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sz8W42BdwB8
1962년 1월 14일자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전권을 장악한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 박정희(이하 박 의장)는 1962년 1월 13일 불교계 분쟁과 관련해 세 번째 담화를 발표하여, “불교계 자체의 자율적인 재건의 기회를 부여하나 … 분쟁이 계속된다면 … 단연코 묵과하지는 않겠다는 것을 확실히 언명한다”고 하였습니다. 분쟁 양측은 ‘나는 새도 떨어뜨릴 수 있는’ 막강 권력을 가진 박 의장이 “묵과하지 않겠다”고 했던 대목에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동아일보》 1961년 12월 29일자 보도에 따르면, 이 담화에 앞서 문교부가 “양쪽에서 각 5명, 문교부장관 위촉 3명 총 13명으로 불교재건위원회를 구성하고 한 달 이내에 불교재건비상총회를 개최하여 단일 종단을 결성하며 일체의 소송사건을 취하한다”는 등의 해결방안을 제시하여 동의각서를 요구하였으나 비구 측의 반대로 성사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박 의장의 협박에 가까운 담화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이 담화에서 요구한 대로 자율대화 모임이 이루어졌으면 바랄 것이 없었겠지만, 담화가 나오고 열흘 뒤인 1월 22일 오후 2시 중앙공보관 문화살롱에서 김상협 문교부장관이 동석한 가운데 타율적으로 자리를 함께 하고 악수를 나누며 대화를 시작하였습니다.
이 사진은 ‘8년 만에 화해의 길 - 무릎 맞대고 앉은 비구 · 대처승’이라는 제목의 1월 23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실린 것입니다. 맨 왼쪽 끝의 청담 스님처럼 굳은 표정도 있지만, 장관이 함께 한 자리여서 그랬던지 웃음을 보여주는 이들도 있어서 공식 대화의 시작 분위기는 좋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푸른 법의法衣의 비구 측과 두루마기를 단정히 입은 대처 측은 겉모습이 완전히 다르기는 했지만 ‘중생제도’의 법리를 닦는 데는 다름이 있을 수 없다는 것.… 비구, 대처로 갈려 이방인처럼 되었던 그들이긴 하나 8년 만에 이렇게 한 자리에 모이고 보니 엄숙한 표정 속에서도 무척 반가운 듯 간간 웃음도 섞어가며 얘기를 진행하는 것이었다.”위 《동아일보》 기사의 내용입니다.
문교부장관도 격려사를 통해 “모든 사회질서가 바로 잡혀가는 있는 이때 불교계만이 예외가 될 수 없다. … 불교계의 대동단결을 위해 최선을 다해 달라”고 당부하였습니다. 자체정화 능력이나 갈등조정 능력이 없어서 사법부 판결과 정치권력에 기대어 왔던 불교계, 장관에게서 이런 훈시를 듣고 있었던 당시 지도자들의 심정을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동아일보》 2월 13일자 보도에 따르면, 어쨌든 정부 주선으로 만난 첫 모임에서 “한 달 이내에 비상종회를 소집하여 양측 총무원이 갖고 있던 모든 권한을 이곳에 이관하기로” 합의하였고, 2월 12일 조계사에서 열린 비상종회에서 의장 · 부의장과 총무 · 교화 · 재정 · 법규 · 심사 등 5개 분과의 위원장과 부의장을 비구와 대처 동수로 선출하였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4월 1일에는 대처 측이 불참하고 비구 측과 정부 위촉 인사들만 참석한 가운데 문교부에서 제8차 비상종회를 개최해 새 종단의 종정 · 총무원장과 각 부장 등 간부를 선출하여 “불교분규에 종막?”이라는 기사가 나오기도 하였지만(《동아일보》 4월 1일), 종회의원 배분 비율 문제로 다시 갈등이 일어나 또 위기를 맞이합니다. 권력의 종용으로 시작한 통합이 쉽게 성공하리라고 기대할 수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지 않을까요. 어쩌면 권력 쪽에서는 성공하지 않기를 기대하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아니 그랬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래야 다루기 쉬울 테니까요. 분리 통치, divide and rule은 제국주의가 식민지 백성들을 다룰 때에만 쓰는 방식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권력이 즐겨 사용하는 유효한 무기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