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109
1월20일[연중 제2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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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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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0zfQisjUDvc
[서울대교구 최봉용 베드로(가톨릭청년성서모임 담당)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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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지금 우리는 분명 의미있는 고통, 가치있는 시련을 겪고 있습니다!>
젊은 시절, 어울려서 운동하기를 참 좋아했습니다. 휴일이면 오후 내내 운동하는 것도 부족해서, 밤늦게까지 축구를 하고 농구를 했습니다. 다른 수도회 형제들과 시합이라도 있으면 내기를 걸었습니다. 이기면 삼겹살 무한 리필, 지면 수도원 돌아가서 라면에 찬밥. 형제들은 목숨을 걸고 공을 찼습니다.
이기고 지고를 반복하던 라이벌 팀에 시원하게 대승을 거둔 저녁이었습니다. 배도 고프겠다, 고기 뷔페집에 들어가서 원 없이 삼겹살을 구워 먹었습니다. 어찌 그뿐이겠습니까? 소맥도 제조해 마시고, 거기다 마무리로 철판 볶음밥까지 만들어 먹었습니다.
돌아오는 길 승합차 안에서 끝 기도도 바치고 묵주기도도 바치기로 했었는데, 죽었다 깨어나도 기도할 수 없었습니다. 정신도 오락가락 혼미해지고, 우선 배가 너무 불러 숨을 쉴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저는 한 가지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기도를 잘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 결핍이 필요하다는 진리. 사실 제대로 된 단식은 인간을 기도로 안내합니다. 단식을 제대로 하게 되면 정신이 맑아집니다.
단식은 인간을 약하게도 만들지만 강하게도 만듭니다. 참된 단식을 통해 인간은 가장 기본적인 욕구들과 본능을 스스로 통제하고 관리할 수 있게 됩니다. 자연스레 인간의 마음과 영혼, 감각과 오감들이 하느님을 향하게 됩니다. 이렇게 단식을 통해 기도할 분위기가 자연스레 조성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문화 안에서 단식과 기도는 언제나 함께 이루어졌습니다. 단식하는 날은 곧 기도하는 날이었습니다. 누군가가 단식하고 있다면 ‘지금 기도하고 있구나!’ 생각하고 방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에는 때가 있기 마련입니다. 단식할 때가 있다면, 단식을 그쳐야 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활동하시던 그 순간을 혼인 잔치에 비유하셨습니다.
혼인 잔치는 기쁨의 잔치요 축제의 잔치입니다. 예수님의 강생과 육화로 인해 시작된 공생활 기간은 일반 혼인 잔치와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성대한 기쁨과 구원의 축제였습니다.
구원과 은총의 시기에 단식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 순간 필요한 것은 만끽하고 즐기는 것입니다. 잔칫상에 올라온 맛갈진 음식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배불리 먹는 것입니다. 갓 수확한 포도로 만들어 내온 새 포도주를 큰 잔에 콸콸 부어 서로 건배하고 즐기는 것입니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중요시한 것은 부정한 것에 대한 단호한 기피였습니다. 율법 규정을 목숨처럼 여기며 철저히 준수하는 것이었습니다. 오랜 전통에 따라 그저 단식하고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새 포도주로 오신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외적인 그 무엇이 아니라, 내적 태도, 영혼의 상태임을 강조하셨습니다. 구원의 때에 합당한 근본적인 회개와 삶의 변화를 중요시하셨습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새 포도주는 언제나 청춘이시며 영원한 새로움이신 예수님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새 포도주이신 예수님은 언제나 새롭게 해석되어야 하고, 오늘 우리 각자의 삶 안에서 늘 새롭게 탄생해야 마땅합니다.
새 포도주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기 위해 우리 각자가 들고 있는 부대의 상태는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여기 저기 구멍나고 헤어진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지금은 우리 백성은 사상 초유의 대혼란을 겪고 있고, 하루하루 안갯속같이 불투명한 길을 걷고 있지만, 분명 의미 있는 고통, 의미 있는 시련이라고 생각합니다. 더 성숙하고 더 건강한 새로운 시대를 향해 나아가기 위한 과정이라고 확신합니다.
새 포도주이신 예수님께서는 지금 겪고 있는 시련을 통해 우리 모두 새로운 존재로 거듭 태어나기를 바라신다고 생각합니다. 새 포도주이신 예수님께서는 이 고통스러운 현실 안에도 분명 우리 가운데 항상 현존하시리가 굳게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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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GTU8MaYfE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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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는 제사일까, 축제일까?>
오늘 복음은 소위 ‘단식 논쟁’입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단식하는데, 왜 예수님의 제자들은 단식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생각은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담으려고 하는 시도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구약과 신약 예배의 차이에 관한 말씀입니다. 구약은 하느님의 용서와 자비를 바라는 제사 형식이었지만, 신약은 신랑을 맞이하는 축제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사실 신약에 와서도 구약의 예배 형식대로 돌아가려는 분위기가 많았습니다. 특히 중세 시대에 성체성사는 깊은 경외심으로 접근되어야 했습니다.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정의된 ‘실체 변화’ 교리는 축성된 빵과 포도주 안에 그리스도가 실재적으로 현존한다는 것을 강조했습니다. 이는 성체성사에 대한 헌신을 심화시키는 데 기여했지만, 동시에 영성체를 모독죄로 연결시키며 성체를 합당하지 않게 받을 경우 큰 죄를 범하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을 심어주었습니다.
이러한 성사의 신학적 강조는 신자들 사이에서 자신이 합당하지 않다고 여기는 지나친 양심의 가책을 유발했던 것입니다. 많은 평신도는 성체를 연 1회, 특히 부활 시기에만 영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으며, 엄격한 참회의 요구 조건은 많은 이들이 준비되지 않았다고 느끼게 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모독할 위험을 피하고자 차라리 영성체를 포기하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지나친 신중함과 성체성사에 대한 망설임은 지속적인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영성체를 멀리함으로써 많은 신자는 교회의 성사적 삶과의 중요한 연결을 잃어버렸습니다. 16세기에 등장한 종교개혁은 중세 가톨릭교회의 이러한 불균형에 대한 반응 중 하나였습니다.
