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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후기] 2020년 10월 11일 주일예배
ㅁ 참석자 (5명)
정혁현 목사, 서선미, 안태형, 이수정, 공은주
ㅁ 예배
- 말씀 : 정혁현 목사 "주체의 추수감사" (요한복음 12:21~26)
- 시기도 : 이수정 (알프레드 헤이즈, '조 힐')
- 대표기도: 이수정
- 헌금기도: 이수정
ㅁ 알림과 나눔
1. 오늘 추수감사예배에 참여하신 모든 분들에게 만물을 풍요롭게 하는 주님의 은총과 사랑이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2. 오늘 방역 당국의 경계단계 조정을 참조하여 10월에 예정된 행사를 진행하겠습니다.
3. 예배 참여시 마스크 착용과 개인위생에 항상 주의합시다.
오늘 공동식사는 안태형교우가 준비해주셨습니다. 매콤한 제육볶음덮밥과 상추쌈을 방역수칙을 준수해가며 안전하게 먹었습니다. 준비해주신 손길에 감사드립니다.
정성가득 공동식사를 준비합니다.
공은주교우님이 준비해주신 폭신폭신한 딸기케잌입니다.
늦게 심은 마리골드(금잔화)도 꽃봉오리를 엽니다. 꽃차 만들어 먹을 생각에 마음이 부풉니다.
*말씀 요약
추수감사절은 세계공통으로 나타나는 문화이다. 자연이 준 결실 앞에서 그 결실과 공동체를 칭찬하는 것을 넘어 만물을 가꾸는 신에 대한 감사이다. 땅을 일구면 인간이 먹을 것을 결실맺을 수 있도록 해주는 대자연을 믿으며 인간은 노동을 해왔다. 통제할 수는 없지만 가꿀 수는 있는 대자연의 힘이 더해져서 인간은 먹고살 풍요로운 결실을 얻었다. 이 결실 앞에서 '우리를 살아 존재하게 하는 세계는 무엇인가?,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묻게 된다. 인간이기에 그러하다. 인간은 넘치는 곡식들 앞에서 그것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 너머를 사유하는 존재다. 대개는 어떤의지를 가진 절대적이고 전능한 존재, 세계의 질서를 주관하고 운행하는 자에 대한 소박한 믿음을 갖게 된다. 그분, 즉 신, 하나님의 의지로 세계가 운행된다고 믿어왔다. 바로 이런 믿음에서 모든 종교가 시작된다. 그러나 자연이 의지를 가지고 어떤 목적을 향해 움직인다는 '목적론'은 오늘날 사고에서 적합한 것이 아니다. 자연의 목적론을 깨는 대표적인 이론이 진화론이다. 진화론의 핵심은 '자연선택'이다. 즉 자연이 목적성 있는 행위를 하는 듯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자연은 무목적성 속에서 움직이고 있다. 기독교를 맹렬히 비난하는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론은 실은 유신론에 강력하게 빠져있다고 할 수 있다. 이기적 유전자론은 '생명은 유전자가 자기를 증식시키는 도구일 뿐이며 궁극적인 행위자를 유전자라고 바라보고 있다. 즉 타자의 타자가 있다는 것이고 대타자가 존재한다는 태도이다. 그는 생명계의 주체를 유전자라고 하는 것이다. 리처드 도킨스에게는 유전자가 곧 하나님이다. 그래서 기독교를 비난할 수 밖에에 없다. 하나님일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라 믿는 이런 태도는 놀랍게도 무신론이 아니라 강력한 유신론이다.
과거에 루소가 한 반박을 그에게 그대로 들려줘야 한다. 루소는 자신이 기독교신앙을 변증하는 철학자라는 것을 비난하는 근대철학자들에게 말한다.
"당신은 내가 기독교 신앙에 대해 말하는 것을 비난하면서 자기자신을 증명하고 있다. 그런데 내 기분은 이상하다. 술취한 사람은 당신인데 내가 술을 끊은 것 같다.'
