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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성경의 수학
By Brian Donovan
수학은 “숫자와 수량에 대한 추상 과학”이라 정의된다. 많은 사람들은 생물학, 수학, 정신 의학, 물리학 등을 포함한 과학이 성경과는 무관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대로 믿는 사람들은 그런 것들과 성경이 유관하다고 여기는데 그 이유는 온 우주가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창조되었고 그분에 의해 운행되고 있기 때문이다(골 1:16-17; 히 1:3). 수학 또한 예외가 아니다. 순수 수학은 성경적으로 유효한데 이는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학은 중립적이지 않으며 과학도 중립적이지 않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수학 법칙들을 제정하셨을 뿐 아니라 사람들이 그것을 조사하고 발견하게 허용하셨다. B.C. 300년 경에 유클리드가 기술한 기하학의 공식들은 2천 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한데 이는 그가 찾아낸 법칙들이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것이었기 때문이다(이를테면 두 점 사이의 가장 가까운 거리는 직선이다; 고정된 점만 있으면 항상 원을 그릴 수 있다 등).
오늘날 과학의 문제는 과학자들이 확정된 절대 법칙의 영역을 버려두고 단지 추측과 이론 영역에 매몰되어 있다는 것이다. 현대의 고등 교육 받은 사람들은 자신이 어떤 기록된 율법을 따를 필요가 없는 독립적인 사색가(새로운 사고)라고 자랑한다.
현대 “과학자들”은 진리에 대해 극도의 편견을 가진 종교적 철학가들이다. 그래서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과학과 철학에서 진리를 찾으려 한다(종교도 마찬가지이다).
리처드 도킨스는 진화론 가설을 떠받드는 대제사장 같은 인물인데 하나님께 대한 그의 증오가 얼마나 컸던지 그가 쓴 책들을 보면 온통 하나님을 반대하는 말들로 도배되어 있다. 주 하나님께서 이 종교적인 얼간이를 어떻게 화나게 만드셨는지 확인하려면 도킨스의 이 발언들을 보면 된다: “구약 성경의 하나님은 모든 소설 가운데 가장 불쾌한 등장 인물인데…그는 질투심 많고, 불공평하고, 용서할 줄 모르며…만사 제멋대로인데다…동성애자를 증오하고, 인종차별주의자에, 대량학살을 자행하고, 과대망상에, 가학 피학성 성욕에, 변덕스럽고, 심술궂은 불량배 같은 존재이다.” 이 말을 한 장본인은 자신의 사악한 생애와 당면한 심판에 대해 강박증에 걸린 것처럼 보인다.
진화론은 참된 과학이 아닌 철학이다. 여러분이 철학의 네 가지 주요 테마들을(이상주의, 현실주의, 자연주의, 그리고 실용주의) 다 살펴본다 해도 5분 동안 쓰레기통에 머리를 들이밀고 찾는 것보다 많은 진리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다른 과학과 마찬가지로 수학은 절대적인 법칙들을 갖고 있다. 이를테면 1+1=2라는 법칙이 있다. 여러분이 자신의 어리석음을 과시하는 철학적 얼간이가 아니라면 이런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만일 어떤 대학 교수가 학생들에게 1+1은 어쩌면 3이 될 수도 있다고 가르친다면 그 수학 교수는 강사료를 받을 자격도 없는 사람이다. 주께서는 자신의 창조물 안에 절대적인 법칙들을 넣어두셨는데 그것은 자신이 신실하고 변함없는 분이심을 보여주시려 함이었다.
수학 공식들의 저자이신 분께서는 자신이 세우신 법칙을 무효화 하실 수도 있는데 주께서 법칙에 예외를 두실 수 있는 것은 그분께서 창조주이시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주께서는 1+1=1이 되게 하실 수도 있다. 주만이 한 남자와 한 여자를 결합하게 하시고 그들을 하나로 만드실 수 있다(엡 5:31). 주만이 수백만 명의 죄인들을 영적인 한 몸 안에 집어넣으실 수 있다(고전 12:12-20). 주만이 바구니에 든 “다섯 덩이 빵”과 “두 마리 작은 생선”을 5,000명 분의 음식이 되게 하실 뿐 아니라 남은 음식을 꽉 찬 열두 바구니로 만드실 수 있다(마 14:19-21; 요 6:9-13).
주께서 자신이 제정하신 법칙들에 종종 예외를 허용하시는 것을 본 아인슈타인 같은 바보는 절대적인 법칙이란 아예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말았다. 아인슈타인이 한 번은 이런 말을 했다. “진리를 소유하는 것보다 진리 탐구 자체가 더 귀중한 것이다.” 성경은 이런 자세에 대해 이렇게 말씀한다. “항상 배우나 진리의 지식에는 결코 이를 수 없느니라”(딤후 3:7). 죄인의 생애에서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놀라운 일은 그가 진리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것이다(요 14:6). 여러분은 죽기 직전에 영원한 생명을 놓치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쁠 것이며(요일 5:20) 그 마지막 순간에 여러분은 자신이 마지막 심판 때까지 인생의 해답을 찾아 헤맨 사람이 아니었음에 감사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주께서 덧셈, 뺄셈, 곱셈, 나눗셈의 절대 법칙에 예외를 만드셔서 행하신 사례들을 성경에서 찾을 수 있다. 성경에는 민수기(Numbers)라고 불리는 책이 있는데 주께서는 그 책에서 115번 이상 사람들, 장소들, 사물들의 숫자를 헤아리신다. 이것을 보면 주께서 질서와 수학적 정확성을 추구하는 분이지 혼란의 창시자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주께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정한 순서와 숫자에 따라 진영을 세우도록 명령하셨는데 광야 생활 40년 동안 그것이 반복되었다(민 1-2장). 또 민 13장에서 주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40일 동안 카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온 정탐꾼들의 보고를 듣고 그 땅에 들어가지 않으려 하자 40일의 하루를 1년으로 간주하여 40년 동안 그들이 광야에서 방황하도록 하셨다(민 14:29-34).
주께서는 성경에서 이처럼 숫자를 사용하여 자신의 뜻을 반복해서 나타내셨다. 이를테면 신 32:8에서 주께서는 “민족들을 그들의 유업으로 나누셨을 때, 그분께서 아담의 아들들을 분리시키셨을 때, 그분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의 수에 따라 백성들의 경계를 정하셨으니”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이방 민족들을 나누는 열두 개의 경계가 있다는 뜻인데 기술 문명이 발달한 현대인들이 이것을 무시한다 해서 주께서 정하신 이 경계가 무효화되지는 않는 것이다.
주께서 수학적으로 역사하신다는 것을 보여주는 다른 케이스는 유다의 바빌론 포로 생활이다. 다니엘은 십대의 소년기에 바빌론에 끌려갔고 노년이 되어서야 그는 포로 생활이 칠십 년이면 끝난다는 것을 깨달았다(단 9:1-2). 다니엘이 그 사실을 깨달은 때가 포로기의 거의 끝인 다리오가 왕으로 책봉된 첫째 해였다는 것을 주목하라. 그 때는 70년 가운데 68년이 경과한 때였다. 왜 그 포로기는 오십 년, 이십 년, 혹은 백 년이 아닌 칠십 년이어야 했는가? 당시 누구도 알지 못했지만 주께서는 이스라엘이 주의 법을 무시하고 그 땅에서 이득을 챙겼던 기간을 계산하신 것이다.
B.C. 1500년 경에 주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칠 년마다 안식년을 지켜 그 땅을 쉬게 하라고 말씀하셨다(레 25:1-7). 그들이 주를 믿고 그의 약속을 신뢰한다면 주께서는 일곱 째 해에 먹을 양식까지 여섯 째 해에 주실 것이었다(레 25:18-22). 그러나 삼상 8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모든 민족들처럼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재판하게 하소서”(삼상 8:5)라고 요구하는 것을 보게 된다. 주께서는 그들이 요구하는 것 때문에 더 이상 “독특한 백성”(신 14:2을 보라)이 되지 못할 것이라 경고하라고 사무엘에게 말씀하신다(삼상 8:9). 그들이 세운 왕은 적그리스도의 모형인 사울이었다. 사울이 왕이 되자 그는 백성에게서 수확의 십 분의 일을 세금으로 징수했다(삼상 8:15). (정부는 스스로 돈을 버는 대신 백성으로부터 빼앗는다.) 이스라엘 백성이 왕을 요구한 대가는 세금 때문에 안식년을 범하게 된 것이었다. 사울이 집권한 B.C. 1096년 이래 이런 관행이 계속되었다. 그 후 490년 동안 주께서는 이스라엘이 안식년을 범하는 것을 계산하셨다. 결국 안식년을 범한 회수가 70번이 차자(70x7) B.C. 606년 주께서는 느부캇넷살을 사용하셔서 그 땅이 칠십 년 동안 쉬도록 강제적으로 역사하셨다.
성경의 수학에서 주께서는 어떤 사람도 영원에 계신 그 분과 경쟁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셨다. 성경에서 처음 수학이 언급되는 때는 주께서 아브람에게 “네 씨를 땅의 티끌 같게 할 것임이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셀 수 있다면 네 씨도 셀 수 있으리라”(창 13:16)고 말씀하셨을 때이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이제 하늘을 쳐다보고 별들을 셀 수 있다면 그 별들을 세어 보아라”(창 15:5)라고 말씀하셨다. 인간은 하늘의 별은 물론이고 땅의 티끌도 세지 못한다. 1930년대 후반에 “과학자들”은 별들을 셀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틀린 생각이었다. 나중에 그들은 말했다. “음, 우리가 틀렸습니다. 별들의 숫자는 무한합니다.” 이번에도 틀렸다. 주께서는 별들의 숫자를 아실 뿐 아니라 그것들 각각의 이름도 지으셨다(시 147:4). 주께서는 “땅의 티끌”도 헤아리시고 측정하신다(사 40:12).
하나님의 수학은 이처럼 경이롭다. 영원에 계신 무한하신 주의 연대는 누구도 계산할 수 없는데(욥36:26) 그 주께서 자신을 낮추시어 “범죄자들과 더불어 헤아림을 받았다”(막 15:28).
주의 기하학적 형상은 무한한 동심원이다. 주께서 창조하신 물질 세계를 관찰해 보면 주의 손길이 활 모양, 나선형, 원형을 즐겨 쓰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원형이 재미있는 점은 그것이 시작도 끝도 없는 무한이라는 것이다. 원형을 정의하는 수학 기호는 파이(Pi)이다. 파이를 제곱하면 원의 직경을 산출할 수 있다. 왕상 7:23에 보면 솔로몬이 놋으로 된 둥근 바다를 만들었는데 그 지름이 십 큐빗이고 외주가 삼십 큐빗이었다고 나온다. 그 파이 값은 3이 된다. 성경을 비웃는 비평가들은 성경 기자들이 수학적으로 무지했다고 말한다. 파이에 대한 한 책에 보면 저자가 이렇게 쓰고 있다. “성경에 나온 파이 값에 대한 부정확함은 무척 흥미로운 부분이다.” 그리고 나서 그는 B.C. 1000년 바빌론인들이 파이를 3.125로 계산했고, A.D. 500년 인도와 중국인들은 3.14로 계산했다고 말한다. 컴퓨터를 가진 현대인은 파이를 12조 자리 수까지 계산할 수 있는데 그래도 이 무한대의 숫자는 끝나지 않는다.
만일 그 저자가 마지막 날 자신이 주 앞에서 설명해야 할 이 책을 믿는 마음으로 보았다면 그들은 왕상 7장에서 솔로몬이 파이 값을 3.14(대략)로 구했음을 알았을 것이다(B.C. 1005년). 그 시기는 바빌론인들, 그리스인들, 인도인들, 중국인들보다 앞서는 때이다. 거기서 몇 구절 뒤로 가면 여러분은 직경이 십 큐빗인 그 놋 바다의 두께가 “한 손 너비”(왕상 7:26)였음을 알게 되는데 그것은 약 4인치 정도가 된다. 따라서 큐빗을 인치로 환산한 다음 거기서 8인치를 제하면 솔로몬이 만든 놋 바다 직경은 1만 인치가 되며 그것의 파이 값은 3.14가 나온다. 사람은 결코 성경을 앞지를 수 없다! 성경의 저자이신 하나님께서 파이에 대해 무지하셨다고 생각하는 것은 대학 교육을 받은 바보들의 일방적 착각일 뿐이다.
