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유신 장군 50세(644)
유신은 [선덕왕 11년] 압량주 군주(軍主)가 되었다가 13년에 소판(蘇判)이 되었고, 가을 9월에 왕이 상장군으로 삼아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의 가혜성(加兮城), 성열성(省熱城), 동화성(同火城) 등 일곱 성을 쳐서 크게 이겼다. 이로 말미암아 가혜진(加兮津)을 열었다.
김유신 장군 51세(645)
을사년(선덕왕 14년: 645) 정월에 돌아와 왕을 뵙기도 전에 백제의 대군이 와서 우리 매리포성(買利浦城)을 공격한다는 봉인(封人)의 급한 보고가 들어왔다. 왕이 다시 유신을 상주(上州) 장군으로 임명하여 이를 막게 하니 유신은 명령을 받자마자 말에 올라 처자를 만나지 않고, 백제 군대를 반격하여 쫓아냈는데 2천 명을 목베었다.
3월에 왕궁에 돌아와 복명하고 미처 집으로 돌아가기 전에 또 백제 군사가 국경에 주둔하여 많은 군사로 우리를 치려한다는 급보가 들어왔다. 왕이 다시 유신에게 말하기를 “청컨대 공은 수고로움을 꺼리지 말고 급히 가서 그들이 이르기 전에 대비하시오!” 하니 유신이 또 집에 들르지 않고 군대를 선발하고 병기를 손질하여 서쪽으로 떠났다. 이때 그 집사람들이 모두 문밖에 나와서 오기를 기다리고 서 있었다. 유신이 자기 집 앞을 지나면서 돌아다보지 않고 가다가 50보쯤 이르러 말을 세우게 하고 사람을 시켜 집에 가서 미음[漿水]을 가져오게 하여 마시고는 “우리 집 물은 옛 맛 그대로구나!”라고 하였다. 이에 많은 군사들이 모두 말하기를 “대장군도 오히려 이와 같이 하시니 우리들이 골육을 이별함을 어찌 한스러워 하랴!”고 하였다. 국경에 이르니 백제 사람들이 우리 군사의 방비를 멀리서 바라보고는 감히 진격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대왕이 이 소식을 듣고 대단히 기뻐하여 벼슬과 상을 더하여 주었다.
김유신 장군 53세(647)
16년 정미(647)는 선덕왕 말년이고 진덕왕 원년이다. 대신 비담(毗曇)과 염종(廉宗)이 여자 임금(女主)이 잘 다스리지 못한다 하여 군사를 일으켜 왕을 폐하려 하니 왕은 스스로 왕궁 안에서 방어하였다. 비담 등은 명활성(明活城)에 주둔하고 왕의 군대는 월성(月城)에 머물고 있었다. 공격과 방어가 10일이 지나도 결말이 나지 않았다. 한밤 중에 큰 별이 월성에 떨어지니 비담 등은 사병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듣건대 ‘별이 떨어진 아래에는 반드시 피흘림이 있다.’고 하니, 이는 틀림없이 여왕[女主]이 패할 징조이다.”
병졸들이 지르는 환호성이 천지를 진동시켰다. 대왕이 그 소리를 듣고 두려워하여 어찌할 줄을 몰랐다. 유신이 왕을 뵙고 말하였다.
“길함과 불길함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오로지 사람이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나라] 주(紂)왕은 붉은 새가 나타났어도 망하였고, 노나라는 기린을 얻었어도 쇠하였으며, [은나라] 고종은 장끼가 울었어도 중흥을 이루었고, 정공(鄭公)은 두 마리 용이 싸웠으나 창성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덕이 요사한 것을 이긴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별이 떨어진 변괴는 족히 두려워 할 것이 아닙니다. 청컨대 왕께서는 걱정을 하지 마십시오.”
이에 허수아비를 만들어 불을 붙인 다음 연에 실려 띄워 하늘로 올라가듯이 하고는 다음 날 사람을 시켜 길가는 사람에게 “어제 밤에 떨어진 별이 다시 올라갔다.”는 소문을 퍼뜨려 반란군으로 하여금 의심을 품게 하였다. 그리고 흰말을 잡아 별이 떨어진 곳에서 제사를 지내고 다음과 같이 빌었다.
