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금이 무려 35년만에 본다
고향 동네에 살면서 어렸을때 보고는 어제 처음 본다
정희는 면민회때 보았다
무려 30여년을 훌쩍 넘기고 처음 본다 어른 모습이 보여도
여전히 내 눈에는 아직도 애린 동생들이고 애들 모습이다.
정금이는 큰 딸이 서른 둘이라니 시집은 언제 갔는지 그러니까 수물하고 두세살에 간 모양이다
정희는 신문사 기자로 아직 왕성한 활동 중이고
내 담임 선생님이신 이용훈 선생님의 딸인 정희 이야기는 진즉했으니
이제 정금이 이야기를 쓴다.
정금이는 재엽이 성 동생이다 그 집 식구 중의 막내다.
재엽이 성은 미남이여서 애릴때 서울로 상경한 배우 지망생이었다 어쩌다 시골에 오면
신기한 서울이야기며, 달작지근한 영화 이야기며 영화 출연이야기는 모두가 신기하였따.
그래서 자주 재엽이 성집에 놀러갔따.
시골 동네는 전부 친척이고 성이고 오빠다. 이리저리 맞추다가보면 친척이다.
뉘 집이든지 밥때가 되면 상을 차려주고 밥 먹고 가야하고
어르신은 아제 아짐이고 할매 할아버지고 누님 성이다. 그랑께, 세랍문 잠글 일도 싸울 일도
서로 숭볼 일도 없따. 가슬이나 씨나락 당굴때면 너도나도 품앗이 해서 바쁜 농번기를
협동하여 헤쳐가던 시대였다. 방죽이 터졌다. 논둑이 터졌다. 길이 무너졌다.
그러면 울력으로 때우면 된다. 울력이라든가 무슨 긴급한 일을 알리려면 징이 울린다 징이 울리면
동네 사람들이 전부 사장나무터(당산나무자리)로 모인다.
동네 사장 나무터는 어른들 아이들 놀이터이고
논 배미는 화로터이고 여자애들 고무줄넘기 터, 이시거리터였다
아름다운 그림이다. 숭년이 들어 보릿고개 때는 갯떡으로 소나무 콩클로 지내기도하고
애린 풀을 뜯어서 죽을 써먹었다.
우리 엄니들은 쑥이란 나물 말고도 시골 길에 널린 그 많은 알 수 없는 풀 중에서도
먹을 수 있는 풀과 못먹는 풀의 구분은 잘도 아셨다. 양식이 없으니 풀죽으로 먹기도 했다.
동네 아래 깽밴에 진흙으로 된 사구모양의 언덕이 있는데
어느날은 엄니가 진흙을 채로 채서 솥에 끓인 다음에 물에 타서
사카리를 타 준적이 있었는데 기막히게 맛이 있었다, 밀가루 죽 같아따.
여름 장마가 오면 보릿대가 썩어 짜부라져불고 보리 수확도 못하고 먹을 것이 없었으나
이렇게 이렇게 잘 버틴 시절이다,
비료가 어디 있겠는가,
여름 내내 산풀로 여름 풀로 망옷을 맹근다. 붓하고 객토하고 그러니 나락도 잘 자라고
밭농사도 진감자도 잘 된다. 여름이면 가을이면 산하가 벼논과
채소등 밭농사로 푸르고 발갛고 창연하니 책에 나오는 전원의 풍경이다.
정겹다. 곰재는 워낙 산중이고 지대가 높아서 시한이면
웬수같은 바람이 송신나게 불러제킨다. 헹거치로 낯바닥을 싸매면 짐이 그냥 얼어서
헹가치 사이 고드름이 된다. 추운 지방이다
한 식구같이 살아 온 세대이니 누가 누구를 뭐라하고 흠할 것인가.
온 동네가 친척이고 식구들이니 설날 세배를 다니려면 한집도
안 걸리고 다녀야 하니 세배하는데도 이틀이나 걸리고
맷뚱에 절하러 다니는 것도 이틀이나 걸린다, 아부지는 이곳이 누구 누구 어르신 산소라고
갈켜 주어도, 절하고 되돌아서면 잊어 분다.
멧뚱도 한 두군데야지 사방 천지 산이 조상들 묘이니 말이다.
으레히 어느 집이나 가면 세배 돈이며 떡국 준다. 설날부터 콩을 볶아먹는 보름때까지
놀자이고 용돈 챙기는 날이고 일도 안한 날이다.
그래서 설은 늘 기다려진 명절이다.