마르틴 루터와 같은 종교개혁가들은 교회가 두려움과 법주의를 조장하고, 그리스도의 해방적 은총을 충분히 강조하지 않는다고 비판했습니다. 실체 변화와 같은 특정 가톨릭 성사적 관행에 대한 개신교의 거부는 이러한 역사적 긴장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분위기는 지금까지 가톨릭교회 내에서도 지속되고 있습니다. 성체를 영하면서 부담만 느껴야 한다면 멀어지는 편이 낫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체성사는 제사가 아니라 혼인 잔치여야 합니다. 마치 마리아 막달레나가 빈 무덤처럼 울고 있다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기쁨으로 그분을 붙들려고 하는 순간과 같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성모 마리아께서 엘리사벳을 방문했을 때 당신 안에 계신 아기 예수님의 활동을 깨닫고는 기쁨의 마니피캇을 부르신 모습과 같아져야 합니다. 이것이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넣는 예배방식입니다.
2013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신경섬유종증으로 외모가 심각하게 훼손된 비니치오 리바(53)를 따뜻한 포옹과 키스로 감싸 안아주는 모습이 사진에 담겼습니다. 리바는 이달 초 바티칸의 세인트 피터스 광장을 방문했다가 교황의 따뜻한 포옹을 받았습니다. 리바는 당시를 회상하면서 “꼭 천국에 있는 것 같았다. 그것은 오직 사랑이었고 세상이 바뀌는 순간을 체험했다.”라고 말했습니다.
리바는 당시 교황과의 만남을 생생히 기억했다. 그는 “내가 먼저 교황의 손에 키스했고, 교황의 다른 손은 나의 머리와 상처를 어루만졌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후 교황은 내 얼굴에 키스하면서 강하게 나를 끌어안았다. 나의 머리는 그의 가슴 앞에 있었고, 그의 손은 나를 감싸 안았다.”라며 당시를 떠올렸습니다. 그러면서 “교황의 어루만짐은 1분가량 이어졌지만, 나에게 그것은 영원 같았다.”라고 강조했습니다. 리바는 “교황은 완전히 침묵했지만, 아무 말을 하지 않는 것이 가끔은 더 많은 것을 말해준다.”라며 “당시 내 심장은 밖으로 튀어나올 것같이 강하게 뛰었다.”라고 회고했습니다.
이것이 신랑을 맞이하는 신부의 마음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우리가 성체를 영할 때의 기분이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을 느끼기 전까지는 그 기쁨이 그리워 단식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마더 데레사 성녀는 가난에도 불구하고 “기쁨은 영혼을 잡는 사랑의 그물이다.”라고 자주 말했습니다. 그녀의 기쁨은 신랑이신 예수님과의 친밀한 관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우리 신앙은 우울한 형식주의 예배에 참여하는 신앙이 아닙니다. 기쁨을 지향하는 신앙입니다. 그 기쁨을 절실히 바라기 때문에 단식하는 신앙입니다. 성체성사의 혼인의 의미가 올바로 회복되지 않으면 가톨릭교회는 점점 위기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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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밥을 할 때 ‘뜸’을 들여야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뜸’을 들여야 맛있는 밥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은 ‘밀당’을 하기도 합니다. 시장에서 물건을 살 때 ‘흥정’을 합니다. 너무 싸게 사려하지 않으면 주인도, 손님도 적당한 가격으로 흥정합니다. ‘뜸, 밀당, 흥정’은 어쩌면 사람 사는 재미인지 모르겠습니다. 친한 사이에는 ‘농담’도 합니다. 가끔 농담을 진담으로 알아들어서 오해가 생기기도 하지만, 농담은 분위기를 유쾌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부부가 헤어지려고 이혼 법정으로 가면 판사가 이야기를 경청한 다음 판결 내리기 전에 ‘숙려기간’을 줍니다. 이제 헤어지면 남이 되기에 잠시 서로의 처지에서 생각하는 시간을 줍니다. 이런 숙려기간을 통해서 서로 이해하고, 서로 용서하며 다시 부부의 인연을 이어갈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왜 단식하지 않느냐는 사람들의 질문에 마치 흥정하듯이, 밀고 당기듯이, 뜸을 들이듯이, 숙려기간을 주듯이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명쾌하게 정리하십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피아노를 배우면서 왼손과 오른손의 역할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오른손은 마치 숨을 쉬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오른손은 멜로디이기에 숨을 쉬듯이 자연스러워야 한다고 합니다. 왼손은 머리와 같다고 했습니다. 리듬을 맞추면서 오른손이 가는 길을 밀어주고, 보듬어 주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본당에는 두 개의 조직이 있습니다. 두 개의 조직이 본당 사제를 도와서 공동체를 위해 봉사합니다. 하나는 사목 평의회입니다. 다른 하나는 재정 평의회입니다. 사목 평의회는 마치 오른손과 같습니다. 각 분과는 1년 동안 해야 할 행사를 기획합니다. 본당의 행사는 전례의 주기에 맞추어서 진행됩니다. 멜로디와 같습니다. 한쪽에 치우쳐서도 안 되고, 너무 모자라서도 안 됩니다. 재정 평의회는 왼손과 같습니다. 본당의 행사가 잘 진행될 수 있도록 예산의 범위를 정합니다. 예산이 부족하면 행사를 줄이도록 요청하기도 합니다. 꼭 필요한 행사라면 필요한 재정을 충당할 수 있는 방법을 찾습니다. 사목자는 사목 평의회와 재정 평의회의 의견을 경청하면서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날 수 있도록 공동체를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삼위일체인 하느님께서 친교와 사랑으로 구원의 역사를 이끄시듯이, 사목 평의회와 재정 평의회 그리고 사목자는 공동체에 하느님의 사랑이 드러날 수 있도록 협조해야 합니다.