“자연의 이치[天道]에서는 양은 강하고 음은 부드러우며, 사람의 도리에서는 임금은 높고 신하는 낮습니다. 만약 혹시 그 질서가 바뀌면 곧 큰 혼란이 옵니다. 지금 비담 등이 신하로서 군주를 해치려고 아랫 사람이 윗사람을 침범하니 이는 이른바 난신적자(亂臣賊子)로서 사람과 신이 함께 미워하고 천지가 용납할 수 없는 바입니다. 지금 하늘이 이에 무심한 듯하고 도리어 왕의 성 안에 별이 떨어지는 변괴를 보이니 이는 제가 의심하고 깨달을 수 없는 바입니다. 생각컨대 하늘의 위엄은 사람의 하고자 함에 따라 착한 이를 착하게 여기고 악한 이를 미워하시어 신령으로서 부끄러움을 짓지 말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나서는 여러 장수와 병졸을 독려하여 힘껏 치게 하니 비담 등이 패하여 달아나자 추격하여 목베고 9족(族)을 죽였다.
겨울 10월 백제 군사가 무산성(茂山城)[현재의 전북 무주군 무풍면], 감물성(甘勿城)[현재의 김천시 개령면], 동잠성(桐岑城)[현재의 경북 구미시] 등 세 성을 공격하여 포위하자 왕이 유신으로 하여금 보병과 기병 합 1만 명을 이끌고 막게 하였으나 고전하여 기세가 꺾이자 유신이 비령자(丕寧子)에게 “오늘의 사세가 급박하다! 자네가 아니면 누가 뭇 사람의 마음을 격동시킬 수 있겠는가?” 하니 비령자가 절을 하고는 “감히 명을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는 적진에 나아갔다.
아들 거진(擧眞) 및 집종[家奴] 합절(合節)이 그를 따라서 창, 칼을 무릅쓰고 힘껏 싸우다 죽으니 군사들이 이를 바라다보고는 감동되고 격분되어 다투어 진격하여 적병을 크게 물리쳤다. 이 전투에서 3천여 명을 목베었다.
김유신 장군 54세(648)
진덕왕 태화(太和) 원년 무신(648)에 춘추는 고구려의 청병을 이루지 못하자, 당나라에 들어가 군사를 청하였다.
태종 황제가 “너희 나라 유신의 명성을 들었는데 그 사람됨이 어떠한가?” 하니, 대답하기를 “유신은 비록 다소의 재주와 지략이 있으나 만약 황제의 위엄을 빌리지 않으면 어찌 쉽게 걱정거리인 이웃 나라를 없앨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황제는 “참으로 군자의 나라로구나!” 하고는 요청을 수락하여 장군 소정방에게 명하여 군대 20만을 거느리고 백제를 정벌하게 하였다.
그때 유신은 압량주 군주(軍主)로 있었는데 마치 군사에 뜻이 없는 것처럼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고 놀며 몇 달을 보내니, 주(州)의 사람들이 유신을 용렬한 장수라고 생각하여 헐뜯어 말하기를 “뭇 사람이 편안하게 지낸 지가 오래되어 남는 힘이 있어 한번 전투를 해봄직한 데 장군이 용렬하고 게으르니 어찌할 것인가.” 하였다.
유신이 이 말을 듣고 백성을 한 번 쓸 수 있음을 알고는 대왕에게 고하였다.
“이제 민심을 살펴보니 전쟁을 치룰 수 있습니다. 청컨대 백제를 쳐서 대량주 전쟁에 대한 보복을 합시다!”
왕은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건드렸다가 위험을 당하면 장차 어떻게 하겠소?” 하니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전쟁의 승부는 대소에 달린 것이 아니고 인심이 어떤가에 달려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주(紂)에게는 수많은 백성이 있었으나 마음과 덕이 떠나서 주(周)나라의 10명의 신하가 마음과 덕을 합친 것만 같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우리 백성은 뜻을 같이하여 생사를 함께 할 수 있는데 저 백제는 두려워할 바가 못됩니다.”
왕이 이에 허락하였다.
주의 군사를 선발 훈련시켜 적에게 나가게 하여 대량성(大梁城)[현재의 경남 합천]에 이르니 백제가 맞서 대항하였다. 거짓 패배하여 이기지 못하는 척하여 옥문곡(玉門谷)까지 후퇴하니 백제측에서 가볍게 보아 대군을 이끌고 왔으므로 복병이 그 앞뒤를 공격하여 크게 물리쳤다. 백제 장군 여덟 명을 사로잡고 목베거나 포로로 잡은 수가 1천 명[級]에 달하였다. 이에 사신을 백제 장군에 보내 말하였다.
“우리의 군주(軍主) 품석과 그의 아내 김씨의 뼈가 너의 나라 옥중에 묻혀 있고, 지금 너희의 부장 여덟 명이 나에게 잡혀 있어 엎드려 살려달라고 하였다. 나는 여우나 표범도 죽을 때에는 고향으로 머리를 돌린다는 말을 생각하여 차마 죽이지 못하고 있다. 이제 그대가 죽은 두 사람의 뼈를 보내 산 여덟 사람과 바꿀 수 있는가?”