성경대로 믿는 사람이 자신이 주께로부터 받은 재능을 사용할 때(고전 12:8) 그는 주께 영광을 돌리게 된다. 진화론은 종교적 설명이 아닌 수학적 논리로 반증할 수 있다. 모든 세계 석학들과 수재라는 학자들은 단지 사실을 무시함으로써 성경과 심판을 반박하려 한다. 과학적, 수학적으로 진화론은 사기라는 것을 학자들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진화론을 포기하면 대안은 결국 전능하신 하나님밖에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하나님의 수학은 인간들의 계산법과 다르다. 주의 계산법에서는 여러분이 세상의 모든 부귀를 끌어 모은다 할지라도 그것이 여러분 한 명의 혼의 가치와 비견할 수 없다고 나온다(막 8:36). 주께서는 인간이 칠십 년, 혹은 팔십 년 동안 즐겁게 사는 대신 지옥에서 영원을 보낸다면 그것은 비교도 되지 않는 일이라고 말씀하신다. 주의 수학에서는 이렇게 말씀한다. “이는 현재의 고난들이 우리에게 나타나게 될 영광에 감히 비교되지 못한다고 내가 여기기 때문이라”(롬 8:18).
성경의 창조와 수학과의 관계
기독교의 모든 것이 있는 성경말씀 그 자체가 논리의 바탕 위에 있고 정확 무오하기 때문에 수학이란 학문을 통하여 위대한 성경말씀을 아는 데 접근화시키는 복음적인 차원에서 생각했다.
「기독교의 신앙 기반인 성경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정확 무오한 계시이며, 인간은 유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신앙의 도리를 인간 이성의 긍정을 초월한 신앙으로 받아 들여서 성령의 역사로서 확신을 가지게 되는 것이 객관적인 기독교가 주관적으로 생명력 있는 인식의 대상이 되는 과정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도리는 우주와 인간의 근본과 시작과 종말을 말해 주는 성경에 근거한 것임으로 과학의 숭고한 대상이며 기독교 도리 설명과 전파에 있어서 과학을 하는 자세나 모든 과학의 조종격(祖宗格)인 수학을 하는 자세는 극히 귀(貴)한 일이다」라고 어떤 개혁주의 신학자 한 분이 말씀한 바 있다.
목 차
I. 서론
II. 본론
1. 수학에 대한 올바른 이해
2. 수학을 통해 본 세계
3. 성경에 나오는 수의 배경
4. 구약 성경에 나오는 수들
5. 신약성경에 나오는 수들
6. 성경에 나타난 숫자와 특별 수들
7. 신앙의 수학자들
III. 결론
Ⅰ. 서론
욥기 38:31~33을 보면 「네가 묘성을 매어 떨기 되게 하겠느냐 삼성의 띠를 풀겠느냐 네가 열두 궁성을 때를 따라 이끌어 내겠느냐 북두성과 그 속한 별들을 인도하겠느냐」, 예레미아 33:25에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의 주야의 약정이 서지 아니할 수 있다든지 천지의 규례가 정한대로 되지 아니할 수 있다 할찐대…」
시편 119:91에 보면 「천지가 주의 규례대로 오늘까지 있음은 만물이 주의 종이 된 연고니이다」에서 나타나 있듯이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주에 법칙을 정해 놓았음을 증거하고 있다. 이러한 우주에 자연법칙이 있음을 알게 된 사람은 BC 500~600년경 희랍 철학자이며 수학자인 탈레스(BC 624~546)와 피타고라스(BC 582~497)였다. 이사야 40:26을 보면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내시고 각각 그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자연현상을 조성하실 때에 수(數)에 따라 이끌어 내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자연법칙은 수적질서이며 조화라는 점을 피타고라스가 발견했는데, 성경은 그보다 약 1500년 전에 벌써 욥기를 통하여 말하고 있으며, 또 200년 전에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말하고 있다. 즉 모든 자연법칙은 수식화할 수 있는 것이다. 보일-샤를의 법칙을 발견한 보일은 「수학과 역학의 원리는 하나님이 세계를 쓰기 위하여 사용하시는 알파벳」이라고 하였다.
Ⅱ. 본론
1. 수학에 대한 올바른 이해
욥기 38:4~6에 보면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찌니라. 누가 그 도량을 정하였었는지, 누가 그 준승을 그 위에 띄웠었는지 네가 아느냐? 그 주초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이 돌은 누가 놓았었느냐…』 여기서 나타나 있듯이 하나님께서 지구의 크기를 정하시고 땅의 기초를 놓았다고 말씀하셨다. 지구의 크기가 적당해야 분출하는 화산 가스가 행성간 공간으로 흩어지지 않고 보존되어 적당한 바다와 대기층을 유지할 수 있다. 지구의 크기는 적도반경이 약 6,378,388m 이고 극반경은 약 6,356,912m 이며, 질량은 5.976×1027g 이다. 욥 38:18에 『땅의 넓이를 네가 측량하였었느냐 다 알거든 말할찌니라』고 하였다.
지구의 표면적은 약 5.10101×108㎢ 이고, 지구의 부피는 약 1.08331978×1012㎦ 이며, 육지의 면적은 약 1.417×108㎢ 이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실 때에 수적조화로 창조하셨는데, 이와 같이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것을 설명하고 증명하는 도구가 과학이요 그 중에서는 수학이다. 수학은 실험이나 관찰 등 감각적인 작업을 전혀 하지 않음으로써 다른 과학과 구별된다. 제로(0), 마이너스(-), 점, 무한(∞) 등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들을 대상으로 할 수 있고, 이들에게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추상적인 과학인 셈이다. 고대 희랍의 유명한 수학자 유클리드(Euclid, BC 300년경)는 수학을 제왕학(帝王學)으로 승화시켜 왕자(후에 플레미 2세)에게 수학을 가르쳤는데, 이 왕자가 「이 어려운 기하학을 쉽게 배울 수 있는 지름길이 없는가?」라는 질문에 「수학에는 왕도(王道)가 없습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그는 어느 날 제자로부터 「도대체 이런 걸 배워서 어디다 써먹는지요?」라는 질문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수학을 매우 이상적인 학문으로 생각했던 유클리드는 격노하여 「너는 당장 눈앞의 쓸모만을 생각하는 비열한 인간이구나. 네게 가장 쓸모가 있는 것은 돈이니 이걸 갖고 빨리 사라지거라.」라고 동전 몇 닢을 던져주었다는 일화가 있다. 뿐만 아니라 알렉산더 대왕의 스승인 아리스토텔레스의 스승이자 철학자이며 수학자인 플라톤(Platon, BC 427~347년에 활동)은 아테네의 교외 아카데모스의 숲에 학교를 열어 우수한 제자를 육성하였는데, 그는 이 학교 교문 현판에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이 문안에 들어오지 말아라.」라고 써 붙여놓고 기하학에 소양이 없는 사람은 입학을 금지시킬 정도였다. 그것은 기하학의 사고방식, 즉 논리적인 사유가 모든 학문의 기본이라는 그의 생각 때문이었다.
우리는 흔히들 수학이라고 하면 숫자적인 계산술만 머리에 떠올리는 오류를 범하기 쉽다. 이러한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도 우리에게는 무리가 아니다. 우리는 초등학교에서부터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약 2,000 시간을 수학을 배우는데 사용하지마는 90% 이상이 계산(셈)이다. 이 끝없는 계산 학습이 수학을 곧 계산술로 생각하는 오류를 범하게 만드는 원흉이기도 하다. 그러나 셈(계산)은 수학자체가 아니라 수학을 전개하는 수단이다. 계산 없이는 한치도 수학세계를 전진시킬 수 없을 때도 있다. 그러나 한때 희랍에서는 계산술 따위의 하찮은(?) 기술은 로기스티케(logistike) 라고만 불러서 고상한 기하학과 엄연히 구별한 적도 있었다. 이때 그들에게는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철학을 하지 못한다.」라고 하는 신념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수학은 그들의 이성적 사고인 동시에 로고스(logos)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데 ‘인간의 사고를 이성적인 것으로 가다듬기 위해서는 논리적으로 따질 능력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것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은 기하학이다’ 라고 그들은 생각했던 것이다. 이처럼 이들은 기하학을 중시했고 유클리드는 기하학을 제왕학으로 승화시켰는데, 근대에도 링컨은 선거연설에서 「나는 유클리드 기하학을 공부한 바 있다」고 밝힘으로써 국민으로부터 큰 지지를 받았다. 그것은 기하학의 지식을 가졌다는 자랑이 아니라, 합리적인 정신, 즉 민주주의를 고수하는 신념을 말한 것이기 때문이다. 수학이 제왕학일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뿐 아니라 피타고라스는 「數는 만물의 근원이다」라고 말했고, 크롬웰은 「나의 자식들이 역사를 읽고 수학과 우주론을 공부해 주었으면 한다. 그것은 神에 따르는 일이며 인간의 사명이기도 하다」라고 말했다. 나폴레옹은 「수학의 수준은 그 나라의 국력과 비례한다」고 갈파했다. 실제로 수학의 신장은 단지 과학 기술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건전한 국민정신의 뒷받침 없이는 이룩되지 않는 것이다.
2. 수학을 통해본 세계
수학의 개념과 수학적 정리에 대한 신비스러운 해석이 많이 있다. 플라톤에 의해서 「유클리드 기하학」의 정의는 이데아(idea)의 세계에서의 영원한 진리를 나타낸다고 믿어졌고, 어거스틴은 이러한 플라톤의 이데아를 신의 이데아로, 데카르트에 의해서는 개인의 이성을 초월한 영원불변의 진리로 믿어졌다. 수에 대해서도 고대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신비주의자들 뿐 아니라 과학자, 철학자들의 신비한 해석의 대상이 되었다. 예컨대 처음으로 마이너스의 수를 발견한 민족은 음양론(陰陽論)을 주장한 중국이며, 0의 발견은 공(空) 사상을 형성한 인도였었고, 크기가 없는 존재론적인 점(点)을 생각한 것은 존재의 철학을 가졌던 희랍인, 무한을 수학의 대상에 도입한 것은 무한자(超越者)의 종교를 갖는 기독교권이었다. 이들 일련의 수학과 사상적인 일치는 결코 우연이 아니다. 또한 연금술이 과학을, 점성술이 천문학을, 또 신비론인 수 관념이 수학의 여왕이라고 하는 數論의 모태가 된 것은 아이러니칼한 일이다. 희랍인들은 수에서 얻은 느낌을 통하여 그 사상을 중심으로 때로는 종교단체를 만들었는데 그들의 수만큼은 오랫동안 서구인의 사상을 지배하여 왔다. 희랍인의 생각에는 수학의 「1」은 하늘(天)로 나타나 있다. 어거스틴은 6의 완전성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6은 그 자체가 완벽하다. 그러므로 신이 6일에 만물을 창조했다.” 6=1+2+3 즉, 6은 그 자신을 제외한 그 약수 전체의 합과 같다. 이런 수를 완전수라 하며, 다음으로 6에 가장 가까운 완전수가 28=(1+2+4+7+14) 이다. 이 완전수의 개념은 「헤브라이」사상에 있어서 종교적인 의미까지 내포되었다. 「7」은 1로부터 10까지 10개의 수 중에서 특수한 수라는 취급을 받았다. 그 이유는 6=2×3, 8=2×2×2, 9=3×3, 10=2×5 등과 같이 2와 3 또는 5의 곱으로 나타낼 수 있으나 7만은 그렇게 표시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희랍인들은 7을 만물의 지배자라고 했다.
