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4110
1월21일[성녀 아네스 동정 순교자기념일/연중 제2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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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를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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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riIrDLkAZ7A
[성바오로수도회 권용훈 안토니오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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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사람이 우선입니다!>
농어촌 마을에서 살다 보니, 농촌 인구의 급감으로 인한 열악한 현실을 온 몸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그래도 꾸준히 재배되고 있는 효자 농작물들이 있습니다. 쌀, 보리, 옥수수, 고추, 마늘, 양파, 고구마, 감자, 사과, 감, 배...
예수님 시대 이스라엘에서 재배되던 7대 주요 농작물이 있었는데, 밀, 보리, 포도, 무화과, 올리브, 석류, 대추야자를 꼽습니다. 그중에서도 밀은 유다인들이 주식으로 삼았던 빵의 기본 재료로 가장 으뜸가는 작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근동 지방에서는 몇 천년전 부터 곡식을 경작해왔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 유적지나 예리코 등지에서 불에 탄 밀알이 출토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 시대 유다 주부들은 매일 맷돌로 밀을 갈아 빵을 구웠습니다.
미풍이 불어오는 어느 봄날, 안식일에 제자들은 예수님의 뒤를 따라 파릇파릇한 밀밭 사이를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구원자 예수님의 동역자로 부르심을 받은 제자들은 의기양양·사기충천한 얼굴로 씩씩하게 밀밭 사이를 걸어갔습니다.
그러나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큰 뜻을 품은 제자들이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뱃속에서 흘러나오는 ‘꼬로록’ 소리를 감출 수는 없었습니다. 자연스레 제자들의 눈길은 이제 막 열리기 시작한 부드러운 밀이삭으로 향했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덜 여문 부드러운 밀알은 비벼서 날것으로 먹기도 했었습니다. 제자들의 손이 자기도 모르게 밀이삭을 훑어 입으로 가져갔던 것입니다.
사실 신명기에 따르면, 굶주리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이웃의 밭에 들어가 밀이삭을 자르는 것을 허용하고 있었습니다. “너희가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갈 경우, 손으로 이삭을 자를 수는 있지만 이웃의 곡식에 낫을 대서는 안 된다.”(신명 23,26)
그러나 그날은 안식일! 바리사이들이 이구동성으로 외쳤습니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마르 2,24)
바리사이들의 외침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침소봉대’(針小棒大)였습니다. 말 마디 그대로, 바늘을 몽둥이라고 과장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본격적인 추수 행위나 노동 행위도 아니고, 지나가며 밀 이삭 한 두가지 잘라 먹은 것을 가지고 안식일 규정 운운하니, 참으로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쪼잔하고 천박하기 이루 말할 데 없는 바리사이들 앞에 예수님의 지혜가 돋보입니다. 사무엘 상권 21장 1~7절을 인용하며 다윗과 그 일행이 겪은 사건을 소개하십니다.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 배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본 적이 없느냐? 에브야타르 대사제 때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고 함께 있는 이들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이스라엘 성전 성소에는 봉헌된 열두 개의 빵이 하느님께 바친 제물로서 일 주일 동안 접시에 놓여 있었습니다. 일주일이 지나면 사제들만이 그 빵을 먹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과 그의 일행은 빵을 먹었습니다. 그들은 당시 굶주렸고 다른 빵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에게 빵을 준 사제 아히멜렉도, 율법학자들도, 성경조차도 다윗과 일행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필요에 따라 율법은 유연성있게 적용될 수 있고 용서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안식일 규정을 비롯한 제반 율법을 해석할 때는 자구 하나 하나에 연연할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하느님의 뜻을 생각하며 율법을 바라봐야 합니다. 한 인간 존재가 처하고 있는 구체적인 현실을 고려하며 율법을 적용시켜야 합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 한 가지! 율법의 주인은, 안식일 제정의 원천은 바로 사람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것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마르 2,2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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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DlDk-3gO0Z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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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가르침이 마음의 안식으로 수렴하면 부모가 맞다>
오늘 복음은 ‘안식일법’의 참 의미를 알려줍니다. 안식일법은 비록 일을 하지 않아야 하는 법이지만, 이스라엘에서 가장 중요한 핵심적인 율법이었습니다. 안식일법을 어기면 사형이었습니다. 쉬지 않는다고 사형시키는 일도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안식일인데도 일합니다. 배가 고파서 남의 밭의 밀이삭을 뜯어 먹은 것입니다. 밀이삭을 뜯는 행위는 추수 행위이기 때문에 일입니다. 바리사이들은 도둑질보다는 안식일법의 위중함을 감안해 안식일법을 위반하는 제자들을 둔 예수님을 비난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그 모든 잘못을 하는 당신 제자들과 당신 자신을 두둔하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안식의 반대말은 무엇일까요? 안식은 아무래도 평화나 평안, 혹은 보호받음을 의미할 것입니다. 부모와 함께 있을 때 아이들이 일반적으로 가지게 되는 감정이 안식입니다. 안식의 반대말은 불안입니다. 부모가 절대 자녀들에게 주어서는 안 되는 감정이 불안입니다. 불안하면 자녀가 악해져서 세상에서 살 자격을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바이킹은 왜 생겼을까요? 불안 때문에 생겼습니다. 춥고 척박한 산악지방에 인구가 늘어나니 어쩔 수 없이 바다로 나가 남의 나라를 약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행위는 그들의 불안을 잠재우기 위한 어쩔 수 없는 행위였습니다.
자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금쪽같은 내새끼’에 나오는 아이들은 하나 같이 사회생활에 부적격자들로 성장하고 있습니다. 말을 하지 않는다거나, 화장실에 가지 못하고, 특정한 물건에 집착하거나, 폭력적으로 되고, 도둑질과 타인을 괴롭히는 일도 하게 됩니다. 이렇게 다양한 모습의 한 가지 원인은 ‘불안’입니다.