백제의 좌평 중상(仲常)<또는 충상(忠常)이라고도 썼다.>이 왕에게 아뢰었다.
“신라인의 해골을 남겨 두어도 이로울 바가 없으니 보내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만약 신라인이 약속을 지키지 않아 우리의 여덟 명을 보내지 않는다면 잘못이 저쪽에 있고, 곧음이 우리 쪽에 있으니 어찌 걱정할 바가 있겠습니까?”
이에 품석 부부의 뼈를 파내어 관에 넣어 보냈다. 유신이 말하기를 “한 잎이 떨어진다고 하여 무성한 수풀이 줄어들지 않으며, 한 티끌이 쌓인다고 하여 큰 산이 보태지는 법이 아니다.” 하고는 여덟 사람이 살아 돌아가도록 허락하였다.
드디어 승리의 기세를 타고 백제의 영토에 들어가 악성(嶽城) 등 12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2만여 명을 목베고, 9천 명을 사로잡았다. 공로를 논하여 이찬으로 승진시키고 상주(上州) 행군대총관에 임명하였다. 다시 적의 영토에 들어가 진례(進禮) 등 아홉 성을 무찔러 9천여 명을 목베고 600명을 포로로 잡았다. 춘추가 당나라에 들어가 군사 20만을 얻기를 청하고 와서 유신을 만나 말하기를 “사람이 살고 죽는 데에는 명이 있어 살아 돌아와 다시 공을 만나니 얼마나 다행입니까?” 하니 유신이 답하였다.
“저는 국가의 위엄과 영령의 힘에 의지하여 두 번이나 백제와 크게 싸워 20개의 성을 함락시키고, 3만여 명을 목베거나 포로로 잡았고, 또 품석공과 그 부인의 뼈를 고향으로 되돌려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가 하늘이 도와주었기 때문이지 내가 무슨 힘이 되었겠습니까?”
[太和] 2년(648) 가을 8월 백제 장군 은상(殷相)이 석토성(石吐城) 등 일곱 성을 공격하여 왔다. 왕은 유신과 죽지(竹旨), 진춘(陳春), 천존(天存) 등의 장군에게 명하여 나가 막게 하였다. 전군[三軍]을 다섯 방면으로 나누어 쳤으나 서로의 승부가 열흘이 지나도록 나지 않았다. 죽어 넘어진 시체가 들에 가득하고 흐르는 피가 내를 이루어 공이를 띄울 정도에 이르렀다. 이에 도살성(道薩城) 아래에 진을 쳐서 말을 쉬게 하고 군사를 잘 먹여 다시 공격을 시도하였다. 그때 물새가 동쪽으로 날아 유신의 군막을 지나가니 장군과 병사들이 보고 불길한 징조라고 말하였다. 유신이 이는 족히 괴이하게 여길 것이 못된다고 생각하고 무리에게 일렀다.
“금일 반드시 백제인이 간첩으로 오는 자가 있을 것이다. 너희들은 짐짓 모르는 체하고 검문하지 말라!”
그리고는 군중에 전령을 돌렸다.
“성을 굳게 지키고 움직이지 말라! 내일 원군이 옴을 기다려 결전을 하겠다!”
간첩이 이를 듣고 돌아가 은상에게 보고하니 은상 등이 군대가 증원되는 줄 알고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유신 등이 일시에 용감히 공격하여 크게 이겼다. 장군 달솔 정중(正仲)과 병사 100명을 생포하고 좌평 은상, 달솔 자견(自堅) 등 10명과 병사 8,980명을 목베고 말 1만 마리와 투구 1천8백 벌, 기타 이와 비슷한 숫자의 기계를 노획하였다. 돌아오다가 길에서 항복해 오는 백제의 좌평 정복(正福)과 병사 1천 명을 만나자 모두 석방하여 각자 가고 싶은 대로 맡겼다. 서울[경주]에 이르니 대왕이 성문까지 나와 맞았고, 위로함이 극진하였다.
김유신 장군 61세(655)
영휘 6년 을묘(655) 가을 9월에 유신이 백제 땅에 들어가 도비천성(刀比川城)을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이 무렵 백제의 임금과 신하들은 심히 사치하고 지나치게 방탕하여 국사를 돌보지 않아 백성이 원망하고 신이 노하여 재앙과 괴변이 속출하였다.
유신이 왕에게 고하기를 “백제는 무도하여 그 지은 죄가 걸주(桀紂)보다 심하니 이 때는 진실로 하늘의 뜻을 따라 백성을 위로하고 죄인을 정벌하여야 할 때입니다.” 하였다.
