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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팀의 새로운 사령탑 조광래 감독. 그는 2011카타르 아시안컵을 대비해 과감히 새로운 선수를 기용하였다.
지동원,손흥민,구자철,윤빛가람 등 그가 발탈한 어린선수들은 마음껏 기량을 뽑내고
한국 대표팀의 기둥이었던 박지성,이영표는 이 대회를 끝으로 명예로운 은퇴를 하였다.
비록 숙전 일본에게 승부차기 패해 이번에도 아시안컵 우승을 거두지 못했지만
어린선수들로 3위를 기록하며
세대교체의 초석을 다졌고, 조광래식 축구의 색깔을 분명히 보였던 대회였다.
이번 대회를 통해 외신과 국내언론,팬들에게 최고의 선수로 평가 받은 선수 이야기를 할려고 한다.
공격형 미드필더 역활을 완벽히 수행해 득점왕에 오른 구자철선수는 아니다.
지동원도 아니고
손흥민도 아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바로
조광래호의 새로운 심장 이용래 선수다
9년전....,
대한축구협회에서 선발된 유망주 자격으로 FC메츠에서 유학까지 했으며
2003년에는 핀란드에서 열린 U17월드컵 3경기 모두 풀타임 출장하고
3번째 경기인 시에라리온전에는 결승골을 넣기도 했다
2005년에는 한살 어린 나이지만 U20대표팀에 발탁되기도 했다.
그는 당시 신생팀이었던 모교 유성생명과학고를 전국 최정상으로 올려놓았다.
공격력도 뛰어났지만 FC메츠시절 기른 수비력으로 인해 공수 모두 뛰어난 전천후 선수가 되었다.
이미 그는 고교무대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는 그런 선수였다.
한국 축구의 미래다!!
미래의 대한민국 중원을 책임일 아이다!
...........,
그가 고교 시절 줄곧 듣던 말들이다.
그는 고교시절 최고의 선수였다.
일반인들에겐 무명선수인 이용래의 뜻밖의 화려한 과거다.
고교 최고의 유망주였던 그가 최고의 대학인 고려대에 가는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리고 그는 당시 청소년대표 감독인
박성화감독의 부름을 받으며 앨리트코스를 계속 밟아가고 있었다.
그렇게 그의 축구인생은 탄탄대로 였다.
하지만 이용래의 비상은 여기까지였다......,
그는 U-20 청소년 월드컵 출국을 며칠 앞둔 상태에서 큰 부상을 입었다.
자체 연습경기를 치르던 도중 태클을 시도하다 발목이 골절되면서 재활에만 무려 6개월이 걸리는 큰 부상이었다.
결국 거동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이용래는 본선 무대에 서지 못했고,,,,
팀 동료들이 세계무대에 서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 후 이용래는 재활에 매달렸지만 6개월이 지난 뒤에도 부상 공포에 시달리며 자신감을 잃었고 점점 잊혀져 갔다.
대표팀에도 더 이상 이름을 올리지 못했다.
그때부터 그는 대학 생활 4년을 부상과 함께 보내야 했다.
한 학년 선배 박주영이 ‘축구 천재’ 칭호를 들으며 자퇴하고 화려하게 K-리그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동안
이용래는 병상에 누워있는 시간이 더 많았다. 조금만 무리를 하면 발목에 통증이 찾아왔다.
그리고 대학교 4학년이던 2008년에는 골반에 심각한 통증을 느꼈다.
마지막 대학 대회라 통증을 참고 경기에 나섰지만 그의 플레이는 이미 정상이 아니었다.
이 경기를 지켜보던 K-리그 스카우터들도 “이용래는 끝났다”고 평했다.
축구계에서 이상한 소문이 나돈 것도 이쯤이었다.
많은 이들은 “이용래가 4년 내내 부상에 시달렸다. 이제는 축구 선수로는 뛸 수 없을 정도의 몸 상태다.
회생 불가다”라고 쑥덕거렸다.
이용래가 대회에 나서 관중석에라도 앉아 있으면 여기저기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원래 말은 사람들 사이에 오르내리면서 더 부풀려 지는 법.
K-리그 스카우터들이 이용래를 외면하는 건 당연한 일처럼 여겨졌다.
그는 K-리그에 가고 싶었다.
대학 내내 보여준 건 없지만 대학 졸업을 앞둔 2009년 K-리그 드래프트 신청서를 냈다.
그가 선택할 길은 어차피 이 길밖에 없었다.
하지만 중·고등학교 시절 ‘천하의 이용래’를 기억하고 있는
동료들과 학부형들에게 망가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 드래프트장에 직접 가지 못하고 후배의 전화를 기다렸다.
초조한 마음으로 전화기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시간이 흘러도 전화벨은 울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드래프트가 끝나가는 상황에서도 연락은 오지 않았다.
모든 걸 놓으려는 순간 전화벨이 울렸다.
저기 형.....,
번 외 지 명 이에요.....,
“형, 번외지명이예요. 경남이요.”
그는 만감이 교차했다.
그는 현실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번외지명으로 입단한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에게는 K-리그 입성 자체가 꿈일 수도 있지만
엘리트 코스를 모두 밟아온 이용래는 죽고 싶을 만큼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
이 순간 드래프트장에서도 한바탕 난리가 났다.
이용래의 진가를 예전부터 잘 알고 있던 학부형들은 “용래가 세상에 어쩌다 저렇게 망가졌대”라면서 수군거렸다.
중·고등학교 시절 이용래를 지도했던 스승들도 번외로 지명된 그에게 위로 전화를 했다.
은사들에게도 그의 번외지명은 충격이나 마찬가지였다.
한국 축구 최고의 유망주라던 그는 이렇게 연봉 1,200만 원을 받는 연습생 신분이 됐다.
