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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구 민교장이 보낸 메일입니다...국사연수 자료.
웹사냥을 하다가 아래와 같은 사연을 읽고 찾아가 보았습니다. 지하철 서현역 분수대쪽에서 석운동행 223번 버스를 타고 가니 판교신도시를 주욱 통과해서 산고개 터널을 빠지니 운중동이고 좀 더가니 정보통신대학원(안기부) 정거장에서 내리게 됩니다. 세상에 이런 첩첩 산골이 있을까? 오른쪽에 대형 산소가 보이는데 제2대 정종의 장남 신종군 이효백의 묘이고 거기서 100여미터 더 들어가면 인조 때 영의정이고 이괄의 난, 병자호란을 겪은 호종공신이며 삼전도 대청황제공덕비의 비문을 작성한 비운의 주인공 백헌 이경석의 산소가 있었습니다. 도토리만한 산밤을 한되박은 주웠습니다.
병자호란과 영의정 백헌 이경석
광해군은 선조의 후궁 공빈 김씨(선조보다 나이가 15살이나 더 ?았던 무수리 출신) 소생이었다. 명나라는 임해군을 빙자하여 조사관을 파견하고 광해군의 즉위를 인준하지 않았다. 화근을 없애기 위해 강화도에서 임해군을 사사했다. 그리고 엄청난 공물과 함께 특사를 파견하였으나 이번에는 적통 영창대군을 핑게로 광해군을 괴롭혔다. 이는 필시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인목대비와 김제남 부원군의 막후 공작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간신 이이첨등이 연산군을 충동한다. 이 과정에서 김제남은 역신으로 몰려 3족이 멸해지는 화를 입고, 인목대비는 폐출하여 서궁에 유폐되었으며, 결국 영창대군은 강화도에서 증살되고 만다.
동복형을 사사하고, 모후를 폐출하였고, 적통인 영창대군을 증살하는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으며 당시 실세였든 선조의 인빈 김씨 소생 능창군까지 죽이니 민심은 폭발했다. 충효와 인륜을 중시하던 이이, 성혼의 문하에서 수학한 이귀, 김자점,김류, 최명길,이괄, 신경진 등은 역모를 성사시켜 창덕궁으로 처들어가 광해군을 포박하여 인목대비에게 끓어 앉혔다. 인목대비는 광해군에게 13개항의 패륜을 조목조목 따졌고 광해군은 순순히 승복했다. 이에 인목대비는 광해군을 폐하고 인빈 김씨 소생 능양군으로 왕위를 승계하라는 교서를 내렸다. 제16대 인조가 옹립된 것이다.
반정공신이 책봉되었는데 이괄은 3등에 책봉된 것이 억울했는데 게다가 평안도병마절도사 장만 휘하의 부원수로 외직에 나가게 되었다. 이괄은 구사를 일으켜 한양을 점령하였고 인조는 황급히 공주 공산성으로 몽진하게 된다.
한성에서는 장만이 이끄는 관군과 아괄의 반군이 안산전투에서 격전을 치룬다. 이괄은 안산전투에 패하여 이천으로 퇴각하였다가 부하들이 이괄의 목을 베어 인조에게 바치니 난은 끝나게 된다. 이 와중에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후금(청나라)에서는 여진족이 침입여 임진강 이북을 점령한다. 이에 최명길, 장유를 보내 형제의 나라를 맺기로 맹약하고 화의를 성립시킨다.
후금은 만리장성을 넘어 명나라 북경을 압박하고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누루하치가 청태종이 되어 황제대관식을 하였다. 대관식에 참석한 조선 사신들에게 앞서 맺은 형제맹약을 폐하고 군신의 맹약을 강요하였으며 조선의 왕자와 척화론을 내세우는 신하들을 잡아 심양으로 보내라는 최후 통첩을 하였다. 그러나 인조는 이를 무시하였고 청나라는 처들어오니 이른바 병자호란이었고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40여일간을 버티다 스스로 삼전도에 나가 청태종 누루하치에게 무릎을 끓고 항복하게 되었다. 이래서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볼모로 하고 삼학사 윤집, 오달제, 홍익한 외 김상헌 등 척화론을 주장한 대신들이 심양에 잡혀갔다.
청태종은 삼전도에 대청황제 공덕비를 세울 것을 명령하였다. 인조는 이경전, 조희일, 이경석, 장유 4대신을 불러 간곡히 비문작성을 당부하였다.
청이 물러간 후 대청황제 공덕비를 세우라고 청태종이 강요
백헌 이경석(1595~1671)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이괄의 난때는 공주(公州)까지 그리고 병자호란때에는 남한산성까지 인조(仁祖)를 호종한다.. 그러나 조선이 남한산성에서 淸나라 황제에게 항복할 당시 삼전도 비문 (정식 명칭은 ... 大淸皇帝 功德碑) 즉, 항복문서를 쓰게 되어 비운의 주인공이 된다.