이보다 앞서 급찬 조미갑(租未@[土甲])이 부산현령(夫山縣令)이 되었다가 백제에 포로로 잡혀가 좌평 임자(任子)의 집 종이 되어 일을 부지런히 하고 성실하게 하여 일찍이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임자가 불쌍히 여기고 의심치 않아 출입을 마음대로 하게 하였다. 이에 도망쳐 돌아와 백제의 사정을 유신에게 고하니 유신은 조미갑이 충직하여 쓸 수 있음을 알고 말하였다.
“내가 들으니 임자는 백제의 일을 오로지 하고 있어 그와 함께 도모하고자 하였는데 길이 없었다. 자네가 나를 위하여 다시 돌아가 말해다오!”
그가 답하기를 “공께서 저를 어리석다고 생각하지 않으시고 지목하여 부리고자 하시니 비록 죽더라도 후회가 없습니다.”고 하였다.
드디어 [그가] 다시 백제에 들어가 임자에게 아뢰었다.
“제가 스스로 생각하기를 이미 이 나라의 백성이 되었으니 마땅히 나라의 풍속을 알아야 하므로 집을 나가 수십 일간 놀면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개나 말이 주인을 그리워하는 것 같은 정을 이기지 못하여 돌아왔습니다.”
임자는 이 말을 믿고 나무라지 않았다. 조미갑이 틈을 타서 보고하였다.
“저번에는 죄를 두려워하여 감히 솔직하게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사실은 신라에 갔다가 돌아왔습니다. 유신이 저를 타일러 님께 가서 아뢰도록 하기를 ‘나라의 흥망은 미리 알 수 없는 법이니 만약 그대의 나라가 망하면 그대는 우리 나라에 의지하고, 우리 나라가 망하면 나는 그대의 나라에 의지하겠다.’고 합디다.”
임자가 듣고는 묵묵히 아무 말을 하지 않았으므로 조미갑은 두려워하며 물러 가 처벌을 기다렸다. 수개월 후에 임자가 불러 묻기를 “네가 저번에 말한 유신의 말이 무엇이었느냐?” 하기에 조미갑이 놀라고 두려워하면서 전에 말한 바와 같이 대답하였다. 임자가 말하기를 “네가 전한 바를 내가 이미 상세히 알고 있었다. 돌아가서 아뢰어도 좋다.”고 하였다. 드디어 돌아와서 [김유신에게] 보고하였다. 겸하여 [백제의] 국내외의 일을 말하여 주었는데 정말 상세하였다. 이에 더욱 백제를 병합할 모의를 급하게 하였다.
김유신 장군 60세(660) * 이것은 김유신 열전이 아닌 삼국사기 신라본기 태종무열왕 7년조 기록 일부를 발췌
여름 5월 26일에 왕이 유신(庾信), 진주(眞珠), 천존(天存) 등과 함께 군사를 거느리고 서울을 출발하여 6월 18일에 남천정(南川停)에 다다랐다. 정방(定方)은 내주(萊州)에서 출발하여 많은 배가 천리에 이어져 흐름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왔다. 21일에 왕이 태자 법민(法敏)을 보내 병선 100척을 거느리고 덕물도(德物島)에서 정방을 맞이하였다. 정방이 법민에게 말하였다. “나는 7월 10일에 백제 남쪽에 이르러 대왕의 군대와 만나 의자(義慈)의 도성을 깨뜨리고자 한다.” 법민이 말하였다. “대왕은 지금 대군(大軍)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계십니다. 대장군께서 왔다는 것을 들으면 필시 이부자리에서 새벽 진지를 잡숫고[
食] 오실 것입니다.” 정방이 기뻐하며 법민을 돌려 보내 신라의 병마를 징발케 하였다. 법민이 돌아와 정방의 군대 형세가 매우 성대하다고 말하니, 왕이 기쁨을 이기지 못하였다. 또 태자와 대장군 유신, 장군 품일(品日)과 흠춘(欽春)<춘(春)을 혹은 순(純)으로도 썼다.> 등에게 명하여 정예군사 5만 명을 거느리고 그것에 부응하도록 하고, 왕은 금돌성(今突城)에 가서 머물렀다. 가을 7월 9일에 유신 등이 황산(黃山) 벌판으로 진군하니, 백제 장군 계백(
伯)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먼저 험한 곳을 차지하여 세 군데에 진영을 설치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유신 등은 군사를 세 길로 나누어 네 번을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고 사졸들은 힘이 다빠지게 되었다. 장군 흠순이 아들 반굴(盤屈)에게 말하였다. “신하된 자로서는 충성만한 것이 없고 자식으로서는 효도만한 것이 없다. [이런] 위급함을 보고 목숨을 바치면 충(忠)과 효(孝) 두 가지 모두를 갖추게 된다.” 반굴이 “삼가 분부를 알아듣겠습니다.” 하고는 곧 적진에 뛰어들어 힘써 싸우다가 죽었다.