국가의 기능도 3개의 헌법기관이 있습니다. 사법부, 행정부, 입법부입니다. 사법부는 법과 원직에 따라서 공정하고 정의롭게 판단해야 합니다. 군사 독재 시절에 사법부가 행정부의 시녀처럼 판단했던 오욕의 역사가 있습니다. 억울한 사람이 법의 이름으로 감옥으로 갔고, 죽었습니다. 양심수가 생겼습니다. 행정부는 공정하게 법을 집행해야 합니다. 부정과 부패가 만연한 나라는 행정부가 소수의 이익을 대변합니다. 빈부의 격차가 심해집니다. 국가의 질서가 무너져 내립니다. 부실 공사로 아파트가 붕괴하기도 하고, 멀쩡하게 보이는 다리가 무너지기도 합니다. ‘밤새 안녕’이라는 말이 인사말이 되기도 합니다. 입법부는 국민을 위한 법을 제정해야 합니다. 당리당략에 의해서 국가와 국민의 안전을 뒤로하는 법을 제정해서는 안 됩니다. 입법부는 토론과 대화를 충분히 거쳐야 합니다. 민주주의 사회는 다당제를 받아들입니다. 1당의 입법부는 소수의 이익을 대변하는 법을 만들 수 있습니다. 2025년 대한민국은 ‘뜸, 밀당, 흥정, 숙려기간’을 겪고 있습니다. 그 시작은 행정부에서 선포한 ‘비상계엄’입니다. 집단 지성이 발휘 되어서 헌정질서가 회복되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국가와 국민을 위한 대한민국이 되면 좋겠습니다.
이냐시오 성인은 ‘영신수련’에서 신앙인들은 3가지 유형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첫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깃발아래 있어야 한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생활태도는 하나도 변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의 가치와 세상의 즐거움이 가득하기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먼 훗날의 일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깃발 아래 왔다가, 금세 달콤한 유혹에 빠져서 세상의 것들에 빠져드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예수님께로 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자신들의 기준에 맞추어서 와야 한다고 말합니다. 세 번째 부류의 사람들은 가난과 겸손이 주는 기쁨을 알고, 세상의 가치보다 훨씬 소중한 주님을 따르는 즐거움을 알기에 언제나 주님의 깃발 아래 서있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예수님께서도 하느님을 따르는 것이 힘들었기에 오늘 우리는 이런 말을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한 구원자가 되신 것은 고난을 겪으신 다음이라고 말합니다. 2025년 새해에는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겸손, 가난, 나눔, 봉사의 삶을 살아가도록 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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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의정부교구 김동희 모세 신부님]
오늘의 복음은 어제의 복음과 내용이 이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이십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과방장을 감탄하게 하신 ‘좋은 포도주’이십니다.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는 첫 회칙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의 1항에서 구약을 뛰어넘는 신약의 새로움을 이렇게 표현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윤리적 선택이나 고결한 생각의 결과가 아니라, 삶에 새로운 시야와 결정적인 방향을 제시하는 한 사건, 한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 ‘한 사람’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한 사건’은 나와 온 우주를 뒤흔드는 그분과의 만남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신앙생활은 이제 우리네 인간의 노력이기보다는 자신이 만난 하느님의 놀라운 사랑에 대한 응답입니다.
이에 화답하듯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 1항 첫 시작에서, 예수님과의 만남에서 어떤 일들이 이루어지는지를 분명히 밝혀 주셨습니다. “복음의 기쁨은 예수님을 만나는 모든 이의 마음과 삶을 가득 채워 줍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죄와 슬픔, 내적 공허와 외로움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기쁨이 끊임없이 새로 생겨납니다.” 예수님께서는 카나의 혼인 잔치를 다시 활기차게 하신 ‘차고 흘러넘치는’ 충만한 포도주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만난 우리는 모두 ‘사랑의 취객’입니다. 감사와 찬미를 그분께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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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2,18-22: 신랑을 빼앗길 날 단식하리라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18절)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19-20절). 식사를 거르는 것만 단식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참된 단식은 우리의 악습을 멀리하고 끊는 것이다. 죽음이란 것은 음식에 굶주려서가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해 굶주린 결과이다. 진짜 죽음은 주님의 말씀을 듣기를 거부하는 사람에게 일어난다. 그분이 사람들 가운데 사시는 동안에는 슬퍼할 수 없었다. 그들이 영으로 사랑했던 분이 육으로도 곁에 계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신랑이시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부활하시고 하늘에 오르신 뒤로도 신자들은 그분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다. 이제 그분의 재림을 기다리며 우리는 단식을 하는 것이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21절) 헌 옷과 헌 가죽 부대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자녀가 되기를 거부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계속 세속의 것, 하느님의 뜻과는 다른 길을 고집하며 헛된 것에 마음을 쓰며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란 말을 들으면 자기와는 맞지 않기 때문에 말씀을 멀리한다.“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22절) 포도주는 내적으로 새롭게 해 주고, 옷은 외적으로 감싸준다. 둘 다 영성의 의미이다. 옷은 세상을 비추기 위하여 실천하는 선행을 가리키고, 새 포도주는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열정을 뜻한다. 이 두 가지로 우리는 하느님 앞에 내적인 영적 쇄신을 이루게 된다. 새것과 낡은 것이 서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은 예수께서 선포하신 복음, 즉, 하느님의 나라는 혁신적이고도 위력적이어서 지금까지와는 달리 그에 맞갖는 회개를 통하여 새로운 자세를 가져야 한다. 복음과 하느님의 나라를 받아들일 수 있으려면,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묵은 나를 버리고 새로운 나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우리의 삶이 그리스도와 함께 항상 기쁘고 주님으로 충만한 삶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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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의 가르침은, 예수님의 방식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단식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헌 옷에 기워 댄 새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진다.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 2,18-22)
1)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의 단식은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참회하는 단식’이었고, ‘슬퍼하는 단식’이었습니다. 그래서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라는 말씀은, “메시아가 이미 와 있으니,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참회하고 슬퍼하는 단식을 하면 안 된다.”라는 뜻입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이미 오셨으니, 메시아를 기다리는 단식을 할 이유가 없습니다. <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라 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구약시대는 메시아를 기다리면서 참회하던 ‘슬픔의 시대’였지만, 신약시대는 이미 오신 메시아 예수님과 함께 기뻐하는 시대입니다.