믿는 사람은 당신인데, 하나님을 끊은 사람은 나(=루소)다. 라는 말이다.
루소는 독교신앙의 핵심 속에 타자의 타자로서의 하나님, 즉 대타자로서의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음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자연선택의 핵심은 우연적으로 유전자변이가 항상일어나는데 어떤 변이가 그 생명존속에 있어 환경에 우연히 적합해서 살아남게 된다는 것이다. 기린이 높은 가지에 달린 잎을 먹기 위해 목이 길어진 것이 아니라 목이 긴 종이 우연히 나왔고, 이 개체가 윗쪽에 있는 나뭇잎도 먹을 수 있었고, 이 점이 생존에 유리해 살아남은 종이 되었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자연 안에는 우연성이 있는데 조건에 우연히 적합했던 종이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자연이 어떠한 의지도 가지지 않았다는 것이 바로 진화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자연을 보고 교훈을 얻기 마련이다. 사물을 보고 사유하는 인간의 태도는 중요하다. 밀알이 수많은 생명을 낳는다는 것은 밀알과 인간이 동일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자연이 그러니까 우리가 따라야한다는 것이 아니다. 비유의 위상은 항상 그런 것이다. 비유를 어떤 사실에 대한 이야기로 이해해서 비유가 옳지 않으면 그 비유로 해설하려는 내용까지 옳지 않다고 하면 안된다.
하나님 나라는 도둑처럼 온다는 말은 하나님 나라가 도둑과 같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방심하는 사이에 , 우리의 허를 찌르는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가 온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다.
성경을 읽을 때에는 상상력과 사유를 동원해야 한다. 밀알 비유의 핵심은 밀알과 인간 사이의 근원적 차이에 주목하는 것이다.
유월절을 맞아 그리스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올 때에 예수님도 예루살렘에 입성하신다.이 때 어떤 여인이 예수의 발에 향유를 부어 예수의 죽음을 사전에 준비하는 듯한 상징적인 행위를 한다.예수님이 오니 민중들은 그에게 호산나라고 한다. 이 시기에 예수는 민중들의 간절한 꿈을 대변하는 인물로 부상했다. 이런 유명세 속에 그리스 출신 사람들, 즉 유대지바에 사는 그리스 사람들이 유월절을 지내러 예루살렘에 오는 것이다. 이들은 그리스 사람이면서 유대교의 율법을 받아들인 사람들이다. 만약 할례까지 했다면 그들은 그리스 태생의 유대인일 것이다.
요한복음은 공간복음서보다는 역사성에서 의심을 받아왔다. 문학, 꾸며낸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 최근에는 오히려 요한복음이 더욱 역사적일 수 있다는 연구결과가 나오고 있다.왜냐하면 요한복음이 그려내고 있는 상황설정이 굉장히 세부적이고 당시 상황에 잘 들어 맞기 때문이다. 어떤 경험을 통해 증언된 이야기의 기록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리스 사람이 갈릴리 뱃세다 출신인 빌립(=필립, 그리스식 이름) 에게 가서 예수를 찾았을 때 예수는 그말을 듣고 많이 고무되셨을 것이다.
'내 이야기가 유대인 뿐 아니라 이방 사람에게도 전해졌구나.'라고 생각하셨을 것이다. 예수는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고 말씀하신다. 실은 이 영광이란 것의 내용이 무시무시한 것이다. 이 영광은 사람들이 호산나를 외쳐부르며 생각하는 그런 영광, 새로운 통치자에 걸맞는 그런 영광이 아니다.