부모는 자녀들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많은 율법을 줍니다. 그러나 그런 말들이 아이들의 마음에 평안을 주지 않고 불안만 가중시킵니다. 사실 부모가 아이들을 평화롭지 못하게 만드는 이유는 본인들이 평화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녀들을 통해서 자기 평화를 찾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모기에서 모기가 태어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모습이 교회에는 없을까요? 고해성사 보러 들어왔을 때 사제가 신자들을 야단치고 불안하게 하면 될까요? 주일미사에 일하느라고 바빠서 못 왔는데 야단치면 될까요? 주일은 안식일입니다. 안식일은 세상 걱정을 잠시 잊고 하느님이 있으니 안심하라고 정해주신 날입니다. 그러니 일에서 쉬면서 평화를 찾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미사 때 어떤 복사들은 틀릴까 봐 두려움에 떱니다. 하느님과 가까워질 때 아이들이 더 평화를 느끼게 만들어야 합니다. 어른들도 성당에 오면 세상 어디에서 느낄 수 없는 안식을 느껴야 합니다. 걱정이 사라져야 합니다. 그래야 착해집니다. 이것이 창조자가 있음을 믿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입니다.
아이들이 부모를 찾을 때 부모는 바로 이 평화를 주는 존재입니다. 안식을 주는 존재가 부모이기에 불안을 조장하는 부모는 아이들이 싫어하게 되어 있습니다.
교회가 그렇게 신자들에게 밀쳐져서는 안 됩니다. 율법주의나 형식주의가 만연해지면 그래서 하느님께 대한 신뢰가 사라지고 냉담률에 올라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아기의 참 엄마를 찾는 과정에서 아기를 반을 잘라서 두 어머니에게 나누어주라고 합니다. 진짜 어머니는 차라리 아기를 다른 가짜 어머니에게 주라고 합니다. 그러나 가짜 어머니는 자기 아기가 죽었으니 그 아이도 반이 잘리는 것을 원합니다.
솔로몬은 아기의 안식을 걱정하지 않는 자는 어머니가 아님을 분별해냅니다. 이것이 지혜입니다. 교회에 하느님을 아버지요, 창조자로 믿게 하려면 교회가 가르치는 모든 율법이 신자들에게 마치 레베카가 야곱에게 에사우의 옷을 입히고 걱정하지 말고 에사우라고 우기라고 한 것과 같은 평화를 주는 가르침이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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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우리의 삶을 지탱하는 두 가지 덕목, 희망과 믿음에 대해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다른 듯하면서도 깊이 연결되어 있으며, 우리의 신앙 여정에서 하느님과 더욱 깊이 연결되게 합니다. 희망은 우리가 아직 이루지 못한 것을 기다리는 능력입니다. 그것은 우리를 절망에서 구해내며, 어두운 시간 속에서도 빛을 보게 합니다. 성 바오로 사도는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사람이 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희망은 아직 보이지 않는 것을 기다리는 마음입니다. 이는 단순한 낙관적 태도가 아니라, 하느님의 약속을 향한 확신입니다. 우리는 고난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의 삶을 통해 이루실 구원의 계획을 믿기 때문입니다. 희망은 이정표와 비슷합니다. 희망은 목표와 비슷합니다. 저의 희망은 교사나 군인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사제가 되었지만, 저의 희망은 이루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사제는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제의를 입습니다.
믿음은 지금 여기서 하느님을 신뢰하는 우리의 응답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히브리서에서 믿음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믿음은 단순히 무엇인가를 믿는 감정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시와 사랑에 대한 구체적인 응답입니다. 아브라함이 자기의 아들 이사악을 하느님께 바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그는 믿음을 통해 순종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약속을 믿으며 희망을 품었습니다. 믿음은 미래의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지금 이루어지는 겁니다. 믿음은 희망이라는 이정표를 따라서 대상을 향해 나가는 겁니다. 믿음은 다분히 인격적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우리는 배우자를 믿고, 자녀를 믿습니다. 37년 전입니다. 저는 약속 시간을 깜빡 잊고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저를 믿어 주었던 친구는 어두운 다방 구석에서 저를 6시간씩 기다려 주었습니다. 나중에 제가 도착하니 활짝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올 줄 알았어요!’ 저를 믿었기 때문에 기꺼이 기다려 주었습니다.
희망과 믿음은 서로 다르지만, 깊은 조화를 이룹니다. 희망은 미래를 향한 기대이며, 믿음은 지금 우리가 하느님께 의지하는 태도입니다. 희망은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을 보여 주고, 믿음은 그 길을 걷게 하는 힘을 줍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길을 걸으실 때, 그분은 희망과 믿음의 완전한 조화를 보여 주셨습니다. 십자가의 고통 속에서도 아버지의 뜻을 믿으며, 부활의 희망을 품으셨습니다. 그분의 삶은 우리가 희망과 믿음을 어떻게 실천해야 할지에 대한 완벽한 모범입니다. 우리의 일상에서 희망과 믿음을 어떻게 실천할 수 있을까요? 먼저, 어려움 속에서도 하느님의 약속을 신뢰해야 합니다. 우리의 고통과 시련은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는 은총의 시간입니다. 희망은 우리가 절망 속에서도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좋은 일을 하고 계신다"라는 믿음을 가질 수 있게 합니다. 또한, 우리의 믿음을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단순히 기도에 머물지 않고, 하느님께서 우리를 부르시는 사명을 실천해야 합니다. 특히 이웃에게 사랑을 나누고, 공동체 안에서 연대하며, 어려운 사람들에게 희망을 전하는 것이 믿음의 실천입니다.