그러나 그 후에 무한의 세계에서는 유한의 세계에서의 인간의 경험적 지식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예컨대 「부분이 전체보다 작다」는 명제는 무한에서는 성립하지 않으며, 티끌 모아 태산이라는 금언도 무한의 세계에서는 반드시 성립하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수학적 개념의 신비성은 그 신비성을 통하여 만물을 해석하게 되고, 결과적으로 아주 특수한 세계관을 이루게 되었다. 피타고라스 학파가 이의 좋은 예이다. 피타고라스는 어느 날 대장간 앞을 지나다가 대장장이의 망치소리에서 어떤 선율(旋律)에 쾌감을 느끼고 이 선율의 조화(調和)를 수(數)로 표현하려고 시도했다. 그래서 음정(音程)은 현의 길이와 비례하며 두음 사이의 음정은 현의 진동수의 차(差)에 의한 것이 아니고 비(比)에 의함을 알고, 또 잇따라 나오는 음정의 진동수의 비가 간단한 비로 조화될 때 심리적으로 아름답게 느낀다는 것을 알았으며, 이를 바탕으로 가장 아름다운 선율이라고 하는 음계(音階)를 만들었다. 이를 피타고라스 5음계라고 하며 진동수 비가 1 : 2/3 : 1/2 일 때 가장 잘 어울리는 화음이라고 주장하였다. 지금으로 말하면 으뜸화음이다.
피타고라스 학파에서는 음악에서의 음계가 완전히 수로서 결정된다는 사실을 발견함으로 철학에 끼친 영향은 지대했다. 그들은 음계와 같이 우주도 수로써 결정된다고 믿었다. 즉 수는 우주의 근원이며, 우주는 단지 수와 수의 조화에 의해 결정된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더욱이 그들은 우주의 수적해석을 넘어서서 「만물은 수이다」라는 근본 원리를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을 이해하려면 피타고라스 학파의 수의 정의를 알아야 한다. 그들의 수의 정의는 유일한 것이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수를 공간적으로 생각했다. 그리하여 1은 점, 2는 선, 3은 곡면, 4는 입체라 했고, 이제 만물이 수라는 것은 만물이 1, 2, 3, 4로 구성되어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그들의 경향은 그들의 기하 수(Geometrical Number)에 대한 집념을 보더라도 알 수 있다. 피타고라스 학파의 숫자론에 대한 예를 두 가지 들겠다. 이 경우 그들의 수의 정의는 달라져서 홀수 3, 7···은 남성, 양(陽), 그리고 짝수 2, 4, 6 ···은 여성, 음(陰)의 수로 해석했고, 6(2×3=6)은 사랑, 5(3+2=5)를 또 결혼이라 했다. 또 4는 정의라 했다. 왜냐하면 2와 균등한 2의 곱이기(2×2=4) 때문이라고 했다. 위의 숫자론에 대한 약간 억지 해석을 하면 결혼은 처음 남성과 처음 여성과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고(3+2=5) 정의는 균등한 분배에 기준 된다고 볼 수 있다(2+2=4, 2×2=4). 이러한 사상에 기초하여 통일교에서는 윤세원「하나님의 나라」라는 책 p.62~64에 「四數完成」이라는 이단적인 원리를 전개하고 있다.
3. 성경에 나타난 숫자와 특별수들
(1) 이스라엘(히브리人)에서의 숫자
현재 남아있는 고대 이스라엘의 비문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다른 기록들을 참고해보면 히브리 사람들 사이에도 기수법(記數法: 수의 기록법)이 있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역사의 여명기에 팔레스틴에 큰 감화를 끼친 나라가 바벨론, 앗시리아이기 때문에 그들에게도 앞서 지적한 기수법이 있었음을 알 수 있으며 랍비들 사이에도 기수법을 많이 사용하였고 10진법을 사용하였으며, 연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포로시대 이전 일에 속하는 것은 확실하며 이 방식에서는 히브리인들은 수를 나타내는 독립된 부호를 가지지 않고 문자를 수로 사용하였다. 박윤선 목사님의 주석에도 고대 히브리 풍속과 헬라 풍속에는 그 방언의 문자를 수치로 표현하는 일이 있었다고 하였다. 이것을 종합하여 예를 든다면 (엘리에셀=318, 1+30+10+70+7+200=318) 엘리에셀의 문자 합이 318 이 된다. 또한 다윗은 자음으로만 표기하기 때문에 DWD가 되므로 4+6+4=14가 된다. 그러므로 마태복음 1장의 예수님에 대한 계보에서 예수께서 다윗의 후손임을 증거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기억하여 간직하기 쉽게 하기 위하여 계보를 14대씩 세 단계로 정리한 것이다.
(2) 수의 계산
성경에 나타난 수의 계산은 성경의 성격상 숫적 계산의 간단한 것만 제시되었다. 덧셈(가법)은 민 1:22~46, 3:26~27, 레 27:19을 통하여 볼 때 「이같이 이스라엘 자손의 그 종족을 따라 이십 세 이상으로 싸움에 나갈만한 자가 이스라엘 중에서 다 계수함을 입었으니 계수함을 입은 자의 총계가 육십만 삼천오백오십 명(603,550) 이었더라 (민 1:45~46)」라고 하여 덧셈을 하며, 뺄셈(감법)은 레 27:18에 「그 밭을 희년 후에 구별하여 드렸으면 제사장이 다음 희년까지 남은 년수를 따라 그 값을 계산하고 정가에서 그 값에 상당하게 감할 것이며」라는 사실에서도 찾을 수 있으며, 곱셈(승법)은 레 25:8에 「너는 일곱 안식년을 계수할찌니 이는 칠 년이 일곱 번인즉 안식년 일곱 번 동안 곧 사십 구 년이라 」(7×7=49)라는 것과 민 3:46~50에 레위인의 1개월 이상 된 남자 수가 이스라엘의 장자 수보다 273명이 부족하여, 매 명에 5세겔씩 즉 273×5=1365 세겔을 속전하도록 하였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으며, 나눗셈(승법) 분수는 출 16:36 「오멜은 에바 십분의 일이더라」, 레 27:19 「밭을 구별하여 드린 자가 그것을 무르려면 정가한 돈에 그 오분의 일을 더할지니 그리하면 그것이 자기 소유가 될 것이요」라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결국 수학의 산술성의 기본이 되는 가감승제는 이외에도 많지만 (참고 요 21:25) 성경은 필요한 때만 사용했을 뿐이다. 따라서 성경을 통하여 볼 때 수학이 배제되어 있지 않음을 볼 수 있다.
(3) 성경에 나타난 수의 기록과 수의 정확성
성경에 나타난 수의 개념에서 그것이 수학의 산술적 계산에서는 틀림없이 정확하나 통계학적인 숫자에서는 필자들로부터 기대하기 어려운 점도 있다. 예컨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전쟁에서 적군의 사망자 숫자는 한자리 숫자까지 완전히 정확하지 못하고 대략 수를 사용할 수밖에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유효숫자 자리수가 서로 다른 수를 같이 셈하여 오차를 일으킨 곳도 있다. 예로서 민수기 3장에서 43절에 이스라엘의 장자의 명수의 총계가 22,273 명이라고 한 자리까지 세밀하게 세었으나, 레위족속의 남자의 수를 셀 때는 가족대로 게르손이 7,500 고핫이 8,600 므라리 6,200 계 22,300 명이나 총계에서 천 자리로 짤라 22,000 명이라고 하였다 (39절). 이렇게 해서 얻은 두 수(유효자리수가 서로 다른)를 뺄셈하여 원래 장자의 수가 27 명이 많아야 하는데 273 명이 적은 것으로 되었다. 또 어떤 경우에는 40에 가까운 수를 40이라 해놓고 그것을 정확한 수로 쓴 예도 있다. 삼하 5:4~5에 「다윗이 삼십 세에 위에 나아가서 사십 년을 다스렸으되 헤브론에서 칠 년 육 개월 동안 유다를 다스렸고 예루살렘에서 삼십삼 년 동안 온 이스라엘과 유다를 다스렸더라」
또한 어떤 경우에는 수 천년 지내오며 베끼고 또 베끼는 사본의 사본이 전승되다 보면 사본에서 볼 수 있는 오류도 숫자에서는 생길 수 있다. 예컨대 므두셀라의 나이가 맛소라 사본에는 969 세이고, 사마리아 사본에는 720 세로 되어 있으며, 또 라멕의 나이는 맛소라 사본에는 777 세이고, 사마리아 사본에는 653 세, 70인역에는 753 세로 각각 다르다. 이외에도 사마리아 사본은 맛소라 사본과 너무나 많은 곳이 틀리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사마리아 사본은 의도적으로 수정했다고 보기도 한다.
(4) 성경에 나타난 수와 그 추상성
우리는 우리의 생활에서 숫자와 관련되어 있는 단어를 많이 발견할 수 있다. 1사1,000리(일사천리) 1확1,000금(일확천금), 3강5륜(삼강오륜), 3한4온(삼한사온), 4분5열(사분오열), 4군자(사군자), 4서3경(사서삼경), 5복(오복), 6친(부모, 형제, 자매), 6미(쓰다, 달다, 시다, 맵다, 짜다, 싱겁다), 7전8기(칠전팔기), 7거지악(칠거지악), 100년 해로(백년해로), 100약이 무효(백약이 무효), 100발100중(백발백중), 100문이 불여1견(백문이 불여일견), 장부1언 중1,000금(장부일언 중천금), 1,000추의 한(천추의 한), 1,000리마(천리마), 1,000리안(천리안), 1,000병10,000마(천병만마), 10,000사형통(만사형통), 10,000물(만물), 10,000수무강(만수무강)등에서 알 수 있듯이 어떤 경우는 정확하게 그 의미와 같은 것이 있고 (4군자, 4서3경, 3강5륜, 5복, 6친, 6미, 7거지악....), 또 어쩐 경우는 표현상 과장적인 것(10,000마리, 1,000리안, 1,000추의 한, 1,000병10,000마, 10,000수무강)도 있고 또 어떤 경우는 그 중요성과 뜻의 강조, 확실성을 위한 표현(7전8기, 100년 해로, 100약이 무효, 100발100중, 100문이 불여1견, 장부1언 중1,000금)등이 있는데, 표현상 과장적인 것은 그런대로 매력적인 단어로 받아주면서 해석해야지 틀렸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생활이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요, 표현상 그 중요성과 뜻의 강조와 확실성을 위하여 이루어진 단어를 (100년 해로 100발 100중) 꼭 그대로 해석한다면, 그 사람에게 99발 99중과 101중은 어떻게 해석해야 되는지 묻고 싶다. 이처럼 수학에 있어서 숫자들은 추상성의 의미 속에서 우리들에게 가장 의미 있게 전달시킬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성경 속에서도 위에 지적한 것들을 찾아 볼 수 있는데,
① 왕상 17:12에 엘리야에게 대답하는 사르밧 과부의 대화「저가 가로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 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두엇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에서 우리의 일상적인 개념으로 생각한다면 나뭇가지가 얼마나 큰지 작은지는 모르겠으나 나뭇가지 두엇으로 음식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것을 앞에서 지적한대로 해석할 수 있다면 훌륭한 표현이다.
② 레 26:8에 「너희 다섯이 백을 �고 너희 백이 만을 �으리니.....」에서도 5명이 100명을 �는다면 100명은 5의 20배이며 100×20=2,000 명을 �아야 하는데 100이 10,000을 �는다고 했으니 의아해 할 수밖에 없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1,000병 10,000마라고 했을 때 1,000명의 병사와 1,000마리의 말이 있으면 관계없지만 만마라고 했으니 9,000마리의 말은 어쩌란 말인가? 이처럼 우리 생활 속에서 나오는 능력의 표현법을 이해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대단한 능력이 있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③ 창 31:7「그대들의 아버지가 나를 속여 품삯을 열 번이나 변역하였느니라」창 31:41에 「내가... 외삼촌의 두 딸을 위하여 십사 년(14년), 외삼촌의 양 떼를 위하여 육 년(6년)을 외삼촌을 봉사하였거니와 외삼촌께서 내 품값을 열 번이나 변역하셨으니」, 또 이스라엘 사람들이 정탐꾼의 보고를 듣고 낙담하여 가나안에 들어가기를 꺼려할 때 여호와께서는 민 14:22「나의 영광과 애굽과 광야에서 행한 나의 이적을 보고도 이같이 열 번(10번)이나 나를 시험하고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한 그 사람들은」에서 10은 상당히 많은 뜻과 실제로 열 번의 수로 표시되었다.
