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女性의 位置]
을지로 네거리를 지나 진고개로 걸어가면서 영훈은 또 영훈대로 귀여운 인어를 생각하고 있었다.
『흘러 버린 과거에서 녹쓰러 버린 낡은 행복을 힘들여 뒤적거려 보는 것보다 현재 내 눈앞에 던져진 이 싱싱한 귀여움을 행복의 절정에까지 끌어올리는 노력이 인간 생활에 있어서 한층 더 귀중한 것이다.』
백연숙을 단념하고 선뜻 돌아서 온 자기의 생활을 영훈은 무척 귀여워하는 것이다.
『흘러 간 행복을 다시 한번 어루만져 보는 데서 한 토막 시심(詩心)은 발견할는지 모르나 그곳에 생활은 있을 수 없다. 생활은 항상 움직이고 있는 것이고 또한 앞으로 앞으로 끊임없이 전진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이 되는 것보다는 한 사람의 성실한 생활인이 영훈은 되고 싶은 것이다.
이윽고 두 사람은 진고개 입구 어떤 지하실 그릴에서 점심을 먹으며
『여자배한테 점심을 얻어 먹는 것, 다소 명예롭지 못한 노릇인 걸! 벌써 여러번 째가 아니오?』
뒤를 돌아보지 않은 덕택으로 맥주는 약속대로 두 병이 들어왔다.
『그럼 어때요? 남자배만 내라는 법은 없을 테죠?』
은주는 고기를 썰고 있었다.
『이러다가는 주객이 자꾸만 전도될 염려가 있는걸.』
『누구가 주고 누구가 객인데요?』
『남자가 점심을 사야 할텐데……』
『영훈씨의 논법, 다소 곰팡이가 쓸었어요. 남자와 여자가 같이 식사를 하게 됨 계산은 으레 남자가 치르거니 하는, 그런 종류의 여자를 좋아하세요?』
『좋아한다는 것보다도 그것이 오늘날의 상식이 되어 있으니까 말이오.』
『전차를 타도 표는 으례 남자가 사겠거니 영화관엘 들어가도 입장권은 응당 남자가 사겠거니하고 시치미를 딱 떼는 것이 오늘의 여자들의 상식이람 그러한 상식은 여성들 자신을 남성에게 예속시키는 결과를 손수 만들고 있는 것 뿐이지 뭐예요?』
『경제적 조건도 있을테니까……』
『노오!』
은주는 완강히 그것을 부인하며
『그것은 한낱 관념적인 관찰이예요.』
『그럴가?……』
『여자의 주머니가 남자의 주머니보다 훨씬 더 배불러 있을 때도 시치미를 곧잘 떼니까요.』
영훈은 웃었다.
『그러니까 남녀평등이란 말 뿐이지, 좀처럼 실현되기는 힘들꺼예요. 될수만 있음 남성들의 신세를 지지 않고 살 수 있는 생활태도만이 민주주의적인 동등권을 부르짖을 수 있을꺼예요. 그렇지 않아요?』
『음 ——─』
은주의 그러한 지성이 영훈에게 있어서 커다란 매력의 하나가 이미 되고있는 것이다.
『오늘날처럼 민주주의 사회체제에 있어서도 왜 걸핏함 남성들이 월권행위를 하느냐 하면 그건 모두가 다 경제적인 우월감이 뿌리 깊이 인백혀 있기 때문이지, 뭐 다른 거 있어요? 참된 자유주의를 여성들이 향유 하려거든 남성들의 덕을 보지 않고도 살아나갈 수가 있어야 해요』
『다소 딱딱한데……』
『그 딱딱한 것이 결국에 있어서는 좋은 거예요. 남성들이 여성들에게 돈을 쓰지만, 아주 대범한 얼굴로 돈을 쓰지만요. 그렇지만 마음속으로는 모두들 발란·씨이트 (貸借對照表)를 들여다보면서 채산을 맞추고 있는 거예요.』
『허어, 은주가 언제부터 그처럼 훌륭한 심리학자가 되었소.』
은주에게 다소 그러한 경향이 있는 줄은 알고 있었으나 남성들의 심리를 이렇듯 명확하게 분석해 낼 줄은 정말로 몰랐다.
『호호호……』
은주는 귀엽게 한번 웃어 보이며
『모두 다 마담·샹하이에게서 교수를 받은 거예요. 차 한잔 점심 한 그릇을 남자에게 얻어먹어도 그것이 성실한 여성일 것 같음 그만큼 마음의 부채를 느끼게 되니까 자연히 약해질 수밖에 없죠. 그리고 그처럼 약해지기를 남성들은 발란·씨이트를 들여다 보면서 은근히 바라고 있는 거라구요. 그리고 그 다음에 오는 것이 남성들의 월권이고 여성들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위기(危機)를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요. 호호호……』
나이프를 놓고 은주는 입을 막았다.
『음, 마담·샹하이는 확실히 나쁜 교사요. 재단법이나 가르칠 것이지, 그런 쓸데없는 말까지……이다음 만나면 항의를 제출해야겠소.』
그런 농담을 영훈은 하며 유쾌히 웃었다,
『그래 제 말이 맞지 않아요?』
『음, 일리는 있지만……』
『왜 일리 만이야요? 이리, 삼리까지도 있을 꺼예요.』
『어쨌든 그러한 심리 해부는 남성들에게 일대 위협을 주는 좋지 못한 이야기요. 남성들의 호의를 무시해도 분수가 있지……』
『그 놈의 호의가 무섭다구, 우리 집 마담이 그랬답니다. 하하하……』
입을 버리고 이번엔 웃었다.