2)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라는 말씀은, 당신의 수난과 죽음을 암시하신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은, 인간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한 희생이었기 때문에, 우리 입장에서는 “죄를 짓고서 예수님을 떠나 있는 시간”을 가리키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죄를 짓고서 예수님을 떠나 있다가, 회개하고 다시 예수님에게로 돌아갈 때, 그때 회개의 표시로 단식을 할 수 있는데, 그 단식은, 자신의 죄를 뉘우치고 회개한다는 점에서는 ‘슬픔의 단식’이 되지만, 용서를 받는다는 점에서는 ‘기쁨의 단식’이 됩니다.
<우리 교회에서는 예수님의 수난에 동참하기 위해서 ‘재의 수요일’과 ‘성금요일’에 공적으로 단식을 합니다. 그 단식은, 꼭 슬픔의 단식인 것만은 아니고, 용서와 구원의 기쁨이 들어 있는 기쁨의 단식입니다.>
3) 단식이란, 먹는 것을 중단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원래 단식은 목숨을 걸고 하는 일입니다. 단식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참되고 영원한 생명을 죄 때문에 얻지 못한다면, 살아 있어도 살아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는 ‘참회’이고, 육신의 목숨을 버려서 영혼의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는 것을 나타내는 ‘믿음과 희망’입니다.
바로 그런 의미가 아니라면, 또 자신의 목숨을 걸고 하는 것이 아니라면, 단식은 쓸데없는 헛고생이 될 뿐입니다. 인간 세상에서 어떤 정치적인 주장을 하는 방법으로 단식을 선택하는 경우가 흔히 있는데, 위선인 경우도 많고,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일로 그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 단식은 아무 의미 없는 일입니다.
4) 21절-22절의 ‘새 천 조각, 새 헝겊, 새 포도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뜻하고, ‘깁는다.’는 말과 술을 부대에 담는다는 말은 그 가르침을 실천하는 신앙생활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새롭고 권위 있는(하느님의 힘이 들어 있는) 가르침”입니다.(마르 1,27)
‘새롭다.’는 ‘하늘에서 왔다.’로 해석할 수 있고(묵시 5,9), ‘하느님의 힘이 들어 있는 가르침’은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요한 6,68) 반대로 ‘헌 옷, 헌 가죽 부대’는 형식적이고 위선적인 생활이고, 생명력 없는 쭉정이 같은 생활입니다.(마태 3,12)
5)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가르침은 ‘예수님의 방식’으로 실천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고, “신앙생활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생활이다.”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소원을 빌기 위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낙타와 바늘귀 이야기’에 나오는 어떤 부자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 부자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을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십계명을 잘 지키면 된다고 대답하셨는데(마르 10,19), 십계명을 지키는 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한 점이 있다는 것을 그 자신도 느끼고 있었고(마르 10,20), 예수님께서는 그의 십계명 실천에 부족한 점이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마르 10,21)
재물에 대한 집착과 애착심을 버리고, 능동적으로 사랑을 실천하면서,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신앙생활이 곧 ‘십계명을 완전하게 지키는 생활’이고,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는 생활’입니다.
만일에 재물에 대한 애착심을 버리지도 않고, 능동적으로 사랑을 실천하지도 않으면서, 십계명을 겉으로만 지킨다면, 그것은 새 포도주를 헌 부대에 담는 어리석은 일입니다.
<오늘날에도, 죄를 안 짓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것만으로는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간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마태 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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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예수님과 바리사이들의 논쟁은 모든 복음서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이런 논쟁 안에서도 전해집니다. 오늘 복음은 서로 대조되는 것들을 통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바리사이들과 제자들, 헌 옷과 새 천 조각, 헌 부대와 새 포도주입니다.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단식은 유다교에서도 일상적으로 행하던 일들이었고 신앙을 지닌 이들이 실천해야 할 덕이었습니다. 또한 단식은 회개와 속죄를 위한 표지로 구약 성경에서도 자주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올바른 단식이 무엇인지 가르치기도 하셨습니다.(마태 6,16-18 참조)
초기 교회에서도 단식에 대한 언급을 찾을 수 있습니다. 『열두 사도의 가르침: 디다케』에서는 신자들이 수요일과 금요일에 단식하도록 권고합니다.(8,1 참조) 지금은 금요일에만 단식하지만 교회에서는 전통적으로 수요일과 금요일에 단식을 해 왔습니다.
바리사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대답은 많은 경우에 두 가지 차원의 의미를 가집니다. 하나는 일상적인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신학적인 의미입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느냐?” 혼인 잔치는 삶에서 가장 중요한 축제로 기쁨과 풍성함이 그 특징입니다. 신랑, 곧 예수님과 함께 있는 시기는 기쁨의 시기이면서 구원의 시기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입니다. 신랑을 빼앗긴다는 비유는 예수님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복음은 예수님과 함께 새로운 시간이 시작되었음을 강조합니다. 이 시간은 옛것과는 구분되는 구원을 위한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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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 무엇인가 쇄신하려 할 때 자주 인용하는 성경 구절입니다. 꼭 어떤 일을 새로 시작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늘 새로워지고 싶어 합니다. 이러한 새로운 변화를 위하여 필요한 것은 옛것을 버리기만 하는 어리석음이 아닙니다. 옛것을 알아 새롭게 하려는 용기와 희망이 필요합니다. 또한 새로운 것을 시작하기에 두려움이 있다면 어쩌면 새롭게 살 용기가 없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낡고 초라하며, 고집스러운 생각과 편견 등이 드러날까봐 두려워하는 것일지 모르겠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2019년 주님 성탄 대축일 밤 미사 강론에서,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올바르게 사고하고 행동하기 때문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실수할 수도 있고 때로는 일을 망쳐 버리기도 하지만 끊임없이 우리 존재 자체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두려움을 떨쳐 버리고 용기를 가지고 우리의 모습을 먼저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은 이기적인 자기애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을 뜻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새로운 삶, 곧 당신의 삶에 초대해 주셨고, 우리의 그 어떤 모습도 한결같이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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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정인준 파트리치오 신부님]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구약성경 어디에서도 ‘정의의 왕’이라는 의미의 ‘멜키체덱(히브리어: מלכי-צדק)’의 신원에 대한 정확하게 설명하는 곳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다만 그에 대해서는 영원한 사제라는 설명 외에는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창세기에 따르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사제이며 살렘의 왕이던 멜키체덱은 아브라함을 만나 빵과 포도주를 주고 아브라함은 그에게 십일조를 바칩니다. (창세 14,18.21)
살렘은 때때로 예루살렘으로 언급되기도 합니다.(시편 76,2) 시편에서 다윗은 장차 오실 메시아에 대해서 언급하면서 “너는 멜키체덱과 같이 영원한 사제다.”(시편 110,4)라는 표현을 합니다. 여기에 기인하여 유대인들은 메시아는 제사장과 왕직을 겸한 분으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멜키체덱에 대한 신원에 대해 설명을 합니다.
