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딧세우스’의 집에 죽치고 앉아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 넌덜머리나는 구혼자들처럼 이 나라의 지겨운 여름 무더위도 늘 그랬지요.
근데 올해는 어쩐 일이래요?
8월 달력이 북~ 찢어지자말자 기승을 부리던 찜통더위는 언제 그랬냐는 듯 허겁지겁 철수해버리고 기다리던 가을이 짠! 하고 찾아왔네요.
몸도 마음도 가을 향기 묻어오는 바람 결에 말랑말랑~해지던 이달의 책은 이스마일 카다레의 ‘피라미드’입니다.
책 두께도 말랑말랑~~ 모옵~시 마음에 드네요.
오늘 독서토론회엔 열분이 참석하셨네요.
4,500년전 고대 이집트를 배경으로 삼고 있지만, 실상은 20세기 전체주의 독재 정권의 메커니즘을 예리하게 해부한 정치적 우화라는 점엔 참석자들 모두 이견이 없군요.
▸▸ 시작은 시큰둥, 그러나 책장을 덮는 순간 ‘대반전’
참석자들이 처음 이 책을 대했을 때의 반응은 한마디로 시큰둥, 기대zero였으나 책장을 넘기면서 대반전이 일어났다는 감상평이 쏟아지네요.
권력 유지를 위한 메카니즘과 음모, 독재.. 이런 주제들은 프로파간다, 파시즘을 비롯해 독토에서 숱하게 읽었던 주제라 심드렁하게 책을 집어들었는데 마지막 책장을 덮는 순간, 거대하고도 투명한 피라미드가 내 안으로 쑥 들어오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는 최모교수님의 고백,
대릉원 뷰가 걸출한 경주 오아르 미술관(카페)에서 기대없이 이 책을 펼쳤는데
너~~~무 재미있어서 시간가는 줄 몰랐다는 수*쌤의 고백.
책을 집어들 때 가졌던 선입견이 산산히 부서져버리고, 참석자 모두가 우화 형식이 주는 기막힌 통렬함에 포로가 되어 버렸네요.
▸▸ 블랙 유머와 뼈 때리는 통찰의 매력
작가의 유려한 문장력,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곳곳에 숨겨진 유머와 위트에 대한 찬사가 이어지네요.
참석자들이 꼽은 카다레식 블랙 유머의 명장면들을 볼까요?
- (음모와 공포로 인해) 수도는 무거운 침묵 속으로 가라앉았다. 사람들이 얼마나 입을 열지 않았던지, 그런 추세로 가다가는 삼년 안에 이집트어는 절반이 사라질 테고, 십년이 지나면 삼백 단어 정도밖에 남지 않아 개도 배울 수 있는 언어가 될 거라고… (116쪽)
프렌치불독과, 말티즈, 치와와가 이집트어로 얘기를 주고 받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배꼽이 빠질 것 같네요
- 쿠푸의 피라미드에 맞선 자신들의 위업을 과시하며 뻥을 치던 늙은 시인 아멘헤루메네프의 에피소드는 압권이었습니다. 눈에 눈곱이 잔뜩 낀 채 자신이 엄청난 2행시를 지었다가 모진 고초를 당했다며 내놓은 시가 바로 이것이었죠.
“날갯짓 하며 날아가는 갈매기들을 보니 / 눈물을 참을 수 없구나”
정치적 저항이나 시대 비판과는 전혀 무관한, 허접하고 뜬금없는 2행시 때문에 고초를 겪었다는 뻥쟁이들의 거짓말엔 다들 실소를 금치 못했지요.
이 작품이 좋은 소설인 이유는 또 무엇일까요?
“문학의 진정한 가치는 독자들로 하여금 다시 생각하게 만드는 데 있지요. 얼마 전 제주 4·3 기념관에 다녀왔는데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을 통해 묻혀 있던 4·3 사건이 세상에 조명되는 계기가 된 것을 보며 문학의 거대한 힘을 실감했지요. 이 소설 역시 ‘피라미드’라는 소재를 통해 권력의 속성과 그 이면에 숨겨진 잔인한 음모를 우리에게 환기시켜 준다는 점에서 정말 훌륭한 작품이라고 느꼈습니다.”라는 노루귀 책방지기 쌤의 소감,
“좋은 소설의 조건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하는 보편성을 가졌는가 하는 점인데. 소설 속의 쿠푸 왕을 트럼프로 치환하고, 피라미드 건설 과정을 거대한 전쟁이나 소모전에 대입해보면 어쩜 그렇게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지 소름이 돋을 정도” 라는 선정위원장님의 예리한 통찰에,
참석자들 모두 폭풍 공감하네요.