좌장군 품일이 아들 관장(官狀)<또는 관창(官昌)이라고도 하였다.>을 불러 말 앞에 세우고 여러 장수들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내 아들은 나이 겨우 열 여섯이나 의지와 기백이 자못 용감하니, 오늘의 싸움에서 능히 삼군(三軍)의 모범이 되리라!” 관장이 “예!” 하고는 갑옷 입힌 말을 타고 창 한 자루를 가지고 쏜살같이 적진에 달려들어갔다가 적에게 사로잡힌 바가 되어 산 채로 계백에게 끌려갔다. 계백이 투구를 벗기게 하고는 그의 나이가 어리고 용감함을 아껴서 차마 해치지 못하고 탄식하며 말하였다. “신라에게 대적할 수 없겠구나. 소년도 오히려 이와 같거늘 하물며 장정들이랴!” [그리고는] 살려 보내도록 하였다. 관장이 [돌아와] 아버지에게 말하였다. “제가 적진 속에 들어가 장수를 베지도 못하고 깃발을 뽑아오지도 못한 것은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닙니다.” 말을 마치자 손으로 우물물을 떠서 마신 다음 다시 적진으로 가서 날쌔게 싸웠는데, 계백이 사로잡아 머리를 베어 말안장에 매달아 보냈다. 품일이 그 머리를 붙잡고 흐르는 피에 옷소매를 적시며 말하였다. “내 아이의 얼굴이 살아있는 것 같구나! 왕을 위하여 죽을 수 있었으니 다행이다.” 삼군(三軍)이 이를 보고 분에 복받쳐 모두 죽을 마음을 먹고 북치고 고함지르며 진격하니, 백제의 무리가 크게 패하였다.
계백은 죽고, 좌평 충상(忠常)과 상영(常永) 등 20여 명은 사로잡혔다. 이 날 정방(定方)은 부총관 김인문 등과 함께 기벌포(伎伐浦)에 도착하여 백제 군사를 만나 맞아 싸워 크게 깨뜨렸다. 유신 등이 당나라 군대의 진영에 이르자, 정방은 유신 등이 약속 기일보다 늦었다고 하여 신라의 독군(督軍) 김문영(金文穎)<또는 영(永)으로도 썼다.>을 군문(軍門)에서 목베려 하였다. 유신이 무리들에게 말하였다.
대장군이 황산(黃山)에서의 싸움을 보지도 않고 약속 날짜에 늦은 것만을 가지고 죄로 삼으려 하니, 나는 죄없이 모욕을 받을 수 없다. 반드시 먼저 당나라 군사와 결전을 한 후에 백제를 깨뜨리겠다.
이에 큰 도끼를 잡고 군문(軍門)에 서니, 그의 성난 머리털이 곧추 서고 허리에 찬 보검이 저절로 칼집에서 튀어나왔다. 정방의 우장(右將) 동보량(董寶亮)이 그의 발을 밟으며 말하기를 “신라 군사가 장차 변란을 일으킬 듯합니다.” 하니, 정방이 곧 문영의 죄를 풀어주었다. 백제 왕자가 좌평 각가(覺伽)를 시켜 당나라 장군에게 글을 보내 군대를 철수시킬 것을 애걸하였다. 12일에 당나라와 신라군이 의자왕의 도성을 에워싸고자 하여 소부리(所夫里) 벌판으로 나아가는데, 정방이 꺼리는 바가 있어 전진하지 않았으므로 유신이 그를 달래어 두 나라 군사가 용감하게 네 길로 나란히 진격하였다.
김유신 장군 67세(661)
용삭(龍朔) 원년(문무왕 원년: 661) 봄에 왕은 “백제의 남은 세력이 아직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를 멸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고는 이찬 품일(品日)과 소판 문왕(文王) 대아찬 양도 등을 장군으로 삼아 가서 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다시 이찬 흠순(欽純)<또는 흠춘(欽春)이라고도 썼다.>, 진흠(眞欽), 천존(天存), 소판 죽지(竹旨) 등을 보내 군사를 인솔하게 하였는데 고구려와 말갈이 신라의 예리한 군사가 모두 백제 땅에 가 있어, 나라 안이 비어 있으므로 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군대를 동원하여 수륙으로 진군시켜 북한산성(北漢山城)을 포위하였는데 고구려는 그 서쪽에, 말갈은 그 동쪽에 주둔하여 공격이 수십 일에 이르니 성안 사람들이 두려워하고 있었다. 갑자기 큰 별이 적의 진지에 떨어지고 천둥과 벼락이 치면서 비가 오니 적들이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포위를 풀고 달아났다. 이전에 유신은 적이 성을 포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말하기를 “사람의 힘을 다하였으니 이제 신령의 도움을 받을 수 밖에 없다.” 하고 절에 나아가 제단을 마련하고 기도를 드렸더니 마침 하늘의 변괴가 있었다. 모든 사람이 지극한 지성이 감동시킨 바라고 말하였다.