“먼저 그의 이름은 ‘정의 임금’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또한 살렘의 임금 곧 평화의 임금이었습니다. 그는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으며 족보도 없고 생애의 시작도 끝도 없는 이로서 하느님의 아들을 닮아, 언제까지나 사제로 남아 있습니다.” (히브 7,2-3)
‘멜키체덱’이라는 말이 ‘정의의 왕’을 의미하듯 그는 역사적인 인물이 아니고 상징적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시편저자도 또한 히브리서 저자도 멜키체덱을 실제의 인물로 표현하는 것으로 보아 상징적인 것은 아니고 실제로 ‘영원한 대사제’로 교회는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예수님께서 멜키체덱의 서열에 따라 영원한 사제가 되신 것으로 믿는 것입니다.
히브리서간의 저자는 예수님을 멜키체덱과 비교해서 하느님 아버지께서 뽑으신 메시아로서의 ‘영원한 대사제’이심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대사제가 되는 영광을 스스로 차지하신 것이 아니라, 그분께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하고 말씀하신 분께서 그렇게 해 주신 것입니다.”(히브리서 5,5)
히브리 서간의 저자는 이어서 인간적이면서도 구원의 근원이신 메시아이며 대사제이신 예수님에 대해서도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으며, 하느님에게서 멜키체덱과 같은 대사제로 임명되셨습니다.”(8-10절)
예수님께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마르 2,18)라는 사람들의 질문에 주님께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십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19-20절)
예수님께서 헌옷과 새 헝겊, 헌 가죽부대와 새 포도주에 대한 비유를 들어 말씀하시지요. 예수님께서 헌 옷에 새 헝겊을 대고 기우면 헌 옷이 새 천 조각에 땅겨 더 심하게 찢어져서 다 버리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또한 새 포주를 헌 가죽부대에 담으며 그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부대도 다 버리게 된다고 설명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들을 들어 결론적으로“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22절)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구약의 시대가 가고 당신의 시대가 왔음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구약의 단식의 의미는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도 심지어는 제자들까지도 이해하지 못하는 ‘신랑을 빼앗길 날’에 대한 말씀을 통하여 진정한 단식의 의미를 주님께서 설명하십니다.
장차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에 높이 매달려서 죽음을 맞이하심으로서 새롭고 참다운 ‘회개의 단식’을 세우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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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코.2,22)
새 포도주가 발효하면 헌 가죽 부대는 건조하고 경직되어 쉽게 찢어지지만 새 가죽 부대는 유연하게 팽창하면서 발효하는 포도주를 품을 수 있습니다.
좋은 포도주를 만들려면 헌 것이든 새 것이든 포도주와 가죽 부대는 서로 일치와 통합을 이루어야 합니다.
새 것과 옛 것이 충돌하여 일치와 통합을 잃으면 공동체는 분열과 갈등을 빚고 개인도 치우친 인간이 되어 광적으로 되거나 혹은 무관심한 사람으로 됩니다.
주님의 새 빛을 받은 사람은 자신의 낡은 방식에서 벗어나 유연한 관계할 줄 알아야 분열되지 않고 새로운 것도 품을 수 있게 됩니다.
자신의 오래된 감정만 지나치게 사용하면 합리적인 새로운 사고를 하는데 어렵게 됩니다. 오래된 이성을 지나치게 사용하면 우리는 따뜻한 감정을 나누며 공감하는 것이 어색합니다. 이성이나 감성이 한 쪽에 고착되거나 고정 관념이 강할수록 우리는 새로움을 보거나 받아 들이지 못합니다.
개인과 사회, 정치와 문화의 갈등이 생기는 것은 새로운 것을 담을 수 있는 새 가죽 부대를 우리가 준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새 가죽 부대는 낡은 자신을 벗어버리고 주님을 입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맺어온 방법에 안주하고자 하는 우리는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으려고 합니다. 모든 관계의 분열과 갈등은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지 않고 헌 가죽 부대에 담기 때문입니다.
헌 가죽 부대가 찢어져 흐르는 포도주는 우리가 찌른 주님의 옆구리에서 흐르는 피와 물과 같습니다. 우리가 낡은 자신으로 분열 할 때마다 희생되신 주님의 옆구리에서는 피와 물이 흐릅니다. 새 포도주인 주님의 새로운 영이 왔지만 우리는 낡은 자신의 가죽 부대만 고집합니다.
새로운 영이신 주님과 일치하기 위해서 우리는
낡은 인간을 벗고 그리스도를 입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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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성녀 마더 데레사 수녀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나는 죽어가는 사람들의 눈빛을 늘 잊지 않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쓸모없어 보이는 사람들이, 죽는 순간에 ‘사랑받았다’라고 느끼며 세상을 떠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라면, 나는 무슨 일이라도 할 수 있습니다.”
