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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느티신부님>
■마르코 6,1-6
+찬미 예수님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여러분들, 일주일에 두 번 하던 강의가 없어지니, 일주일에 한 번 제 목소리 들으니 반갑죠?
저도 반갑습니다.
오늘 정말 날이 더웠어요.
그래서 한 번도 안 틀던 에어컨을 켰어요.
그런데 켠 이유 중 하나가 지금 아픈 고양이 때문이지요.
알다시피 제게는 이제 20살이 된 루비와 5살 먹은 초코라는 고양이, 두 마리가 있습니다.
루비는 사람으로 따지면 한 140살 정도 산 거죠.
고양이나 개들의 1년은 보통 사람이 7년을 산 것이지요.
그래서 빨리 헤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루비가 한 1년 전부터 좀 몸이 많이 쇠약해지다가, 2주 전부터는 아예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입에서도 핏물이 보이고
그래서 며칠 전에 병원에 갔었죠.
갔더니 방광암이다.
하루만 늦게 갔어도 다음 날 죽을 상황이었는데 그래도 어떻게 다시 살려 데리고 왔습니다.
그래서 아침저녁으로 제가 주사 놓아주어야 하고, 또 혼자서 먹지 못하기 때문에 죽을 만들어 약과 함께 주사기로
하루에 여러 번 넣어줘야 합니다.
전혀 먹지 못하다 그거라도 받아먹으니 오줌 누러 갈 때만 이제 일어나지만, 그래도 아무튼 살아있는 게 고맙습니다.
이제 호스피스 단계로 들어간 것 같아요.
아시는 분은 아시지만, 저는 개들도 참 수십 마리 길렀죠.
마지막 개를 배티 성지에서 보내고 난 다음부터는 다시는 개는 기르지 않겠다고 했죠.
그래서 지금도 개는 너무 좋아하지만 기르지 않습니다.
헤어지는 게 너무 힘들어서요.
루비는 20년 전에 들어왔으니까, 뭐 나를 찾아왔죠.
고양이는 집사를 자기가 선택한다고 그럽니다.
루비나 또 마지막 성당 서원동에서 들어온 초코나, 내가 어디서 데리고 온 것이 아니라
두 아이가 전부 사제관 앞에 와서 나를 기다렸던 것 같아요.
그래서 두 마리 다 데리고 살고 있는데, 그래도 루비가 며칠 전에 그냥 급하게 가지 않고,
내가 보낼 마음의 준비하면서 주사 놔주고 밥 먹여주고 하는 시간이 있으니 고맙죠.
사실 루비는 초코가 들어오기 전에는 내 사랑을 혼자 독차지했었습니다.
그런데 초코가 들어오고 난 다음부터는 많이 상처받은 것 같아요.
초코는 워낙 사람을 잘 따르고 루비는 좀 차가운 것이 매력인데, 초코가 온 다음부터는 나한테 잘 오지도 않았죠.
그래서 좀 미안한 마음도 있어서 미안하다고 얘기했습니다.
여러분들 가운데도 반려견 반려묘를 기르시는 분들은 한 번은 맞이해야 할 때가 오지요.
저는 내 손으로 묻은 개들이 정말 수십 마리가 됩니다.
아무튼 제가 요즘의 근황을 조금 얘기를 드렸습니다.
그래서 마음이 요즘은 좀 편치 않죠.
그래도 병원에서 죽어 오지 않고 살아서 와서, 나랑 살 기간을 갖고 있다는 것이 저는 고마울 따름입니다.
오늘 복음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다른 얘기가 좀 길어졌었네요. 미안합니다.
여러분들 아시죠? 사제들은 출신 본당에서는 사제 생활 못 합니다.
그것은 오늘 예수님처럼 예언자는 자기 고향에서 존경받지 못한다, 어린 시절 내 과거의 삶을 다 알고 있기에 쉽지 않은 겁니다.
