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통문 Ⅲ-14]율곡 선생이 살았던 집 언저리
독보적인 전각예술가 친구의 공방(갤러리)이 인사동 사거리에 있다. 그의 작품(병풍, 액자 등) 수 백 점을 비좁은 갤러리에 도저히 보관할 수 없어, 유서 깊은 승동교회(勝洞敎會)* 쪽문 골목의 허름한 빌딩(金座) 사무실을 빌렸다. 최근 지독히도 더운 날, 수장고(收藏庫)에 이사하던 중 교회 쪽문으로 언뜻 돌 표지석<사진>이 보여 들어가보고 깜짝 놀랐다. 바로 이곳이 조선조 대유학자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 선생이 한양에서 벼슬아치를 할 때 살았던 ‘절골 집터’라는 것이다. 세상에나, 지금으로부터 족히 400여년 전의 일이 아닌가. 정말일까. 그렇게 쓰여 있으니 믿을 수밖에 없는 일이긴 하다. 그렇다. 한양은 그렇게 오래된 수도(首都)였다.
지갑 속의 5천원권 지폐를 새삼 꺼내보며 잠깐 상념에 잠겼다. 국립중앙박물관 유홍준 관장이 “우리나라는 전국토가 박물관”이라고 했듯, 한양도성을 걷다보면 전설같은 얘기들을 많이 듣고 알게 된다. 장충단(獎忠壇)이 왜 원조(元祖) 현충원인지, 북대문으로 일컫는 북악산의 숙정문은 조선조 왜 닫혀 있었는지, 낙산의 동망대(東望臺)는 단종 임금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인왕산의 치마바위 유래 등 간단간단한 역사적 일화들을 아는 것은 가외의 소득이 아니고 무엇이랴.
2014년 도로명 주소가 본격 시행하기 전의 서울시내 중심도로의 이름 유래가 궁금했다. 창경궁에서 원남동 사거리까지 도로가 ‘율곡로’인데, 율곡 선생이 이곳 절터에서 사신 것을 기억하고자 한 것이라. ‘세종대로’ 역시 서촌에서 태어난 세종대왕을 기리는 작명일 터이고, ‘퇴계로’는 이황 선생을, 강남의 ‘도산대로’는 독립운동가 안창호 선생을, ‘충무로’는 건천동에서 어린 시절 성장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기념하는 도로명일 것이다. 이처럼 역사를 빛낸 위인들의 이름이나 호 또는 시호를 따 도로명을 삼는 것은 정말 잘 하는 일이다. 최근에는 스포츠맨 이름을 딴 ‘박지성로’도 있지만, 나쁜 일은 아니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조선조 유일한 왕립대학(Royal Academy) 성균관의 맥을 일제강점기를 거쳐 제대로 잇지 못하고 사립대학교가 된 성균관대학교에 재직했을 때의 이야기를 한 토막 소개하자면, 입시철만 되면 우수한 학생들을 유치하기 위해 각대학 입학처장들은 전국을 돌며 학부모들을 대상으로 자기네 대학 홍보하기에 바쁘게 마련이다. 당시 홍보위원인 필자가 낸 아이디어가 지금 생각해도 신박하기만 하다. 율곡 선생을 우리로는 까마득한 원로선배로 “성균관 1556학번”으로 규정했다(팩트이다. 필자는 1976학번). 나아가, 1천원권 주인공 퇴계 이황 선생은 정3품 대사성(현 '성균관대 총장')을 3번이나 제수받았으며, 1만원권 세종대왕은 할아버지 이성계가 성균관을 세웠으니 '이사장'일 것은 당연지사. 5만원권 신사임당은 율곡 선생의 어머니이므로 '성균관의 학부형'이라는 스토리텔링을 만든 것이다. 세계 어느 주권국가가 특정대학과 관련된 인물 4명을 한 나라의 화폐의 주인공으로 정한단 말이냐? 오직 성균관대이기에 가능한 일이 아니냐며 전통과 첨단의 조화를 자랑하는 “오래된 미래의 대학”이라고 강조하기에 딱이지 않은가. 삼성그룹이 재단이 되면서 '반도체 사관학교'로 불리는 <반도체학과>를 신설한 것은 오늘날 미래를 내다본 혜안(慧眼)에 다름 아니다. 더 나아가, 10만원권 주인공으로 백범 김구 선생이 거론된 적이 있었는데, 백범으로 정해졌다면, 백범은 1948년 '성균관대학교 초대 육성회장'이었으므로 '화룡점정'이 되지 않았을까. 결코 우스갯말이 아니다. 나중에 입학처 관계자들이 4종의 화폐를 코팅하여 자랑한다는 말을 들었다. 도올 김용옥 선생도 우리 역사가 비록 일제강점기를 거쳤지만, 광복이후 구한말 성균관이 국립으로 재건됐어야 하는데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다고 통렬히 지적한 바 있다. 일제하 경성제국대학이 전문대 몇 곳을 합쳐 국립 서울대학교로 된 것을 개탄한 것이다.