희망과 믿음은 우리 신앙의 두 기둥입니다. 희망은 우리가 하느님의 구원을 바라보게 하고, 믿음은 우리가 그 구원 안에 살아가게 합니다. 이 두 가지가 함께할 때, 우리는 어떠한 시련도 이겨낼 수 있는 힘을 얻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희망과 믿음은 사랑의 두 날개와 같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우리는 희망을 품고 믿음을 실천하며 하늘나라를 향한 여정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 희망과 믿음의 은총을 간구하며, 우리의 삶을 그분께 온전히 봉헌하면 좋겠습니다. “여러분 각자가 희망이 실현되도록 끝까지 같은 열성을 보여 주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희망은 우리에게 영혼의 닻과 같아, 안전하고 견고하며 또 저 휘장 안에까지 들어가게 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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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의정부교구 김동희 모세 신부님]
“풍요로운 우정으로 꽃피우는 하느님 사랑과 만남으로써, 또는 그 사랑과 새롭게 만남으로써 비로소 우리는 자신의 고립감과 자아도취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복음의 기쁨」 8항을 열쇠 삼아 오늘 복음의 문을 열어 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제자들과 급히 밀밭 사이를 질러가십니다. 다른 이웃 고을에 복음을 전하시러 가시는 길일까요, 아니면 누군가 크게 아프다는 전갈을 받으시고 서둘러 그를 찾아가시는 길일까요. 그런데 제자들이 길을 내고 가던 중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호호 불어 먹기 시작합니다. 볕에 익어 가는 밀 내음과 밀 이삭을 흔드는 산들바람! 간단하고 조촐하지만 주님이신 예수님 곁에서 이루어지는 근사한 안식일 식사입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따져 묻습니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마르 2,24)
사실 구약의 율법은 매정한 법이 아닙니다. “너희가 밭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곡식 한 묶음을 잊어버리더라도 그것을 가지러 되돌아가서는 안 된다. …… 너희가 올리브 나무 열매를 떨 때, 지나온 가지에 다시 손을 대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의 몫이 되어야 한다.”(신명 24,19-20) 따스함이 묻어 있는 법입니다. 안식일 법도 일을 금하는 법이기에 앞서 돌봄의 법입니다. 그럼에도 바리사이들은 완고합니다.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는 자아도취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함께 이 안식일을 누려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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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2,23-28: 안식일이 사람을 위한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창조해 주셨다. 인간이 노력하면 그 결실을 얻을 수 있게 해 주셨다. 본래 안식일의 의미는 하느님께 이 모든 것을 감사드리고 계속 그 축복을 비는 날이었다. 생명의 하느님께 그러한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이 근본정신이다. 안식일이라서 생명이나 생명 유지에 필요한 일을 하지 않는 것은 바로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이며,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는 것은 선행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선행을 베푸는 것이다. 복음에서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다가 밀 이삭을 자르자, 바리사이들이 안식일 법을 어겼다고 항의하고 예수께서 그에 대한 답을 하시는 장면이 나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27절). 이 말씀은 안식일의 의미 자체를 밝히는 답변이다. 법보다도 사람을 중요시하는 인본주의적 법이념이다. 법률 만능주의가 아니라 인권을, 안식일 법보다 인간애를 앞세우셨다.(참조: 마르 3,1-6; 루카 13,10-17; 14,1-6; 요한 5,1-8; 9,1-41) 그리고 당신이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신다(28절).
우리의 신앙생활은 어떤가? 주일을 안식일 본래의 의미대로 지키며 살아가야 하는데, 주일을 지키는 것을 강박관념 때문에, 주일을 지키지 않는 것은 죄가 되고, 하느님으로부터 어떤 벌을 받을까 두려워서 아무런 느낌이 없이 미사에 참여한다면, 그것은 현대적인 율법주의일 것이다. 진정으로 하느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리는, 그러면서 우리 자신을 주님께 봉헌하는 제사를 지내는 날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게 주일을 살아가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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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안 지키는 것이 죄입니다. 못 지키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질러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길을 내고 가면서 밀 이삭을 뜯기 시작하였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에브야타르 대사제 때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고 함께 있는 이들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마르 2,23-28)
1) 이 이야기의 핵심 주제는 ‘배고픔’입니다. 마태오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지나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기 시작하였다."(마태 12,1)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는 다윗이 배가 고팠을 때 했던 행동을 예로 들면서 제자들을 변호하셨습니다. 따라서 이 이야기에서 ‘제자들의 배고픔’을 보지 않으면, 그것은 핵심을 놓치는 일이 됩니다.
<이 이야기는, “정말로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리는 사람은 율법 실천을(신앙생활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관한 가르침이고, “그런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에 관한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2) 제자들도 자기들이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했음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너무 배가 고파서,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배가 고파서,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밀 이삭을 뜯어 먹었을 것입니다.
그 모습에서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라는 예수님 말씀이 연상됩니다.(마태 8,20)
예수님만 그런 생활을 하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다닌 제자들도 예수님과 함께 그런 생활을 했습니다. 또 뒤의 11장에 있는, “그들이 베타니아에서 나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시장하셨다. 마침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멀리서 보시고, 혹시 그 나무에 무엇이 달렸을까 하여 가까이 가 보셨지만, 잎사귀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마르 11,12-13)라는 말도 연상됩니다.
배가 고파서 밀 이삭을 뜯어 먹은 제자들의 모습과 시장하셔서 무화과나무 열매가 있는지 살펴보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비슷합니다.
<제자들이 밀 이삭 몇 개를 뜯어서 먹은 일은, 결코 ‘근사한 안식일 식사’가 될 수 없습니다. 허기를 면할 수도 없는 그 몇 개의 밀 이삭을 뜯어 먹는 자신들의 모습 때문에, 또 그런 일을 한다고 비난하는 바리사이들 때문에, 어쩌면 제자들의 심정은 더욱더 비참해졌을지도 모릅니다.>
3)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다윗의 이야기는, 사무엘 상권 21장에 있습니다. 다윗이 한 일은 분명히 율법을 어긴 일인데, 유대인들은 아무도 그 일에 대해서 시비를 걸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절박했던 상황을 생각해서 그랬는지, 아니면 그가 왕이었기 때문에 그랬는지, 어떻든 유대인들은, 또는 바리사이들은 그 일을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다윗의 일을 문제 삼지 않는다면, 제자들의 일도 문제 삼지 말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만일에 다윗은 왕이었다는 이유로 그냥 넘어가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보잘것없는 사람들이어서 문제를 삼는다면, 그것은 사람을 차별하는 것이고, 그 차별 자체가 죄입니다.>
4)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변호해 주신 것은, 그들의 행동이 ‘안식일’에 해도 되는 행동이라는 뜻은 아닙니다.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한 것은 맞지만, 왜 그런 일을 했는지 먼저 살펴보아라.”가 예수님 말씀의 뜻입니다.
