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生 데코레이슌]
그릴을 나서서 진고개 입구를 향하여 한은주는 또박 또박 걸어 나가고 있었다.
오후 두 시 ——─ 지하실 그릴에서 갓 빠져 나온 영훈에게는 거리에 범람하는 오후의 태양이 눈에 부시다.
『같이 가요.』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은 채, 서편 하늘을 말똥말똥 쳐다보면서 곧장 걸어가고 있는 은주였다.
『화났소?』
영훈은 따라가서 나란히 걸었다.
『아뇨. 화는……』
절대로 영훈을 쳐다보지를 않는다.
『어떻게 알았소?』
『그 녀석이 묻지도 않는 말을 알으켜 줘서 알았죠.』
『그 녀석이라니?』
『유둘유둘한 목소리를 가진 사내 말이예요.』
『아, 영업부장! 뭐라고 그래요?』
은주는 들은 이야기를 솔직히 말했다.
『왜 입때까지 잠자코 있었소?』
『그건 누가 할 말인데요?』
영훈이 이내 대답을 못했다. 못하고 얼마 동안을 묵묵히 걷다가
『어쨌든 은주와 세 시간 동안을 허비할 결심을 하지 않았소?』
『그래서 전 행복했었죠.』
『안 됐소.』
『누가 안 됐대요?』
『대답이 자꾸만 까다로워지는걸!』
『아냐요. 나 어지간히 허심탄회할 수 있는 성미예요. 영훈씨와 점심을 나누겠다는 내 풀랜은 적어도 내개 있어서는 중대사니까요. 그래서 그 중대사를 나는 예정대로 실행한 것밖에 없어요. 다소의 난관은 있었지만요.』
자기 행동에 대하여 추호도 두리번거릴 줄을 모르는 은주였다. 그러한 은주에게서 영훈은 기보다 한 걸음 먼저 새로운 세대의 공기를 호흡하고 있는 한 여성의 생태(生態)를 눈앞에 보는 것이다.
『어떤 여자예요?』
『어떤 여자라구……』
『나이가 몇이예요?』
은주는 우선 나이부터 묻는다. 그것이 제일의 관심점이다.
『자아, 며칠가?……』
『나이두 몰라요?』
『헤어진 지가 하두 오래니까, 스물여덟? 아홉?……』
『직업은?……』
둘째가 직업이었다. 마치 피고에게 대하는 재판관의 질문과 비슷하다.
『무직업 ——─』
『세상에 직업 없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가정부인이니까 ——─』
『가정부인은 직업이 없는가요?』
『……?』
『가정이라는 직장에서 아내라는 직업을 갖지 않았어요?』
영훈은 웃었다.
『남편은 뭘 하는 사람이에요?』
『대부호의 아들……』
『그럼 취직은 곧잘 했군요.』
『그렇지만 이북 지주니까 몰락을 했을 거야.』
『그래서 전직(轉職) 운동 때문에 찾아온 거 아냐요?』
『전직 운동?……』
『실직(失職)을 했음 재취직 운동이구요.』
『아직 만나 보지 못했으니까 알 수 없지.』
해골과 같이 시뻘건 뼛대만 남은 우체국 앞으로 둘이는 빠져나왔다. 전차 정류장으로 걸어가면서
『이뻐요?』
은주는 지나가는 말처럼 그것을 물었으나 사냥개의 두 귀박죽처럼 신경을 오뚝 세우는 것이다.
『밉고 곱고는 주관적 문제니까……』
『그러니까 그 주관이 어떠냐 말이예요?』
『약간 ——─』
『흥!』
하고 은주는 콧소리를 가볍게 내며
『도대체 만나자는 건 어느 편이예요?』
『저 편 ——』
『향수병(鄕愁病) 환자군요.』
『모르지.』
『어쨌든 영훈씨의 심장이 다소 들뜬 것만은 사실인데……』
『들뜨긴……』
『괜찮어요. 애정의 속박은 낡은 시대의 유물이니까요.』
그때 동대문 행 전차가 우루루 들어 닿았다.
『영훈씨는 사무실꺼정 걸어 가시죠?』
영훈이가 머리를 끄덕이는 동안에 은주는 여학생처럼 경쾌한 포오즈로 전차에 올랐다. 들창으로 얼굴을 내밀고 안전지대에 멍하니 서 있는 영훈의 귓 전에다 입술을 갖다 대듯이 하며
『애정은 자유에요. 약혼은 애정의 자유를 속박해서는 아니 된다고 생각해요.』
『그런 말은 왜 새삼스럽게……』
그러나 은주는 방글방글 웃는 낯으로 전차가 막 떠나려는 무렵에
『암만 해두 영훈씨, 사무실 앞을 그대로 지나칠 것만 같애요. 종각 앞에서 두 시간 동안이나 영훈씨를 기다리는 로맨쓰! 호호홋……』
전차가 한국은행 앞에서 커어브를 할 무렵에 핸드·빽을 들창 밖으로 흔들어 대는 은주의 쌔하얀 손목이 눈부신 햇볕 속에서 조그맣게, 조그맣게 나불거리며 사라졌다.
『귀여운 사람!』
영훈은 입속말로 중얼거렸다.
영롱, 구슬과 같은 존재 한은주! 질투심을 나타내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는 한은주의 애정의 포오즈가 그의 세련된 회화와 함께 영훈의 다소 들떴던 마음을 다사롭게 감싸 주는 것이다.
