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통문 Ⅲ-13]친구의 어록(語錄)과 학수구명(鶴壽龜命) 글자
민간인들이 올해초 조직한 <오수 반려문화도시 추진협의회>가 있다. 몇 년도 가지 않아 없어질 듯 위태롭게 보이는 우리 고향 오수(獒樹)를 세계적인 반려동물의 성지로 우뚝 서게 해, 지구촌 반려동물 인구들이 대한민국 남부의 조그만한 면소재지를 관광을 겸해 찾아오게 함으로써 고향 오수의 “먹고살 길”을 대대로 마련해야 한다는 ‘기특한 뜻’에서 출발했다. 사실, 그 출발은 30여년 전 한 의로운 친구의 결심에서 시작됐다. 아무튼 그 취지의 핵심은, 아마도 천년도 더 전에 세워졌을 것으로 보이는 ‘오수 의견비’가 오수 원동산공원에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촌로들에 의해 입으로 입으로 전해온 ‘개비’의 건립연대를 현재로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하지만 2023년 금석문학자 손환일 박사의 탁본으로 밝혀진 “임술년 3월중”의 ‘임술년(壬戌年)’이 서기 962년이나 1022년이라면, 장담컨대 세계적인 토픽이 될 것이 틀림없다. 그뿐인가. 이 개비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지구촌에서 유일무이한 개비로 유네스코의 세계유산에 등재되지 못할 이유는 ‘1도’ 없지 않은가.
허나 문제는 비석이 너무 오랜 세월 모래천변에 묻혀 있었고, 수마로 인해 글자 판독이 어렵다는 것이다. 육안(肉眼)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금물대시주’ 등 몇 글자와 이 비를 세우는데 헌금을 냈을 시주자(施主者) 50여명의 명단뿐이다. 비의 두전(頭篆)과 함께 이 비를 세운 뜻을 담을 문장이 한두 자 확인된다면 ‘뛰다 죽을 정도’로 좋은 일일 텐데. 이게 어찌 오수, 임실 나아가 전라북도의 경사(慶事)뿐이랴. 대한민국이 경천동지할 일이거늘. 마모된 돌비의 글자를 확인하는 신기술이 있다한다. RTI 돌출 촬영기법과 3D 정밀 촬영을 하면 음각(陰刻)의 글자들이 양각(陽刻)처럼 돌출돼 보이게 할 수 있다한다. 누구도 관심 기울이지 않은 일에 발벗고 나선 게, 이 글의 서두에 말한 <오수 반려문화도시 추진협의회>이다. 어제 금석문학자 손박사를 초청하여 심재석 회장의 ‘의견비의 학술적 가치 규명 및 문화유산 승격·등재기반 구축’이라는 제목의 PT와 관련 회의가 있었다. 참석자는 10명도 안됐지만 분위기만큼은 시종일관 진지했다.
그런데 문제는 첨단기술을 동원하여 의견비 조사사업을 벌이려면 ‘돈’이 필요하지 않은가. 다행인 것은 한 독지가가 내놓은 ‘오수개 발전기금’으로 지난달 오수개 조형물을 조각 제막식을 가졌는데 잔액으로 해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껏 대한민국 전역에 있는 고비(古碑)를 300개도 넘게 고찰한 경험이 있는 서화문화연구소 대표인 손박사께서 흔쾌히 책임이 무겁지만 해보자고 한 것이다. 신기술로도 안된다면 의견비의 건립연대 간지(干支) ‘임술년’이 도대체 몇 년인지는 영원히 역사의 수수께끼로 남고 말 것이다. 하지만, 퀴즈를 풀 수 있는 몇 개의 단서는 있다. 시주자 이름을 나열하는 ‘단월’(檀越) 형식의 비가 유행하던 시기가 있고, 대부분 민초(民草)일 테지만 넉 자의 이름을 추론하자면 건립연대가 위로 더 올라갈 수 있겠다. ‘개나무골’(오수)라는 땅이름이 언제부터 쓰였는지도 고찰해야 할 일. 이규보의 한시에 ‘오수’(獒樹) ‘오원’(烏原:임실 관촌의 옛이름)이라는 지명이 나온 게 1240년경이다. 그러니 1254년 최자의 <보한집>에 나오는 의견설화는 실화(實話)임이 분명하고, 그 이전 200-300년전에 발생한 사건일 수 있지 않겠는가(설화연구가 최래옥교수). 1977년 정부(문광부)가 발행한 <한국문화유적 총람> 책에는 '오수개 설화'가 977년 발생했다고 쓰여있지만, 무슨 근거로 단정했는지, 필자가 누구였는지를 알 수 없는 게 너무나 답답한 일이다. 개와 사람을 인격체로 동일시하던 고래적 사람들이 의견을 기리는 추모비를, 사건 발생 후 십수년 만에 세웠을 게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제발, 이번 첨단기술로 여태껏 애를 태우는 건립연대 궁금증이 풀리기를 비는 수밖에 없다. 간절히.