▸▸ 카다레, 그는 누구인가요?
장기간 이어진 엔베르 호자의 독재와 고립주의로 인해 유럽의 최빈국이 되고 거의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알바니아라는 작은 나라.. 여기서 태어나 자신의 작품을 통해 그 나라를 전 세계에 각인시킨 위대한 작가. 카다레에 대한 경외감과 함께 그의 작품에 대한 여러 소감들도 쏟아졌습니다.
그의 글은 늘 안개 속에 갇힌 것처럼 모호하지만 독특한 색깔을 띠고 있다는 강원장님의 촌평에, 카프카의 성(城), 심판(審判)을 연상시킨다는 선정위원장님의 해설까지...
하지만 그 모호함 속에 인간 본성과 전체주의의 폭력성을 고발하는 날카로운 메스가 숨겨져 있죠.
카다레를 세계에 알린 ‘죽은 군대의 장군’, ‘부서진 사월’ 등 카다레의 다른 작품들을 읽은 회원들도 많군요.
그가 겪었을 시대적 압박과 검열 속에서도 이러한 우화적 걸작을 탄생시켰다는 사실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피라미드처럼 다가왔습니다.
이 책이 너~~~무 재미있었다는 수*쌤의 소원 한자락!
“만약 알라딘의 요술램프에서요, 딱 2시간 동안 너가 제일하고 싶은 소원 한가지만 말하면 무엇이든 들어주겠다 라고 한다면요, 2년 전에 저 세상으로 가신 카다레옹을 불러와서 이 책에 대해 밤새 수다를 떨고 싶어요!”
▸▸ 피라미드의 양면성, 그러나 소설은 소설일 뿐!
토론의 후반부는 수년전 오지 알바니아를 다녀온 최모원장님의 여행담에 이어 실제 피라미드에 대한 이야기로 이어졌습니다.
이집트를 직접 방문해 모래바람 속에서 피라미드를 영접했던 회원들은 그 엄청난 규모에 압도된 경외감을 생생하게 증언해주었는데요.
세계 각지의 관광객들이 환호성을 지르는 그 거대한 유적이, 알고 보면 절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지배자의 수단으로 악용되어 수많은 백성들의 피와 눈물 위에 세워졌다는 사실을 떠올리며 깊은 탄식을 내뱉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같은 토론의 기류에 대해 허를 찌르는 날카로운 지적도 나왔습니다.
“피라미드는 그저 피라미드일 뿐입니다! 피라미드는 작가가 이 소설을 위해 빌려온 하나의 매개체일 뿐입니다. 이 책에 나오는 피라미드 관련 에피소드들은 역사적 사실이라기보다는 어디까지나 작가의 상상력이 빚어낸 ‘소설’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역시!
분위기에 휙! 휩쓸리지 않고 진실의 맥을 되찾아가는 모습, 이것이 바로 독토의 매력 아닐까요?
역사와 허구, 거대한 권력과 개인의 무력함, 그리고 그 사이를 유쾌하게 가로지르는 작가의 위트까지. 얇고 말랑말랑~한 한 권이 책이 준 즐거움과 행복한 수다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다음달은 어느 듯 부산독서아카데미 300회 토론회가 되네요.
회원들 각자가 함께 모여 머리를 맞대고 치열한 토론을 벌이며 쌓아온 거대한 벽돌 한 장 한 장이 300회라는 또 하나의 피라미드를 만들었네요.
규모에선 쿠푸의 피라미드에 견줄 수 없겠지만 그 단단한 내공으로 따지면 쿠푸의 피라미드보다 더 낫지 않을까요?
▪참석: 강*욱, 김*경*, 김*경, 박*주, 어*빈, 윤*한, 정*화, 최*래, 최*욱, 하*명
#부산독서아카데미 #피라미드 #독서토론회 #카다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