『그렇지만 여성들이 남성들의 덕을 봐야만 하는 경우가 꼭 한가지는 있다고요.』
『그건 뭔데?……』
『체력상 어떨 수 없는 일이니까, 완력이 모자랄 때는 주먹을 좀 들어 달라는 것, 그것 한가지 만은 덕을 봐야 한다구요.』
『아하하핫……』
『그 밖에는 덕 볼 것이 하나도 없으니까, 필요 이상으로 머리를 숙이지 말라는 거야요. 호호호……』
커피를 마시며 둘이는 유쾌히 웃었다. 은주가 이처럼 흥미로운 화제를 연거퍼 꺼내서 자기도 웃고 영훈도 웃기고 하는 데는 그 화제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 이외에 또 한가지 중대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것은 식사 시간을 필요 이상으로 끌어나가려는 심산에서였다. 십 분이라도 더 영훈의 시간을 잡아먹어 주는 것이 은주에게는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종각 앞에서 기다리는 여인을 은주는 쭈욱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은주는 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벌써 한 시간이나 되었다. 그 전화의 여자가 누군지는 모르지만 입때까지 한길 가에서 기다리고 섰지는 않을 것이라고, 저으기 안심은 되지만 그래도 미심해서 은주는 화제를 좀 더 끌고 나갔다.
『우리 마담의 지론을 말함 말이야요.』
『응?……』
『마담의 말이, 여자가 애당초 어째서 결혼을 하게 되었나, 함 말이예요. 여자는 힘이 약하니까 이리저리 물리우고 뜯기우고 하잖겠어요? 그래 혼자서 살 수는 도저히 없으니까 남자의 보호를 받을 셈으로 결혼을 했다는 거예요. 말하잠 주먹 힘을 좀 빈 것 뿐이죠.』
『그러니까 일종의 보스 (문지기 주먹대장)로군요?』
『하하하핫……일어로 말함 요오짐보오가 되겠죠.』
『음, 그 쯤 되고 보면 남자의 시세가 아주 폭락인걸!』
『왜 있잖어요? 다방 같은 데서 거지가 들어 옴 문깐에 지켜 섰다가 막 때려 쫓는……하하하핫……』
『으와, 하핫……』
영훈은 완전히 백연숙의 존재를 잊어버리고 이 귀여운 약혼자가 발산하는 그윽한 분위기 속에 젖어 있는데 은주가 입을 또 열었다.
『암만 생각하두 삼십 분 가지군 잘 안될 것 같아요.』
『뭣이?……』
『아까 약속은 영훈씨의 시간 삼십 분만 절 달라구 했었지만 벌써 한 시간반이나 되잖았어요?』
『아, 그거 말이오?』
영훈은 후딱 제 시계를 들여다보면서
『삼십 분이 세 시간 돼두 무방하다니까 ——─』
『정말?……』
『글쎄 누가 거짓말을 합디까?』
『은주 정말 행복해요?』
『왜 또 갑자기……?』
『흐응, 그럴 이유가 있대요.』
『그 행복, 내게도 좀 나눠 줘요.』
『아, 영훈씨는 그럼 행복하지 못하나 봐요.』
『아, 그런 의미에서 말이오?』
『암만 해두 약간 우울해 보이는데……내가 행복해하는 고만큼 우울하나봐요?……』
『허어, 어째 그럴가?……』
『암만 생각해두 모를 일인데……』
『거 참 모를 일이예요. 난 이렇듯 행복한데 영훈씨는 저렇듯 우울해 보이는 게 암만 생각해두 이유를 모르겠어요.』
『내 얼굴이 그렇게도 우울해요.』
그러면서 영훈은 바로 식탁 맞은 편 바람벽에 걸린 무슨 약방 집 마아크가 붙은 체경을 후딱 들여다보았다.
『어디가?……이처럼 명랑한데……』
벙글벙글 영훈은 웃었다.
『얼굴은 일견 명랑한 것 같지만두……마음은 암만 해두 어두울 거예요.』
『응?……』
『하하핫, 뭘 그리 놀래요?』
『놀래긴……?』
『그러기에 아까 내가 뭐라구 했어요? ——─ 죄가 있어두 관용을 한다는 밖에……』
『또 죄인 취급이오?』
『아이, 웃어!』
은주는 익살 웃음을 하나 지으며
『자아, 인제 나가요. 벌써 한 시간 반이나 됐으니까요.』
『괜찮소. 세 시간은 앉아 있어야 은주의 마음이 편할테니까 ——─』
『후훗 ——─』
은주는 그 말에 한두 번 쿡쿡 웃음을 깨물다가
『괜찮어요. 인제 그만함 됐어요.』
『왜 좀 더 앉아 있습시다. 하루종일이라두……』
『아냐요. 필요 이상의 시간을 허비한다는 건 서루가 다 불경제니까요.』
『어째 오늘은 아까부터 경제 문제가 그처럼 빈번히 나올가?……』
『그럴 이유가 있대요. 후훗 ——─』
『그럴 이유라니?……』
『두 시간 가까이나 한길 가에서 기다릴 그런 쑥은 아닐테니까 말예요.』
『응?……』
영훈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졌다.
『누구예요?……』
밑도 끝도 없는 물음이다.
『누구라니?……』
『그이가 누구냐 말이예요.』
『그이?……』
영훈은 은주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은주의 표정 없는 새침한 얼굴이 레지뒤 먼 담벼락을 비둘기처럼 말똥말똥 바라보면서
『아까 종각 앞에서 영훈씨와 만나자던 그 여자가 누구냐 말이예요.』
『………………?』
너무나 갑자기 달려드는 토라진 질문이다.
『요것 봐라?……』
하는 생각이 든 것은 다음 순간의 일이었다.
『인제 나가요?』
냉큼 일어서서 계산을 하고 총총히 걸어 나가는 은주의 뒤를 영훈은 허둥지둥 따라나섰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