④ 전도서 6:3에「사람이 비록 일백 자녀를 낳고 또 장수하여 사는 날이 많을찌라도 그 심령에 낙이 족하지 못하고...」에서 한 사람이 100 자녀와, 또 신 32:30에 「그들의 반석이 그들을 팔지 아니하였고 여호와께서 그들을 내어 주지 아니하셨더면 어찌 한 사람이 천(1,000)을 쫓으며 두 사람이 만(10,000)을 도망케 하였을까」에서 1당 1,000, 2당 10,000과 같은 것은 대단히 큰 수로 나타낸 능력의 표시법이다
⑤ 40년의 긴 세월을 삿 5:31 下에「그 땅이 사십 년 동안 태평하였더라」(40년). 삿 8:28에 「기드온의 사는 날 동안 사십 년에 그 땅이 태평하였더라」(40년). 행 13:21下「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 년간 주셨다가」. 삼하 5:4에 「다윗이 삼십 세에 위에 나아가서 사십 년을 다스렸으되」. 왕상 11:42에「솔로몬이 예루살렘에서 온 이스라엘을 다스린 날수가 사십 년이라」에서 나타난 공통적인 40년. 또 왕하 8:9에 「하사엘이 드디어 맞으러 갈쌔 다메섹 모든 아름다운 물품으로 예물을 삼아 가지고 약대 사십에 싣고 …」에서 40의 의미는 긴 세월의 긴 의미와 실제로 40이었고,
⑥ 창 24:60에 「리브가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우리 누이여 너는 천만인의 어미가 될찌어다」에서 1,000만인의 어미라는 의미와, 또 단 7:10에「불이 강처럼 흘러 그 앞에서 나오며 그에게 수종하는 자는 천천이요 그 앞에 시위한 자는 만만이며…」에서 수종하는 자 1000, 1000과 또 그 앞에 시위한 자 10,000, 10,000은 울창한 숲의 울울창창한 숲의 의미와, 또 계 5:11下에「…장로들을 둘러선 많은 천사의 음성이 있으니 그 수가 만만이요 천천이라」에서 만만 천천은 무한히 많은 수라는 의미이다. 실제 고대 이집트에서는 1천을 나타내는 숫자는 나일강의 연꽃모양을 본떠서 사용했고, 1만을 나타내는 숫자는 나일강의 언덕에서 자라는 파피루스라는 풀의 모양에서 그 싹을 본떠서 나타내었고, 10만을 나타내는 숫자는 나일강의 작은 물고기의 모양을 그려서 나타내었다. 1백만을 나타내는 숫자는 사람이 놀라고 있는 모양을 본떠서 나타내었고, 1천만을 나타내는 숫자는 神을 나타내는 표시로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섰다는 뜻이요, 1 천만 이상의 숫자를 이집트인들은 만들어내지 못하고 모두 ℓ로 표시하면 그만이었다. 즉 神만이 아는 數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5) 성경에 나타난 수의 상징
시간은 하나님의 최초의 창조물로서 모든 존재의 핵심이다. 그리고 그 시간의 연장이 연대를 이루며, 따라서 연대기는 역사의 척추가 된다. 시간이 일정한 시각으로 나누어지듯이 구약의 연대기도 일정한 댓 수와 기간으로 나누어진다. 그리하여 구약성서는 일정한 계수와 질서정연한 기계적인 체계를 갖춘 길고 짧은 각종 연대기들과 크고 작은 상징을 품고 있는 숫자로 조화된 사건들과 사물들로 가득 차 있다.
일정한 숫자가 독특한 개념을 갖고 있다는 수론(數論)의 원리는 고대의 히브리인들뿐만 아니라 고대 근동 국가들에서 그들의 수많은 연대기들에 사용되었다. 구약성서의 연대기에 나오는 숫자들은 구약성서의 기자들이 ‘무엇이 언제? 일어났느냐?‘ 하는 역사의 년도와 일자보다는 ’그것이 몇 대만에 일어났으며, 그 결과가 얼마동안 미쳤느냐?‘ 하는 역사의 기간과 댓수에 중요성과 의미를 부여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구약성서의 수신학, 엄원식 저, p.65)
그러므로 족보를 작성한 기자들은 족보에 들어갈 사람들을 수집하기 전에 먼저 족보의 범위와 세대 사이의 간격을 고려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렇듯 성경에 나오는 숫자들이 우연의 일치로 반복적으로 사용되었는지, 아니면 기자들이 신학적인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사용했는지는 분명치는 않지만, 상당부분 의도되었다는 것은 분명하다. 또한 히브리인들은 숫자를 문자와 병행했기 때문에 의미를 부여 할 수 있었으며, 성경 숫자에 대해 연구하는 학자들은 ‘성경에 나타난 일련의 체계적인 숫자들은 하나님의 정확한 계시의 기술이며, 하나님의 계획적인 디자인을 보여 주려는 성경 기자들의 의도가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오랜 역사를 두고 수신학자(數神學者)와 수비학자(數秘學者)들에 의해 체계화된 성경 수에 대한 상징들을 소개만 하고자 한다.
◎ 1 수론(數論)
1을 나타내는 말에는 하나, 한번이라는 뜻을 가진 기수 ‘에하드’(unity)와 첫째, 장자라는 뜻을 가진 서수 ‘리숀(primacy)이 사용되고 있다. 특히 리숀은 우두머리 정상, 가장 좋은 것, 앞 시작, 총수, 처음 등의 의미를 가진 명사로 ’쉬‘에서 파생한 단어로, 이전의, 첫째의, 최고의, 정월, 처음, 첫날, 먼저 등의 뜻을 포함하고 있다.
성경에서 1이라는 숫자는 1 없이는 아무 수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기본 수이며, 모든 수는 1(하나)에 의존한다. 그래서 1은 시작을 뜻하며 그것 자체로서 완전해서 그 어떤 다른 수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고 독립하기 때문에 홀로 서있으며 독특하며 불가분을 표시한다. 1에 해당하는 히브리어의 첫 번째 알파벳인 ‘알�’은 시작과 우두머리를 상징한다. ‘황소’(ox, bull)를 의미하는 알�은 원래 ‘소머리’를 본뜬 모양이다. 소를 의미하는 알�의 복수형은 ‘알핀’으로 ‘일천’(one thousand)을 뜻하기도 한다.
특히 하나님과 연관하여 사용될 때는 ‘무한한’(infinite), ‘셀 수 없는’(innumerable)의 의미가 더해진다 (출20:6, 34:7, 신5:10, 렘32:18, 벧후3:8-10, 시90:4, 계20:2,5). 또한 알�은 헬라어로 알파에 해당하는 알파벳이다. 이 알�과 알파는 수(數)로는 1000뿐만 아니라, 1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더불어 1이라는 값을 가진 알�과 알파는 ‘처음(first) 또는 ’시작‘(beginning), '근본’(origin, source), 기력의 시작이라 여겨지는 ‘장자’(firstborn) 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1수는 유일하신 한 분 하나님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모든 것 가운데 첫째이며, 먼저이고, 모든 것을 산출했으며, 모든 것이 그에게 의존하기 때문이다. 하나님 없이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홀로 서고 모든 것에 독립하여 계신다. 그는 스스로 만족하시며 부족이나 둘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구약성서에 나타나는 양상은 다음과 같다.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며 〈한〉 분이시니” (신 6:4)
“남자와 여자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루며” (창 2:24)
“온 땅의 구음이 〈하나〉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창 11:1)“
“놋 갈고리 오십을 만들고 그 갈고리로 꾀어 연합하여 〈한〉 막이 되게 하고” (출 26:11)
“이 중에 〈하나〉에 허물이 있을 때에는” (레 5:5)
“열 여인이 〈한〉 화덕에서 너희 떡을 구어서” (레 26:26)
“너희중 너희와 우거하는 타국인이나 〈한〉율례니” (민 15:15)
“그 막대기들로 서로 연합하여 〈하나〉가 되게하여” (겔 37:17)
“모든 산에서 그들로 〈한〉나라를 이루어서 〈한〉 임금이 모두 다스리게 하리니” (겔 37:22)
“그들에게 다 〈한〉 목자가 있을 것이라” (겔 37:24)
◎ 2 수론(數論)
2를 나타내는 말에는 두 번째를 의미하는 서수 ‘쉐니’와 둘을 의미하는 기수 ‘쉐나임’이 있다. 쉐니는 이튿날, 차자, 우편의 뜻을 포함하고 있으며, 쉐나임은 반복하다, 다시 행하다, 가르치다, 입으로 전하다 등을 뜻하는 ‘샤나’에서 유래된 단어로 쌍, 갑절, 양편 등의 뜻을 가진다.
그래서 히브리적 표현에서 2는 곱하다, 반복하다, 두 번째 행하다 등을 의미한다. 종교적 전통에서 2는 절대적인 신성이 분리되고 분열되는 것을 의미한다.
구약성서에 〈2〉혹은 〈둘〉이라는 수사가 나타나는 경우는 아래와 같다.
“하나님이 〈두〉큰 광명을 만드시고 큰 광명으로 낮을, 작은 광명으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창 1:16)
“한 남자가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되고” (창 2:24)
“각기 ‘암수 한 쌍씩’ 새와 육축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이 그 종류대로 각기 〈둘〉씩 노아에게로 나아왔고” (창 6:19-20)
“이스라엘 백성이 〈두〉마음을 품어서 죄를 범했으며” (호 10:2)
“여호와의 사자가 〈두〉번째 아브라함을 불렀으며” (창 22:15)
“야곱의 양들이 〈두〉떼나 이루었으며” (창 32:10)
“한 땅에 〈두〉종자를 섞어서 뿌리지 말도록 하였고” (레 19:19)
“죄를 정죄할 때 한 증인으로만 하지 않고 〈두〉증인을 세웠으며” (신 19:15)
“다윗이 모압을 쳐서 〈두〉줄 길이의 사람을 죽이고 한 줄 길이의 사람은 살렸으며” (삼하 8:2)
“모세가 하나님께 받은 증거판은 〈둘〉이고” (출 31:18)
“속죄물은 산비둘기 〈둘〉이나 집비둘기 새끼 〈둘〉이며” (레 5:7)
이상과 같은 〈둘〉이라는 수사는 없으나 의미상 〈둘〉을 지시하는 내용은 허다하니, 출애굽기 8장 32절에는 “내 백성과 네 백성 사이에 구별을 둔다”고 했고, 창세기 첫 장에는 “궁창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나누었으며,” 하와는 창조의 둘째 인간이며 구약성서에는 옛 계약과 새 계약이 있고, 제사 시에는 두 마리의 새가 있어 한 마리는 살해되고 한 마리는 방면되었으며, 두 마리의 염소가 있어 한 마리는 살해되고 한 마리는 방면된다. (레 14:5-8, 16:8)
그리고 구별되는 이름은
가인과 아벨이 있으며 (창 4:1-2), 이스마엘과 이삭이 있고 (창 16:11, 17:19)
야곱과 에서가 있으며 (창 25:25-26), 와스디와 에스더가 있으며 (에 1:9, 2:7)
여인의 후손과 사탄의 후손이 있고 (창 3:15), 정과 부정이 있다 (레 10:10).