각설하고, 서울 시내를 걷다보면 ‘정도전 집터’나 ‘김종서 집터’ 표시판을 보면 참 반갑다. 비겁한 역사투성이지만 이렇게라도 역사를 기억해야 하지 않겠는가. 동학혁명 전봉준 장군의 좌상이 있는 곳이 그가 순국한 전옥서(典獄署) 터인 것을. 역사(歷史)는 기억하고 기록해야 역사이지 않겠는가. 율곡 선생은 바로 이 집터에서 ‘10만 양병설’을 구상했을까. 인사동 도로 가운데에 <한남서림 터>라는 표지판이 깔려 있다. 이 서점을 통해 ‘문화애국자’ 간송 선생은 1930년 안동에서 발견된 자칫하면 불쏘시개가 될 뻔한 <훈민정음 해례본>을 구입, 사라진지 400여년만에 세상에 빛을 보게 했다. 이로써 우리는 훈민정음(한글은 주시경 선생이 해례본을 보지 못한 상태에서 지은 문자이름)의 제정 원리와 세종대왕의 뿌리깊은 애민사상을 알게 된 것이다. <태백산맥>을 쓴 문호 조정래 선생은 “역사를 모르면 미래가 없다”고 설파했다. 딴 이야기이지만, 하나 더 덧붙이면 <아리랑>에서 “일본인들의 죄는 잊지도 말고 용서하지도 말아야 한다”고 했다. 정신적으로 ‘토착왜구’들이 날뛰는 목불인견(目不忍見)의 현상들을 보면 늘 분통이 터진다. 율곡선생의 집터 돌 표지석을 보면서 든 단상이다.
*덧붙임 1: 승동교회는 한국 근현대사의 산 증인이랄 수 있는데, 1893년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 사무엘 포먼 무어(한국명 모삼열)이 16명의 교인과 건립했는데, 처음 이름은 ‘곤당골교회’였음. 천대받던 계급인 백정들에게 전도하며 신분 타파의 불씨를 지폈음. 1905년 인사동 승동(僧洞)으로 이전, 1912년 현재의 붉은 벽돌 본당건물을 지었음. 1919년에는 3.1만세운동의 학생단 사령부 역할을 한 유서깊은 교회임. ‘중골’을 뜻하는 승동을 ‘이길 승’ 자를 쓴 승동으로 바꾼 까닭은 세상의 핍박을 이겨내고 복음으로 승리하겠다는 뜻을 담은 것이라 함. 교회 역사를 알리는 표지판의 해설에 의함.
*덧붙임 2: 손(가락)장단의 달인, 가수이자 탤런트이며 만능 엔터테이너 김성환(1950년생) 님이 지난 5월 19일 경기대학교에서 명예경영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요즘 <약장수>라는 노래로 깃발을 날리고 있다. 나이 54세에 경기대 경영학과에 입학(연기학과 부전공)하여 10년이 넘도록 석사와 박사과정을 모두 수료하고, 특임교수를 하며, 최고경영자과정(MBA)을 다니는 등 학교 홍보와 대중문화 발전 및 노인의료나눔 기여 공로로 명예박사학위를 받은 것이다. '거시기 형님'은 수상 소감에서 20여분간 준비한 원고도 보지 않고 "이제껏 받은 그 어떤 상보다 값지고 기쁘다"며 "세상을 아름답고 따뜻하게 하는데 늘 앞장서겠다"고 밝혔다. 그는 '노인의료나눔재단' 이사장으로 활동하며, 저소득층 어르신들의 퇴행성 관절염을 치료하는 무릎 무료수술(현재 2만명 이상 혜택)에 앞장서고 있다. 거시기성님과 아우로 지낸 지 십수년, 나는 그날 식장에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박수를 실컷 치며 축하를 해드렸다. 건승, 건강을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