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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민족, 영원한 공동체 아닌 상상의 공동체”…통념을 넘다
김호기 |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베네딕트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
지난해 말 타계한 베네딕트 앤더슨 미국 코넬대 국제학과 명예교수는 “근대 국가 울타리 안에서 운명을 함께한다고 믿는 집단, 그들이 만든 상상의 공동체가 바로 민족”이라고 주장했다.
전후 사상 70년에서 가장 뜨거운 논쟁을 이룬 쟁점의 하나는 민족주의다. 민족주의는 민주주의와 함께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등장한 비서구사회 신생 독립국의 기본 이념을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민족갈등은 계급갈등과 함께 정치·사회 질서를 뒤흔들어 놓았다. 이러한 역사와 현실은 인문학은 물론 사회과학에서 자연스럽게 민족과 민족주의에 대한 탐구 및 토론을 활성화시켰다.
민족주의 연구에서 가장 획기적인 주장을 제시한 것은 어니스트 겔러, 베네딕트 앤더슨(Benedict Anderson·1936~2015), 에릭 홉스봄으로 대표되는 민족주의에 대한 ‘현대주의적’ 이론이었다. 철학자이자 인류학자인 겔러, 역사학자이자 정치학자인 앤더슨, 역사학자인 홉스봄은 근대화 과정에서 민족주의가 형성됐고, 이 민족주의가 민족을 만들었다는 혁신적인 견해를 내놓았다. 기존의 통념을 뒤흔든 이러한 이론틀은 민족과 민족주의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요구하고, 나아가 뜨거운 논쟁을 일으켰다.
앤더슨의 <상상의 공동체>(Imagined Communities, 1983)는 현대주의적 이론을 대표하는 저작이다. 책 제목이 암시하듯 민족은 민족주의 지식인들이 만들어낸 ‘상상의 공동체’라는 게 앤더슨의 주장이었다. 앤더슨의 이론은 민족을 영원한 공동체로 인식하는 ‘영속주의적’ 이론에 이의를 제기하고 민족주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촉구했다는 점에서 역사학·문학·사회학·인류학·정치학 등에 결코 작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세계화 시대에 민족주의가 한편에선 약화되고, 다른 한편에선 강화되는 역동적 현실을 지켜볼 때 <상상의 공동체>는 여전히 문제적이면서도 음미하기에 충분한 내용을 담고 있다.
■‘상상의 공동체’로서의 민족
<상상의 공동체>의 부제는 ‘민족주의의 기원과 전파에 대한 성찰’이다. 앤더슨은 이 저작에서 민족과 민족주의에 대한 독특한 해석을 제시한다. 그에게 민족이란 주권을 가진 것으로 상상되는 정치 공동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민족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실재의 공동체가 아니라 근대 민족주의자들이 만들어낸 상상의 공동체라는 점이다.
앤더슨은 상상의 공동체로서의 민족에 대한 인식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으로 ‘인쇄 자본주의’를 주목한다. 인쇄 자본주의의 등장은 문필가들에게 라틴어가 아닌 지역 주민들이 읽을 수 있는 지방어로 저술하게 했고, 이때 민족주의 지식인들은 자신의 민족주의 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민족을 공동체로 상상할 수 있게 하는 저작들을 발표했다. 이러한 민족주의 지식인들의 저작들을 통해 지역 주민들은 상상의 공동체인 민족을 실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게 됐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앤더슨에 따르면, 민족주의에는 세 유형이 존재한다. 아메리카 대륙의 제1세대 크리올 민족주의, 유럽 대륙의 제2세대 종족 언어 민족주의와 이와 연관된 관 주도 민족주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신생국의 민족주의가 그것이다.
주목할 것은 그가 민족주의의 기원을 유럽이 아닌 아메리카 대륙에서 찾았다는 점이다. 백인 이주민의 후손인 크리올들은 선구적으로 자신들의 ‘민족됨’을 자각했고, 이는 민족주의의 형성으로 귀결됐다. 유럽 민족주의가 크리올 민족주의를 모방하고 표절했다면, 신생국 민족주의는 크리올 민족주의와 관 주도 민족주의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
요컨대 앤더슨은 민족을 중시하는 민족주의를 18세기 후반이라는 특정한 시기에 여러 역사적 동력들이 교차해 등장한 특수한 문화적 조형물이라고 파악한다. 이러한 이론화를 통해 앤더슨은 민족을 불변하는 실체로 보는 통념에 맞서서 민족과 민족주의에 대한 새로운 성찰을 제공한다.
■민족주의의 빛과 그늘
<상상의 공동체>는 출간되자마자 민족주의를 연구해온 인문·사회과학자들의 큰 관심과 논쟁을 일으켰다.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민족을 과거로부터 이어진 영원에 가까운 존재로 파악하는 견해가 작지 않은 영향력을 행사해온 상황에서 앤더슨의 주장은 혁신적인 발상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앤더슨의 이론은 같은 현대주의적 이론가로 지목되는 겔러의 <민족과 민족주의>, 홉스봄의 <1780년 이후의 민족과 민족주의>에서 제시된 이론과 매우 유사했다.