그는 그 碑文을 쓴 다음에 학문을 익힌 것을 한탄하며 一生을 보냈다고 한다. 그의 묘는 경기도 분당구 석운동에 있다.
치욕과 굴욕으로 얼룩진 병자호란 그리고 이 수모의 역사가 새겨진 삼전도비(三田渡碑)...
仁祖는 4명의 신하에게 비문 찬술(碑文 撰述)을 명령하지만 아무도 그 命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는다.
名分으로 사는 조선시대에 항복문서의 작성은 개인과 家問의 수치일 뿐 아니라 후대에까지 오명을 뒤집어 쓰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영의정 이경석이 작성하게 된다.그는 왜, 무엇을 위해 ?
삼전도비는 1639년(인조17), 청나라 태종이 조선 仁祖의 항복을 받고 자신의 공덕을 찬양하기 위하여 세운 전승비이다. 병자호란에 패하였지만 여전히 淸나라를 배척하고 明나라를 섬기는 분위기가 팽배한 조선...淸은 조선이 스스로 비(碑)를 세우게 하고, 明나라와의 단절을 강요하게 된다.
두개의 비(碑)가 나란히 서있다. 하나는 새 것이고, 또 하나는 글자가 전부 깎여 아무런 글이 보이지 않는 碑...누군가에 의하여 땅 속에 묻혀 있던 것을 후손들이 다시 세운 것이다.
삼전도비.... 이경석의 신도비보다 더한 굴곡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1637년 - 仁祖, 淸에 항복하며 삼전도 비를 건립
1895년 - 高宗은 치욕의 삼전도비를 강물에 버린다.
1916년 - 일본이 다시 세운다
1935년 - 일본, 보물로 지정.. 조선은 처음부터 속국이었다..라고..
1945년 - 광복 후, 이웃주민들 부끄럽다 땅 속에 묻어버린다
1963년 - 큰 홍수로 땅속에 묻혀있던 삼전도비 모습을 드러낸다.
그리고 치욕의 역사도 또한 교훈이라고 하여 다시 세우고
사적(史跡)으로 지정한다.
조선시대 선비에게 글이란 목숨과도 같은 것..
仁祖는 당대의 문장가인 4名의 臣下에게 비문 작성을 명령하지만 누구도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다.
이경전(李慶全)은 병을 핑계로 자리에 누워버렸고, 조희일(趙希逸)은 고의로 거칠게 글을 써서 채택되지 않도록 하였다.
결국 이경석(영의정)과 장유(張維=효종의 인선왕후 부친, 문장가)......두 사람의 글을 청나라에 보내지만 심한 질책과 함께 되돌아 온다. 장유의 글은 잘못된 인용문을 사용하였고, 이경석의 글은 너무 간단하였기 때문에 질책과함께 다시 작성하라고 되돌려온 것이었다.
결국 仁祖는 이경석을 불러 간곡히 부탁한다. 이경석은 국가를 위하여 개인의 명예를 희생할 것인가 ? 아니면 개인의 명예를 지킬 것인가? 조선을 뒤 흔드는 명분과 현실 사이의 갈등이었다.
연려실기술에 의하면 仁祖는 다음과 같은 말로 이경석에게 부탁한다. " 지금 저들이 이 비문으로 우리의 향배(向背)를 시험하려 하니 우리나라 존망이 여기에서 판가름 나는 것이다. 월(越)나라 구천(句踐)은 회계산(會稽山)에서 오(吳)나라의 신첩(臣妾) 노릇을 하였지만 끝내는 와신상담하여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공을 이루었다.
훗 날 나라가 일어 서는 것은 오직 나에게 달렸는데, 오늘 할 일은 다만 文字로서 그들의 마음(비위)을 맞추어 사세가 더욱 격화되지 않도록 하자는데 있는 것이다. "
王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던 이경석은 비문의 일부를 개찬하고는 자기에게 공부를 가르켜 준 兄 이경직(李景稷)에게 편지를 보내어 " 글 공부를 한 것이 천추의 恨이 됩니다."라고 썼다. 수치스러운 마음 등에 업고 백길이나 되는 어계강(語溪江)에 몸을 던지고 싶다...라는 그의 詩는 그의 고통을 잘 말해 준다. 그 당시에는 누구도 이경석을 비판하지 못했다. 누군가 했어야 할 일인 줄 너무나 잘 알기에......
그러나 훗날 이경석은 비문 찬술로 인하여 송시열과 그 제자들로 부터 수 많은 공격과 수모를 당하였으니, 그야말로 소절(小節)이 대의(大義)를 꾸짖는 격이었다.