그 리고 창세기 19장에는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상이 있는데, 그 기사는 두 가지 모습으로 가득 차있다. 즉〈두〉천사 (19:1), 늙은이와 젊은이의〈두〉연령층 (19:4), 〈두〉딸 (19:8), 크고 작은〈두〉무리들 (19:11), 들과 산의〈두〉장소 (19:17), 유황과 불로 파괴하는〈두〉행위(19:24), 집과 동굴의〈두〉거주지 (19:3,30), 모압과 벤암미의〈두〉자녀 (19:37,38), 이 밖에도 모세와 아론, 갈렙과 여호수아, 엘리야와 엘리사 등〈두〉수를 내용으로 하는 것은 허다하다.
이상과 같이 〈두〉수는 ‘구분(division)과 분리(seperation)’와 ‘차이(difference)와 보완(replacement)'을 그 공통근의(共通根意)로 갖는다.
2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알파벳 ‘베트’는 집 모양을 나타낸 것에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히브리어 베트는 헬라어로 ‘베타’에, 영어로는 알파벳 ‘B, b' 에 해당한다. 숫자의 의미로는 베트와 베타 모두 2 또는 2000에 해당하는 알파벳이다.
성경에서 2라는 수는 증거의 수로, 두 사람의 증인이 있을 때 참으로 진정된다 (민 35:30, 신 17:6, 요 8:17, 계 11:1-4), 빛으로 오신 예수님도 자신에 대한 증인으로 보내신 자 하나님과 예수 자신이 두 증인이라는 것을 강조하셨다 (요 8:18). 둘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듀테로스’로 둘째, 두 번, 다시, 두 번째의 사람 또는 물건 등을 의미한다 (마 22:26,29, 고후 3:12, 히 8:7, 계 2:11). 단순히 둘, 이틀을 의미하는 ‘뒤오’라는 말도 있다.
한편 둘이라는 수는 주님의 초림과 재림과 관련해서도 사용된다. 초림에 대하여서는 고전 15;47에 ‘하늘에서 오신 둘째 사람’으로 표현하고 있다. 재림과 관련해서는 완전한 구원을 위해 다시 오시는 주님이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고 기록돼 있다 (히 9;28).
참고로 열한 번째 히브리어 알파벳인 ‘카프’와 열 번째 헬라어 알파벳인 카파는 20이라는 수의 값을 가지며, 스무 번째 히브리어 알파벳인 ‘레쉬’와 헬라어 알파벳 ‘로’는 200이라는 수의 값을 가진다.
◎ 3 수론(數論)
3을 나타내는 말에는 셋이라는 뜻의 기수 ‘솰로쉬’와 셋째라는 수 ‘쉘리쉬’가 있다. 헬라어로는 ’트레이스‘가 있다. 이 3수는 포괄적으로 완성과 완결의 수로 이해된다. 구약성경에서 3은 거룩한 완전수이며 완성수로, 처음과 중간과 끝, 연합 및 협력, 승인 및 허가의 뜻이 있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제례의식에서 완전무결함을 의미하는 수이다. 고대인들은 우주와 하늘과 땅(지상), 지하의 세계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성경속의 수의 신비, 연합공보 출판부, p.57).
숫자 3에 해당하는 세 번째 히브리어 알파벳인 Gimel은 헬라어로는 ‘감마’에 해당하며, 3 또는 3,000이란 수의 값을 가진다. 특히 성경에서 3이라는 수는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되신 하나님을 가리킨다. 곧 하늘의 수로 하나님의 완전성을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구약 성경에서 〈3〉혹은 〈3〉이란 숫자가 나타나는 경우는 아래와 같으나 곧,
“하나님께 제사드릴 때는 〈3〉년된 암소와 〈3〉년된 암염소와 〈3〉년된 수양을 잡아라” (창 15:9)
“이스라엘 백성이 매년 〈3〉차례 절기를 지키며” (출 23:14)
“각종 나무를 심거든 〈3〉년 동안은 그 열매를 따지 말라” 고 했고, (레 19:23)
“살인자나 죽임을 당한 시체를 만진 자는 제〈3〉일과 제 7일에 몸을 깨끗이 하라 (민 31:19)
“다니엘은 하루 〈3〉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했으며” (단 6:10)
“엘리야는 죽은 시신 위에 몸을 〈3〉번 펴서 엎드리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으며” (왕상 17:21)
“아브라함에게 나타난 천사는〈셋〉이었으며” (창 18:2)
“애굽의 술 관원이 꿈에 본 포도나무는 가지가 〈셋〉이며” (창 40:10)
“솔로몬의 궁전은 창들이 〈3〉줄로 있는데 창과 창이 〈3〉층으로 서로 대하였고” (왕상 7:4)
“다니엘은 〈3〉이레가 차기까지 좋은 떡을 먹지 아니하였으며“ (단 10:”3)
“다윗에게...혹 〈3〉년 기근일지, 혹 네가 〈3〉달을 대적에게 패하여 대적의 칼에 �길 일일지, 혹 여호와의 칼 곧 온역이 〈3〉일 동안 이 땅에 유행하며” (대상 21:12)고 했고
〈3〉성읍에 〈3〉을 더해서 늘리기로 되어 있는 도피성 (신 19:7,9)과
성막은 뜰 성소 지성소의 〈3〉구분으로 되어 있고 (출 26:33, 27:9)
아론의 축복에서 여호와의 이름이 〈3〉번 나오고 하나님의 축복행위가 〈3〉번 이루어 질 것” (민 6:24~26)을 단언했고
출애굽기 3:14절의 “나는 ........이다”는 확대하여 과거, 현재, 미래에 미치게 된다. (계 1:4, 4:8)
또한 구약성서에는 수많은 삼총사가 있으니 셈과 함과 야벳(창 5:32), 게르손과 고핫과 므라리(출 6:16), 사울과 다윗과 솔로몬 등등이 있다. 약속의 땅(가나안)이 완전한 자연임을 증거 하는 귀국한 정탐꾼의 보고에 의하면 〈3〉가지 였으니, 포도, 석류, 무화과였다 (민 13:23).
그리고 〈3〉수로 완성된 신성화의 아름다운 모습은 문둥병의 완치나 제사장의 성결 의식에서 볼 수 있다. 그때에는 피와 기름을 붓는데 피를 오른쪽 귓밥에, 오른손 엄지에, 그리고 오른발 발가락에다가 발랐다 (레 14:14). 이와 같은〈3〉중(重) 성결화는 하나님께 듣고, 하나님께 봉사하고,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기 위함이었다.
이상의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3〉수는 질적으로 본 거룩한 완전수(完全數: perfect)이며, 완성수(完成數: completeness)로서, “동위(同位: co-ordination, 처음과 중간과 끝)”의 개념을 가졌으며, ‘연합(聯合) 및 협력(協力: union)', 승인(承認) 및 허가(許可: approbation)'의 뜻을 지닌다. (엄원식 교수의 구약성서의 수신학, p.53)
그리고 기독교에서 3위1체의 교리가 확립된 후 “〈3〉란 숫자는 하늘의 수로 하나님의 완전성을 나타낸다.” 라고 할 수 있다.
◎ 4 수론(數論)
4를 나타내는 말에는 넷이라는 서수 ‘레비이‘와 넷, 네 배, 나흘, 넉 달, 사방이라는 뜻의 기수 ’아르바‘가 있다. 복수 형태인 ’아르바임‘은 사십, 마흔 등을 의미한다. 헬라어로는 4, 넷을 의미하는 ’텟사렛트‘가 있으며, 넷째, 마흔 등을 의미하는 ’데타르토스’가 있다.
4라는 수 값을 가지는 네 번째 히브리어 알파벳은 Daleth으로 문(door)을 상징한다. Daleth에 해당하는 알파벳은 델타로, 4 뿐만 아니라 4,000이란 수 값을 가지기도 한다. ‘델타’는 영어로 4를 의미하는 ‘테트라’(tetra)에 해당한다.
4수는 성경에서 땅의 네 귀퉁이인 동서남북을 가리킨다.(욥 3:11-12, 암 3:11, 계 7:1, 민 1:50, 53). 구약성서에서 〈4〉혹은 〈넷〉이란 수사가 나타나는 경우는 아래와 같다.
“〈넷〉째 날에 물질 창조가 끝났으며” (창 1:19)
“에덴동산에 흐르는 강은 〈넷〉이며” (창 2:10)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흩어진 자들을 땅 〈4〉방에서 모으며“ (사 11:12)
“하나님께서 하늘의 〈4〉방에서부터 〈4〉방의 바람을 엘람에 이르게 하여 그들을 〈4〉방으로 흩으신다.” (렘 49:36, 단 7:2, 슥 2:6)
“스가라에게 나타난 병거(兵車)는 〈넷〉이며” (슥 6:1-8)
“에스겔이 본 하나님의 벌은 〈네〉가지(칼, 기근, 사나운 짐승, 온역)이며” (겔 14:21)
“예레미야가 본 하나님의 벌은 〈네〉가지 (칼, 찢는 개, 공중의 새, 땅의 짐승)이며” (렘 15:3)
“스가랴가 본 유다와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을 해치는 뿔은 〈네〉가지이며” (슥 1:18-19)
구 약성서에 지구는 〈네〉귀퉁이와 〈4〉방이 있다 (삼하 7:1). 방위는 동서남북 〈4〉방이 있고 (대상 2:24), 하루는 아침, 점심, 저녁, 밤 〈4〉구분이 있으며, 1년은 봄, 여름, 가을, 겨울 〈4〉계절이 있고, 음력은 초승, 반달, 보름, 그믐의 〈4〉구분이 있다. 그리고 〈넷〉째 계명은 ‘땅’에 관련된 것이었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4〉수는 특별히 땅, 즉 지상 세계와 관련을 갖고 있다 (Gordon Lindsay, op cit, p. 49).
그러므로 〈4〉수는 '세상 수(世上 數 : world number)'이며 창조 수(創造 數 : creation number)'이다. (Edwin Hartill, op, cit, p.112)
◎ 5 수론(數論)
5를 나타내는 말에는 다섯의 의미인 기수 ‘하메쉬’와 다섯째를 의미하는 서수 ‘하미쉬’가 있다. 복수 형태인 ‘하밋쉼’은 50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서 5수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구원을 상징한다. 더불어 5의 배수인 50은 50년마다 돌아오는 유대교의 절기인 희년과 죄의 참회와 용서에 대한 표현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 숫자 5는 다섯 개의 손가락, 구약성경의 모세 오경, 상업적인 성공을 거둔 ‘샤넬 넘버 5’ 등처럼 대부분의 문화권에서 중심적인 수로 등장한다.
특히 동양에서 숫자 5는 모든 것이 이치에 맞게 갖추어진 완전함을 뜻하는 수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의 다섯 가지 감각(五覺, 五感)이나, 간장, 심장, 비장, 폐장, 신장의 5장(五臟), 눈, 혀, 몸, 코, 귀의 오관 (五官) 등은 대표적인 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5를 3+2, 즉 삼위일체에 대한 믿음과 신에 대한 경배,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이해했다.
5라는 수의 값을 가지는 히브리어는 창문, 바람, 기도 등의 의미를 가진 알파벳인 ‘헤’와 헬라어 알파벳인 ‘엡실론’이 있다. 엡실론은 5뿐만 아니라 5,000을 의미하기도 한다.
다섯을 의미하는 헬라어로는 '펜테'가 있다. 5를 의미하는 영어의 펜타(penta)가 이 헬라어에서 파생된 말이다. 특히 이 단어에서 파생한 ‘펜테콘타’는 ‘50’을 의미한다. 이 단어에서 파생된 ‘50번째‘ 라는 의미를 가진 ’펜테코스토스‘의 여성형인 ’펜테코스테‘는 오순절이라는 뜻이다 (행2:1-4, 20:16, 고전 16:8). 성령강림절을 뜻하는 영어 'Pentecost' 가 바로 여기에서 나온 말이다.
