은 우리나라에 존재하는 석탑 중 가장 오래되었고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지만, 이것도 지나온 세월의 무게를 말하는 듯 많이 쇠약해진 모습이다. 특히 미륵사지석탑은 훼손 상태가 심각하여 2001년부터 수리를 시작해 2018년 7월에 보수 작업을 완료하였고, 2019년 4월 30일에 열린 준공식에서 복원된 모습을 공개하였다.
백제 무왕과 선화공주의 사랑이 깃든 미륵사 백제의 30번째 왕은 무왕이다. 무왕의 어머니는 과부로 홀로 집을 짓고 살던 중 못의 용과 정을 통하여 무왕을 낳았다. 무왕은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났으며, 도량이 넓은 아이였고, 집이 가난하여 생계를 위해 마를 캐어 팔았다 하여 마을 사람들은 그를 ‘마동’ 또는 ‘서동’이라 불렀다. 어느 날, 서동은 신라 진평왕의 셋째 공주가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경주로 갔다. 경주에서 만난 아이들에게 마를 나누어 주며 노래를 가르쳐 주었는데, ‘선화공주가 서동과 몰래 만나 정을 통한다’는 내용의 노래였다. 노래는 아이들에 의해 경주 전역에 울려 퍼졌고, 결국 진평왕의 귀에도 들어가게 되었다. 진평왕은 선화공주의 부정한 행실을 문제 삼아 먼 시골로 유배를 보냈는데, 왕후는 황금을 주며 노잣돈으로 쓰라고 했다. 선화공주가 길을 떠나는 도중에 갑자기 서동이 나타나서 모시고 가겠다고 했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으나 선화 공주는 서동을 믿었고 좋아했다. 후에 서동의 이름을 들은 선화공주는 자신이 서동의 부인이 될 운명임을 알고 서동을 따라갔다. 서동과 함께 백제에 도착한 선화공주는 왕후가 준 황금을 팔아 생활을 꾸리자고 했다. 그러자 서동은 웃으면서 “내가 마를 캐던 곳에는 이것이 산처럼 쌓여 있소.”라고 했다. 선화공주는 깜짝 놀라며, “이것은 죽을 때까지 부자로 살 수 있는 진기한 보물입니다.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다면, 부모님께 보내면 어떻겠습니까?”라고 했다. 서동이 좋다고 했지만, 문제는 산처럼 쌓인 황금을 보낼 방도가 없었다. 이때 용화산 사자사의 지명법사가 신통력으로 황금을 수송해주겠다고 했다. 지명법사는 신통력으로 선화공주의 편지와 황금을 진평왕에게 보냈고, 진평왕의 마음을 얻은 서동은 백제의 무왕이 되었다. 하루는 무왕과 선화공주가 사자사의 지명법사를 만나러 가는 길에 용화산 아래의 큰 못 속에서 ‘미륵삼존’이 나타났다. 두 사람은 수레를 멈추고 내려와 공손하게 절을 했다. 미륵삼존을 본 후 선화공주는 “이곳에 큰 절을 지어 주십시오, 그것이 제 소원입니다.”라고 무왕에게 말했다. 무왕은 공주의 소원대로 못을 메워 절을 짓고, 절의 이름을 ‘미륵사’라 하였다.
백제 무왕의 신념이 담긴 미륵사 미륵사에 얽힌 설화는 우리에게 「서동요」의 배경설화이며, 서동과 선화공주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로 기억되고 있다. 그러나 미륵사의 창건은 백제 무왕에게 있어 왕권 강화의 중요한 수단이었으며, 당시 백제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희망과 이상을 심어주고 싶은 백제 무왕의 신념이 담긴 이야기이다. 설화에서는 선화 공주의 부탁으로 미륵사가 창건되었다고 하지만, 2009년 미륵사지 석탑을 보수 과정에 발견된 ‘금제사리봉안기 (金製舍利奉安記)’에는 선화공주가 아닌 당시 좌평이었던 사택적덕(沙宅積德)의 딸에 의해 창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출처] 선화공주의 청을 들어 세운 미륵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