제자들은 안식일 율법을 안 지킨 사람들이 아니라
못 지킨 사람들입니다. 지킬 수 있는데도 안 지키는 것은 죄입니다.
그러나 지킬 수 없어서 못 지킨 것은 죄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정말로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배가 고팠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에, 그들을 변호해 주셨습니다.
만일에 제자들이 배가 고프지 않은데도 그런 행동을 했다면, 바리사이들이 비난하기 전에 먼저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꾸짖으셨을 것입니다.
5)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라는 말씀은, 모든 계명들과 율법들에 적용되는, 또 종교 전반에 적용되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종교를 위한 존재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교는 사람을 위해서 존재하는 종교입니다. 만일에 ‘자비와 사랑 없이’ 사람들을 억압하기만 하는 종교라면, 그것은 종교가 아니라 무자비한 폭력 집단입니다.
마찬가지로 계명과 율법을 지키고 싶어도 못 지키는 사람의 사정은 헤아려보지 않고, 꾸짖고 비난하고 단죄하기만 한다면, 그것은 사랑을 거스르는 폭력일 뿐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라는 말씀은, 인간을 구원하려고 오신 메시아 예수님의 가르침이 모든 계명과 율법의 해석과 적용의 기준이라는 뜻입니다. 즉 ‘인간의 구원과 해방’이 율법 실천의, 또는 신앙생활의 기준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사람을 구원하시는 주님의 ‘자비와 사랑’이 모든 계명들과 율법들보다 위에 있다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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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김동희 모세 신부님]
“풍요로운 우정으로 꽃피우는 하느님 사랑과 만남으로써, 또는 그 사랑과 새롭게 만남으로써 비로소 우리는 자신의 고립감과 자아도취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복음의 기쁨」 8항을 열쇠 삼아 오늘 복음의 문을 열어 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제자들과 급히 밀밭 사이를 질러가십니다. 다른 이웃 고을에 복음을 전하시러 가시는 길일까요, 아니면 누군가 크게 아프다는 전갈을 받으시고 서둘러 그를 찾아가시는 길일까요. 그런데 제자들이 길을 내고 가던 중 밀 이삭을 뜯어 손으로 비벼 호호 불어 먹기 시작합니다. 볕에 익어 가는 밀 내음과 밀 이삭을 흔드는 산들바람! 간단하고 조촐하지만 주님이신 예수님 곁에서 이루어지는 근사한 안식일 식사입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따져 묻습니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마르 2,24)
사실 구약의 율법은 매정한 법이 아닙니다. “너희가 밭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곡식 한 묶음을 잊어버리더라도 그것을 가지러 되돌아가서는 안 된다. …… 너희가 올리브 나무 열매를 떨 때, 지나온 가지에 다시 손을 대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의 몫이 되어야 한다. ”(신명 24,19-20) 따스함이 묻어 있는 법입니다. 안식일 법도 일을 금하는 법이기에 앞서 돌봄의 법입니다. 그럼에도 바리사이들은 완고합니다. ‘나는 옳고, 너는 그르다.’는 자아도취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함께 이 안식일을 누려보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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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허규 베네딕토 신부님]
안식일은 예수님과 유다교 지도자들의 갈등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지는 주제입니다. 유다인들은 안식일을 주간의 축제로 여겼습니다. 안식년과 희년이 있는 것처럼 매주 안식일은 하느님의 창조를 기억하며 일상의 일에서 벗어나 하느님과 함께 머물며 감사를 드리는 하루의 축제였습니다. 지금 우리는 똑같지는 않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을 한 주간의 축제로 지내고 있습니다. 유다인들이 지키던 수많은 율법 가운데 1/3 정도가 안식일에 관련된 규정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들에게 안식일이 얼마나 중요하였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지금도 독실한 유다인들은 철저하게 안식일을 지키며 살아갑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바리사이들이 규정의 문구에만 집착하는 것을 비판하며 율법의 본래 정신과 의미를 기억하도록 합니다. 물론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창조된 것은 아닙니다. 안식일은 세상 창조의 모든 것을 완성하는 의미를 지닙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에게 창조된 모든 것을 보존하고 보살피도록 맡기셨고(창세 1,28 참조), 사람은 그 창조 업적에 참여합니다. 그런데 사람도 피조물이면서 유한한 존재로 휴식과 회복이 필요합니다.
안식일의 의미는 모든 피조물을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때때로 주객이 뒤바뀌는 경우가 생깁니다. 그럴 때일수록 본래의 의미를 찾고 되새기는 것이 필요합니다. 실제로 이것이 율법의 규정을 지키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하느님의 계명을, 하느님의 뜻을 온 마음을 다하여 따라야 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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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교구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마르코 복음서에서 ‘사람의 아들’은 분명 예수님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라고 확언하시며, 모든 제도와 율법 위에 당신의 권위가 있다는 사실을 선포하십니다. 이 말씀은 분명 앞에 나온 마르코 복음서 2장 10절의 ‘사람의 아들이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가진다는 것’과 같은 맥락에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창조 때 받은 은총의 수혜자로 자유로이 살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의 올바른 의미로 어려운 상황에서 위축된 사람들을 회복된 삶, 구원된 삶으로 초대하십니다. 안식일은 선과 생명에 도움을 주고, 예수님과 함께하는 거룩한 날로, 이런 개념은 모든 안식일의 규정이나 법규를 넘어섭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어떤 때 기도를 많이 할까요? 그리고 어떤 때에 기도하여야 하느님께서 잘 들어주실까요? 주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으로 청하기만 하면 들어주신다고 말씀하셨는데 언제 기도를 하여야 주님께서 잘 들어주신다고 생각하나요?