유신이 일찍이 한가윗날 밤에 자제를 거느리고 대문 밖에 서 있는데 문득 서쪽으로부터 오는 사람이 있었다. 유신은 그가 고구려 첩자임을 알고 불러 앞에 세우고 말하기를 “너희 나라에 무슨 일이 있는가?” 하니 그 사람은 얼굴을 숙이고 감히 대답하지 못하였다. 유신이 말하기를 “두려워하지 말고 단지 사실대로 말하라!” 하여도 말을 하지 않았다. 유신이 말하였다.
“우리나라 임금님은 위로는 하늘의 뜻을 어기지 않고 아래로는 백성의 마음을 잃지 않아서 백성이 즐겁게 모두 자기 일을 즐기고 있음을 지금 네가 보았으니 가서 너희 나라 사람들에게 알려주어라!”
드디어 위로하여 보냈다. 고구려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는 “신라는 비록 작은 나라이지만 유신이 재상을 하고 있는 한 가벼이 할 수가 없다.”고 말하였다.
[문무왕 원년] 6월에 당나라 고종 황제가 장군 소정방 등을 보내 고구려를 정벌하려 할 때 당나라에 들어가 숙위하고 있던 김인문이 명을 받고 돌아와 출병일을 알리고 겸하여 출병하여 함께 치기를 권유하였다. 이에 문무대왕은 유신, 인문, 문훈(文訓) 등을 인솔하여 많은 병사를 출동시켜 고구려로 향하였다. 행군이 남천주(南川州)에 이르렀을 때 주둔하고 있던 유인원이 거느린 군사를 사비로부터 배를 태워 혜포(鞋浦)에 이르러 하륙시켜 또한 남천주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때 담당 관청이 보고하기를 “앞길에 백제의 잔적이 옹산성(瓮山城)에 모여 있어 길을 막고 있으니 곧바로 전진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이에 유신이 군사를 진격시켜 성을 포위하고 사람을 시켜 성 아래에 가까이 가게 하여 적장에게 말하였다.
“너희 나라가 공손하지 못하여 대국(大國)의 토벌을 당하였다. 명령을 따르는 자는 상을 주겠고 명을 따르지 않는 자는 죽이겠다. 지금 너희들은 홀로 외로운 성을 지켜 어찌하고자 함인가? 끝내 반드시 패망할 것이니 성에서 나와 항복하여 생명을 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부귀를 기약함보다 더 좋은 방책이 없을 것이다.”
적들이 큰 소리로 외치기를 “비록 조그만 성이지만 군사와 식량이 모두 족하며, 장수와 병졸이 의롭고 용기가 있으니 차라리 죽도록 싸울지언정 맹세코 살아 항복하지는 않겠다.” 하니, 유신이 웃으며 말하기를 “궁지에 몰린 새와 짐승은 오히려 스스로를 구할 줄 안다고 하는데 이 경우를 두고 말함이라!” 하고는 이에 깃발을 흔들고 북을 쳐 공격하였다. 대왕은 높은 곳에 올라 싸우는 군사를 보고 눈물을 흘리며 격려하니 병사들이 모두 분발하여 공격하여 창끝과 칼날을 겁내지 않았다.
9월 27일에 성을 함락하자 적의 장수를 잡아 처형하고 그 백성은 놓아주었다. 공을 논하여 장수와 병사에게 상을 주었고 유인원도 비단을 차등있게 나누어 주어. 이에 군사에게 잔치를 베풀고 말을 먹인 후 당나라 군사가 와 있는 곳에 가서 이와 합치려 하였다. 대왕은 앞서 대감(大監) 문천(文泉)을 보내 소(蘇)장군에게 서신을 보냈던 바 이 무렵 돌아와 보고하였다. 드디어 [소]정방의 말을 전하였다.
“내가 명을 받아 만 리나 되는 푸른 바다를 건너 적을 치러 배로 해안에 이른 지가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 대왕의 군사가 이르지 않으니 식량을 이을 길이 없어 위태로움이 심합니다. 왕께서는 조처하여 주십시오!”