면민회, 시골의 재경 면민회처럼 왁자지껄이 없단다
워낙 시골이라 郡 중에서도 첩첩 산중에 산사람들이라서인지
외부 유동은 없고 도회에서 보는 이기적이거나 욕심이 없고 정으로 뭉친 인심이다
서울에서 재경 면민회하면 수백명이 모인다. 할 때마다,
시골 면사무소는 아예 면사무소 문을 닫아 불고 면장과 면직원들이 전부 서울로 올라온다.
시골 동네마다 나이드신 어른들을 관광차로 모시고 같이 올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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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정의 고장이다
정희가 신문기자로 고향 소식을 취재하는디 금메 웅치가 다른 재경회보다 사람들도 많고
정이 많고 좋아서 다른 출신들이 부러워한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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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금이는 내 2년후배이다. 보성여중에 다니던 시절이다. 난 담안에서 자취를 했고
정금이는 내 사촌동생 금화하고 솔메에서 자취를 하였다.
언제인가 오빠로서 처음으로 과자를 사들고 둘이 자취하는 솔메에 갔다.
친척 간이라도 남녀 유별이니 마음대로 같이 지내거나 말을 터놓고하던 시절이 아니다.
같은 동네의 오빠이니 공부하는 모습도 보고싶고 그리고 지낸 모습도 보고 싶어서
처음으로 찾아갔다. 제법 너른 방에서 둘이서 자취를 하고 있었고
움묵에는 커다란 책상하나가 달랑 하나 있고 우게 책이 쪼끔 놓여있을 뿐
단조롭다는 인상이었다. 자취하면 대개 방안 이곳 저곳에 쌀 푸대며 반찬 독이며
가방이며 책이며 이불이며 비게며 ...많은데 아무 것도 없었다. 내가 온다고 미리 숭케부렀는가 싶었다
시한인데 방이 차갑다는 느낌이다.
그런데 동생들이 과자도 먹으라고 하니 먹지도 않고 말이 통 없었다
뭐라고 이 오빠가 물으면
대답만 가느다랗게 할뿐 도무지 말이 없었다.
원래 나도 남자치고 수줍음을 많이 타서 통 말이 없는 성격인데
애들마져 단 한마디도 하지않았다...
그때 정금이를 보고....
다시 1973년 무렵인가보다 난 18세에 서울시 실시 5급 공채 행정직에 합격해서
서울시 산하의 공무원으로 다니던 시절이다,
그때 무슨 일로 시골집에 갔다가 서울로 올라오는데 당시 보성역에서
정금이와 정금이 어머님이 보인다. 정금이 어머님이
정금이랑 같이 서울 가는데 데려다주라 하신다. 정금이도 서울에 큰언니가 살아서 직장일로
상경하는 터 였다. 추운 겨울날이다. 몹시 추워하길래 양복을 벗어서
덮혀주고 내 무릎에 재워서 그렇게 서울역에 도착하여 내렸다.
마장동인가 천호동인가 먼데로 간다고하는데 서울역 앞에서 헤어졌다.
송신나게 바람은 쌩쌩불고 발과 손이 시러웠다. 새벽 찬바람이 귓가를 때린다.
시한 중의 시한이었다.
서울역 앞에는 한진빌딩만이 커다랗게 서있을뿐, 새벽 일을 나온 리아까 아저씨들과
지게짐 인부들이 바삐 다닌다.
시내버스들이 갈길을 재촉하느라고 여기저기서 빵빵거린다.
잘 가라하고 헤어졌다. 그 뒤 어떻게 잘 들어갔는지 내내 걱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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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후 세월이 흐른 뒤에 한 번도 정금이를 본 적이 없었다.
1975년인가 1976년인가 재업이 성집에도 가보았는데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서울에 있다고만 들었다.
당시 장교 교육을 상무대 포병학교에서 했는데
기간중 토요일이면 외박을 나와서 종종 보성 집에 갔었는데
재업이 성집에 집에 가 보았어도 없었다.
첫댓글 재경웅치면민회일년에두번 봄.가을에있습니다.회장임기가2년이기에2년에4번입니다.수정요망,이민영시인님당신은무척이나죤경받은분으로후배로서 자랑스럽습니다 오래전부터오붓한시간을갖고싶었습니다 이제라도만나서오손도손시간간줄몰으고 황금같은시간들이흐르고 그날잠실호수공원은가장아름다운곳 그곳은정말빛이났습니다 가끔은그런시간이필요하다는걸알았습니다 또,또 만납시다.이민영시인님과,김정금님 그리고 나 정희...
반갑고 세월을 거슬러 올라간 시간이였겠습니다...세월이 흘러도 어릴때 친구들은 어릴때 그모습이던걸요.제경험으로..^^ 반가운 만남 마음으로 축하 드리면서 고운글 잘 읽었습니다...^^
당신은뉘신지 함께 동행하니 많이감사합니다.우리선후배사랑 쪼아보이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