사실 매일매일 기도 가운데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응답하고 계십니다. 때때로 우리가 너무 규범적이고, 율법과 같은 법규 준수에 머물러 있거나, 바리사이들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따지고 자신의 생각대로만 분석하려고 하여 올바로 듣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전통과 율법을 보호하려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그 모든 것 위에 계신 최고 권위시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들이 세상에서 가진 권위만을 주장하게 됩니다.
어쩌면 예수님의 말씀은 잘 짜여진 그물 같은 바리사이들의 세상에 하나의 도전이었을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로 주님을 받아들이지 말고, 그분께서 말씀하신 사랑과 기도 안에서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여 우리의 삶이 구원으로 초대된 삶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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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전교수도회 김종오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코.2,27)
예수님 시대의 지도자들은 안식일의 규정을 먼저 내세우며 사람들에게 엄격한 아버지 하느님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버지는 그런 분이 아니라 사람들의 상황을 먼저 공감하시고 이해하며 따뜻하게 안아주시는 사랑의 주님이심을 알려 주셨습니다.
우리가 믿는 주님은 저 높은 곳에서 사람들을 억압하거나 왕처럼 군림하는 두려운 주님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의 고통을 공감하며 희망을 주기 위해 우리 가운데 오신 따뜻한 주님입니다.
따뜻한 주님은 법과 제도를 통제하는 수단보다 먼저 봉사하는 수단으로 보십니다.
안식일을 지키라는 규정은 사람을 살리기 위한 수단입니다. 안식일은 우리가 주님 안에서 편히 쉬는 날입니다.
일에만 매달려 사는 사람들에게 주님과 함께 쉬라고 만든 법입니다. 성과를 이루기 위해서 자신을 혹사시키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주님의 편한 멍에입니다.
안식일을 의무적으로 대한다면 우리가 아직 주님을 두려운 분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을 마지 못해 의무적으로 만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의 어리석음에 대해서 주님의 말씀은 비수처럼 날카롭게 다가오지만, 따뜻함이 그 본질입니다. 따뜻함이 본질인 주님을 모르면 우리는 주님과 의무적인 관계를 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따뜻하게 다가오시지만 우리는 두려워합니다. 안식일 하루는 함께 쉬자고 초대 하지만 우리는 자신의 일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일에 우리의 마음을 빼앗기면 안식일은 귀찮은 법이 되지만, 주님을 사랑하면 안식일은 환희의 날이 됩니다.
따뜻한 아버지를 알려주신 주님께서 지친 우리를 따뜻하게 안아 주시는 날이 안식일 입니다.
무엇인가를 해야 되는 강박적인 삶을 사는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열망하는 따뜻한 삶을 주시고자 만드신 날입니다.
안식일은 우리가 따뜻한 주님을 만나고 주님 품 안에서 쉬는 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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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강의를 나갔다가 잠시 쉬는 시간이 주어질 때가 있습니다. 이때 사람들은 주로 무엇을 할 것 같습니까? 화장실에 다녀오는 사람이 많지만, 적지 않은 사람이 자기 자리에서 스마트폰을 보고 있습니다. 실제로 쉼의 시간에 스마트폰을 본다는 분이 많습니다. 그런데 과연 스마트폰 보는 것이 쉬는 것일까요?
하루 평균, 우리가 스마트폰으로 습득하는 정보의 양은 신문 175부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보통 신문 한 부에 포함되는 글자 수가 13만 자이나 우리가 매일 뇌 속으로 넣는 글자의 양은 일 평균 2,300만 자입니다. 일주일이면 1억 6,000만 자, 한 달이면 7억 자, 1년이면 84억 자입니다. 어떻습니까? 쉬는 것이 아니라, 머리가 터질 것 같지 않습니까?
이런 정보의 양을 접하고 있으니, 머리는 피곤할 수밖에 없습니다. 손가락만 움직이기에 쉬는 줄 알았지만, 머리는 쉴 새 없이 엄청나게 많은 일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는 일 없이 피곤했던 것이 아니라, 진짜로 많은 일을 해서 피곤했습니다. 그래서 요즘 기억력이 전과 다르다는 사람이 많은 이유를 여기에서 찾으시는 분도 많습니다. 단순히 나이 먹이서가 아니라, 정보의 양이 너무 많아서 그 모든 것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쉬기 위해 하는 스마트폰이 오히려 피곤하게 만든다는 것, 우리 삶에서 이런 경우는 참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큰 부자가 되고 싶다고 말하면서, 쓸데없는 소비를 멈추지 않습니다. 공부 잘하고 싶다면서, 정작 공부를 하지 않습니다. 행복했으면 한다고 말하면서, 미움, 질투 등의 부정적 생각을 버리지 않습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정말로 지금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라고 예수님께 말합니다. 사실 제자들이 안식일 법을 어긴 것이 아닙니다. 신명기에 보면(23,26), “너희가 이웃의 곡식밭에 들어갈 경우, 손으로 이삭을 자를 수는 있지만 이웃의 곡식에 낫을 대서는 안 된다.”라고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밀 이삭 뜯은 것을 추수 행위로 확대 해석하는 것입니다.
안식일 법에 왜 생겼는지를 알아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라고 말씀하시면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한 사랑 때문에 생겼음을 이야기하십니다.