이 세상은 쓸모 있는 사람, 쓸모없는 사람, 그리고 도움 되는 사람, 도움 되지 않는 사람 등으로 구분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창조물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쓸모 있고, 도움 되는 사람입니다. 이 사실을 잊어버리고 세상의 시선으로만 보게 되면,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따를 수 없게 됩니다. 따라서 인간에 대한 사랑, 상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상대가 ‘사랑받고 있다’라는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정말 어렵고 힘든 일일까요? 많은 봉헌과 거창한 희생을 해야만 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따뜻한 미소만으로도 충분히 사랑받고 있음을 느낄 수 있게 됩니다. 웃으며 인사만 잘 해도 상대는 어느 정도 ‘사랑받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자기 안에 있는 주님을 상대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만남은 사랑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이 질문에서 사랑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단순히 유다교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있음에 대한 못마땅한 마음만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무조건 단식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단식의 의미를 알아야 하며, 그래서 단식을 언제 하고 언제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분별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단식도 바로 사랑에 그 이유가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단식해야지, 그냥 막연한 전통을 따르기 위한 단식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주님과의 관계에서, 또 사람과의 관계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주님의 일을 이해할 수 있으며 또 그 안에 늘 함께하시는 주님을 만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사랑을 잊어버리고 세속적인 기준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게 된다면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이 세상 안에서 주님의 일도 발견할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기준을 새롭게 세워야 합니다. 주님의 기준이 ‘사랑’에 있듯이, 우리도 ‘사랑’에 기준을 두면서 주님과 함께하는 우리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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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새로움>
마르코 2,18-22 (단식 논쟁 - 새것과 헌것)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단식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깁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헌 옷에 기워 댄 새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진다. 또한 아무도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포도주가 부대를 터뜨려 포도주도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새로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 2,22)
기쁨은 늘
앞선 것과 다른
처음 만나는 기쁨
그리하여 새로운 기쁨
기뻐하며
나날이 조금씩
나는 늘 한껏 오르네
슬픔은 늘
앞선 것과 다른
처음 만나는 슬픔
그리하여 새로운 슬픔
슬퍼하며
나날이 조금씩
나는 늘 깊이 여무네
희망은 늘
앞선 것과 다른
처음 만나는 희망
그리하여 새로운 희망
희망하며
나날이 조금씩
나는 늘 차지게 영그네
절망은 늘
앞선 것과 다른
처음 만나는 절망
그리하여 새로운 절망
절망하며
나날이 조금씩
나는 늘 낮춰 솟아나네
만남은 늘
앞선 것과 다른
처음 만나는 만남
그리하여 새로운 만남
만나며
나날이 조금씩
나는 늘 넓게 열리네
헤어짐은 늘
앞선 것과 다른
처음 만나는 헤어짐
그리하여 새로운 헤어짐
헤어지며
나날이 조금씩
나는 늘 애틋이 이어지네
당신은 늘
앞선 당신과 다른
처음 만나는 당신
그리하여 새로운 당신
당신과 함께
나날이 조금씩
나는 늘 당신의 참된 벗이네
나는 늘
앞선 나와 다른
처음 만나는 나
그리하여 새로운 나
나와 함께
나날이 조금씩
나는 늘 오롯이 나로 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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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형식도 중요하지만, 내용이 더 중요하다>
그동안 익숙해 있던 생활의 패턴을 바꾸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나름대로 지켜온 전통과 고정관념이 나의 삶을 지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정된 의식의 전환을 통해서 새로움이 주어집니다. 과거에 매여 있으면 열린 미래를 볼 수 없습니다. 예전에는 이렇게 했는데.... 어떤 못된 습관을 관행이라고 합리화시키는 고집을 피워서는 발전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우리 자신이 변화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를 분간하고(로마 12,2) 거기에 나의 마음을 두어야 합니다.
요즘 여야의 정치 논리를 보며 잇속 챙기기에 바쁜 많은 정치인이 거짓말을 밥을 먹듯이 하는구나! 하고 생각하게 됩니다. 공정한 원칙과 신뢰는 사라지고 자기 이득만 앞세웁니다. 그들을 백성을 위하는 대변자로 뽑았다는 사실에 자괴감이 듭니다. 그 백성에 그 지도자라고 한다면 할 말이 없습니다. 어느 세월에 정신을 차리고 제대로 된 사람이, 아니 하느님께서 뽑으신 사람을 통해 정의와 평화를 가져올지 안타까운 마음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새로운 구원의 시대를 열어주셨고, 이 구원에 동참하기 위해서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상응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옛 사고방식대로는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질 구원을 알아들을 수 없습니다. 갇혀 있는 만큼 새로운 것을 볼 수 없게 됩니다. 기득권을 내려놓으면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습니다. 앞으로 나아가지는 못할망정 과거로 회귀해서는 안 됩니다. 근본정신을 망각한 과거에로의 회귀는 퇴보이기 때문입니다.