그는 수많은 그저그런..
자기 앞날을 걱정해야되는...,
그런 평범한 선수로 전락하............,
지 않았다.!!!
그가 낙담하고 있는 사이 ......
U-17 대표팀에서 그를 지도했던 윤덕여 경남 수석코치로부터 전화가 왔다.
“지금 그럴 때가 아니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자. 당장 짐 싸서 경남으로 내려오라.”
이용래는 은사의 전화를 받고 곧바로 경남 클럽하우스가 있는 함안으로 내려갔다.
이때부터 이용래는 매일을 자기 자신과 싸워야했다.
훈련장에서는 자신이 가진 모든 능력을 쏟았고 훈련이 끝나면 치료실에 가 살다시피했다.
이미 바닥까지 친 자존심은 더 이상 꺾일 것도 없었다.
매일 잠들면서 ‘내일은 또 다른 뭔가를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다짐했다.
패스 플레이를 중시하는 조광래 감독과
U-17 대표팀 시절 자신을 지도했던 윤덕여 코치가 한 팀에 있으니 든든하기도했다.
꾸준한 치료 덕분에 발목과 골반 통증도 서서히 사라졌다.
비록 예전의 경기력은 아니었지만 점점 몸상태가 좋아지는 걸 스스로도 느꼈다.
그의 첫 목표는 경남에서 지속적으로 경기에 나서는 것이었다.
경남은 선수층이 그리 두터운 편이 아니었지만 그의 몸상태로 보나 경기력으로 보나
그가 많은 경기에 출전하기에는 무리가 있어보였다.
하지만!!!!!
그는 2009시즌 경남에서 30경기에 나서 6골 6도움을 기록하며 맹활약했다.
30경기 중 28경기가 풀타임이다.
이용래 자신도, 조광래 감독도 믿기 힘든 결과였다.
조광래 감독은 그에게 공격과 수비를 오가는 중앙 미드필더라는 중책을 맡겼고
그는 생소한 이 포지션에서 기대에 부응했다.
완벽하고 화려한 부활이었다.
그의 부활은 데뷔 시즌에 그치지 않고
2010시즌에도
32경기에 출장해 4골 1도움을 올리며 경남의 6강 플레이오프 진출에 일등공신이 됐다
그는 이번 시즌이 끝난 뒤 믿기지 않는 소식을 들었다
태극마크...,
2011년 아시안컵 예비엔트리 47명에 이름을 올린 것이다.
이용래는 박지성, 이청용, 기성용 등 쟁쟁한 선수들과 함께 미드필더 후보로 선정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다.
K-리그 입성 2년 만에 누린 경사였다.
대표팀 최종 엔트리 발탁 여부를 떠나
대표팀에서도 그의 실력을 인정했다는 점은 엄청난 변화였다.
하지만 예비엔트리는 어디까지나 예비엔트리일 뿐이다.
대표팀의 제주도 전지훈련 소집 명단 24명에 그의 이름은 없었다.
전지훈련 소집 명단 두 배수에 가까운 예비엔트리 발탁이 그가 누릴 수 있는 기쁨의 전부였다.
그는 ‘더 열심히 하면 나중에는 기회가 한 번 오리라’는 마음으로 툭툭 털고
예비엔트리 발탁 자체에 감사했다.
이 정도 인정받은 것만 해도 그에게는 격세지감을 느낄 만한 일이었다.
이 시점 그에게는 겹경사가 일어난다.
대학 시절부터 이용래를 눈여겨보던 수원 윤성효 감독이 그에게 이적 제안을 보내 온 것이다.
수원의 리빌딩을 위해서는 그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판단에서였다.
2년 전 연봉 1,200만 원을 받던 이용래는
이적료는 6억 원이라는 어마어마한 금액으로 수원에 새 둥지를 틀게 됐다.
수원은 그를 잡기 위해 바이아웃 금액에 준하는 거액을 경남에 지불했다.
그런데 이때 또 놀라운 소식 하나를 접하게 됐다.
대표팀 전지훈련 중이던 정조국이 프랑스리그 진출을 앞두고 전지훈련에서 제외돼
참가자 한 명이 더 필요했고
조광래 감독이 예비엔트리에 있던 이용래를 낙점한 것이다.
이용래는 얼떨결에 부랴부랴 제주도로 내려갔다.
꿈에나 그리던 대표팀 입성을 드디어 이루는 순간이었다.
이용래에게 이 현실은 꿈만 같았다. 이렇게 그의 대표팀 ‘연습생’ 생활을 시작됐다.
이용래는 쟁쟁한 선수들 틈에 껴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땜빵용’ 선수라고는 믿기지 않는 활약을 펼쳤다.
명지대와의 연습경기에서는 2개의 도움을 기록하면서 완벽에 가까운 경기를 선보였다.
이용래는 보름 동안의 전지훈련에서 모든 걸 쏟아냈고
조광래 감독은 결국 아시안컵 본선 엔트리에 과감히 이용래를 발탁했다.
이용래는 보름 간의 대표팀 연습생 생활을 끝내고 마침내 당당한 태극 전사가 됐다.
그렇게 출전하게 된 아시안컵!!!!
그는
누구보다도 간절했고
누구보다도 빛났으며
누구보다도 열심히 뛰었다.
팬들은 점점 그를 신뢰하게 되었고....,
아시안컵 최고의 선수로 평가받게 되었다.
아직 그는 자신의 기량의 반도 못보여줬다고 한다.
그가 어디까지 가는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옆에서 항상 응원해주길 바란다.
[자료출처]김현회 기자님 칼럼.
용래선수에게 그런 과거가 있는줄 몰랐네요. 계속 치고 올라가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