참고로 히브리어의 열네번째 알파벳인 눈은 ‘물고기’(fish) 라는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 숫자로는 ‘50’을 나타낸다. 또 50이라는 수는 유월절이후 50일째 되는 절기인 오순절(五旬節)을 가리킨다 (행 2:1).
구약 성경에서 보면 <5> 혹은 <다섯>이란 숫자가 나타나는 경우는 다음과 같으니,
곧 “하나님께서 명하시기를 너희는 성막(聖幕)을 만들 때
그 앙장(仰帳) <5섯>폭을 서로 연하며 (출 26:1-3)
조각목으로 띠를 만들며.........<다섯>으로 하고 (출 26;26-29)
기둥 <다섯>을 조각목으로 만들고 (출 26;37)
조각목의 장이 <5>규빗, 광이 <5>규빗이며 (출 27:1)
세마포의 고가 <5>규빗이며 (출 27:18)
번제단의 장이 <5>규빗, 광이 <5>규빗이 되게 하라”(출 38:1)고 하였다.
그리고 “처음 남자를 속하기 위하여 매 명에 <5>세겔씩 취하고” (민 3:46-47)
화목제물(和睦祭物)로 수양 <다섯>과 일년 된 수양 <다섯>이며 (민 7:17)
“소나 양을 도적질했으면 <5>배로 갚고” (출 22:1)
“하나님 자녀 <다섯>이 이방 원수 백을 쫓고” (레 26:8)
'오순절과 희년(禧年)은 <50>일과 <50>년이다“ (레 23:16, 25:10-11)
이상에서 본바와 같이 <5>수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恩惠: wonderful grace)를 상징한다. 광야에서의 성막은 <5>수로 표시되어 도움 받을 길 없는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를 부여하는 기구로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이 <5>수의 공통 의미는 ‘은총(恩寵)’이며 ‘구속(救贖 : Redemption)’이다.
◎ 6 수론(數論)
6을 나타내는 말에는 히브리어로 여섯을 의미하는 기수 ‘쉐쉬’와 여섯째를 의미하는 서수 ‘쉬쉬’가 있다. 6이라는 수의 값을 가지는 히브리어의 여섯 번째 알파벳은 ‘와우’다. 하지만 6이라는 수의 값을 가지는 헬라어 알파벳은 없다. 사람이 제 6일에 창조되었기에 6은 인간을 상징하는 수가 됐다. 이 6수는 완성을 의미하는 7수를 지향하고 있지만 하나가 부족한 수다. 그래서 6수는 인간의 불완전성을 의미하고, 인간의 미완성의 슬픈 상태를 반영한다.
또한 일각에서는 6이라는 수가 인간에 대한 사단의 영향력과 관계있다고 보기도 한다. 느브갓네살 왕이 사람들에게 경배하게 하기 위해 세운 금신상의 크기가 높이 60규빗, 너비 6규빗이라는 점에서 ‘짐승의 형상’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성경의 6은 여섯째 날 지음 받은 인간의 영·혼·육이 완전히 타락한 것을 나타내기도 한다. 요한계시록 13장 17절에 하나님의 일을 훼방하는 짐승의 이름 또는 짐승의 수를 ‘사람의 수’ 라고 하면서 666이라고 기록 한데서도 이를 엿볼 수 있다 (계 13;18). 곧 666은 여섯째 날 지어진 사람의 가장 큰 반역과 가장 큰 심판을 받아야 할 타락한 인류 역사를 표현한 것이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타락한 인간은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는 결과를 가져왔다.
참고로 60이라는 수의 값을 가지는 히브리어 알파벳은 버팀목 또는 받침대 (support. prop)등을 나타내는 ‘싸메'이며, 헬라어 알파벳은 ’크시‘다
구약성경에서 <6> 곧 <여섯>이란 숫자가 나타나는 경우는 아래와 같다.
“너희는 <6>년을 섬겼거든 제 7년에는 자유케 하라” (신 15:12)
“땅은 <6>년 동안 계속 파종하여 그 소산을 거두라” (출 23:10)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을 그들의 <여섯>가지 환난에서 구원하신다” (욥 5:19)
“법궤(法櫃)를 멘 사람들이 <여섯>걸음을 행하며 다윗이 제사를 드렸다”(삼하 6:13)
그 리고 골리앗은 <6>척 장신이며 (삼상 17:4), 느브갓네살이 세운 동상은 고가 <60> 규빗이고 (단 3:1), 어떤 거인은 <6>손가락에 <6>발가락이 있었다 (삼하 21:20).
이와 같이 <6>은 <7> 즉 완성을 목적하고 있으나 부족하다. 인간 창조가 제 <6>일에 지어졌고 그래서 <6>은 인간의 표시 숫자가 되었다. 그러므로 6의 어떤 배수는 더욱 중요한 의미가 있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6>수의 공통의미는 ‘인간의 불완전성(不完全性)의 슬픈 상태를 반영하는 ’인간 수(人間 數)이다.
◎ 7 수론(數論)
7을 나타내는 말에는 일곱을 의미하는 기수 ‘쉐바’와 일곱째를 의미하는 서수 ‘쉐비이’가 있다. 더불어 이것을 어근(語根)으로 하는 단어로는 충만하다는 뜻의 ‘사바’ 맹세하다는 뜻의 ‘샤바’를 들 수 있다. 7에 해당하는 헬라어 알파벳은 ‘헵타’다. 고대 헬라어 문헌에서 일곱은 성취된 기간 또는 완전히 완성된 기간의 상징이다. 바벨론인에게 있어 7은 충만과 전체의 뜻이다
7이라는 값을 가지는 일곱 번째 히브리어 알파벳은 ‘무기’(weapon, Arms)를 상징하는 ‘자인’이며, 헬라어 알파벳은 ‘제타’이다. 7은 하늘의 상징수인 성부, 성자, 성령을 의미하는 3과 땅의 상징수인 동서남북을 의미하는 4를 합한 수로,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완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킨다 (창 2:2-3, 8:6, 15:1)
구약시대의 7은 매우 신성한 의미로 사용됐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구속사역의 완성을 인하여 우주창조 후 7일째 안식하였으며 (창 2:1-2), 이를 기념하여 일곱째 날을 안식일로 특별하게 성별했다 (출 20:10, 신 5:14). 또한 성별된 기간으로 무교절은 칠일동안 지키도록 되어 있다 (레 23:6-8). 완전한 속죄의 상징으로 제물의 피를 속죄소 앞에 일곱 번 뿌리기도 했다 (레 16:14, 19). 온 세상을 두루 감찰하시는 여호와의 눈도 일곱이라고 되어 있다 (슥 4:10).
신약 성경에서 7은 우상숭배를 하지 않는 순결한 신앙(롬 11:14), 완전한 안식(히 4:4), 온전한 믿음(히 11:30) 등을 의미한다. 또한 완전하신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을 나타내기도 한다(계 1:4, 1:16, 2:1, 5:1, 6, 6:8-11장, 15:1).
참고로 70이란 수의 값을 가지는 열여섯 번째 히브리어 알파벳은 ‘눈’(eye)을 상징하는 ‘아인’이며, 헬라어 알파벳은 ‘오미크론’이다. 성경에서 70은 죄로부터의 완전한 회복과 구원을 상징하는 숫자 70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엘림에 있는 물샘 열둘과 종려 70주는 이스라엘 백성을 죄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 예수께서 세우신 열두 제자들과 칠십 문도와 상징적인 관련을 갖는다 (출 15:27, 마 10:1-2, 눅 10:1).
이와 함께 이스라엘 백성은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70년 만에 회복되었다 (대하 36:21, 렘 25:11-12, 렘 29:10, 단 9:2). 또 하나님은 다니엘 선지자를 통해서 ‘칠십 이레의 기한 동안에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원히 속하여진다’ 고 예언하시기도 했다 (단 9:24).
성경에 <7> 또는 <일곱>이란 숫자가 나타나는 경우는 아래와 같다.
“하나님의 세상 창조 작업이 <일곱>째 날이 이를 때에 마쳤다.” (창 2:2)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7> 배나 받는다” (창 4:15)
“노아의 방주(方舟)에 나오는 모든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이었다” (창 7:2)
“야곱이 라헬을 위하여 <7>년 동안 라반에게 봉사하였고” (창 29:20)
“바로가 본 하수에서 올라온 살찐 암소가 <7>마리였고” (창 41:2)
“야곱이 형 에서를 만날 때 절을 <7>번 하였으며” (창 33:3)
“애굽의 흉, 풍년이 각각 <7>년씩이고” (창 41:47-54)
“무교절과 장막절은 각각 <7>일간씩 지키고” (출 12:16-18)
“병가(病家)에서 새 두 마리의 피를 <7>번씩 뿌려 정결케 했고” (레 14:48-51)
“여리고 성이 제<7>일에 <일곱>번 도니 무너졌고” (수 6:12-16)
“삼손의 머리털 <7> 가닥을 깎으니 힘이 없어지고” (삿 16:13-19)
“엘리야의 하인이 <7>번 기상을 예보했으며” (왕상 18:43-44)
“땅에 <7>년 기근이 오고” (왕하 8:1-3)
“나아만이 요단강 가에서 <7>번 목욕하니 병이 나았으며” (왕하 1:10-14)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곧 싫어하시는 것이 육 <7>가지니 곧” (잠 6:16)
“앗수르 사람이 우리 궁전을 밟으면 <7> 목자(牧者)로 치겠다 하고” (미 5:5)
“그 날에 <일곱> 여인이 한 남자를 붙들고 당신 이름으로 수치를 면하고자 하고” (사 4:1)있다.
스가랴서와 다니엘서는 <7>이라는 숫자가 강조되어 있으며, 창세기 12장 2-3절에는 계약(契約)의 <7> 부분이, 그리고 출애굽기 6장 6-8절에는 이스라엘의 <7>중(重) 약속이 나타나있다.
그러므로 구약성경의 <7>수의 공통의는 ‘신적충만(神的充滿 : divine fullness)'과 ’만족(滿足 : satisfaction)' 그리고 ‘완성(完成 : perfection)'과 ’완전(完全 : completion)'이다.
◎ 8 수론(數論)
8을 나타내는 말에는 여덟을 뜻하는 기수 ‘쉐모네’와 여덟째를 뜻하는 서수 ‘쉐미니’가 있다. 숫자 8에 해당하는 헬라어 알파벳은 ‘옥토’다. 여기서 파생된 영어식 표기가 ‘octa’이다. 참고로 8각형은 ‘octagon’이며, 피아노의 5도 음정을 ‘octave’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 4의 배수인 8은 중복과 강조의 효과를 나타내는 경우가 있다. 사방팔방(四方八方), 사고팔고((四苦八苦), 사통팔달(四通八達)등이 그 예다. 바벨론에서 8은 천국의 수로 인식돼 있다. 왜냐하면 바벨론 신은 탑 모양으로 세워진 신전의 8층에 기거했다고 알려졌기 때문이다.
고대인들은 8을 행운을 불러오는 특별한 수라고 여겼다. 8은 근원으로 회귀하는 의미와 7이 준비하고 성취한 것을 완성하는 의미를 갖는다. 8은 신적인 완전수 3과 은혜의 수 5의 합으로 부활을 상징한다. 뿐만 아니라 중세 신학자들은 예수의 헬라식 표기인 ‘예수스’( 10+8+200+70+400+200)가 888이라는 값을 가지기 때문에 성스러운 수로 인식하기도 했다.
8이라는 수의 값을 가진 히브리어의 여덟 번째 알파벳은 ‘담’(wall, partition}, ‘울타리’(fence)라는 의미를 가진 ‘헤트’이며, 헬라어 알파벳은 ‘에타’다. 또 ‘헤트’는 ‘죄에서 다시 깨끗하게 한다’는 구원과 재창조를 의미하는 8이란 숫자를 의미하는 것으로, 죄로 인해 막힌 담을 허시고 구원의 길을 여신 예수와도 그 뜻이 일맥상통한다. 성경에서 8은 구세주를 통한 구원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노아의 가족 8명이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홍수 심판에서 방주를 통해 구원받았다 (창 6:1-7:8, 벧전 3:20). 태어난 지 8일 만에 행하는 할례는 범죄 함으로 더러워진 피를 뽑아내어 깨끗하게 한다는 구원을 상징한다 (창 17:10-14, 23-27, 레 12:3, 눅 2:21).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주님은 7일째 안식일이 지난 첫날 부활하셨다 (마 28:1-6, 막 16:1-6, 눅 24:1-8). 때문에 숫자 8은 안식 후 첫날인 새 안식일, 곧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는 날인 주일이 됐다 (요 20:1-10).
