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21일 [연중 제16주간 목요일]
마태오 13,10-17
<마태오 효과 (Matthew effect)>
제가 시골에서 통학하면서 도시에 있는 고등학교까지 나오고 결국 서울에 있는 대학에 들어갔더니 저희 마을에서는 개천에서 용 났다고 곧 대통령이라도 될 것처럼 칭찬을 받았습니다.
공부 열심히 해서 면장이 되라는 어르신도 있었습니다.
정말 시골에서는 4년제 대학에 들어가는 것도 큰 성공이었고 주위에서도 제가 대학을 가장 잘 간 사람 축에 끼었습니다.
그런데 대학에 와서 만난 친구들을 보니 대부분이 좋은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이었습니다.
가까운 학교나 기숙사 있는 학교에서 공부를 했거나, 학원과 과외 등은 기본적으로 했던 아이들이었습니다.
저는 학원 문턱에도 못 갔으니 ‘저런 좋은 환경에서 공부했다면 더 나았을 텐데...’
라는 아쉬움도 남았지만, 그런 환경에서 자라서 저들과 같은 대학에 다닌다는 것도 스스로 대견하게 여겨졌습니다.
그러면서 생각했던 것은 낮은 환경에서 높은 환경으로 올라가는 데는 기적과 같은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지만, 이미 기득권에 있는 이들이 그 기득권을 유지하는 데는 별 힘이 들지 않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집안일을 도와가며 학원 한 번 못 가는 아이들과 고액 족집게 과외를 하는 아이들이 어떻게 경쟁이 되겠습니까?
결국 가진 자는 더 가지게 되고 가지지 못한 자는 계속 가난하게 살아야하는 악순환이 이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다람쥐가 쳇바퀴 돌듯이 한 번 들어간 굴레에서 벗어난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습니다.
이건 대학에 들어와서도 아니 졸업 이후도 마찬가지입니다.
대학에 다니면서도 친구들보다 제가 학점은 더 높았지만 친구들은 해외 영어연수를 1년씩 다녀오면서 토익 점수 등이 급격히 높아지는 것을 보고 저들은 태어날 때부터 복권을 지니고 태어난 사람들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대학 졸업을 하고 나니 부모님의 백으로 큰 어려움 없이 좋은 직장에 취직하는 친구들과, 어떤 친구는 졸업 후 바로 부모님이 사무실을 열어주기도 하고, 어떤 친구는 결혼할 때 강남의 아파트를 부모님이 바로 사주시기도 하였습니다.
40년 전 미국 컬럼비아대학교의 저명한 사회학자 로버트 머튼이 ‘빈익빈 부익부’현상을 설명하면서 처음 사용한 이 말은 마태오복음에 나오는 “사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태 25,29)라는 구절에서 비롯한 ‘마태오 효과(Matthew effect)’라는 용어입니다.
만약 읽기 장애가 있는 아이가 있다면 그 아이는 글을 읽지 못할 뿐만 아니라 거기에서 배워야 하는 지식들을 습득하는 것이 다른 아이들보다 느리기 때문에 계속 뒤쳐질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누적 우위’ 이론이라고도 하는데 이미 쌓아놓은 게 많은 사람이 더 유리하다는 뜻입니다.
곱셈, 나눗셈도 못하는 사람에게 미적분을 가르쳐 줄 수가 없습니다.
기초 지식이 있어야 더 깊은 지식을 넣어줄 수 있는데 이런 의미에서 가진 자만이 더 가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 누적 우위의 법칙은 신앙에서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오늘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께 왜 저 사람들에게는 비유로만 말씀하시느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은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해 주십니다.
눈도 닫히고 귀도 닫히고 마음도 무뎌서 직설적으로 이야기 할 수준이 아니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후 당신 살과 피를 먹고 마셔야 하는 것이 이 기적의 의미라고 했을 때 대부분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떠나간 것을 보아도 그들은 깊은 진리를 깨달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따로 비유의 뜻을 설명해 주시곤 하였습니다.
이는 그들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머물 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스도와 항상 함께 있었고, 그래서 필요할 때만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었던 사람들과는 차별될 수밖에 없었던 이들입니다.