그런데 바리사이들은 사랑 자체는 전혀 보지 않습니다.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하느님과 함께 할 수 있는데, 법 준수만을 외치면서 사랑을 외면합니다. 하느님과 함께하지 못하고 하느님의 반대편에 서게 됩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지금 해야 할 것을 살펴봐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느님의 뜻에 맞는 것인지를 봐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과 함께하며 진정한 행복의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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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쉼이 참으로 쉼일 수 있도록>
마르코 2,23-28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질러가시게 되었다. 그런데 그분의 제자들이 길을 내고 가면서 밀 이삭을 뜯기 시작하였다.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 본 적이 없느냐? 에브야타르 대사제 때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먹고 함께 있는 이들에게도 주지 않았느냐?” 이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쉼이 참으로 쉼일 수 있도록>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마르 2,27)
쉼이
참으로
쉼일 수 있도록
사람을 자유롭게
쉼이
참으로
쉼일 수 있도록
사람을 평화롭게
쉼이
참으로
쉼일 수 있도록
사람을 넉넉하게
쉼이
참으로
쉼일 수 있도록
사람을 기쁘게
쉼이
참으로
쉼일 수 있도록
사람을 희망차게
쉼이
참으로
쉼일 수 있도록
사람을 따뜻하게
쉼이
참으로
쉼일 수 있도록
사람을 부드럽게
쉼이
참으로
쉼일 수 있도록
사람을 아름답게
쉼이
참으로
쉼일 수 있도록
사람을 온전하게
쉼이
참으로
쉼일 수 있도록
사람을 사람답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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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영적인 양식을 취하고 사랑을 실천하는 날>
“놀 때 놀고 일할 때 일하며, 쉬고 싶을 때 마음껏 쉬고 싶습니다. 주일 미사참례의 의무는 주님의 기도 33번으로 가름하고 휴일을 즐기고 싶습니다.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싶어서 성당을 찾았는데 미사참례의 계명이 오히려 자유를 옭아매는 느낌이 들어 싫습니다.”
교회법에서는 “미사참례 계명은 주일이나 의무 축일 당일이나 그 전날 저녁에 어디서든지 가톨릭 예식으로 거행되는 미사에 참례하는 것으로 이행된다.”(교회법 1248조 1항)고 정하고 있습니다. 물론 미사가 없는 공소에서는 공소예절(말씀의 전례)에 참례하여야 하고 공소예절도 참례할 수 없는 경우에는 개인이나 가족끼리 합당한 시간 동안 기도에 몰두하도록 권장합니다. 그래서 부득이한 경우 예수님께서 33살까지 사셨기에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 33번을 바치라는 관습이 생겨났습니다. 사실, 예전에 우리 나라의 많은 사람이 한글도 모르고, 성경도 라틴어로 된 책만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기도를 대신 바치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성경을 읽을 수 있고 마음만 먹으면 성당에 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주님의 기도 33번으로 주일 미사참례 의무를 대신하려 한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 2,28)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셨습니다. 안식일 계명은 일주일에 한 번은 무조건 쉬어야 함을 내용으로 합니다. 이는 인간이 일의 노예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규정은 선과 생명에 도움을 주는 것이고, 궁극적으로는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하느님의 선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이스라엘 백성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기 위해서 안식일 규정을 강화하는 가운데 본래의 의미를 잊고 자구에 매인 나머지 단지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데에 집착하여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될 규정들을 세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이 선과 생명에 보탬이 되기보다 되레 인간을 자유롭지 못하게 하는 굴레와 족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본래의 의미를 회복하려고 하셨습니다. 법보다 사람이 우선입니다.
어떤 분이 고해성사를 보시면서 “안식에 해서는 안 될 일, 빨래를 하고, 청소를 하였습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것은 죄가 아닙니다. 일상적인 생활을 하기 위해서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규정을 생각하기보다 그 의미, 알맹이를 생각하십시오. 하느님을 섬기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하고 말씀드렸더니, “요즘 법은 왜 그리 물러졌어요?” 하셨습니다.
안식을 취해야 할 주일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영혼의 안식을 취하는 날로 보내야 하는 것은 마땅합니다. 단순히 미사참례를 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영적인 양식을 취하고 구체적 사랑을 실천하는 날로 지내야 합니다. 이날은 우리를 구원에로 이끌어 주시며 성체성사의 양식으로 배 불리시는 주님께 감사와 찬미를 드리는 날이어야 합니다. 주일은 분명, 주님의 부활을 경축하는 날이면서도 인간을 사랑하시고 해방하시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바리사이들은 마음이 완고하고 오그라들어서 안식일 법을 확대해석하며 사람들에게 짐을 지웠지만, 예수님께서는 인간 구원에 방해가 된다면 그것을 철저히 거부하셨습니다. 그것은 분명 하느님의 뜻과 상반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라는 말을, 달리 말하면 예수님의 권위 있는 가르침이 곧 인간을 살린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뜻을 인간에게 알려주고 하느님의 뜻대로 살도록 가르치는 전권을 가진 분으로 안식일의 주인입니다.(이영헌)
그러므로 적극적인 마음으로 함께 모여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기도하며 미사성제에 참여함으로써, 주님의 수난과 부활, 영광을 기념하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즐거움과 휴식의 날이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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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의 트집을 잡습니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마르 2,24)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안식일에 해야 할 일의 본질과 우선순위를 깨닫게 됩니다. 곧 ‘해야 할 일’(생명을 살리고 축복하고 하느님을 주인 되게 하는 일)과 ‘해서는 안 되는 일’(생명을 저해하고 자신이 주인 되게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자신의 유익과 유쾌함 따르는 일)의 순위를 보게 됩니다. 그리고 나는 어떤 일을 우선하는 사람인가를 보게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안식일을 왜 세우신 것일까?
야훼 하느님께서는 만나와 메추라기를 주시는 장면에서, 안식일을 주신 이유를 “내가 너희 주 하느님임을 알게 되게 하기 위함”(탈출 16,12)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안식일을 계약의 표로 삼으시는 장면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의 안식일을 잘 지켜라. 그러면 너희를 성별한 것이 나 야훼임을 알리라.”(탈출 31,13)
이처럼, 안식일을 새운 이유를 ‘하느님께서 주님이심을 알게 하기 위함’이라고 밝혀줍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에서는 “사람의 아들이 또한 안식일의 주인”(마르 2,28)이라고 선포하십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의 근본정신은 무엇일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팠을 때, 다윗이 어떻게 하였는지 너희는 읽어본 적이 없느냐?”(마르 2,25) 하고 물으시고, 그들이 제사 빵을 먹었던 사실을 말씀하십니다. 곧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그런 일들을 ‘해서는 안 되는 일’로 알았지만 다윗이 그렇게 하였던 것처럼, 이제 예수님께서는 ‘자비를 베푸는 일’이 안식일 계명의 근본정신임을 밝히십니다. 곧 안식일의 본질이 율법의 규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있음을 밝히십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탈출기>의 ‘계약의 책’에서는 안식일이 누구를 위한 날인지를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이레째 되는 날에는 쉬어라. ~그래야 계집종의 자식과 몸 붙여 사는 사람도 숨을 돌릴 것이 아니냐?”(탈출 23,12)
이는 안식일이 인간을 위해 주어진 것임을 말해줍니다. 곧 율법이 하느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것이듯, 쉼도 하느님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한 것임을 말해줍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마르 2,27)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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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아들은 안식일의 주인이다.”(마르 2,28)
주님!