『잘했다!』
백연숙을 버리고 은주를 따라 온 자기 자신이 영훈은 추호도 뉘우쳐 지지가 않았다.
『귀여운 여자! 내 아내!』
소리를 내어 그렇게 되씹어 봄으로써 들떴던 감정이 아직도 다소의 꼬리를 물고 있던 자기 자신을 영훈은 완전히 청산해 버리는 것이었다.
영훈이가 걸어서 을지로 사무실로 돌아온 것은 두 시 반이 넘었을 무렵이었다.
사원들은 거지반 외출을 하고 영업부장 최씨와 여기자 한 사람이 남아 있었다.
『아니 고선생, 도대체 어떻게 된 노릇이오?』
장부를 뒤적거리고 있던 영업부장이 얼굴을 불쑥 들면서 하는 말이다.
『왜요?』
걸상에 털썩 걸터앉으면서 고영훈은 시선을 던졌다.
『왜요가 뭐요? 그처럼 철석같은 약속을 해 놓고서 슬쩍 빠지는 법이 어디 있소?』
영업부장 최성진은 일부러 정색을 했다.
『빠지다니요?』
『아무튼 과복자는 다르구려. 그처럼 어여쁜 여인을 슬쩍 따 버리다니, 아까운 일이오』
그제서야 고영훈도 반색을 하며
『무슨 말입니까?』
『무슨 말이라구……종각 앞에서 만나자던 미인이 여기로 찾아 왔었답니다.』
『옛, 찾아 왔었다고요?』
뭉클하고 가슴에 무어가 하나 왔다. 정말 예상 밖의 일이었다.
『한 시간쯤 전이지요. 아무리 기다려도 고선생이 나타나지 않으니, 어떻게 된 셈이냐고요.
그래 고선생은 분명히 당신을 만나려고 열두 시 전에 나갔다고 했더니, 그것이 정말이냐고, 수차 따지다가 돌아갔답니다. 원 그런 미인을 따 버리다니, 고선생두 참…….』
가슴이 차츰차츰 설레어 온다. 은주와 헤어질 무렵에는 완전히 가라앉았던 감정의 들뜸이었다.
『그래 그 밖엔 다른 말은 없이 돌아갔습니까?』
『무슨 말이든 고선생께 전해 드리겠노라고 했더니, 다소 망서리는 표정으로 섰다가, 별로 전할 말은 없노라고 하면서 지극히 쓸쓸한 표정으로 돌아갔지요.』
물론 과장인 줄은 알면서도 지극히 쓸쓸한 표정으로 돌아갔다는 이 마지막 한 마디가 영훈의 가슴 한복판에 조그만 못 하나를 박아 주었다.
지금이 세시 ——─ 그리고 백연숙이가 한 시간 전에 찾아왔었다니까, 그는 열두 시부터 자그만치 두 시간 동안을 한길 가에서 기다리다가 찾아온 계산이 된다. 오주주하니 달려드는 일종의 스릴 같은 것을 영훈은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실로 이유 모를 신비로운 전률이었다. 이것이 대체 어디서 무엇 때문에 오는 것일가?……
『나는 지금까지도 연숙을 사모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영훈은 자기의 감정의 풍경을 자기 자신 측량할 도리가 없었다. 영훈의 성실한 의욕은 한은주를 사랑하고 있는 것이 분명한데 이 신비로운 한줄기의 전률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영훈은 갑자기 백연숙이가 만나고 싶어졌다. 만날 필요가 어디 있느냐고, 돌이돌이를 하면서도 그것을 긍정하는 감정이 앞장을 서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내 인생의 필수품은 아니다. 생활의 데코레이슌(裝飾物)이요, 악세써리(附帶物)일 따름이다.
앞장을 서는 감정의 부풀음을 영훈은 그렇게 생각함으로서 무자비하게 억눌렀다. 그리고 그러한 감정의 노예로부터 벗어나려는 듯이 한두 번 머리를 휙휙 흔들다가 불쑥 몸을 일으켰다.
바깥 공기가 마시고 싶어 영훈은 다시 모자를 쓰고 사무실을 나섰다.
영훈의 집은 사직동 공원 뒤에 있었다. 영훈은 종로를 향하여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하였다.
거리는 움직이고 있었다. 무엇 하나 움직이지 않는 것이 없다. 이 끊임 없는 움직임 속에서 도회의 생리는 살아 있는 것이다.
영훈도 움직이었다. 시간이 이르니까 어느 때 같으면 명동 쪽으로 움직여야 할 영훈이가 종로 쪽을 택했다. 백연숙이가 두 시간이나 기다렸다는 종각 앞 한길이 그리워졌는지도 모른다.
광교 다리목에서 영훈은 종각 쪽으로 건너갔다. 건너 서서 두리번거리며 연숙이가 아직도 한길 가 어느 한 모퉁이에서 자기를 기다릴는지도 모를 일이라고, 꿈 같은 공상을 영훈은 하여 보았다.
『행여나?……』
하는, 무슨 기대 같은 것이 역시 영훈의 의식 세계에 있는 것일가?……생활필수품이 될 수 없는 일종의 악세써리를 인간은 역시 욕구하는지도 모른다.
『인생의 사치품!』
영훈은 그것을 명확히 느끼며 네길 어름으로 걸어가면서 후딱 시선을 종각 쪽으로 던지다가
『앗 ——─?』
하고 가는 외침과 함께 걸음을 탁 멈추었다.
단청도 새롭게 개축된 종각 앞에 백연숙은 서 있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