애인이 있는 친구 녀석이 많은 여자들을 만나고 다니는 것을 보고 신기해 한 적이 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애인이 있으면 여자에 대해 집착하거나 안달하지 않아서 오히려 여자들에게 더 관심을 받게 된다고 합니다.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이 다섯 달란트를 벌고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이 두 달란트를 벌었으며 한 달란트만 있는 사람은 그것마저 빼앗겼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믿음에 관한 것입니다.
그 분께 대한 믿음이 크면 클수록 더 많은 것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 분은 가지면 가질수록 그 분에 대한 지식이 늘어나고 그 누적효과로 더 깊은 진리를 쌓아나가게 됩니다.
혼자 살면 혼자입니다.
그러나 결혼을 하게 되면 자녀를 낳아 셋이나 넷, 다섯까지도 됩니다.
이것이 마태오 효과입니다.
요아킴과 안나는 경건한 삶으로 늦은 나이에 마리아를 가졌습니다.
결국 마리아를 통해 구세주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셨습니다.
가져야 더 가지게 됩니다.
행복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를 조금이라도 더 가지려고 노력합시다.
왜냐하면 모든 좋은 것들은 다 그분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7월21일 [연중 제16주간 목요일]
예레미야 2,1-3.7-8.12-13
마태오 13,10-17
오늘 우리는 어떤 줄을 붙들고 있습니까? 생명줄인가요? 아니면 썩은 동아줄인가요?
철없는 이스라엘을 향한 예레미야 예언자의 경고 말씀이 얼마나 강력한지 수천년 세월을 건너와 오늘 우리의 귀까지 먹먹하게 할 정도입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예언의 말씀을 듣고 있노라면 마치 잘 갈아놓은 쌍날칼처럼
날카롭기만 합니다.
사실 예레미야처럼 기구한 운명의 예언자도 다시 또 없을 것입니다.
그는 아직 부모의 보살핌이 필요한 청소년의 나이에 예언자로 불림을 받았습니다.
너무나 기가 막히고 부담스러웠던 소년 예레미야는 이런 저런 핑계를 대며 거절했습니다.
“아, 주 하느님 저는 아이라서 말할 줄을 모릅니다.(예레미야서 1장 6절)
그러나 주님 역시 물러서지 않으셨습니다. 끊임없이 자극하시고 재촉하셨습니다.
“내가 항상 너와 함께 하겠다. 부족한 것을 다 채워주겠다. 용기를 내라. 앞으로 나아가라!”
주님께서 예레미야에게 주신 예언의 사명은 너무나 엄청난 것이었습니다.
또래 청소년들 적당히 모아놓고 교리 지도하는 정도가 아니었습니다.
가가호호 방문하며 회개를 선포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예레미야를 왕궁으로 가라하십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노회한 지도층 인사들이 모인 장소로 가라합니다.
가서는?
외치라고 하십니다.
무엇을?
이스라엘의 멸망과 예루살렘 성전의 철저한 파괴를!
요즘으로 치면 여의도 국회의사당이나 한국천주교주교회의 회의 석상으로 가라고 한 것입니다.
가서 대한민국의 멸망과 한국 천주교회의 파괴를 외치라고 한 것입니다.
듣도보도 못한 애송이 하나가 갑자기 나타나서 파괴니 멸망이니 엉뚱한 말을 해대니 원로들과 지도자들을 콧방귀를 뀌었을 것입니다.
다들 헛웃음을 터트렸을 것입니다.
예레미야 입장에서 두려움도 컸겠지만, 도무지 말발이 먹히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주신 예언의 사명이 얼마나 힘겨웠던지 그는 주님을 원망합니다.
자신이 태어난 날마저도 저주합니다.
“아, 불행한 이 몸! 어머니, 어쩌자고 날 낳으셨나요?
온 세상을 상대로 시비와 말다툼을 벌이고 있는 이 사람을. 빚을 놓은 적도 없고 빚을 얻은 적도 없는데 모두 나를 저주합니다.”