참고로 80이라는 수의 값을 가지는 히브리어의 열일곱 번째 알파벳은 ‘입’(mouth)을 상징하는 ‘페’이며, 헬라어 알파벳은 ‘피’다.
성경에서 <8> 또는 <여덟>이란 숫자가 나타나는 경우는 아래와 같다.
“노아의 방주에서 구원을 얻은 자가 <여덟> 명이었다” (벧전 3:20)
“남자는 난지 <8>일 만에 할례(割禮)를 받았다” (창 17:12)
“제 <8>년에 다시 파종(播種)할 수 있었다” (레 25:22)
“압돈이 이스라엘의 사자가 된지 <8>년에” (삿 12:14)
“이스라엘 자손이 구산 리사다임을 <8>년 동안 섬겼다” (삿 3:8)
“여호람이 예루살렘에서 <8>년 동안 통치했다” (대하 21:20)
“유다 왕 여호야긴이 잡혀 갈 때는 바벨론왕 <8>년이었다” (왕하 24:12)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8>수는 ‘부활’과 ‘새 시작’ 즉 ‘새로운 질서(秩序)’를 뜻한다.
◎ 9 수론(數論)
9를 나타내는 말에는 아홉을 뜻하는 기수 ‘테샤’ 또는 ‘티쉬아’와 아홉 번째를 뜻하는 서수 ‘테쉬이’ 가 있다. 헬라어로는 ‘엔네아’와 아홉 번째를 의미하는 ‘엔나토스’를 들 수 있다.
9는 8에 1을 더한 수로, 천상의 완전함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고통과 수난을 상징하기도 한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9라는 수가 완전한 수로 여겨지는 10에서 1이 모자라기 때문에 불길한 수라고 여기기도 했다. 또한 성스러운 수인 3이 강화된 의미를 갖기 때문에 완성의 수로 받아들여진다.
우리 민족에 있어서 숫자 9는 조화와 완벽의 상징으로 여기는 3을 3배한 수로, 어떤 한정된 범위 내에서는 가장 완전한 수이며, 가장 큰 수로 여겨진다. 완벽한 수는 아니지만 아직도 채워야할 것이 있다는 여유와 기대감을 갖게 하는 숫자다. 예를 들어 9는 더없이 높은 지고의 수이다. 아주 큰 키를 구척장신(九尺長身)이라 하고, 매우 먼 하늘을 ‘하늘 구만리’ 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여기에 해당한다. 많음을 뜻하는 구사일생(九死一生)과 깊음을 뜻하는 구중궁궐(九重宮闕 : 깊은 궁궐)등도 9의 의미를 잘 표현해주고 있다. 9는 3의 3곱으로 구약성경에서 일곱 번 나오며, 심판과 종국, 완성을 의미한다.
9라는 수의 값을 가지는 히브리어의 아홉 번째 알파벳은 뱀을 상징하는 ‘테트’이며, 헬라어 알파벳은 ‘데타’에 해당한다. 예수님은 아홉 또는 아홉과 관련된 개념을 죄인 하나의 회개와 연관시켜 설명한다. 곧 아홉이라는 개념은 잃어버린 하나가 돌아 올 때까지는 완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마 18:12-13, 눅 15:4, 7). 잃어버린 자, 곧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시간도 이스라엘 시간으로는 제 구 시다 (막 15:34, 마 27:45-46).
또한 숫자 구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는 성령, 곧 하나님의 영으로 말미암은 아홉 가지 열매를 나타내기도 한다 (갈 5:22). 참고로 90이라는 수의 값을 가지는 열여덟 번째 히브리어 알파벳은 낚시바늘(fish-hook) 또는 물고기를 낚는 갈고리(fishing hook)를 상징하는 ‘차데’다.
성경에서 <9> 또는 <아홉>이란 수사(修士)가 나타나는 경우는 아래와 같다.
“호세아 제<9>년에 앗수르 왕이 사마리아를 취하고 이스라엘을 사로 잡아갔고” (왕하 17:6)
“히스기야 제<9>년에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이 예루살렘을 포위하였고” (왕하 25:1)
“시드기야 제<9>년에 바벨론 왕 느브갓네살이 예루살렘을 포위하였고” (렘 39:1)
“에스겔은 제<9>년에 여호와의 말씀을 받았다.” (겔 24:1)
이 러한 <9>는 <3>의 3곱이며, 그리고 구약성서에 단 <7>번만 나오고 있다. 구약성서의 <9>수는 ‘심판(審判:judgment)’ '종국(終局:finality)‘ 완성(完成:completion)을 의미한다.
◎ 10 수론(數論)
10을 나타내는 말에는 열을 뜻하는 기수 ‘에세르’ 또는 ‘아사르’와 열 번째를 의미하는 서수 ‘아시리’가 있다. 10을 의미하는 헬라어는 ‘데카’다. 일반적으로 열은 1과 짝을 이루어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에서 하나는 작거나 부분적이고 미약한 것을 가리키지만, 열은 많거나 완벽하거나 전체를 가리킨다.
10에 해당되는 로마 숫자 X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십계명을 연상케 한다. 메시아 곧 그리스도의 헬라어 ‘크리스토스’의 첫 문자 역시 Χ다. 또한 예수의 헬라어 ‘예수스’ 역시 그 첫 문자가 10이라는 수의 값을 가지는 ‘이오타’다. 10이라는 수의 값을 가지는 열 번째 히브리어 알파벳은 ‘손’(hand)또는 손을 포함한 ‘팔뚝’(forearm)등을 상징하는 ‘요드’이며, 헬라어 알파벳은 ‘이오타’다.
구약성경에서 10수는 전체, 완전한 우주성, 완벽한 하나님의 질서, 인간의 책임을 나타낸다. 이 10수가 신성수(神聖數)로서 특별히 중요시 되는 이유는 신적 완전수인 3과 영적 완전수인 7의 합으로 질서적 완전을 성립하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10은 완전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창세기 1장의 천지창조에 관한 기사에서 ‘하나님이 가라사대’라는 말씀이 10회 나온다(창 1:3, 6, 11, 14, 20, 22, 24, 26, 29). 출애굽기에서는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일어나게 하신 열 가지 재앙이 나오기도 한다 (출 7:20-12:36). 하나님께서 직접 두 돌판에 기록하여 주신 계명 또한 열 가지로 나타난다 (출 20:1-17, 신 5:7-22).
더불어 10은 성도들이 견디고 이겨 내야할 시험과 환난의 기간을 뜻하기도 한다 (단 1:12-16, 계 2:10). 또 예언서에서 10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짐승과 같은 존재에 대한 실체를 설명하는 것과 연결돼 있다 (단 7:20,24 계 12:3, 13:1, 17:3, 7, 12, 16).
참고로 100을 의미하는 히브리어의 열아홉 번째 알파벳은 바늘 귀(Eye of needle), 뒷머리(back of head)등을 상징하는 ‘코프’다.
<10> 또는 <열>이라는 수사(數詞)가 성경에 나타나는 경우는 아래와 같다.
“성막을 만들 때 각 판의 장은 <10> 규빗이다.” (출 26:16)
“이스라엘 백성이 모은 메추라기는 <10> 세겔 이었다” (민 11:32)
“솔로몬이 만든 성소(聖所)의 한 그릅의 두 날개의 길이가 <10> 규빗이다.” (왕상 6:24)
“모세가 받은 계명은 <10> 계명이다” (출 34:41)
“소돔을 위한 아브라함의 도고는 의인 <10> 인에 와서 중지되었다” (창 18:32)
“아브라함이 하갈을 첩(妾)으로 받은 때가 가나안에 거한지 <10> 년이었다” (창 16:3)
“아하스의 일영표(日影表)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는 <10>도를 물러가게 하였다” (왕하 20:11)
“여로보암이 예언자에게서 이스라엘 부족들의 상징으로 받은 옷 조각이 <10>이었다” (왕상 11:31)
“다니엘이 본 짐승의 머리에는 <열> 뿔이 있었다” (단 3:20)
“애굽에 내린 재앙은 <열> 가지이다”
“모세가 드린 생명의 속전은 <10> 게라(gerahs)였다” (출 30:13)
“소득의 1/10은 하나님께 드려야 할 사람의 책임이다” (말 3:10)
“광야에서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열>번이나 시험을 하였다” (민 14:22)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10> 수는 그 공동의가 ‘전체(全體:totality)', '완전한 우주성(宇宙性: a perfect universality)', 완벽(完璧)한 하나님의 질서(a completeness of divine order)' 및 ‘인간(人間)의 책임(責任: responsibility)'을 나타낸다.
이 <10> 수가 신성수(神聖數)로서 특별히 중요시되는 이유는 역시 다른 신성수 곧 <3>과 <7>의 합계이기 때문이다.
◎ 기타 수론(數論)
<11> 혹은 <열 하나>라는 수가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경우는 아래와 같다.
“야곱이 밤에 일어나서 <열 한> 아들을 데리고 얍복 나루터를 건넜다”(창 32:22)
“호렙산에서 가렙산 바네아까지 <열 하루> 길이었다” (신 1:2)
“성막을 덮은 둘째 휘장은 <열 한>폭이었다” (출 26:7)
“시드기야는 <십 일>년을 통치하며 악을 행하였다” (대하 36:5)
<10> 수는 하나님의 완전한 질서를 상징하는데, <11>은 거기에 무엇을 더하는 것이니 결국 그 질서의 파괴 훼손을 의미한다. <11>은 하나님의 완전한 통치를 상징하는 <12>에서 하나가 모자라는 숫자이다. 그래서 결국 <11>은 10+1이거나 혹은 12-1로서 '무질서(無秩序: disorder)'와 ‘불완전(不完全: imperfection)', '부족(不足: insufficiency)', 미완성(未完成: in completion)'을 뜻한다.
<12> 혹은 <열 둘>이란 숫자가 구약성경에 나타난 것은 아래와 같다.
“이스라엘은 <열 두> 지파이다.” (창 49:28)
“엘림에는 샘물이 <열 두>개가 있었다” (출 15:27)
“모세가 시내산 아래 쌓은 제단의 기둥은 <열 둘>이다” (출 24:4)
“솔로몬이 온 이스라엘을 위하여 세운 관장(官長)이 <열 둘>이다” (왕상 4:7)
“엘리야가 여호와의 단을 쌓은 돌은 <열 둘>이다” (왕상 18:31)
“엘리사가 밭을 가는 소는 <열 두>겨리였다” (왕상 19:19)
“대제사장의 흉패(胸牌)에 붙인 보석은 <열 둘>이다” (출 28:21)
“<열 두>개의 떡덩이” (레 24:5)
“<열 두> 지팡이 (민 17:2,6),
“<열 두> 정탐꾼” (수 3:12, 4:2)
“요단강 가운데 세운 <열 두>돌” (수 4:9)
“예수님의 <열 두> 명의 제자” (마 10:2)
“오병이어의 기적 후에 남은 빵조각과 물고기가 <열 두> 광주리에 가득 참” (막 6:43, 눅9:17, 마 14:20)
“예수님이 <열 두>살 되던 해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심” (눅 2:42)
“예수님이 베드로를 책망하시며, <열 두> 영도 넘는 천사를 보낼 수 있다하심” (마 26:53)
“해를 입은 한 여자는 머리에 <열 두>면류관을 씀” (계 12:1)
“새 예루살렘 성에 <열 두>대문, <열 두>기초석, <열 두>문” (계 21:12,14,21)
등 허다하다.