대왕이 뭇 신하에게 “어찌하면 좋을꼬?” 하고 물으니, 다같이 말하기를 “적의 경계 내에 깊이 들어가 식량을 수송하는 것은 형편상 이룰 수가 없다.”고 하였다. 대왕은 걱정하면서 한숨을 쉬었다. 유신이 앞에 나아가 대답하였다.
“신이 지나치게 은혜로운 대우를 받았고, 무거운 책임을 맡았으니 국가의 일을 비록 죽는 한이 있더라도 피하지 않겠습니다. 오늘이 이 늙은 신하가 절의를 다하여야 할 때입니다. 마땅히 적국에 가서 소(蘇) 장군의 뜻에 부응하겠습니다.”
대왕이 자리 앞에 나아가 그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였다.
“공의 어진 보필을 얻었으니 걱정이 없습니다. 만약 이번 일이 뜻한대로 어긋남이 없으면 공의 공덕을 어느 날인들 잊을 수 있겠습니까?”
유신이 이미 명을 받고 현고잠(懸鼓岑)의 동굴 안의 절에 가서 재계하였다. 곧바로 영실(靈室)에 들어가 문을 닫고 홀로 앉아 분향하여 여러 날 밤을 지내고 나와서 사사로이 홀로 즐거워하며 말하기를 “나의 이번 걸음에는 죽지 않을 것이다.” 하였다. 장차 떠나려 하니 왕이 손수 쓴 글을 유신에게 주었는데 『국경을 벗어난 후 상벌을 마음대로 하여도 좋다.』 하였다.
12월 10일에 부장군 인문(仁問), 진복(眞服), 양도 등 아홉 장군과 더불어 병사를 인솔하고 식량을 실어 고구려의 경계 안으로 들어갔다.
김유신 장군 68세(662)
임술년(문무왕 2년, 662) 정월 23일 칠중하(七重河)에 이르렀는데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감히 먼저 배에 오르지 않자 유신이 말하기를 “여러분이 이처럼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어찌 이 곳에 왔는가?” 하고는 스스로 먼저 배에 올라 건너니 여러 장군과 병졸이 따라서 강을 건너 고구려 강역 안에 들어갔다. 고구려인이 큰길에서 지킬 것을 염려하여 험하고 좁은 길로 행군하여 산양(
壤)에 이르렀다. 유신이 여러 장수들에게 말하였다.
“고구려 백제 두 나라가 우리 강역을 침범하여 우리 인민을 죽이고 젊은이를 포로로 잡아가 목을 베었으며, 혹은 어린애를 잡아다가 종으로 부린 지가 오래되었으니 통탄스런 일이 아닌가? 내가 지금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어려움에 나가는 것은 대국의 힘에 의지하여 두 나라 수도성을 함락시켜 나라의 원수를 갚고자 함이다. 마음 속으로 맹서하고 하늘에 고하여 신령의 도움을 기대하나 여러분의 마음이 어떤지 몰라 말한다. 적을 가벼이 보는 자는 반드시 성공하여 돌아갈 것이나, 적을 두려워하면 어찌 포로로 잡힘을 면할 수 있겠는가? 마땅히 한 마음으로 협력하면 한 사람이 백 사람을 당해내지 못함이 없을 것이니 이것이 여러분에게 바라는 바이다.”
그러자 여러 장졸들이 모두 말하기를 “원컨대 장군님의 명을 받들겠으며 감히 살겠다는 마음을 가지지 않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북을 치며 평양으로 향하였다. 길에서 적병을 만나면 역습하여 이기니 얻은 무기가 심히 많았다. 장새(獐塞)의 험한 곳에 이르렀을 때 마침 날씨가 매우 추웠고 사람과 말이 지치고 피곤하여 쓰러짐이 많았다. 유신이 어깨를 드러내 놓고 채찍을 잡고 말을 몰아 앞에 나가니 뭇 사람이 이를 보고 힘을 다하여 달려 땀이 나자 감히 춥다고 하는 자가 없었다. 드디어 험한 곳을 지나니 평양이 멀지 않았다. 유신이 말하기를 “당나라 군대의 식량 부족이 심할 터이니 마땅히 먼저 알려야겠다.”고 하고는 보기감(步騎監) 열기(裂起)를 불러 말하였다.
“내가 젊어서 그대와 놀 때 너의 뜻과 절의를 알았다. 지금 소(蘇) 장군에게 소식을 전해야겠는데 적당한 사람을 찾기가 어렵다. 네가 가지 않겠는가?”
열기가 말하였다.
“내 비록 어리석으나 외람되이 중군(中軍)직을 맡았고, 하물며 장군님이 시키신다면 비록 죽는 날도 살아 있는 때와 같다고 여기겠습니다.”
