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명_텅 빈 들판 텅 비게 보이는 것은 ●지은이_박운식 ●펴낸곳_시와에세이
●펴낸날_2024. 8. 27 ●전체페이지_160쪽 ●ISBN 979-11-91914-63-4 03810/신국판변형(127×206)
●문의_044-863-7652/010-5355-7565 ●값_ 12,000원
논과 밭과 가고 없는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농민시!
박운식 농민 시인의 시선집 『텅 빈 들판 텅 비게 보이는 것은』이 ‘詩와에세이’에서 출간되었다. 이번 시선집은 「시인의 말」에서 밝히고 있듯이 팔순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농사(포도)를 짓고 있는 평생 농사꾼으로서 삶의 무게를 오롯이 담아내고 있다.
오늘도 괭이를 둘러메고 밭에 간다
질긴 뿌리의 나무들이 잡풀들이
밭둑을 넘어
슬금슬금 먹어들어 온다
나무뿌리 풀뿌리를 찍어내야지
젊은 놈들은 다 대처로 떠나고
무디어진 괭이로는 어림없구나
그래도 이 밭을 지켜야지
잠시 먼 하늘 바라보는 사이에도
담배를 피우는 사이에도
내 발바닥 밑으로 담배 연기 속으로
철사보다 질긴 뿌리들이 기어들어 온다
치켜든 괭잇날이 부릅뜬 두 눈이
나무뿌리를 힘껏 내리찍지만
서러움만 가득 밭뙈기에 쌓인다
―「농부」 전문
박운식 시인은 고등학교 졸업 이후 군 복무 기간을 제외하고 평생 농사꾼으로 살았다. 위 시의 제목처럼 농사짓는 일을 직업으로 삼았다. 그래서 눈만 뜨면 “괭이를 둘러메고 밭에” 가고 “나무뿌리 풀뿌리를 찍어내”며 땀을 쏟고 “밭을 지켜”온 사람이다. 그러나 농사를 방해하고 억압하고 빼앗아 가는 무리가 있다. 그것들은 농촌을 텅 비게 하고 “서러움만 가득 밭뙈기에 쌓고” 현실 삶을 서글프게 한다.
텅 빈 들판 텅 비게 보이는 것은
겨울 들판이기 때문이다
들판마다 커다란 발자국
우리들이 잠든 사이 커다란 자루를
들고 가던 검은 그림자
그 검은 그림자의 깜깜한 뱃속엔
무엇이 들었을까
알 수 없어라 어리석은 눈은
텅 빈 들판 텅 비게 보이는 것은
어리석은 눈 때문이다 감은 눈 때문이다
살찐 바람이 잘도 불더니만
햇살은 잘도 내리더니만
내 가는 팔뚝에 주렁주렁 많이도 매달리는
농비, 학비, 조합 빚, 사채 빚
내 가는 팔뚝이 부러질 것 같구나
텅 빈 들판에 바람아
더 세게 세게 불어 봐라
지금껏 견디어 온 질긴 내 팔뚝은
부러지지 않으리라 부러지지 않으리라
―「겨울 들판」 전문
박운식 시인은 “텅 빈 들판 텅 비게 보이는 것은/겨울 들판이기 때문이다”라고 단정 짓는다. 대부분 농사의 수확은 가을에 이루어진다. 그런데 그 수확은 온갖 빚을 갚고 나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 그래서 농민의 마음은 황량한 겨울 들판처럼 텅 비게 되는 것인데, 겨울 들판은 농민의 황량한 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 시는 1989년 그의 두 번째 시집에 수록된 것으로 보아 대략 35년 전 작품임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이 시가 여전히 설득력 있게 읽히는 것은 아직도 우리 농촌의 현실이 조금도 나아진 게 없다는 증거다.