단식에 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에 대한 답의 결론은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르2,22).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새 가르침을 주시면 그대로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났으면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의식을 전환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은 단순히 율법의 규정에 따라 단식할 때가 아닙니다. 단식하는 이유는 죄를 벗는 속죄의 행위나 회개의 표시로 그리고 이웃을 사랑하는 구체적인 행위로 하는 것이지 단순히 식사를 절제하거나 육식을 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몸매 관리나 건강을 위해서 단식합니다. 그렇지 않더라도 금요일 고기를 먹지 않는 금육재를 잘 지킵니다. 그러나 단식을 해서 이웃에게 어떤 실제적인 도움을 주었는가? 생각해 보면 그 단식의 의미가 드러납니다. 예수님께서는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마태 9,13)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올바른 단식에 대해 “너는 단식할 때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너에게 갚아주실 것이다”(마태 6,17-18).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단식은 보이기 위한 단식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 매달려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의 사랑에 동참하는 단식이어야 합니다. 믿는 이들은 단순히 굶는 것을 단식이라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새 포도주를 새 부대에 담기를 소망하며 우리를 부르십니다. 당신의 사랑으로, 그리고 이웃사랑으로 초대하십니다. 구체적 이웃사랑 실천이 없는 단식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적을 가진 단식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의미 있는 단식, 내용 있는 삶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은혜를 간구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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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분별의 잣대>
“사랑 또는 예수님”
오늘 복음의 주제는 “단식논쟁-새것과 헌것”입니다. 저는 논쟁은 가급적 삼가며 괄호안에 넣고 침묵하는 편입니다. 이보다 시급하고 해결해야 할 일이 많을뿐 아니라 사실 논쟁은 결론이 없음은 물론 분열로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요 서로의 관계도 불편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단식하면 떠오르는 말마디가 있습니다. 수십년전 일화이고 수차례 인용했지만 지금도 생생합니다. 영적 통찰력이 뛰어났던 장상으로 기억합니다. “밥안먹고 교만한 것보다는 밥먹고 겸손한게 낫다”라는 지극히 평범단순한 언급입니다. 단식하고 남판단하는 교만보다는 단식 않고 남판단하지 않는 겸손이 낫다는 것입니다. 수행하다 보면 비교와 더불어 판단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단식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구원받습니다. 침묵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구원받습니다. 구원의 잣대는 단식이나 침묵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사랑 앞에 모든 수행 덕목은 상대화 됩니다. 침묵이 대부분인 독거 노인 경우 같은 경우는 침묵보다는 말해야 하고, 가난이 일상화된 이들은 단식이 아니라 먹어야 합니다. 많이 먹고 많이 말하는 편에 속한 사람이 유념하여 실천해야할 단식과 침묵입니다.
그러나 영성생활에 단식이나 침묵이 유익한 것은 분명합니다. 수행의 원칙은 자발적 사랑입니다. 단식을, 침묵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발적 사랑으로 수행할 때 진정 자유로울 수 있으며 남판단하지 않은 겸손에 이를 수 있습니다. 분별의 잣대는 사랑입니다. 단식은 인간의 법이나 사랑의 환대는 신적 법이기에 단식에 우선하는 환대입니다. 환대의 사랑 때문에 단식도 일단 보류하는 것입니다. 단식의 대원칙은 이미 주님이 분명히 밝혔습니다.
“너는 단식할 때에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라. 그리하여 네가 단식한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그러면 숨은 일도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아 주실 것이다.”
바로 이것이 단식뿐 아니라 모든 수행의 대원칙입니다. 단식뿐 아니라 모든 수행이 겸손하고 지혜로워 이처럼 사람들에게 감쪽같이 숨겨진 하느님만이 아는 수행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 “왜 당신의 제자들은 요한의 제자들이나 바리사이의 제자들처럼 단식하지 않느냐?” 질문하는 사람들은 바로 무지의 반영입니다. 분별의 잣대는 단식이 아니라 사랑임을 몰랐던 것입니다. 단식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구원받습니다. 단식은 상대적이나 사랑은 절대적입니다. 예수님의 분별의 지혜가 빛을 발합니다.
“혼인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느냐? 신랑이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주님과 함께 기쁘게 지내야 할 축제인생을 고해인생으로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무 때나 단식이 아니라 단식의 때에 단식하고 나머지는 축제인생 기쁘게 살라는 것입니다. 수행은 결코 경쟁 대상이 아닌 자발적 사랑의 표현이 되어야 하며 사랑의 잣대로 분별되어야 합니다. 이래야 꼰대 소리를 듣지 않습니다. 발상의 전환으로, 사랑의 잣대로 분별해야 할 함을 주님은 한마디로 정리해 주십니다.
“새포도주는 새부대에 담아야 한다.”
의식의 전환, 발상의 전환으로 늘 새포도주의 현실 내용을 담아내야할 새부대의 마음을, 사고를, 의식을 지니는 것입니다. 늘 예수님의 마음을 분별의 잣대로 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생각하고 실천했을까?” 생각하며 끊임없이 내 이해지평을, 사고지평을, 마음을 넓히고 깊이 새롭게 하는 것입니다. 결국 분별의 잣대는 사랑 또는 예수님임을 깨닫습니다. 우리가 분별의 잣대로 삼는 예수님은 어떤 분입니까? 히브리서가 위대한 대사제 예수님의 정체를 명쾌하게 밝혀 주십니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너는 멜키체덱과 같이 영원한 대사제다.”
하느님께서 친히 인정해 주신 아드님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자신도 약점을 짊어지고 있으므로, 무지하여 길을 벗어난 이들을 너그러이 대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습니다.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은 예수님뿐입니다. 우리 역시 주님처럼 일상의 크고 작은 시련과 고난을 통해 순종을, 겸손을, 비움을 배우는 영적성장의 계기로 삼는다면 날로 구원의 근원인, 예수님을 닮게 되고 진정 분별의 잣대인 지혜와 사랑을 지닐 수 있을 것입니다. ‘똑똑하고 착하다’라는 말보다는 ‘지혜롭고 자비롭다’라는 표현이 예수님께 적절하고 이런 모습을 닮고 싶습니다.
분별의 잣대는 사랑입니다. 더 분명히 하면 분별의 잣대는 하느님의 현현인 지혜롭고 자비로우신 예수님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을 닮아 날로 지혜롭고 자비로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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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같아지셨으니 같아지자!>
히브리서의 중요한 가르침 가운데 하나는 주님께서 우리와 같아지심이고, 주님께서 우리와 같아지셨으니 우리도 주님과 같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같아지심 중 하나가 우리 인간과 똑같이 유혹받으셨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가 우리 인간과 똑같이 고통받으셨다는 것이며, 우리 인간과 똑같이 고통을 피하고 싶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유혹과 고통은 인간의 조건이고, 유한하기에 받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뜻대로 다 할 수 있다면 고통이란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고통이란 것이 본래 내가 원하지 않고 싫어하는 것을 경험하는 것이고, 그러므로 원하는 대로 되지 않거나 그 반대로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굶주림은 본성상 인간이 너무도 싫어하고 원치 않는 것이며, 반대로 먹는 것은 즐거운 것이고 맛있는 것을 먹는 것은 가장 큰 즐거움이기에 식도락이란 것이 있지요.
