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기적을 일구고 그 소멸을 마주한 전사들에게
- 독기를 빼내야 생명이 살수 있는 세상이 됩니다
수필가 정임표
“말은 나면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라."
전쟁베이비 세대에게 이 말은 자신의 운명과 가족의 운명을 개척하라는 준엄한 명령이었습니다. 흙먼지 날리는 고향을 뒤로하고 우리가 향한 곳은 '서울'이었습니다. 팔도의 젊은이들이 전부 서울로 밀려들었습니다. 상경은 가난과의 결별이었고, 그 성채 안에서 입신양명하여 금의환향하는 일은 전사(戰士)에게 주어진 가슴 벅찬 훈장이었습니다.
전쟁으로 텅 빈 폐허를 채우듯 쏟아져 나온 우리 세대는 6.25 전쟁의 포성이 멎은 1955년부터 10년간 900만 명이 태어 났습니다. "무턱대고 낳다보면 삼천리는 초만원"이라는 표어를 골목마다 붙여야 할 정도로 1960년 전후에는 한 해에만 무려 100만 명 넘는 아이들이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지금의 출생아 수가 20만 명대로 주저앉은 것과 비교하면, 그야말로 인구 폭증의 시대 한복판을 걸어온 셈입니다.
그 아이들이 '우골탑'으로 표현되는 배움의 길로 일로매진했습니다. “똥 묻은 바지라도 팔아서 자식을 가르치겠다”는 부모님의 열망을 등에 업고 배우는 일을 우선으로 하여 맨주먹으로 세상을 향해 돌진했습니다. 호롱불 아래서 책을 읽고, 지게를 지며 농경사회의 끝자락을 살았던 우리 세대는 원자력과 태양광 전기를 거쳐 이제 인공지능 로봇과 대화하는 초과학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인류 문명이 수만 년간 일궈온 변화를 단 수십 년 만에 모두 겪어낸 이런 세대는 과거에도 없었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없을 것입니다.
그 격변의 파도 속에서 우리는 늘 최전방에 있었습니다. 학교는 '오전반·오후반'으로 쪼개졌고, 군 입대도 자리가 부족해 '보충역'이 생길 만큼 우리는 넘쳐나는 생명력이었습니다. 주택 100만 호 건설의 망치 소리와 함께 서울에다 성채를 쌓아 올렸고, 그 뜨거운 숨결로 6.29 선언을 이끌어내며 민주화의 문을 열었습니다.
대한민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이 거대한 인구의 해일은 가는 곳마다 기적을 일구어냈으나, 이제 그들은 평균수명 84세라는 종착역을 향해 함께 달려가고 있습니다. 향후 10~20년 사이에 전체 인구의 26% 이상을 차지하는 우리 세대와 우리 이전 세대 인구 1,300만 명이 이 땅을 하직할 것임을 예고하는 마지막 종소리가 들리고 있는데, 우리가 낳은 오늘의 젊은이들은 일자리도, 집도, 희망도 없어 결혼과 출산을 포기하고 있습니다. 부모가 되어 자식에게 결혼하라는 말도 꺼내지 못하는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통계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대한민국 주택의 40%를 60대 이상의 우리 노병들이 움켜쥐고 있습니다. 자가 소유율이 70%에 달하는 전쟁베이비 세대가 84세 종착역을 향해 썰물처럼 빠져나갈 때, 이 집들은 누구의 차지가 되겠습니까? 나는 확신합니다. 우리 세대가 죽고 나면 이 거대한 도시는 오늘날 학교가, 고향집이 텅 비듯이 순식간에 빌 것이고, 주인 잃은 아파트들은 비석처럼 늘어선 '수직의 공동묘지'로 화하든가 타국의 이민자들로 채우는 이방인의 도시가 될 것입니다.