이 날은 저희를 위하여 마련하신 날,
저희에게 새 마음, 새 살이 돋게 하고 새 옷을 입히시니
당신이 주 하느님임을 알게 하소서!
이 날을 새롭게 하시고, 저희를 새롭게 하소서.
거룩함을 입었으니, 거룩한 일을 행하게 하소서.
자비를 입었으니, 자비를 베푸는 이가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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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분별의 잣대는 사랑>
-사랑과 자유-
"보라, 나는 내가 갈망하는 것을 보았고, 희망하는 분을 얻었으며, 지상에서 온 마음으로 사랑한 분을 만났도다."(즈카르야 후렴)
성녀 아녜스의 아름다운 고백입니다. 오늘은 성녀 아녜스 동정 순교자 기념일입니다. 오늘 영명축일을 맞이하는 여러 아녜스 자매들을 기억하며 미사를 봉헌합니다. 생몰연대를 보니 고작 13세에 순교한 성녀입니다. 성덕과 산 햇수는 무관함을 봅니다. 얼마나 많이 살았는가 보다는 어떻게 사랑의 삶을 살았느냐는, 바로 성덕의 잣대는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성녀 아녜스는 아가타, 세실리아, 루치아와 함께 로마의 4대 순교 성녀에 속합니다.
아녜스는 ‘순결’ 또는 ‘양’을 뜻합니다. 성녀는 발치에 양을 데리고 있거나 팔에 양을 안고 있는 여인으로 그려지지만, 때로는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있거나 긴 머리칼로 온몸을 덮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지기도 합니다. 성녀 아녜스는 처녀, 약혼한 남녀, 정원사의 수호성녀입니다. 성녀 아녜스의 미모에 반한 로마 총독의 아들이 청혼했을 때의 성녀의 전설적 답변 내용을 소개합니다.
“나는 이미 다른 사람과 서약했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분은 고결하고 훌륭한 혈통의 자손입니다. 그분의 어머니는 동정녀이시고, 그분은 천사들의 시중을 받고 계십니다. 그분은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결국 배교를 거절하고 하느님의 사랑에 대해 설교하다 참수형의 순교를 맞이합니다.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의 순교요 새삼 순교는 주님 성체와의 결합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꽃같은 사랑의 성녀 아녜스는 물론 오늘 영명축일을 맞이하는 사랑하는 아녜스 자매님들께 제 좋아하는 두 시를 헌정하고 싶습니다.
“꽃같은
하루
꽃같이
살자”
하루를 살더라도 꽃같은 하루, ‘파스카의 꽃’같은 사랑으로 살면 참 아름다운 삶이겠습니다. 간혹 꽃을 가져오는 꽃보다 더 예쁜 영혼의 자매들에게 선사하는 덕담같은 시입니다.
“꽃이
꽃을 가져오다니요?
그냥 오세요
당신은
꽃보다 더 예뻐요.”
사랑이 답입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습니다. 이말마디는 제 세 번째 출간한 책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책 1면에 소개된 글을 인용합니다.
“사랑은 구체적이다, 추상명사가 아닌 실행해야 하는 동사다. 우리 온몸은 사랑하라 있는 사랑의 도구다. 멀리 밖에서가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서 함께 하는 주님과 가족, 그리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서로 사랑하라고 보내 주신 하느님의 선물이다. 거창한 사랑이 아니라 작은 행동으로의 사랑이다. 작은 사랑의 실천이 감동을 주어 마음을 치유하고 정화하고 충만하게 한다. 사랑은 우리의 모두다. 사랑이 있을 때 빛나는 인생이지만 사랑이 사라지면 어두운 인생이다. 사랑하며 살아갈 때 비로소 사람이다.”
사랑은 분별의 잣대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오늘 복음은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은 사실에 격렬히 항의하는 바리사이들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한마디로 율법주의자 바리사이들의 사랑부재를 반영합니다. 예수님 제자들의 배고픈 구체적 인간 현실을 도외시하고 인정머리없이 안식일법의 잣대를 들이댑니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되는 일을 합니까?”
예수님은 즉시 바리사이들 역시 존경하는 구약의 다윗의 예를 듭니다. 우리가 여기서 비교할 것은 예수님과 바리사이가 아니라, 예수님과 다윗입니다. 두분은 공통점은 참으로 자유로운 처신입니다. 예수님은 다윗이 에브야타르 대사제 때에 그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 사제가 아니면 먹어서는 안되는 제사 빵을 먹고 일행들에게도 준 사실을 예로듭니다. 자신에 대한 하느님의 마음을, 사랑을 너무 잘 알았기에, 또 하느님의 사랑과 신뢰를 너무나 받고 있음을 알았기에 이처럼 다윗의 자신있는 자유로운 처신입니다.
이것은 일상에서도 자주 목격하는 사랑의 진리입니다. 가난이 문제가 아닙니다. 물질적으로 가난해도 참사랑으로 자녀를 키운 이들의 자녀들의 당당하고 자유로운, 자존감 높은, 정체성 또렷한 처신에서도 입증되는 진리입니다. 사랑 많이 받은 이들이 사랑할 줄도 알고 또 사랑도 많이 받습니다. 성장과정중 부모로 부터의 사랑결핍으로 어른이 되어서도 얼마나 많은 이들이 마음 위축되고 아파해 하며 허기를 느끼며 춥게 지내는 지요!