저도 그전에 집안 행사에 가면 집안 어른들 가운데 교우들이 아닌 분들이 많았죠.
지금은 거의 신자가 되셨지만, 별의별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이제 신부 생활은 할 만큼 했으니 나와서 장가가야 하지 않느냐,
좋은 규수 봐 두었으니 더 나이 먹기 전에 신부 생활 청산하고 장가가라는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은 적도 있어요.
그래서 어느 때부턴가는 집안 행사에 가지 않게 됐습니다.
그러니 또 안 간다고 어른들은 서운해하셨지요.
아무튼 이런저런 이유로 사제들은 자기 출신 본당에서 본당 신부를 못 합니다.
예수님은 자기 고향 나자렛에 왔을 때, 아주 정말 엄격한 시험을 당하십니다.
사실은 예수님의 삶 전체가 어떻게 보면 돌아가실 때까지 수모의 삶인데,
그중에서 고향에서 당한 수모만큼 아픈 것은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에 나오는 것처럼 기적을 행하지 않으신 유일한 장소가 바로 나자렛이 아닌가,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죠.
나자렛을 피해서 다른 곳으로 가실 수 있었을 텐데 왜 하필 고향에 와서 수모를 당하셨는가?
나자렛을 찾아가신 이유는 장원 급제하여 금의환향, 그런 마음으로 찾아가신 건 아니겠죠.
고향이라고 하는 곳은 우리 마음속에 편한 곳입니다. 그리고 기댈 수 있는 장소죠.
아마 그래서 방랑 스승으로 떠도시다가 고향에 가신 것이 아닌가 생각하지만,
아까 얘기한 것처럼 누구나 자기의 일을 어릴 때부터 알고 있는 곳만큼 용서가 없는 곳은 없습니다.
나의 가족사를 잘 알고 있는 곳은 굉장히 어려운 곳이죠.
예수님의 이 고향 방문은 단순히 옛 가정과 가족을 찾는 사적인 방문을 뜻하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한 사람의 랍비로서 오셨죠. 스승으로 오셨던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랍비를 왔기 때문에 길거리에서 가르치신 것이 아니라 회당에서 가르치셨죠.
처음에는 그들은 경탄하죠. ‘아! 이런 가르침 처음 들어봤다, 대단하다!’
그런데 저 앞쪽에서부터 웅성대는 소리가 나오기 시작하죠.
소리의 내용은 ‘그런데 저 사람 우리가 아는 사람 아니야? 목수. 그 어머니가 과부 마리아고.’
다시 말하면 존경의 눈빛이 순식간에 경멸의 눈빛으로 바뀝니다.
그러면서 자기들 앞에 서서 가르치는 예수님은 그들에게는 일종의 경멸로써 자기들을 무시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성경에 보면 ‘그들은 분개하였다’라고 나옵니다.
너 같은 배경을 가진 사람이 그같이 말하고 행한다는 것에 대해 우리는 분개할 수밖에 없다 얘깁니다.
예수님은 알다시피 무학자입니다. 학교 다닌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정식으로 랍비에게서 배운 랍비들의 제자도 아닙니다.
무학자에다가 과부 아들이었죠.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두 가지 이유로 거부합니다.
첫 번째는 ‘저 사람 목수 아닌가?’
‘맞아 목수야 우리 집에 와서 일했던 그 목수야. 저 사람 아버지도 목수였지 아마.’
목수는 알다시피 나무를 가지고 일하는 사람입니다.
다시 말하면 노동자였죠. 그리고 그렇게 높은 신분의 사람이 아니었죠.
그냥 평민이었습니다.
많이 배운 사람들은 절대로 목수를 하지 않았겠죠.
다른 직업을 선택했을 겁니다.
이런 목수라고 하는 이유로 사람들은 예수님을 경멸합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성인이신 요한 바오로 2세의 고향이 폴란드죠.
교황님도 젊은 시절에는 탄광 노동자였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항상 사람을 평가하고자 하는 유혹을 받습니다.