이경석의 친필 글씨이다. 역지사지(易地思之)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라!
아마도 이 말은 이경석의 피 맺힌 절규이리라.....
이경석이라고 淸나라가 좋아서 굴복한 것은 아니었다.
영의정 이경석은 이조판서 최명길과 승려 독보(獨步)를 明나라에 밀파해서 조선과 명나라가 합심하여 중원을 위협하는 청나라를 공격할 효종의 북벌계획을 설명하는 밀사로 보냈다는 것만 보아도 이경석의 진의가 청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고 종묘사직을 보존하며 장차 병자호란의 치욕을 갚아주려는 워대한 뜻을 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인조실록에 따르면 조정에서 독보(獨步)를 밀파한 이유는 "조선의 세력이 곤궁해서 淸나라의 통제를 받는 이유를 설명"했다는 것이다. 이 때 이경석은 두문불출하면서 찾아 오는 사람도 물리치고 하루 종일 울었는데 , 가족들은 그 이유를 몰랐다고 한다.
만약 밀파 사실이 淸나라에 감지되면 국가가 흔들릴 사안이었다, 게다가 明나라는 " 이전의 허물(오랑케에게 인조가 항복한 것)은 거론치 않를 것이니 기어코 함께 청나라를 협공하자. "고 답사를 보냈다. 인조실록은 " 그 일이 비밀에 붙어져 사람들이 알지 못 하였다." 라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위험한 일이었다.
이경석이 74세 되던 해, 이경석은 현종으로부터 궤장을받는다. 궤장은 나라에 공이 많은 신하에게 하사하는 것으로 비문 작성 후, 실로 50년만에 이경석이 받은 것이다. 그 모습의 그림이 남아 있다.
그러나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은 이경석을 절의 없는 사람, 삼전도 비문을 지어 오랑케에게 아첨하고 부귀영화를 누린 소인배로 비하시켰다. 淸을 배척하고 明나라를 숭배하는 尊明排淸論者의 대표인 송시열은 그를 인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송시열이 주도하는 노론세력이 집권하면서 이경석은 계속 비닌의 대상이 되었고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한다.
상황이 영웅을 또는 역적을 만든다. 역사 앞에 개인은 무력 한것.....
이경석의 시(詩) ...... 청천탄야도 (晴川灘夜渡)
장하월흑우사사 長 河 月 黑 雨 絲 絲 청천강의 밤은 칠흑같고 비는 쉴새없이 나리는데
인어탄성공개시 人 語 灘 聲 共 漑 時 민심은 흉흉하고 물소리도 요란하다.
반야직장충신섭 半 夜 直 將 忠 信 涉 구국일념으로 야반에 이 강을 건너가네
차심수직구신지 此 心 誰 直 鬼 神 知 이 마음은 오로지 천지신명만이 알 것이네.......
조선 효종1년(1650), 청나라는 강화조약을 위반하였다는 구실로 문책하기 위한 특사를 의주(義州)로 파견한다. 孝宗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이경석은 자기가 책임을 지겠다며 자청하여 나섰다. 국운이 화급한지라 이경석은 밤길을 재촉하며 청천강(지금의 평안도)을 건널 때 지은 詩이다.
그 후 이경석은 효종의 북벌(北伐)계획에 모든 책임을 지고 약 1년간 義州 백마산성(白馬山城)에 구금되었다. 효종은 부왕 인조의 굴욕과 형 소현세자와 인질로 잡혀가 당한 굴욕을 갚아줄 북벌계획을 추진하고 있었고 이런 청나라를 응징할 계획은 친정파인 김자점이 역관 이형장을 시켜 청나라에 밀고하게 된다. 이 문제가 효종에게 비화되면 큰일 임으로 영의정 이경석이 추진한 일로 자진해서 책임을 덮어쓰기로 했고 그래서 청태종은 이경석을 평양근처 백마산성에다 구금시켜 버린다. 효종은 많은 조공물을 바치며 다시는 이경석을 관리로 쓰지않겠다는 각서를 써 주고 간신히 백마산성에서 이경석을 구해낸다. 이후 이경석은 안협현감으로 있는 이들 이철영에게 내려가 살면서 금강산을 비롯하여 전국을 유랑하며 한 많은 세월을 보내다 안협에서 별세하여 분당구 석운동에 묻힌다.