얘야 여시골 논다랑이 묵히지 마라
니 어미하고 긴긴 해 허기를 참아가며
손바닥에 피가 나도록
괭이질해서 만든 논이다
바람 불고 비가 오고 눈이 오고
꽃이 피고 새가 울고
아픈 세월 논다랑이 집 삼아 살아왔다
서로 붙들고 울기도 많이 했었다
내 눈에 흙 들어가기 전에 묵히지 마라
둘째 다랑이 찬물받이 벼는 어떠냐
다섯째 다랑이 중간쯤 큰 돌 박혔다
부디 보습 날 조심하거라
자주자주 논밭에 가보아라
주인의 발소리 듣고 곡식들이 자라느니라
거동조차 못하시어 누워 계셔도
눈 감으면 환하게 떠오르는 아버지의 논
―「아버지의 논―논 5」
도종환 시인은 추천사에서 “삶의 고단함과 아픔과 무거움이 뚝살처럼 박힌” 박운식 시인의 농민시에서 “삶의 진실이 시적 진실이 되는 거짓 없는 목소리를 만난다.”고 하였는데 이제 농촌은 농사지을 사람이 없다. 설령 농사를 짓는다 해도 박운식 시인처럼 팔십 전후의 농부가 대부분이다. 박운식 시인에 의하면 금년 포도 농사도 외국 노동자의 손을 빌려 알 솎기와 봉지 싸기 등의 일을 했단다. 아버지 살아생전 “눈에 흙 들어가기 전에 묵히지 마라”는 간곡한 부탁이 있었는데, “아버지 이제 논농사는 지을 수 없어요” 울먹이는 시인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
■ 차례
차례―
시인의 말·04
제1부
겨울·13
햇살 속에서·14
벽시계·15
낙숫물·16
가을·17
빈터에서·18
어둠 속에서·20
찔레꽃·24
아침·25
잠 속에서·26
농부·28
씨앗·29
감자를 심으며·30
골방에서·32
가뭄·33
농투산이·34
괭이질을 하며·36
비 오는 날·37
논다랑이에서·38
돌을 던지며·40
장작을 패며·41
두엄을 뒤지며·42
콩심기·44
보리 타작·46
제2부
피사리·51
마늘 캐는 날·52
이삭줍기·54
풍구질·55
감을 따며·56
사랑방·57
담배 농사·58
배추밭·60
낫을 갈며·61
겨울 들판·62
미루나무·64
눈 오는 날·66
보리밭·67
질경이·68
지게·70
해 질 녘에·72
묵밭을 보며·74
빚·75
호랑이·76
빚 걱정을 하다·78
애기콩·80
콩타작·81
포도나무 전정을 하며·82
담배 하는 날·84
제3부
봄은 왔는데·89
벼 잎 속으로·90
식전바람·92
논에 가다·93
아버지의 논·94
논둑에 서서·96
논둑의 풀을 깎다·98
어린 모·100
가을 논에서·101
벼를 거두다·102
가을걷이 끝난 후·103
벼 매상하는 날·104
못된 놈들·105
빈 다랑이·106
안부·107
쟁기·108
사랑방·109
할머니·110
누렁이 소를 팔고·112
방에 누워 있다·114
집수리를 하며·116
술 먹으러 가는 길·118
겨울 밭에서·120
눈 내리는 밤·122
콩을 가리며·124
담배 건조실·126
제4부
지렁이 1·129
지렁이 2·130
지렁이 3·132
지렁이 4·133
지렁이 5·134
조선낫·136
눈 오는 날에·137
넋두리·138
날아가 버린 새·140
낙엽·142
물꼬 옆에서·143
곶감·144
여보게·146
꽃길·148
빈집·149
아버지의 손·150
어머니·151
빈 외양간·152
몽동발이 삽·153
겨울 논에서·154
마늘·156
바람 세게 부는 날·158
논 매기·159
■ 시집 속의 시 한 편
산골짝 밭뙈기에 마누라와 같이 콩을 심는다
간격을 맞춰 고르게 호미로 파고 콩을 몇 개씩
떨어뜨리고 흙으로 덮는다
허리가 아파 밭둑에 앉아 담배를 피운다
빨리 심고 집에 가야지요, 한낮이 됐는데
투덜거리는 마누라의 소리가 산 너머로 날아간다
까짓 심어봐야 품삯도 안 나오는 거
돈 많은 사람들 하루저녁 술값도 안 되는 거
지난겨울 돈 많은 친구 따라
벌거벗고 춤추는 술집에 가봤지
쌀 한 가마 값도 더 술을 퍼먹었지
번쩍번쩍하는 불빛과 요란한 소리들
담배 연기 속에 어지럽게 떠오르네
콩이나 심어요,
마누라의 고함 소리에 정신이 번쩍든다
그래 쓸데없는 생각일랑 버리고
콩이나 심자 몇 말이나 먹을 수 있을까
산꿩이 퍼득퍼득 소리치며 날아간다
정신차려라 이놈아
마누라는 땀을 뻘뻘 흘리며 일하는데
밭둑에 앉아 담배나 피우고 쓸데없는
못된 생각이나 하고 마누라 눈에 불이나 때는
이놈아
―「콩심기」 전문
■ 시인의 말
아버지는 평생 농사만 짓다 저세상 사람이 되었습니다. 저 역시 팔순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포도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어렸을 때 전쟁으로 수많은 피난민의 긴 행렬 속에 내가 있었습니다. 고단하고 힘든 그때의 어린 나, 초등학교를 마치고 소도 뜯기고 꼴도 베고 그렇게 보내다 아버지께서 장리쌀을 얻어 몇 달 늦게 중학교에 들어갔습니다. 시오리 산길을 걸어 다니며 찔레순도 꺾어 먹고, 먹을수록 배고픈 진달래꽃도 따 먹곤 했지요.