그 사람을 평가할 때 그 사람의 출생이라든지 가문이라든지 재산 등,
어떤 그 외적인 것에 의해서 평가하고 싶은 유혹을 많이 받는다는 얘기입니다.
선입관의 노예가 됩니다.
그전에 그런 얘기를 드렸죠.
‘편견과 오만’이라고 하는 오스카 와일드 소설이 있습니다.
편견은 어떤 것이냐?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오만은 뭐냐?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편견과 오만은 동전의 앞뒤처럼 늘 붙어 다닙니다.
편견이 있는 사람은 오만하고요. 또 오만한 사람은 편견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을 바라보는 편견을 갖고 있었던 나자렛 사람들은 역시 오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편견의 노예가 되고 오만의 종이 되어 예수님을 단순히 목수로 생각하고, ‘
저 목수가 감히 건방지게 우리를 가르쳐?’ 이렇게 나갑니다.
두 번째로 예수님의 말씀을 거부했던 이유는 ‘이 사람은 마리아의 아들이 아닌가?’
마리아의 아들이라 부른 사실에서 우리는 한 가지를 이렇게 유추해 낼 수가 있습니다.
만일에 이때 양아버지 요셉이 살아있었다면 ‘이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했을 텐데,
요셉의 얘기는 싹 빠지고 마리아의 아들이 아닌가, 이 뜻은 뭐겠습니까?
요셉은 이미 죽었음이 틀림없다는 사실을 간접적으로 얘기하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서 예수님의 생애에서 가장 궁금했던 수수께끼가 풀립니다.
예수님의 생애에서 가장 궁금했던 게 뭐죠?
‘왜 좀 일찍 나자렛을 떠나서 구원 사업을 하지 않으셨던가, 왜 30세까지 나자렛을 떠나지 못했던가?’ 하는 것입니다.
왜 그렇게 지체되었는가?
하느님 아버지 성부께서 ‘너는 딱 30세부터 일해서 3년 동안만 그러다 죽어라.’하는 계획에 의한 것일까요?
세상은 메시아가 오기를 구원받기를 그토록 기다리고 있었는데, 왜 그렇게 30년 동안을 목수 일만 하면서 사셨을까,
왜 그렇게 오래 머무르셨는가?
그 이유는 요셉이 젊어서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홀로된 엄마를 돌봐주지 않으면 안 되었던 상황이었죠.
이해되십니까?
예수님께서 일찍 공생활을 하실 수 없었던 제일 큰 이유는 요셉이 세상을 일찍 떠났기 때문에
홀로 된 엄마 마리아를 부양해야만 했던 겁니다.
사실 옛날 2천 년 전에 나이로 보면,
그 당시 평균 수명이 40-50 넘기기가 힘든 시절에 나이 30이면 지금으로 따지면 50이 넘은 정도로 봐야 할 겁니다.
예수님이 효자죠.
그래서 ‘이 사람은 마리아의 아들인가?’ 하는 말 가운데는
우리가 그토록 궁금해하던 예수님의 공생활 시점에 대한 해답이 나온 겁니다.
또 나자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가족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경멸했죠.
뭐라고 그럽니까?
누이도 뭐 전부 다 우리 동네에 살고 있고 어쩌고저쩌고하면서 경멸합니다.
이런 두 가지 이유, ‘목수가 아닌가?’와 ‘이 사람 마리아의 아들이 아닌가?’
다시 말하면 과부의 아들이 뭐 제대로 배웠겠느냐 이 얘기죠.
과부를 멸시하는 겁니다.
구약 성서를 보면 내 구약 강의에도 나왔지만, 과부를 도와야 한다는 얘기가 많이 있죠.
하지만 실제로 과부들의 위치가 도움받고 다른 사람에게 좋게 보이는 위치가 아니었습니다.
‘얼마나 팔자가 세길래 남편을 먼저 보냈을까?’
