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65:14는 하느님을 끝까지 거역한 자들과 하느님께 신실하게 남은 자를 대조하는 문맥 속에서 주어진 말씀이다. 하느님을 따르는 "종들"은 구원과 회복으로 인해 기쁨과 찬양을 누리지만, 하느님을 버린 자들은 심판으로 인해 슬픔과 통곡을 경험하게 된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과 신실한 자들에 대한 구원을 함께 강조하며, 나아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완성될 하느님의 나라를 바라보게 하는 중요한 전환점에 위치한 말씀이다. 유대 백성들이 하느님께 충실하다는 것은 그들이 바빌론 망명생활에서 돌아와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고 흩어진 민심을 모아 나라를 새롭게 출발시키겠다는 다짐이며 그 가운데 야훼 숭배가 중심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유대 백성이나 오늘날 기독교파들이나 또는 시계탑 종교는 그들의 하느님을 숭배한다고는 하지만 따져보면 그들 조직을 세워나가겠다는 발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들 조직의 철학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내 세우고 그 조직의 수장들이 하느님의 대변자가 되어서 그들을 중심으로 그들의 조직을 확장해 나가려는 시도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기독교회들은 신실한 교인들을 중심으로 하늘 천국, 지상천국, 마음 천국이라는 세 종류의 천국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교인들은 이미 마음 천국에서 산다고 떠들어 댄다. 비슷하게도 시계탑 종교는 앞으로 다가올 낙원이 있고 현재 그들의 연합을 영적 낙원이라 주장하며 그들의 연합을 떠나면 어두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으로 선전한다. 이처럼 모든 종교들은 그들의 상상의 영역을 마치 실제로 존재하여 경험할 수 있는 대상으로 선전한다. 18세기의 독일 철학자 칸트는 사람들의 이러한 지적 논리의 잘못된 사용을 논파하여 사람들에게서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가를 인간의 정신 능력으로 잘 설명하였다. 그는 사람들이 사물을 인식하게 되는 과정을 감성과 지성으로 구분하여 인간이 사물을 시공간적으로 파악하려는 선천적인 능력과 그것을 지적으로 논리화 시킬 수 있는 선천적인 방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밝혔다. 그 방식에 의하면 마치 말을 배우기 위한 능력이 먼저 존재하여야 말을 배울 수 있는 것처럼 우리에게 다가온 현상을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체계를 세우려는 기본적 방식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는 반드시 조건이 따라 붙는다. 이러한 지성이 사용되려면 그것의 재료는 우리가 현실에서 경험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일어난다. 사람들은 어떤 권리를 취하게 되면 그 권리를 남용하게 되는 경향이 발생한다. 우리는 흔히 그것을 '월권'이라 부른다. 인간이 사물을 파악하여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을 한도를 넘어서 남용하려는 월권적 행위가 시도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곧 상상의 영역인 종교에서 흔히 일어난다. 그들은 그들의 경험과 전혀 무관한 가상의 교리를 재료로 해서 인간이 선천적으로 지닌 지성의 방식으로 논리화를 시도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시계탑의 핵심적인 교리인 '1914년 왕국설립설'을 연대계산이라는 수학적 논리화를 시켰고, 그들의 교제 관계를 '영적 낙원'이라는 표현으로 지성화 시킨 것이다. 이것들은 명백히 인간 지성의 월권 행위이지만 신자들은 그것이 월권적이라는 것을 모른 채, 그들의 처해진 현실과 부합되는 팩트인 것처럼 받아들이게 된다.
그러므로 종교적 세뇌 또는 종교의 지적 논리화가 얼마나 사람들을 그릇 인도하는 지 알 수 있다. 사람들은 이러한 그릇된 종교 논리화에 빠져들어가는 이유는 사람에게 언제나 자기에게는 비록 적은 확률이라도 불운이 아니라 행운이 임할 수 있다는 도박적 심리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도박에서 벗어나려면 그 도박이 결코 자기에게 이로울 수 없다는 사실을 확실히 깨닫는 것이 필요한 것처럼, 종교의 영적 감옥 또는 마약에서 벗어나려면 가상의 종교적 교리들이 인간의 선척적 지적 능력을 월권적으로 사용했다는 분명한 깨달음이 필요한 것이다. 하느님이 계시다면 우주 저 너머에 계시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연의 모든 존재하는 것들의 총체가 우리의 경험적 하느님이란 사실과 우리에게 희망이 있다면 그 희망을 우리의 노력으로 이룰 수 있다는 사실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