드디어 힘센 군사 구근(仇近) 등 15명을 데리고 평양으로 가서 소 장군을 만나 말하기를 “유신 등이 군사를 이끌고 식량을 가지고 가까운 곳에 이르렀다.”고 하니, 정방이 기뻐서 글로 감사하다고 썼다. 유신 등이 양오(楊
)에 다다라 한 노인을 만나 물었더니 적국의 소식을 상세히 말해 주었다. 베와 비단을 주었더니 사양하여 받지 않고 가 버렸다. 유신이 양오(楊
)에 진을 치고 중국말을 할 줄 아는 인문, 양도(良圖) 그리고 그 아들 군승(軍勝) 등을 보내 당나라 군영에 가서 왕의 명으로 군량을 보냈음을 알렸다. 정방은 식량이 떨어지고 군사가 피곤하였으므로 힘껏 싸울 수 없어 식량을 얻고는 돌연히 당으로 돌아갔다. 양도는 군사 800명을 거느리고 바다로 귀국하였다. 그때 고구려인이 군사를 매복시켰다가 우리 군대를 돌아오는 길에서 공격하고자 하였다. 유신이 북과 북채를 모든 소의 허리와 꼬리에 매달아 뛸 적마다 소리를 내게 하였고, 또 땔나무를 쌓아 놓고 태워 연기와 불이 끊이지 않게 해놓고 밤중에 몰래 표하(@[
瓢]河)에 이르러 나루를 건너 강 가에서 군사를 쉬게 하였다. 고구려인이 이를 알고 추격해왔다. 유신이 만노(萬弩)를 일제히 발사하니 고구려 군대가 물러나므로 여러 부대[幢]의 장병을 독려하여 나누어 출발하게 하고 역습하여 패퇴시켰다. 장군 한 사람을 사로잡았고, 1만여 명을 목베었다. 왕이 소식을 듣고 사신을 보내 위로하였고 돌아오자 상을 내려 식읍을 봉해 주고 벼슬을 차등있게 하였다.
김유신 장군 69세(663)
용삭(龍朔) 3년 계해(문무왕 3년: 663)에 백제의 여러 성이 몰래 부흥을 꾀하여 그 장수들이 두솔성(豆率城)에 근거하며 왜에 군사를 청하여 후원을 삼으니 대왕이 친히 유신, 인문, 천존(天存), 죽지(竹旨) 등 장군을 인솔하고 7월 17일에 정벌에 나서 웅진주(熊津州)에 이르러 주둔하고 있던 유인원과 군사를 합쳐 8월 13일에 두솔성(豆率城)에 이르렀다. 백제인과 왜인이 진영에서 나오자 아군이 힘껏 싸워 크게 이겼다. 백제와 왜인이 모두 항복하였다. 대왕이 왜인들에게 말하였다.
“우리 나라와 너희 나라는 바다를 사이에 두고 강역이 나뉘어 있어 일찍이 전쟁한 일이 없고 단지 우호관계를 맺어 사신을 서로 교환하여 왔는데 무슨 까닭으로 금일 백제와 죄악을 함께하여 우리 나라를 도모하는가? 지금 너희 군졸은 나의 손아귀 속에 들어 있으나 차마 죽이지 않겠다. 너희는 돌아가 너희의 국왕에게 전하라! 그리고 너희는 가고 싶은대로 가라!”
군대를 나누어 치니 모든 성이 항복하였으나 오직 임존성(任存城)만은 지세가 험하고 성이 견고하며 또한 식량이 많아 30일을 공격하여도 함락시키지 못하였다. 군사가 피곤하여 싸움을 싫어하였으므로 대왕이 말하기를 “지금 비록 한 성을 함락시키지 않아도 다른 모든 성이 항복하였으니 공이 없다고 할 수 없다.” 하고는 군사를 거두어 돌아왔다. 겨울 11월 20일에 서울에 와서 유신에게 토지 500결을 내려주고 다른 장병에게 상을 차등있게 내려주었다.
김유신 장군 70세(664)
인덕(麟德) 원년 갑자(문무왕 4년: 664) 3월에 백제의 남은 무리가 또 사비성에 모여 반란을 일으켰다. 웅주도독(熊州都督)이 자기 소관의 병력을 출동시켜 공격하였는데, 여러 날 동안 안개가 끼어 사람과 물건을 분별하지 못하여 이 때문에 싸울 수가 없었다. 백산(伯山)을 시켜 [그 사연을] 고하니, 유신이 은밀한 모책을 주어 이기게 하였다.
*출처: 삼국사기 신라본기 태종무열왕조, 삼국사기 김유신 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