예수님은 다윗 이상으로, 세상 그 누구보다도 하느님의 사랑과 신뢰를 온몸에 받고 있음을 알았기에, 하느님의 사랑에 정통해 있었기에, 그리도 당당하고 의연하며 자신감 넘치는, 자유로운 처신입니다. 사랑 많이 받고 사랑 많이 할수록 정체성 또렷하고 자존감 높은 참나의 실현이요 참으로 자유로운 삶입니다. 사랑과 함께 가는 자유입니다.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참으로 자유롭게 하는 아오스팅 성인의 말씀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자유로운 사랑의 반영이 바로 다음 말씀입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하느님의 신뢰와 사랑을 한몸에 받고 있음을 알았기에, 하느님의 마음에 정통해 있기에, 하느님 사랑을 그대로 반영한 우리를 참으로 자유롭게 하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실천해야 할 유일한 법은 다음 사랑의 계명, 하나뿐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3,34)
분별의 잣대는 안식일법 율법이 아니라 사람이자 사랑이요, 최종적인 분별의 잣대는 안식일의 주인이신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사랑이신 주 예수님이라 고백하고, 2025년 희년에 우리는 우리의 희망이신 주 예수님이라 고백하며 희망의 순례자로서 우리의 신원을 새롭게 합니다. 오늘 히브리서의 고백이 우리의 희망을 새롭게 합니다.
“당신께 몸을 피한 우리가 앞에 놓인 희망을 굳게 붙잡도록 힘찬 격려를 받게 하셨습니다. 이 희망은 우리에게 영혼의 닻과 같아, 안전하고 견고하여 저 휘장 안에까지 들어가게 해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선구자로 그곳에 들어가셨습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우리의 사랑이자 희망’이신 주님과 하나되어 올바른 분별의 지혜와 사랑을 발휘하며 자유롭게 살게 하십니다. 역시 아녜스 성녀의 고백입니다.
"내가 사랑하고 찾으며 갈망하던 거룩하신 성부여, 당신께 나아 가나이다."(성모의 노래 후렴).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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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사랑은 없고 힘만 있는?>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
어제 복음은 “새 술을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라는 주님 말씀으로 끝났습니다. 제 생각에 오늘 주님 말씀은 새 술에 해당하는 말씀이고 혁명적인 말씀입니다.
당시 유대인에게 안식일은 최고로 중요한 것이었고, 이 중요한 안식일 법을 지키지 않았을 땐 가차 없이 단죄받던 때였는데 안식일보다 그리고 안식일 법보다 사람이 더 중요하다 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이 곧 사람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말씀이 제게는 사랑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말씀으로 이해됩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 없는 사람이 종종 법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고 단죄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인간에 대한 사랑이 없는 사람이 법을 더 중요시하고 사람을 법보다 하시하고 단죄합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법은 본래 정의로운 것이고 그래서 법의 정신이 본래는 인간 사랑인데, 사랑이 없는 사람은 법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고, 힘이 있는 사람들이 법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며, 법을 가지고 사익을 취하고 남을 단죄하고 공격합니다.
그러니까 사랑은 없고 힘은 있는 사람이 법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고 힘없는 이를 쥐락펴락하며 단죄하고 공격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사랑은 없고 힘이 있는 사람이 늘 문제이고 위험한데 그런 자가 어떤 짓을 저지르는지 우리는 지금 생생히 목격하고 있지요.
그런데 자신을 잘 성찰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을 우리가 또 공격하지 말고 내가 그런 사람이 아닌지 곧 사랑은 없고 힘만 있는 내가 아닌지 오히려 나를 돌아보는 오늘이 되게 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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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 2,27)
<본질을 살자!>
오늘 복음(마르2,23-28)은 '제자들이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밀밭 사이를 질러가시게 되었는데, 예수님의 제자들이 길을 내고 가면서 밀 이삭을 띁어먹었습니다. 아마도 배가 고파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바리사이들이 예수님께 말합니다. "보십시오, 저들은 어째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합니까?"(마르 2,24)
그러자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다윗과 그 일행이 먹을 것이 없어 배가 고팠을 때, 사제가 아니면 먹어서는 안 되는 제사 빵을 함께 먹은 사실을 언급하시면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아들은 또한 안식일의 주인이다."(마르 2,27-28)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종교 지도자들과 끊임없는 논쟁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율법 논쟁'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율법 규정을 어기고 있다는 것이었고,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본질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율법은 '십계명과 모세오경(창세기.탈출기.레위기.민수기.신명기)'이 근간을 이루고 있고, 사람들이 만들어 놓은 많은 세부 규정들(613개 정도)이 있습니다.
율법은 '하느님의 법'입니다. 하느님께서 시나이 산에서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내려준 하느님의 법으로서, '생명 법'입니다.
오늘 복음이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아무리 복잡하고 엄격한 율법 규정이 많이 있어도 율법의 본질은 사람을 살리는데 있다.'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사람을 살리기 위해 오신 메시아이시다.'라는 것입니다.
본질을 가리키는 손가락(율법의 세부 규정들)만 바라보지 말고, 그 손가락이 가리키는 본질을 바라보고, 본질인 사랑을 살려고 노력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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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은 아니다."(마르 2, 27)
안식일을
만드신 분은
사람을 창조하신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날이
바로 안식일입니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향하시듯
사람을
향해야한는
안식일의
정신입니다.
안식일은
바리사이들의
전유물이
결코 아닙니다.
안식일은
하느님께서
중심이 되는
하느님의 날입니다.
하느님을
위하는 것이
사람을
위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은
사람을 위한
연민의 마음에서
시작되어야합니다.
사람을 바라보는
방식이 폭력과
비판이 아닌
사랑과 진심어린
기도이길 바랍니다.
성녀 아녜스처럼
삶을 아름답게
하는 것은
하느님을 향한
사랑과 믿음임을
기억합시다.
사람을 위한
사람의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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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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