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나무아미타불 원문보기 글쓴이: 늘언제나
기도나 수행을 할 때 큰스님들께서 늘 강조하신 것이 첫째도 놔라 둘째도 놔라 셋째도 놔라고 하신다.
이속에 수행에서 정말 중요한 어떤 비법이 들어있는 모양에 틀림이 없다.
그렇기에 큰스님들께서는 강조하고 또 강조를 하신 모양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집착하고 있는 것을 모두 놓아라는 뜻이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집착을 가지고 있으면 깊이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방하를 한다는 것이 그렇게 쉽지를 않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모든 큰스님들께서 첫째도, 마지막도 놔라고 하신다.
방하 즉 놓는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하고 수행에 있어서 전부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방하만 잘 된다면 기도나 수행에 있어서 그 사람은 이미 길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사람은 스스로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지 않아도 스스로 깊이 들어 갈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깊이 들어가서도 해야 할 일은 거기서도 또 다시 놓는 것이다.
그래서 방하는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생각으로 생각을 놓을 수 없는 것이 방하다.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하는 데는 어떤 기술? 이 필요하다.
그런데 방하를 하는 데는 무엇보다도 몸과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이완이 필요하다.
다시 말하면 리렉스를 해야 한다.
리렉스 즉 이완이라는 말은 그 근원이 한국에서 나온 말이 아니고 서양에서 나온 말이다.
그래서 한국불교를 전통적으로 수행하시는 분들에게는 이완이니 리렉스라는 말은 낯설기만 할 것이다.
그러나 놔라는 말을 다르게 표현하는 것이 바로 이완이다.
그러니 이완이나 놔라는 말은 같은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동양에서는 사람들을 치료할 때 침을 사용하여 어떤 놓아야 할 자리에 꽃는다.
그런데 흔히 알고 있는 현대 의술은 수술을 하고 양약을 주는 것으로 일반적으로 알고 있지만 사실은 서양에서도 침을 사용하고 있다. 단지 침을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지 않아 주류에 속하지 않고 변방에 속해서 그렇지 침을 놓을 자리도 동양의 그 자리와 비슷하다.
마찬가지로 방하를 하라는 것이나 이완이나 리렉스를 하라는 것은 동 서양을 막론하고 표현들은 다르지만
삶의 모든 부분에서, 수행에 있어서 핵심적인 부분으로 근본적으로 같은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런데 불교에서 사용하고 있는 놓는다는 방하는 이완이나 리렉스와 비교를 했을 때 접근 방법들이 너무나 막연하고 추상적이다. 어찌보면 핵심을 찌르지 못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서양에서 사용하고 있는 이완법이나 리렉스 하는 방법들은
구체적이고 체계적으로 아주 다양한 방법들이 있다.
그리고 그들은 수행의 목적으로만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실생활의 삶에서 아주 긴요하고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
모든 스포츠, 음악, 그리고 수행, 힐링 등에 있어서 이완이나 리렉스는
꼭 필요하고 그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프랑스에 계시는 어떤 큰스님께서는
이런 현대적인 이완 기법을 활용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다.
이완이나 리렉스는
삶에 있어서뿐 아니라 삶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그만큼 중요하고 모든 부분에서 꼭 필요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독일 사람들은 이완하는 법을 일상생활에서 활용하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한다.
이완이란 말은 최면에서 주로 사용하는 말이었지만
독일에서는 의사였던 슐츠 박사라고 그 부분에서 유명한 분이 계신다.
그분은 최면을 통한 이완 기법을 자율 훈련법이라는 간단하면서도
스스로 해 나갈 수 있도록 독창적인 이완법으로 승화를 시키셨다.
그래서 독일에 가면 지금은 돌아가시고 계시지 않지만 슐츠박사란 분이 개발한 자율 훈련법을 통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이완법들을 활용하여 경험하고 있으며 또 자율훈련법에 관한 서적이 수십 종이나 된다고 한다.
그리고 그 책들은 어떤 전문 서적도 아니고 일반인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코너에
그 부분의 서적들이 다양하게 진열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자율훈련법을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브란트 전 수상을 비롯하여
유명한 스포츠인 등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활용하여 성공에 이른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독일 사람들은 그 만큼 이완의 중요성을 알고
이완을 삶에 활용하면서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한다.
그래서 그 차분하고 편안하게 이완된 마음을 가지고 있기에 어떤 과학적인 정밀 기계들이 지금도 세계적으로 유명한 지도 모르겠다.
나도 자율 훈련법을 접하고 그 자율 훈련이 이완하는데 정말 좋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무리 피곤하더라도
5,6분 정도하고 나면 몸과 마음이 자고 난 것처럼 아주 가뿐 한 것을 느낀다.
그것은 반복하면 할수록 빨리 깊이 들어 갈수 있다.
우리의 삶에서도 긴장을 풀고 이완이 되었을 때 삶의 활력이 솟는 것을 느낀다.