앤더슨의 민족주의 이론은 유럽의 역사적 경험을 돌아볼 때 나름대로의 경험적 적실성을 가진 논리였다. 근대 자본주의 국가는 사회통합을 위해 민족주의를 발전시켰고, 이 과정에서 공동체로서의 민족을 호명했다. 하지만 이러한 현대주의적 이론에 대한 비판도 만만치 않았다. 사회학자 앤서니 스미스의 민족주의 이론은 대표적인 반론이었다. 스미스는 민족을 같은 장소에서 살아온 소속감 및 결속력을 가진 공동체로 파악하고, 근대 이전에도 이 민족이 역사적 실재로서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스미스의 이론은 유럽과 다른 동아시아에서 경험적 적실성이 높은 것으로 보인다. 근대 이전에 한국·중국·일본의 경우 민족과 민족주의는 실재했다고 보는 게 더 온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학자 신기욱은 앤더슨 이론보다 스미스 이론에 주목해 한국 민족주의의 역사적 계보와 정치적 함의를 추적하기도 했다.
21세기 현재, 한편에선 서로 다른 민족주의들이 격렬히 충돌하는 반면, 다른 한편에선 세계시민사회의 등장과 다문화사회의 도래에서 볼 수 있듯 민족주의의 배타성이 시험대 위에 올라 서 있다. 분명한 것은 강대국과 약소국이 경쟁하는 지구적 차원에서 민족주의를 일방적으로 거부할 수만은 없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해서 민족주의에 내재된 권위주의와 인종주의를 승인해서도 안된다. 민족적 정체성과 세계시민적 정체성을 어떻게 생산적으로 공존시킬 것인지는 21세기 정치사회 및 시민사회에 부여된 매우 중대한 과제다.
■한국어판 저작은
1991년에 나온 <상상의 공동체>의 개정증보판은 인류학자 윤형숙 목포대 교수에 의해 우리말로 옮겨졌다. 책 말미에 덧붙여진 윤 교수의 ‘역자 해설’은 이 저작에 대한 이해를 돕고 있다.
■“민족이 먼저 형성” 한국 민족주의 바탕 앤더슨 이론 비판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를 겪고 이로부터 독립을 이룬 역사적 경험은 20세기 우리나라를 강렬한 민족주의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했다. “민족의 혈통은 영구적이다. (…) 오늘날 소위 좌우익이란 것도 결국 영원한 혈통의 바다에서 일어나는 일시적인 풍파에 불과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김구의 <백범일지> 가운데 ‘민족국가’의 한 구절이다. 이러한 김구의 주장에 국민 다수는 작지 않은 공감을 표명해왔다.
민족주의가 민주주의와 함께 광복 이후 우리 사회를 대표해온 이념인 만큼 많은 인문·사회과학자들은 민족주의를 다각도로 연구해 왔다. 역사학자 이기백과 사회학자 신용하가 대표적인 민족주의 옹호자라면, 역사학자 임지현과 정치학자 권혁범은 주목할 만한 민족주의 비판자다. 민족주의 비판자들은 민족주의에 내재된 과도한 집단주의·권위주의·국가주의에 초점을 맞췄다.
한국 민족주의의 특징에 주목해 앤더슨의 민족주의 이론에 대해 반론을 제기한 대표적인 연구로는 사회학자 신용하의 논문과 신기욱의 저작을 들 수 있다.
신용하는 “‘민족’의 사회학적 설명과 ‘상상의 공동체론’ 비판”(2006)을 통해 앤더슨 이론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그에 따르면, 앤더슨의 상상적 공동체 이론은 역사적 인과관계부터 잘못돼 있다. 앤더슨은 민족보다 민족주의가 먼저 등장했다고 본 반면, 신용하는 민족이 먼저 형성되고 이어서 민족주의가 출현했다고 파악했다. 민족주의 문필가들의 저작들이 이미 형성돼 있던 민족의 민족의식을 강화해서 민족주의 형성에 나름대로의 역할을 했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신기욱 역시 <한국 민족주의의 계보와 정치>(원제: Ethnic Nationalism in Korea, 2006)에서 앤더슨의 민족주의 이론에 이의를 제기했다. 그는 한국의 민족주의를 ‘종족적 민족주의’로 이해할 것을 제안했다. 한국의 종족적 민족주의는 이중적 특징을 갖는다. 긍정적 측면에서 그것은 반식민주의·반제국주의 이데올로기로서의 역할을 담당하고 산업화를 위한 개발 윤리의 토대를 이뤘다. 하지만 부정적 측면에서는 인권과 시민권의 침해를 정당화하는 이념으로 작동하기도 했다.
21세기 세계화 시대와 정보 시대에 민족주의는 여전히 ‘양날의 검’이다. 민족주의에 내재된 권위주의와 배타성은 거부돼야 한다. 하지만 동시에 세계적 차원에서 갈수록 치열해지는 국가 간 경쟁을 고려할 때 민족주의의 영향력은 상당 기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