그러니 굶주림 또는 먹지 못하는 고통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래서 저의 어렸을 때의 고통은 굶주림의 고통이었고 이 고통과 비교하면 다른 고통은 사치스러운 고통이었습니다.
어쨌거나 고통은 이렇게 원하는 것,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하는 것이요, 반대로 원하지 않는 것, 하기 싫은 것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원하는 대로 곧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수 있다면, 그리고 원치 않는 곧 하기 싫은 것을 다 피할 수 있다면 나는 늘 즐거울 것이고 고통이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나는 그리고 인간은 유한하기에 원하는 대로 다 할 수 없고, 그래서 나는 그리고 인간은 고통을 피할 수도 면할 수도 없으며, 그래서 고통을 인간의 조건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고통이 이렇게 인간의 조건인 측면도 있지만 영적인 측면도 있습니다. 내 원하는 대로 되게 하고 원치 않는 것은 피하려고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내 뜻대로 되지 않을 때 그때 나의 유한성을 인정하고 하느님께 눈을 돌리면 그래서 주님처럼 고통 가운데서 하느님을 보게 되면 영적인 고통이 됩니다.
오늘 히브리서도 얘기하듯 주님도 고통을 면하게 해달라고 성부께 기도하셨고, 그러나 내 뜻대로 말고 아버지 뜻대로 하시라며 아버지 뜻에 순종하심으로 당신의 고통이 영적인 고통이 되게 하셨습니다.
이처럼 영적인 고통은 우선 시선 돌림입니다. 고통에 갇히지 않고 시선을 하느님께 돌리는 것이고 이것이 실은 기도입니다. 그런데 우린 고통에 신음만 할 뿐 기도로 바꾸는 데 얼마나 자주 실패합니까?
그러므로 고통스럽기에 시선을 하느님께 돌리고,
고통 가운데서 하느님을 발견하는 그런 관상적인 기도를 우린 배워야 합니다.
다음으로 오늘 히브리서 말씀처럼 순종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 계실 때, 당신을 죽음에서 구하실 수 있는 분께 큰 소리로 부르짖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경외심 때문에 들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내 뜻대로 할 수 없기에 고통을 수용할 수밖에 없지만 내 뜻대로 할 수 있어도 하느님 사랑 때문에 내 뜻을 꺾고 하느님 뜻에 순종하는 법을 배우는 겁니다.
이것이 영적인 기도의 더 높은 차원입니다. 시선을 고통으로부터 하느님께 돌릴 뿐 아니라 사랑 때문에 내 뜻을 꺾고 하느님 뜻 따르기를 한 번 하고 두 번 세 번 반복하여 순종하는 법을 배우고 습관화하는 것입니다.
성인들은 주님을 본받아 이런 영적인 고통을 받고 사랑의 순종을 산 분들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본받는다는 것은 주님께서 이 순종의 근본이라는 말이지요. 우리도 근본에서 본을 받는 사람이 되고 성인이 되라고 가르침 받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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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마르 2,19ㄷ)
<단식의 참 의미!>
오늘 복음(마르2,18-22)은 '단식 논쟁과 새것과 헌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이렇게 묻습니다.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제자들은 단식하는데, 선생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마르 2,18)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십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단식할 수야 없지 않으냐?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때에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마르 2,19)
그리고 이어서 '새 천 조각은 새 옷에 대고 깁어야 하고,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단식의 참의미를 묵상해 봅니다. 단식은 '구원행위'입니다. 신랑이신 예수님, 새것과 새 포도주이신 예수님을 만나기 위해 노력하는 '구원행위'입니다. 지금 우리와 함께 계신 임마누엘이신 주님과 함께 하기 위한 '영과 육의 쇄신행위인 회개행위이며, 기도행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혼인 잔치라는 구원 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하느님 나라 안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는, 곧 신랑이신 예수님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신랑이신 예수님을 빼앗긴 때'입니다.
때문에 '지금은 단식할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의 나라 안에 들어가려고 애써야 하는 '단식의 때'입니다. 예수님이라는 새옷과 어울리게 새것이 되려고, 그리고 새 포도주이신 예수님을 담는 새 부대가 되려고, '일일신우일신(日日新又日新) 해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드님이시지만 고난을 겪으심으로써 순종을 배우셨습니다. 그리고 완전하게 되신 뒤에는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셨으며, 하느님에게서 멜키체덱과 같은 대사제로 임명되셨습니다."(히브 5,8-10)
우리도 함께 노력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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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마르 2, 19)
잃어본 뒤에야
비로소 알게 되는
소중한 사랑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본질이
함께하는 사랑임을
너무도 잘 압니다.
잔치와 단식은
모두 신랑이신
예수님을 향하여
있습니다.
새롭게 되지
않으면
잔치도
단식도
빛을 잃습니다.
그릇된 마음을
버리는 것이
단식입니다.
담아야 할 것을
담는 것이
단식의 올바른
정신입니다.
예수님의
삶에는
수난도
있습니다.
수난을 통하여
드러나는
우리들
마음입니다.
사랑은
찢어지는
이 여정까지
건너뛰지
않습니다.
더 견고해지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새 포도주이신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통하여
결실을
맺으십니다.
새 포도주를
마주하기 위해
새 부대가
되는 기쁨을
맛보게 하십니다.
쓴맛과 단맛을
번갈아
함께 맛보며
더 깊어지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잔치이며
또한 단식입니다.
십자가의 여정에
함께하지 않고서는
우리의 욕망은
결코
복음을 향하지
않습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가장 좋으신
하느님 사랑을
체험하도록
오늘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단식은
이제 그만
우리의 아집을
내려놓고
하느님 사랑에
하나 되는
것입니다.
잔치도 사랑
단식도 사랑
공적인 생활도
십자가의 수난도
모두 사랑입니다.
더 사랑하고
더 집중하기 위해
겸손과 절제라는
단식이 있습니다.
단식의 순간을
놓치지 않는
새 포도주이신
예수님을
새 부대에 담는
이 순간이길
기도드립니다.
우리는
우리들 마음에
무엇을 담고
사는지를 묻는
소중한
아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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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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