(예레미야 15장 10절)
초년병 시절 예레미야 예언자에게서는 위엄과 포스가 넘치는 파워풀한 예언자로서의 모습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두려움에 벌벌 떠는 나약한 한 소년의 모습으로 출발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소명이 너무나 벅차고 힘겨웠던 예레미야 예언자는, 때로 자신을 부르신 주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멀리 도망가고도 싶었지만,
결국 우리 인간은 옹기장이이신 주님 손에 들린 옹기라는 진리를 깨닫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진정한 예언자로서 거듭납니다.
주님께서 주신 예언의 말씀을 단 한치의 오차도 없이 백성들에게 선포하기 시작합니다.
오늘 첫번째 독서를 통해 이스라엘과 오늘 우리에게 전해지는 예언의 말씀은 다른 예언서에서도 자주 되풀이되는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을 각별히 사랑하셨습니다. 다시 말해서 총애하셨습니다.
수많은 민족들 가운데서 딱 찍어 이스라엘을 당신 백성으로 간택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귀염둥이처럼 챙기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젖과 꿀이 흐르는 옥토로 인도하고 축복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런 주님의 사랑에 감지덕지하면서 주님께 충실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주님으로부터 등을 돌리는 것도 모자라 반역을 거듭했습니다.
마지막 말씀은 이스라엘을 향한 말씀이기도 하지만 바로 오늘 우리를 향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정녕 내 백성이 두 가지 악행을 저질렀다.
그들은 생수의 원천인, 나를 저버렸고, 제 자신을 위해 저수 동굴을, 물이 고이지 못하는, 갈라진 저수 동굴을 팠다.”
( 예레미야서 2장 12~13절)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알을 풍요와 다산으로 안내할 신이라 여기고 바알이라는 동아줄을 잡고
매달렸습니다.
그러나 그 줄은 썩은 동아줄이었습니다.
결과는 집단적 타락과 멸망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죽기살기로 큼지막한 지하 물탱크 하나를 만들었습니다.
젖먹던 힘까지 다 퍼부어서 물탱크가 완성되었습니다.
크게 기뻐하면서 물탱크에 물을 채우기 시작했습니다.
결과는 아무리 물을 갖다 부어도 채워지지 않았습니다.
밑바닥에는 큰 틈이 있었고, 그리고 물이 다 빠져나가고 있었습니다.
주님없이 오로지 우리 힘만 믿고 뭔가 하려고 할 때 드러나는 전형적인 현상입니다.
주님과 함께 하지 않는다면, 주님 뜻을 반하는 일이라면 커다란 산 하나를 옮긴다 할지라도 아무런 의미가 없고 소용이 없습니다.
주님과 등을 돌린 상태에서라면 아무리 큰 희생과 헌신이라 할지라도 헛고생일 따름입니다.
오늘 우리는 과연 어떤 줄을 붙들고 있는가요?
생명줄인가요?
아니면 썩은 동아줄인가요?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행복>
2022. 07. 21 연중 제16주간 목요일
마태오 13,10-17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
그때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왜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너희에게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아는 것이 허락되었지만, 저 사람들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 사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여 이사야의 예언이 저 사람들에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보지 못하리라. 저 백성이 마음은 무디고, 귀로는 제대로 듣지 못하며, 눈은 감았기 때문이다. 이는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서는 돌아와, 내가 그들을 고쳐 주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갈망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자 갈망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행복>
보고 싶은 것만
보는 눈이 아니라
보여주시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듣고 싶은 것만
듣는 귀가 아니라
들려주시는 것을
듣는 귀는 행복하다
건네고 싶은 데만
건네는 손이 아니라
건네라하시는 데에
건네는 손은 행복하다
가고 싶은 데만
가는 발이 아니라
가라하시는 데에
가는 발은 행복하다
알고 싶은 것만
아는 머리가 아니라
알려주시는 것을
아는 머리는 행복하다
담고 싶은 것만
담는 마음이 아니라
담아주시는 것을
담는 마음은 행복하다
있고 싶은 대로
있는 내가 아니라
있으라하시는 대로
있는 나는 행복하다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