사정이 이러한데도 우리 세대가 평생을 바쳐 마련한 그 안식처가 이제 새로운 '전장'이 되었습니다. 국가는 집값 안정을 외치며 평생 땀 흘려 일해온 우리를 '투기꾼'으로 몰아세우며, 자식에게 살림 날 집 한 칸 마련해주지 못해 피눈물을 흘리는 부모의 고통을 외면하고 있습니다. 권력을 쥔 그들은 과거의 자기 트라우마에 갇혀서 미래의 파고를 보지 못하고, 국민을 적으로 돌리며 소리 없는 내전에서 자신의 낡은 생각이 승리할 것만을 고집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가장 절실하고도 핵심적인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우리가 일군 이 성채가 우리의 죽음과 함께 폐허가 되게 놔둘 것인지, 아니면 다음 세대의 희망으로 이어지게 할 것인지 우리 손으로 결정해야 합니다.
지난 윤석열 정부가 결혼하는 자녀에게 양가 합산 최대 3억 원까지 증여세를 비과세하는 길을 열어준 것은 그나마 고무적인 변화였습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1,000만 명에 육박하는, 전후 복구와 한강의 기적을 일으킨 세대의 자산이 자발적이고 합법적으로 청년 세대에게 흘러갈 수 있도록 비과세 증여의 폭을 전폭적으로 확대해야 합니다. 부모가 평생 흘린 땀이 자식의 앞날을 열어가는 마중물이 되게 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국가 소멸을 막는 가장 현실적이고도 시급한 해법입니다. 우리가 '살아서' 기꺼이 물려줄 수 있도록 막힌 물길을 우리 손으로 터주어야 합니다.
물론 부모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청년들에게는 국가가 더 단단한 사다리를 놓아주어야 합니다. 증여받지 못한 청년 세대에게는 신규 공급되는 아파트를 최우선으로 배정하고, 저리의 파격적인 금융 지원을 통해 그들이 자립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주어야 합니다. '살아있는 증여'와 '국가의 적극 지원'이라는 두 개의 물길이 동시에 터질 때, 비로소 청년들이 '영끌'의 공포에서 벗어나 미래를 꿈꿀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청년들은 집값이 비싸 결혼도, 출산도 포기한 채 성채 밖을 떠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정치는 '증여'를 부의 대물림이라 비난하며 세금의 빗장을 더욱 단단하게 걸어 잠급니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집을 마련할 길이 없는 청년들은 "영끌"을 해서라도 아파트부터 마련해야 한다면서 불나비 처럼 달려들고 있습니다. 하루 노동의 휴식처가 될 코 딱지 만한 아파트가 20억 30억 합니다. 이 비정상적 세상을 바로 잡는 길이 정녕 세금 폭탄 밖에 없습니까. 대한민국은 지구상에서 사라지는 1호 국가가 될 것"이라 했던 인구학자 데이비드 콜먼의 섬뜩한 경고는 이제 경고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부모가 마련한 깨끗한 아파트에서 성장한 우리의 아이들에게 사글세 단독주택으로 살림 나라고 하면 어느 누가 시집장가를 가려하겠는지요?
윤석열 정부의 결혼자금 양가 증여 3억 비과세는 겨우 시작일 뿐입니다. 1,360만 노병의 자산이 청년의 희망으로 '살아서' 흘러가도록 증여의 문턱을 더 파격적으로 낮춰야 합니다. 우리 세대가 죽고 난 뒤에야 유산이 상속되는 현재의 경직된 체제가 15년 이상 계속 된다면, 조만간 이 거대한 도시는 어느 날 갑자기 텅 빈 도시가 될 것입니다. 생의 황혼을 맞이한 전쟁베이비 세대인 우리에게 평생을 바쳐 마련한 이 아파트 한 칸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다는 말입니까? 죽음을 앞둔 노병들에게 세금의 몽둥이를 휘두르는 이 비정한 정치는 대체 누구를 위해 울리는 종이란 것입니까?
자발적인 증여로 세대의 선순환을 이뤄내 미래를 살릴 것인가, 아니면 지난날의 트라우마에 발목 잡혀 가진 자를 증오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저주의 독기를 내뿜는 일로 세월을 보내다가 모두가 공멸할 것인가? 보리밥도 배불리 먹지 못하고 태어난 전쟁베이비 세대의 노병이 천하의 제현들에게 글로서라도 한번 물어봅니다. 세금 없이 부의 대물림을 어느 정도까지 허용할 것인지 우리 손으로 결정을 하여 청년들에게 꿈과 희망의 길을 열어 줄 때 진짜 자유민주주의 세상이 올 것입니다.(2026. 2.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