* 이 집안은 제2대 정종의 10왕자 德川君 李厚生의 후손
사진의 新宗君 李孝伯은 덕천군의 장남으로 명궁이라 30발을 쏘아 29발을 명중시켰다고 한다. 이성계를 도와 역성혁명을 일으켜 공신이 되었고 평소 분당구 석운동을 궁술연습장으로 썼는데 활시위를 당기다 갓끈이 끊어져 구슬을 잃었는데 그가 죽어 산소를 마련할 때 광중에서 그 구슬이 나왔다고 한다. 효성이 지극하여 이름을 효백으로 지어주었다고 한다. 이수광(지봉유설, 천주실의),이경직(이조, 호조판서, 명필, 묘는 남현동)- 아들 이정영(숙종때 좌찬성, 명필), 이광사(명필), 백헌 이경석(인조-효종때 영의정, 이경직의 동생, 명필, 소현세자, 효종이 볼모로 잡혀갈 때 세자의 선생으로 함께 따라가 수행하였음) -이건창(15세 장원, 암행어사) 등 정치적으로는 남인이고 학자풍의 가계로 저술이 많고 양명학의 뿌리를 내려 강화학파를 이루었고 정인보에게 전수된다. 다산 정약용 등 실학파의 등장의 밑걸음이 되었고 이수광의 지봉유설은 과학에 눈을 뜨게하고, 천주실의는 최초의 천주교교리 해설서로 유명하다
첫댓글 민교장님의 행적과 글 잘 읽었습니다.책임 지는 정승 영의정 이경석에 관한 글..삼전도비는 어디에 있나요? 글 윗부분중 광해군과 연산군이 같이 나와서 좀 의아합니다..명분을 거의 생명과 같이 여겼던 사람들도 있었지요...이 글을 쓰기 위해서는 연구도 많이 했겠습니다...잘 읽었다고 전해 주십시오...
삼전도비는 서울 송파구 가락동(가락농수산물센타 주변) 가락아파트에서 석촌호수쪽으로 약 500m 정도 가면 민가가 있는 길 옆에 있어서 풍산이 가 본 적이 있습니다....초라한 작은 공원이 있습니다...몇 번 땅에 묻었다가 새로 세웠다고 합니다......감추는 것이 옳은지 ? 알 수 없습니다.....그래도 역사를 바르게 인식시키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듭니다...........풍산
누군가는 꼭 써야 했을 항복문서를 어쩔 수 없이 이경석이 썼다고해서(인조에게 문서작성을 명령받은 신하 3명 중 2명은 이런 저런 핑게로 죽거나 거절하므로) 그를 비난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는 생각입니다. 누군가가 쓰지 않으면 인조가 죽고 그나마 나라의 간판을 내리는 것인데...오히려 사대주의와 무능의 극치 이씨왕조를 개탄해야하고... 명나라와 달리 청나라와 원나라(몽골)는 우리와 같은 조상이 세운 나라이기에 청황제가 명나라에 사대 맹종하는 이씨왕조를 응징하기위해 직접 원정에 나섰고, 인조를 남한산성에서 끌어내 중국교포 이성계왕조를 꾸짖고 인조의 무릎을 꿇게 한것이지요.
이런 응징의 내용을 담은 명나라의 역사서가 우리에게 전해지지않게 만든 것도 이씨왕조... 친일파 매국노... 이들의 후예들은 지금도 사회지도층에 남아 역사의 진실을 덮고있으니... 그래서 우리나라의 잃어버린 역사찾기가 어려우나 고노무현 정부 이후 뜻있는 재야 사학자들을 중심으로 역사의 진실을 밝히고 되찾고자 하는 활동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허락없이는 이씨왕조의 왕이 될 수 없었고, 중국에게 결재를 받아야 했고 조공을 바치고 했던 참담한 역사로 점철된 이씨왕조의 내용은 진정 보기싫습니다. 중국의 속국인 이조 역사는 교육자료로서 이용되기 만을 바랍니다. 여기 캐나다에서 외국인들을 만나면 우리나라가 중국과 같은 글자와 말을 하고있는 것으로 오해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중국 고사성어를 인용하며 말해야 지식인 대접을 받아서일까 아직도 지나치게 중국문자를 쓰고있고 부끄러운 이조역사를 지나치게 들먹이고... 바깥에 나와보니 한글전용이 왜 필요한가 하는 걸 절실히 느낍니다.
임금 옆에 상주하면서 일지를 쓰는 사관은 남한산성에 피신했던 당시 인조 행적에 대한 기록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는 겁니다. 기록을 했는데 없앤 것인지 알 수는 없으나 이조의 역사왜곡은 상상을 초월한다는데 이 이조역사를 맹신해선 안되겠단 생각이고, 후세에 사학자들은 당시 인조가 살아남기 위해 적과 내통하면서 엄청난 뇌물을 바쳤다고 말하는 게 정설로 돼 있습니다.
서특파원의 구구절절 맞은 말의 댓글 잘 읽었습니다....성의있는 댓글에 감사합니다.....역사 연수 잘 하였습니다...
그러니 그 비석 문구 썻다하여 친청파 라고 매도...오늘날 친일파 매도 하듯이...칭병하여 빠진 사람은 애국한 사람이 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