푹 자고 나면 에너지를 충전할 수 있듯이 아무리 피곤하더라도 이완하는 것만 제대로 할 수 있다면 깊은 잠을 자고 난 것처럼 맑은 정신을 유지 할 수 있다.
그것은 하루아침에 되는 것은 아니지만 매일 매일 생활의 일부로서 활용을 한다면 내 것을 만들 수 있다.
이완이 삶의 모든 부분에서 활력을 불어 넣어 주듯이
특히 기도나 수행에서도 이완은 정말 중요하고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완이 얼마나 빨리 그리고 잘 되었느냐에 따라 집중을 잘 할 수 있고 깊이 들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도나 수행에 있어서 백번을 말해도 부족하지 않고 꼭 필요한 것이 이완이다.
고등학교에 졸업 후 야구부가 생겼다. 그때부터 야구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것이 지금까지도 연결이 되어 지금도 나는 야구를 좋아한다.
어느 선수가 2군으로 내려가서 하는 것이 힘 빼는 연습만 하다가 올라왔다고 한다.
그런데 1군에 올라와서도 막상 타석에 들어서면 긴장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2군에 가서 힘 빼는 것만 연습을 했다고 하는데도 말이다.
기도나 수행 역시 마찬가지다. 삶에서 어려움을 겪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긴장이 된다.
그러할 때 일수록 이완은 더욱 필요하다.
그리고 이완은 어떻게 해서든지 해야만 하는 중요한 전부라고 말 할 수 있다.
야구 등 운동을 잘하는 사람들은 몸이 부드럽고 몸이 유연하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선 동열 선수가 광속구를 던질 수 있었던 것도
그는 몸이 유연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몸이 유연하다는 것은 그만큼 에너지가 넘쳐흐른다는 말도 된다.
그리고 자연 에너지가 넘치고 자신감이 충만하니 긴장이 되 있지 않다는 것이다.
긴장이 되지 않은 유연한 몸에서 힘이 나온다.
수행 엮시 마찬가지다.
몸이 먼저 받쳐 주어야 한다. 몸이 받쳐주지 못하면 몸에 끄달려 깊이 들어 갈 수 없다.
그래서 티벳에서는 수행하기 전에 먼저 수행하기 좋은 몸을 만든다고 한다.
수행하기 좋은 몸을 만든다는 것은 바로 힘 빼는 것을 잘하는 것이다.
우리한국 불교에서도 몸을 만들기 위해 가장 좋은 것이 절 수행이다.
절은 알고 보면 몸을 긴장과 이완을 반복하면서 이완에 이르게 하는 좋은 방법이다.
그리고 절이라는 굴절운동을 통해서 우리는 몸과 마음을 이완도 시키고 정화도 시키고 치유도 시키면서 수행하기 좋은 몸을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절을 통해서 힘을 얻으신 큰스님 분들도 계신다.
수행하는데 몸의 불편함을 느낀다는 것은 마음이 그곳에 뺏기게 되어 집중을 하는데 방해가 된다.
물론 그걸 가지고 들어가는 방법이 있지만 여기서는 생략한다.
불교에서 팔정도를 이야기 한다.
팔정도의 첫 번째가 정견이다.
올바로 보는 것이 팔정도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올바로 보기위해서
우리들이 먼저 해야 할 일이 몸과 마음이 편안하게 이완이 되어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방하가 되어야 한다.
그런 상태에서 정견이 바로 되는 것이다..
그래서 큰스님들께서는 놔라 놔라 놔라 하시는 것이다.
긴장되어 뭔가에 집착으로 가득 차 있는 사람에게서
정견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그 사람에게는 온갖 고정관념으로 가득차 있기에 그 사람의 관점에서 바로보고 온갖 시비심으로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으로 가득찬 사람에게 무얼 기대 하겠는가?
이완은 단순한 최면을 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이완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들의 갖혀 있는 한계의식에서 벗어나 끝도 갓도 없는 한계 없는 다시 말해 시간(무량수)과 공간(무량광)을 초월한 무한한 우주(나무아미타불)와의 연결을 시키는 데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들이 초점을 어디에다 두느냐는 정말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처음에는 그것은 사소한 것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초점이 싸이고 쌓이고 했을 때 그것은 사소한 것이 이제는 아니다.
처음에는 사소한 것일지모르지만 그것이 기적을 만들기도 하고 원하는 것을 이루기도 한다.
초점을 어디에다 두느냐 그것은 정말 중요하다.
그래서 그 초점을 맞추는 것을 이완에다 중점을 두어 보자.
이완, 이완, 힘 빼는 것, 그것은 모든 부분에서 활용해야 되고 또 모든 부분의 전부이다.
초점을 맞추고 했을 때는 그것은 쌓이고 쌓여 마침내는 큰 것이 되고 만다.
그것은 전부가 되어 모든 것을 삼키어 버린다.