"내가 진정으로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땅에 그대로 있고, 죽으면 엶를 많이 맺는다."라고 하신 말씀을 보자. 밀은 열매를 많이 맺기 위해 땅에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밀이 땅에 떨어져 새로운 열매를 많이 맺으면 그 종자는 번성하게 된다. 밀알이 썩어가며 배아, 싹이 자라며 많은 소출을 내며 종족을 번식시키는 것이다. 아마 생명에 중요한 것은 종의 보존이라는 차원일 것이다. 밀에게도 관심이 있다면 밀의 관심은 얼마나 좋은 조건에서 나와 동일한 유전자를 가진 종족을 탄생시킬 것인가 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심의 초점은 하나의 밀알이 떨어져 '썩는다. 죽는다'에 있었다.
예수님이 이땅에 오셔서 제 일성으로 전한 말씀은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이다.
회개는 돌이켜라라는 것이다. 돌이키기 이전의 삶을 죽여라는 것이다.
'자기 목숨을 사랑한 사람은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목숨을 미워한 이는 영생에 이르도록 자기목숨을 보존할 것이다.' 했을 때 삶의 생산성에 대한 문제를 생각해볼 수 있다.
예수님이 생각하시는 삶의 생산성은 삶의 확장이다. 즉 자기 자신의 삶을 자신을 넘어서 모든 피조물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하고 가꿀 수 있는 것이다.
목숨을 미워한다는 말은 어려운 말이 아니다.
우리는 목숨에 연연하기 때문에 반드시 돌이켜야하는 삶, 즉 생물학적 존재에서 진정한 존재로의 인간적 전환을 하지 못한다. 리처드바크의 소설 <갈매기의 꿈>에서는 갈매기가 주인공이 된다. 이것이 1부라면 2부에서는 다슬기가 주인공으로 나온다. 다슬기는 바위에 붙어 사는데 어느날 주인공 다슬기가 바위에서 몸을 떼어본다. 그는 조루에 휩쓸리며 온 세계의 곳곳을 여행하게 된다. 어떻게 보면 자유에 대한 단순한 비유가 될 이야기일 것이다.
목숨이라고 하는 것이 자유라고 하는 주체족 존재로서의 삶을 끊임 없이 방해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로 읽을 수 있다. 참다운 삶을 원한다면 목숨을 미워해야한다. 왜? 그것 때문에 내 소중한 삶이 생물학적 존재의 한계에 머무른 채 시간을 죽이고 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2장 26절에서 '나를 섬기려고 하나느 사람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너라....
인자가 영광을 받을 때가 왔다는 것은 이제 십자가라는 과정을 거칠 때가 왔다는 말씀과 같이 알아들을 수 있다.
요한복음 12장 27절부터 전개되는 <인자는 들려야한다>는 제목으로 이어지는 십자가 죽음을 예언하는 말씀이 나온다. 예수는 자신이 목적하는 삶의 세계에서 어떤 결과를 낳을 것인지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 길로 갔다.
하나님의 아들이 주어진 세계의 질서에 의해서 십자가에 매달리는 방식을 통해
지금 인간의 존재방식, 세계가 자기자신을 재현하는 방식이 얼마나 처참한 상황에 처해 있는지, 얼마나 비극적인 것인지를 보여주셨다. 인간을 진리 앞에 서게 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에서 진리를 보는 것이다. 예수는 진리의 행진을 멈추지 않겠다고 말씀하신다. 인간에게 이 결실이야말로 진리와의 근접성, 한 인간의 삶이 이 세상의 진리가 얼마나 큰 목소리로 말하게 하는가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이 추수감사절에 팬데믹 상황에도 불구하고 풍요로운 결실을 낸 대자연에 감사하며 인간이 자기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야 할 우리 삶의 추수할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주님, 만물이 풍요롭게 추수하듯이 우리 또한 주님의 말씀을 아 우리 삶에 풍성한 결실을 맺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첫댓글 화단을 이렇본 적이 없었는데 .... 너무 좋네요! 후기 감사드립니다!
말씀 잘 읽었습니다. 풍성한 꽃밭으로 자연의 아름다움을 감상해봅니다 감사합니다.
꽃의 시선으로 교회 문쪽을 보는 것 같네요^^ 꽃같은 마음!
예배후기 애쓰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