그런 시선, 그리고 남편이라는 버팀목이 없었기 때문에 과부들은 늘 무시당했던 겁니다.
‘과부의 아들 주제에 감히 우리에게 설교해, 저놈이?’
아무튼 이런저런 이유로 예수님은 나자렛에서 힘 있는 일을 할 수가 없었던 겁니다.
사실 분위기가 나쁘면 행할 수 없는 것들이 많이 있죠.
만일에 본인이 병이 낫기를 거부한다면은 어떻습니까?
불치병을 고쳐줄 수 있는 의사가 왔는데 ‘내버려 두세요. 나 이렇게 살다 죽을래요. 병 낫기 싫어요.’
이런 사람에게는 어떤 명의라 해도 손을 쓸 수가 없습니다.
살려고 하는 의지가 없는 환자에게 도울 수 있는 의사는 없다는 얘기죠.
영적으로 살려고 하는 의지를 우리는 ‘신앙’이라고 얘기합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병들어서 고쳐주시려 하는데 그것을 거부하면 어찌 되겠습니까?
거부하는 의지까지 예수님은 어떻게 못 하신다는 얘기입니다.
그런 나쁜 분위기였기 때문에 예수님은 설교할 수가 없었습니다.
처음에는 ‘이런 설교 처음 들어보네.’ 하던 분위기가 갑자기 여기저기서 ‘목수 아니야, 과부의 아들 아니야?’
이렇게 웅성댈 때는 강론 끝이죠, 할 수가 없습니다.
기대감이 있고, 평화롭고, 알려고 하는 눈망울이 총총한 분위기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그들에게 불을 붙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비판적이고 냉랭하고 무관심한 분위기 속에서는 어떤 박력에 찬 설교도 생명 없이 땅에 떨어지고 맙니다.
본당 신부만이 아니라 저는 한 평생을 피정 지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말씀을 전할 때 제일 힘들었던 때가 어느 때였느냐?
군대에서 군종 신부로 연병장에 혹은 강당에 수백 명을 앉혀놓고, 그들에게 하느님 말씀을 전하기보다는 훈화할 때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자리에는 불교 신자, 개신교 신자, 무신론자, 오만 애들이 다 앉아 있기에,
그 자리에서 천주교가 어떻고 하느님 아버지가 어떻고 예수님이 어떻게 얘기해 봐야 귀에 들어오질 않습니다. 다 자고 있죠.
아이들을 안 재우고, 나중에 그 아이들이 ‘신부님 강의 다르네,
하느님만 찾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하’자 얘기하지 않았는데 뭔가 끌리네,
나중에 내가 제대하고 종교를 갖는다면 천주교를 한번 가져볼까?’하는 마음을 던져주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군대에서 설교하는 게 참 힘들었어요,
그 아이들은 처음부터 들으러 온 아이들이 아니라 잠을 자러 온 아이들이었기 때문이죠.
또 힘든 곳이 교도소 사목, 더 힘들었죠.
교도소 들어가면 특유한 냄새가 납니다.
이상한 짬밥 비슷한 냄새가 나죠. 소독약 냄새도 나고.
체육관에 푸른 죄수복을 입은 사람들 수백 명이 앉아 있습니다.
그 가운데를 지나서 강당 위에 올라가서 1시간을 떠든다, 뭔 얘기를 해야겠습니까?
그 자리에는 살인범부터 전과 10범, 조폭까지 다 있죠.
한번은 아마 그중에 조폭 두목이 하나 있었나 봅니다.
조폭 두목이 화장실을 가려는지 벌떡 일어나니 여기저기서 수십 명이, 부하들이겠죠,
두목이 밖에 나갈 때까지 90도로 머리를 숙이고 있습니다.
나는 강의하다 멍해졌습니다.
화장실 갔다 들어올 때도 역시 부하들이 일어나서 90도 배꼽 인사하고.
분위기가 살벌하죠.