읍내에 있는 농업고등학교에 다녔습니다. 하지만 공부가 재미없어 헌책방이나 만화방에 많이 드나들었습니다. 결석도 많이 하고, 지금 뒤돌아보면 방황을 많이 한 것 같습니다. 간신히 학교 뒷문으로 나왔지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부모님 앞에 엎드려 일이나 하는, 부모님 눈에 불이나 때는 못난 놈으로 살았으니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 어림해 봅니다. 어디 취직도 못 하고 이곳저곳 노가다 판에 돌아다니다 군대에 갔습니다. 전방 철책선 안 지피(GP)에서 근무하다 월남전에 지원 참전했습니다. 무사히 군 복무를 마치고 귀국해 부모님 도와 농사를 지었지요.
담배 농사는 어렸을 때부터 했습니다. 담배를 딸 때도 건조실에 매달 때도 불을 땔 때도 땀과 담뱃진이 범벅이 되기도 했지요. 비육우도 몇 마리 길러 보고, 이런저런 돈이 되지 않는 농사를 지었습니다.
아버지는 “애야 여시골 논다랑이 묵히지 마라” 간곡한 말씀 있었는데 쌀농사는 물론 보리, 밀, 콩 등의 농사를 작파한 지 아주 오래되었습니다. 1990년도부터 포도 농사를 했습니다. 시설하우스 2,000평에 포도를 심어 먹고살 만했는데, 루사 태풍 때 포도밭이 통째로 쓸려나갈 때는 참으로 막막하고 절망스러웠습니다. 농사는 어느 것 하나 수지맞는 게 없었습니다.
그래도 꾸불꾸불 비틀거리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험한 산길, 들길, 오솔길, 강을 지나며 만났던 고마운 사람들, 밉거나 곱거나 버팀목이 되고 위안을 준 ‘시’라는 동무가 있어 따뜻하고 좋은 나날입니다. 남은 삶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2024년 여름
박운식
■ 추천사(표4)
박운식 시인 시는 정직하다. 시도 사람도 순박하고 꾸밈이 없다. 삶의 고단함과 아픔과 무거움이 뚝살처럼 박힌 농민시 속에서 만나는 진정성, 박운식 시인 시의 가장 큰 미덕은 바로 이 진정성에 있다. 논밭과도 이야기하고, 가고 없는 사람들과도 두런두런 이야기하고 있는 시, 따뜻한 공동체를 그리워하는 시, 꺼질듯한 등불을 들고 밤길을 가는 시, 모두들 도시로 떠나고 없는 폐허 같은 풍경 속에 오늘도 집을 고치고 있는 바보 같은 시, 그런 시들이 모여 있는 시의 사랑방에서 우리는 삶의 진실이 시적 진실이 되는 거짓 없는 목소리를 만난다._도종환(시인)
박운식 시인은 땅과 하늘 안에 있는 뭇 생명들과 몸을 섞고 말을 나누어 비애의 서정으로 기쁘고도 서러운 광경을 묘사한다. 어쩔 수 없이 그 광경에서 떨어져 소멸되기도 하는 것들도 “가을날 벼를 베는 시퍼런 낫 끝에”(「가뭄」) 기억되어 모든 풍경의 노래로 살아나리라 예감되고 있었다. 분노해야 할 세계와 품어 안아야 할 세계는 여전한데, 시인은 지금 생의 만년에 이르러 뜨겁고도 차가웠던 삶 전체와 그를 에워싼 모든 목숨을 이윽히 바라보는 지극한 눈을 갖게 되었다. 근육이 줄고 마음이 약해져서 ‘인생의 허무’를 느끼기 시작할 때(「날아가 버린 새」), 그는 그의 평생의 은유적 주제이기도 한 ‘깜깜한 밤’마저도 순순히 받아들이는 상태이다. 제 삶의 소멸을 예감하는 「꽃길」이나 「빈집」도 그렇지만, 시집을 닫는 시 「논 매기」는 그 순응의 마음이 저 비애와 황홀의 풍경 속 풍경이 되어 이제 지긋이 자신의 마을을 돌아보는 모습으로 옮겨 앉았음을 보여준다. “새참 때가 되”어 “마을 쪽 길 바라보”는 황새는 아름답고 고적하게 풍경이 된 시인 자신이다.
_박수연(문학평론가·충남대학교 교수)
■박운식
충북 영동에서 태어나 1974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하였다. 시집으로 『연가』, 『모두 모두 즐거워서 술도 먹고 떡도 먹고』, 『아버지의 논』 등이 있다. 현재 영동작가회 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