사실 염불이나 진언이나 다라니 등도 열심히 하다보면 그것은 전부다 이완으로 연결이 된다.
물론 그 자체가 지니는 힘으로 이완도 되지만 열심히 하다보면 이완은 저절로 된다.
그러나 초점을 처음부터 이완에다 맞추고서 이완을 경험하면서 경전이나 불보살님의 명호나 진언이나 다라니 등을 독송을 하게 되면 훨씬 재미있고 흥미를 느끼면서 지루하지 않고 고비를 수월하게 넘어갈 수 있다.
그러나 이완에다 맞추지 않고서 그냥 하다보면 수많은 고비들이 다가온다.
그럴 때 우리들은 그만 포기를 하여 버리기 쉽상이다.
물론 상근기 들이라면 처음 먹은 마음을 끝까지 유지하여 신묘장구 대 다라니만 하여도 100만 독이고, 200만 독이고 해 나갈 수 있겠지만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중간에 포기를 하여버리고 만다.
왜 그럴까? 100만 독이고 200만독이고 하면 좋다는 것을 알면서도......
공부를 잘하는 사람들은 공부가 재미가 있다는 것이다.
언젠가 어떤 분이 공부가 이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고 가장 쉽다고 한 기사를 본적이 기억이 난다.
기도나 수행 엮시 재미를 느껴야 한다.
기도나 수행에서 흥미나 재미를 느꼈을 때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게 해 나갈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재미를 느끼고 신나게 하는 것일까?
"기도는 기도하는 곳에 있지 않고 체험하는 곳에 있다"는 말이 있듯이
기도를 할 때는 어떤 체험이 필요하다. 몸과 마음을 통해서 어떤 체험을 하게 되어 어떤 변화를 경험하게 되면 그 경험은 누가 뺏어 갈수도 없고 주어도 주어도 부족하지 않게 된다.
그럴 때 그 사람에게는 기도하는 것이 재미있고 신이 나고 절에 가는 것이 기다려지게 된다.
그럴 때 절에 나오지 말고 좀 쉬어라고 해도 그에게는 절에 가는 것이 마냥 즐겁기만 하다.
그리고 주위사람들에게 절에 다니는 것이 정말 신나고 즐거운 일이라는 것을 이야기 한다.
그런데 그 사람이 체험과 변화에서 나온 것이기에 주위 사람들은 그 사람 말을 믿게 되고 동화 될 수 밖에 없게 된다.
기도나 수행을 할 때 그런 변화와 체험을 가져오게 하는 가장 중요한 핵심이 이완이다.
물론 기도를 상근기들처럼 오래 하다보면 반드시 이완이 무엇인지 조차도 모르면서 이완 속에서 기도를 하게 되고 그들은 반드시 체험과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기도나 수행을 할 때 처음부터 이완에 초점을 맞추면서 하다보면 그리고 그걸 아는 사람들이 함께 기도를 하다보면 그 사람들은 기도를 하면서 체험과 경험을 하면서 변화를 경험하게 되고 또 그 변화가 동기부여가 되어 신이 나고 재미를 느끼면서 기도를 하게 되어 낙오자 없이 힘을 얻게 될 것이다.
우리들은 소니의 전성기를 잘 안다.
얼마나 철옹성 같았냐면은 소니왕국이라고 부를 정도로 탄탄한 기반을 가지고 있었다.
젊은이들은 워크맨이라고 하는 것을 가지고 싶어했고 전성기일 당시에는 무너지질 않을 것 같은 정도였다.
그러나 급변하는 디지털 시대가 다가옴에도 불구하고 아날로그를 고집하여 변화를 외면한 소니는 변화의 페러다임을 놓치는 바람에 결국 철옹성 같았던 왕국이 허물어 지고 말았다.
또 카메라 필름 회사로 코닥이라는 유명한 회사가 지금도 있다.
한 때는 선두주자 였지만 맨 처음 디지탈 카메라를개발한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디지탈 카메라에 눈을 뜨지 놋하고 필름을 고집하기도 하였다고한다.
그러다 놓쳐 후발 주자들에게 필름이 필요없는 디지달 카메라가 급숙히 발전하게 됨에 따라
시기를 놓쳐 뒤쳐지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은 시대가 급변하고 있다.
물도 고이면 썩듯이 어떤 사회든 다른 배경과 문화를 가진 이들과 함께하여 수용하지 않으면 글로벌 시대에 도태되기 마련이다. 종교엮시 예외 일 수 없다. 비록 불교 밖에서라도 기도와 수행에 도움이 되는 것들이 있다면 우리는 그걸 토대로 새롭게 페러다임을 구성해야 한다.
그래서 불자들에게 뭔가 동기부여를 하여 재미있고 신이나는 불교가 되도록 하여야 한다.
첫댓글 이글은 제가 어느 까페에 올린 글을 퍼온 글입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