글이 길어진 까닭인데, 정작 하고 싶은 이야기는 지금부터이다. 오수를 제 사업보다 더 사랑하는 듯한 주인공이 평소 수 백번의 특강을 할 때 첫마디로 한다는 그의 어록을 표구해놓은 것을 어제 봤다. 글씨는 한문학자에서 어느 해 돌연히 훈민정음학자로 돌변해 훈민정음 창제 기념탑을 세우려 동분서주하고 있는 박재성 교수가 썼다. 그분은 주인공의 호를 ‘나는 엉겅퀴 농부’라는 뜻으로 ‘계농’(薊儂)이라고 지어주기도 했다. “처음 그들은 너에게 왜 하냐고 물어보겠지만/훗날 그들은 너에게 어떻게 했냐고 물어볼 것이다” 무언가 느낌이 쌔하게 오시지 않은가? 토종 임실엉겅퀴를 논이나 밭에 처음 재배에 성공한 이후 20년간 오직 엉겅퀴의 성분을 연구하여 오늘날 ‘엉겅퀴박사’가 되었듯, 그는 30대 후반에 멸절된 오수개의 생물학적 복원에 매달려 2008년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수의학자들의 헌신으로 오수개의 원형을 세상에 공표했다. 초지일관, 엉겅퀴나 오수개나, 말하자면 미쳐야 미친다(불광불급不狂不及)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준 것이다. 그의 평소 어록(語錄)이 멋지고 의미심장하지 않은가. 세상은 이런 공의(公義)로운 인간들이 도처에 있기에 ‘굴러가는’ 것이 리라. 애쓰셨다. 고마운 일이다. 이어가고, 이어받는 일은 뒤에 오는 사람들이 할 일이지만, 의견비 건립연대 규명의 매듭만큼은 그의 어깨에 달려 있다.
덧붙임: 삼베옷을 멋들어지게 차려입고 오수까지 특별내방한 손환일 박사에게 지난 몇 달간 졸문을 쓰는 족족 보내드린다. 바쁜 가운데에도 잘 읽었다며 이모티콘 등을 보내오는 성의가 고맙다. 그런데 어제오후 나를 또 한번 감격시키는 글씨를 내밀었다. 지난 5월 23일 아버지의 상수연(上壽宴: 100세 축하잔치) 이야기를 읽고, 필이 꽂혀 귀한 글씨를 썼다는 것이다. 큰 글자 ‘학수구명’(鶴壽龜命)이야 십장생(十長生)을 뜻하는 건 알겠는데, 병서(竝書)한 초서 글씨를 어찌 알랴. 창피를 무릅쓰고 여쭸더니 <논어> <이인편>의 <父母之年 不可不知也 一則以喜 一則以懼>(부모님의 연세는 유념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편으로 생각하면 오래 사셔서 기쁘지만, 한편으로 생각하면 연로하셔서 두렵다) 구절이라 한다. 내가 7년전 본채 당호로 삼은‘애일당’(愛日堂)의 뜻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글을 써준 박사님께 감읍한 까닭이다. 전라고6회 동창회 | [찬샘통문 Ⅲ-10]아버지의 상수연(上壽宴) - Daum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