이런 데서 무슨 얘기를 합니까? 사실 쉽지 않죠.
얼마나 앞에서 떠드는 저 신부가 우습게 보였겠습니까? 귀에 들어오겠습니까?
그래서 나쁜 분위기에서는 절대 설교가 되지 않습니다.
물론 성당에서 피정시킬 때도 스펀지가 물 빨아들이듯이 신자들에게서 말씀에 대한 피드백이 아주 강하게 올 때가 있습니다.
‘내가 말하는 것이 이 사람들의 심령 속에 박히고 있구나.’
그런데 어느 성당은 들어가는 입구서부터 냉랭합니다.
강론대에 올라와서 보면 그냥 할 수 없이 앉아 있는 사람들입니다.
차갑죠. 그 차가운 마음이 든 건 분명히 신자들이 병이 들어 있다는 얘기입니다.
상처를 받은 게 많다는 얘기입니다.
나중에 오후 시간에는 이제 얼굴들이 풀어지면서 여기저기서 우는 소리가 들립니다.
차가움은 상처가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거죠.
또 나쁜 분위기에서는 오늘 예수님처럼 평화를 줄 수가 없습니다.
나자렛을 내 마음 내 가정이라고 생각해 봅시다.
서로 미워하면서 이해하기를 거부하는 분위기 속에서 예수님이 서 계실 장소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가정을 나자렛이라 하는데, 내 가정이 지지고 볶고 싸우고 미워하고 식구들끼리 손가락질하고
죽일 놈 살릴 놈 하는 그 자리에 예수님이 서 계실 장소가 어디 있겠습니까?
거실에도 십자가가 걸려 있고 방마다 있는데, 그 십자가 앞에서도 죽일 놈 살릴 놈 하면서
집안 식구들 입에서 내 탓이라는 말은 한마디도 들어본 적이 없다면, 매달려 계신 예수님이 얼마나 슬프시겠습니까?
그 밑에 계신 성모님도 얼마나 슬프겠습니까?
나자렛은 결국에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의 가정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 문을 열어서 들어오실 수 있도록 해야 할 겁니다.
묵시록 3장 20절에 ‘보라, 내가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고 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나는 그의 집에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 사람도 나와 함께 먹게 될 것이다.’
사실 예수님은 여러분 마음의 문밖에서 오래전부터 문을 두들기고 계셨을 겁니다.
‘마리아야, 루시아야, 베드로야, 안드레아야, 왜 이렇게 문을 걸어 잠그고 있니?
나는 너에게 들어가고 싶어도 밖에 문고리가 없단다. 네가 못 이기는 척하고 안에서 문을 좀 열어줄 수 없겠니?
그럼 내가 해결해 줄게. 너의 상처, 너의 아픔, 그거 내가 다 치료해 줄게.’
오늘 나자렛 고향에서 수모를 당하신 예수님이 내 마음의 문 앞에서 내 가정 안에서 똑같은 수모를 당하지 않도록,
우리 한번 지금이라도 예수님에게 문을 열어드리도록 합시다.
그리고 집안에서 가족들끼리 힘든 일이 있을 때마다 어른이 쳐다보고 계신다는 마음으로 서로가 좀 진정하고 거친 말 삼가고,
정 한바탕 할 일 있으면 어른 계신 집안에서 하지 말고 밖에 나가서 해결하고 들어오는 효자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여러분들 이제부터는 계속 ‘비’입니다.
비도 오고, 날도 습하고, 그래서 여러 가지로 스트레스가 쌓이고 그렇죠.
아무튼 저는 아픈 루비 옆에서 계속 병간호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여러분들 만나기 전부터 사랑하고 있는 거 아시죠?
강복 드리겠습니다.
+전능하신 천주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는 이 강론을 듣는 모든 이들에게 강복하소서.
아멘
♣2024년 연중 제14주일 (7/7) 김웅열(느티나무) 신부님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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