그리고 12수는 신성하고 완전한 하늘의 수 3과, 물질적이고 유기체적인 것을 상징하는 4의 곱(3×4)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은혜의 수 5와 영적 완전수인 7의 합으로 통치적 완전을 의미한다.
해 와 달은 낮과 밤을 다스리고 지배(支配)하도록 만들어졌다. 그들은 황도대(黃道帶: zodiac)의 12 표시를 따라 통과하여 12개월 동안 다스려 1년을 완성한다. 따라서 <12>의 공통 뜻은 “완전한 통치(統治: perfection of government or governmental perfection)”, 혹은 “지배(支配: rule)'를 상징한다. 더불어 12지파, 12명의 아들이라는 표현이 보여주듯이, 12라는 수가 종족이라는 낱말과 함께 나타날 때는 ‘굳게 결속된’ 이란 뜻을 상징한다.
<13> 곧 <열 셋>이란 수사가 나타나는 곳은 아래와 같다.
“7왕들이 12년 동안 그돌라오멜(chedorlaomer)을 섬기다가 제<13>년에 배반했다. (창 14:4)
“이스마엘이 <13>세에 할례를 받았다.” (창 17:25)
“솔로몬이 자기 궁궐을 <13>년 동안 건축했다. (왕상 7:1)
이 상과 같이 <13> 혹은 <13>의 배수는 배반(背反), 반란(反亂), 모반(謀反), ‘반역(反逆: rebellion), 배교(背敎: apostasy), 분열(分裂), '나쁜 전조(前兆: ill omen)'등의 개념과 연관이 있다.
<14> 수는 7의 2배수(7×2=14) 이다
“거룩한 완전(完全) 양적(量的)인 것”이 강조된다. (창 31:41, 46:22, 민 29:13, 왕상 8:65, 마 1:17)
<15>수는 3의 5배수 (3×5=15) 이다.
“거룩한 완전(完全), 질적(質的)인 것”이 강조되어 있다. 즉 질적인 완성에 은총을 곱한 것으로 3의 5배이다. (레 23:34, 왕하 20:6. 사 38:5)
<17> 수는 두 완전 수(7+10=17)의 합이다. 이 숫자는 “영적인 완전(spiritual perfection)' 혹은 ”영적 질서의 완전(perfection of spiritual order)을 뜻한다. “에라토스테네스의 체”의 소수(素數)와 같이 성경의 숫자<17>은 어떤 수의 합이 아니고 나눌 수 없는 불가분의 수(數) 즉 기본 소수(素數)이다. 7개의 기본수는 1, 3, 5, 7. 11. 13, 17이다.
<40>수는 4의 10배수(4×10=40) 이다.
“노아 홍수 때 비가 <40>일간 내렸다” (창 7:4,17)
“노아 홍수 시 산들의 봉우리가 보이고 <40>일이 지나 까마귀를 내보냄” (창 8:6)
“모 세는 왕궁에서 <40>년간 애굽의 학술을 배우고 (행 7:23), 미디안 땅에서 <40>년을 나그네로 보낸 후 (행 7:30), 이스라엘 민족을 <40>년간 이끌다가 120세에 죽음 (신 34:7)”
“갈렙이 정탐꾼으로 보내어졌을 때 나이 <40>세 였음” (수 14:7)
“12명의 정탐꾼이 <40>일간 가나안 땅을 정탐함.” (민 13:25)
“이스라엘 백성은 <40>년간 광야에서 방황함” (출 16:35, 민 14:33-34, 수 5:6, 행 7:36,42)
“모세가 시내산에서 <40>일을 지낸 후 십계명을 받음 (출 34:28, 신 9:9,11)
“태형도 <40>을 넘기지 못하게 하심” (신 25:3)
“제사장 엘리가 목이 부러져 죽을 때 사사된지 <40> 년이었음” (삼상 4:18)
“골리앗이 <40>일을 조석으로 나와 조롱함” (삼상 17:16)
“다윗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기간이 <40>년” (대상 29:27)
“솔로몬이 이스라엘을 다스린 기간이 <40>년” (열상 11:42)
“엘리야가 이세벨을 피해 <40>일간 여행함” (왕상 19:8)
“요나가 니느웨를 향하여 <40>일이 지나면 성이 무너질 것을 예언하였다.” (욘 3:4)
“에스겔이 우편으로 <40>일간 누워서 유다 족속들의 죄를 담당했다” (겔 4:4-6)
“예수님의 <40>일간 금식” (마 4:2)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40>일간 하나님 나라의 일들을 말씀하셨다.” (행 1:3)
이상과 같이 <40> 수는 ‘시련(試鍊 : trial and testing)' ’견습(見習 : apprenticeship)' 준비(準備 : preparation)의 뜻이 있다.
그리고 <40>의 배수(倍數)로는
<400>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400>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라”(창 15:13)
<4,000> “이스라엘이 블레셋 사람 앞에서 패하여 죽임을 당한 자가 <4,000>명 가량이라” (삼상 4:2)
<40,000> “(수 4:13, 삿 5:8, 삼하 10:18, 왕상 4:26, 대상 12:26) 등이 있다.”
<42>는 영원한 평화에 대한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이 세상의 교회에 대한 암시라고 본다. 중세의 성경주석 학자들은 42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을 떠나 시나이로 가면서 머물렀던 마흔 두 처소를 연결시킨다.
또 한 42는 부정적으로 심판의 수라고도 본다. 이 세상의 심판자 그리스도가 아브라함으로부터 42대째 태어났고, 선지자 엘리사는 자신을 놀리던 아이들 중 42명을 암곰에 의해 죽게 만들었다 (왕하 2:24). 고대 이집트의 ‘사자(死者)의 서’에는 망자들을 처리하는 심판관 42명이 나온다.
<49>는 성스러운 수 7의 제곱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이후 제자들에게 성령이 강림하기까지의 기간과 관련이 있다.
<50>수는 5의 10 배수(5×10)이다. 50은 구원 수이며 성경에는 거의 300회가 나온다.
“아브라함이 여호와께 소돔 성에 의인 <50>인이 있다면 멸하시겠냐고 간청함” (창 19:24)
<70>수는 7의 10 배수(7×10=70) 이다. 70의 공통 뜻은 보편성을 상징한다.
“대홍수 후 셈과 함과 야벳의 자손들이 <70>인이었다.” (창 10장)
“야곱이 그 후손 <70>인을 데리고 애굽으로 내려갔다.” (창 46:27, 출 15:27)
“유대인이 <70>년 간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하였다.” (렘 25:11, 29:10)
“모세는 무리들을 인도하기 위해서 <70>인의 장로들을 택하였다.”(민 11:16)
“<70>인이 기뻐 돌아와 예수님께 귀신도 항복함을 보고함” (눅 10:17)
따라서 <70>수는 ‘보편(普遍)’ 수이며 ‘구원(救援)’의 수이다.
신앙의 수학자들
역사적으로 볼 때 유명한 과학자들과 수학자들 중에는 기독교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수학이나 과학에서 기독교에로 직접 나아갈 수 있는 길은 없다. 그러나 수학자, 과학자의 인격 속에서는 기독교 신앙과 수학적 진리가 모순 없이 공존한다. 따라서 본인은 그 공존 속에서 살아간 신앙의 수학자들을 간략하게 소개함으로서 기독교와 수학에 한 걸음 더 접근 시키고자 한다. (신앙인의 측면에서 신부도 포함되어 있다.)
● 로저 베이콘 (Roger Bacon, 1214~1292 AD)
프란시스코파의 신부이며, 옥스퍼드 대학의 교수, 물리학과 화학을 연구, 자연 철학서 저술, “자연과학은 주의 깊은 관찰과 실험적 기초가 필요하며 천문학과 물리학은 수학 위에 세워져야 한다”고 하였다.
● 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 (Nicolaes Copernicus, 1473~1543 AD)
폴 란드의 천문학자→신학자→철학자→수학자→의사, 후에 태양계의 변화에 대한 연구에 전생을 바쳤다. 마침내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라는 저서를 통해 지구가 태양의 둘레를 돌고 있다는 ‘지동설’을 발표했다. 그러나 ‘천동설’을 믿고 있던 당시의 종교계와 과학계에 큰 충격을 주었고 그로 말미암아 박해를 받았다. 그 후에 갈릴레이와 케플러에 의해 빛을 보게 되었다.
● 레오나르도 다빈치 (Leonardo Davinci, 1452~1519 AD)
이 탈리아 플로렌스와 피사라는 도시의 중간쯤 되는 곳에서 태어났으며, 어린 시절 집안사정으로 부모님과 떨어져 조부모 손에서 자랐으며, 7세 때에 교회학교에 입학하여 경건한 신앙의 소유자가 되었다. 천재적 물리학자→해부학자→미술가→건축가→수학자로 역학연구에 전념하였으며 ‘모나리자’ ‘최후의 만찬’등 수많은 걸작을 남김으로 르네상스 문화를 이룩하기 위하여 하늘이 내린 사람이라고 하였으며, “오오 학자들이여 수학을 배워라, 그리고 기초 없이 건설하지 말라” “수학자가 아닌 자는 나의 원리를 읽을 수 없다” 등의 명언을 남겼다.
● 요하네스 케플러 (Johannes Kepler, 1571~1630 AD)
뛰어난 수학자요 천문학자였고 현대 천문학의 기초를 닦은 요한네스 케플러는 독일 베일 지방의 아주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경건한 신앙생활을 하며 한 때 개신교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을 공부하면서 천체와 별들의 운행에 관한 공부에도 몰두한 특별한 사람이었다.
1600년 케플러는 덴마크의 유명한 크리스천 천문학자였던 티코 브라헤(1546~1601)와 만나면서 본격적인 천문학자가 되었다. 브라헤가 임종하면서 30세 된 청년 과학자에게 자신의 천문학적 자료를 모두 인계하고 자신이 연구해 온 일들을 완성해 줄 것을 부탁하고 임종했으며, 그리고 그가 맡았던 국왕 루돌프 황제의 수학담당관으로 임명되어 연구에 결정적인 도움이 되었다.
드디어 케플러는 유명한 “케플러의 법칙”을 발견하여, 최초로 코페르니쿠스의 가설을 수학적으로 밝혔으며, 아이작 뉴턴은 그의 유명한 만유인력의 법칙을 케플러의 제3법칙으로부터 이끌어 낸 것이다.
케 플러는 그의 저서 “우주의 신비”에서 “하나님의 섭리가 나와 함께 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결코 발견할 수 없었던 것을 우연히 내가 발견하게 되었다고 믿습니다. 그 이유는 만일 코페르니쿠스가 말한 것이 참이라면 내가 그것을 입증할 수 있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끊임없이 기도했기 때문이다” 라고 고백했다. 그는 또 은사인 마에스트린 교수에게 위대한 발견을 한 후 이렇게 편지를 쓰기도 하였다. “자연이라는 책 속에서 인정받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위해 저는 제가 발견한 이 사실을 발표하고자 합니다. 저는 한때 신학자가 되려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천문학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합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 도다(시 19:1)” 이 말씀은 케플러의 천문학연구에 있어 일생의 중심 사상이었다.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연대상의 문제에도 노력을 기울여 라틴 달력에 오류가 있음을 밝혀내고 예수님께서 실제로 기원전 4년에 탄생하였음을 주장하여 누가복음의 기록이 정확함을 변호하였다.
1618년 “우주의 조화”라는 논문을 완성하였을 때 이것을 그는 “신성한 설교요 창조주 하나님께서 받으실만한 찬송”이라고 고백했다.
케플러는 참으로 위대한 과학자였을 뿐 아니라, 누구보다도 신실하게 하나님을 섬겼던 사람이다.
● 파스칼 (Blaise Pascal, 1623~1662 AD)
프랑스 남부 오베르뷰의 클레몽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유명한 수학자이며, 과학의 천재였으며, 뛰어난 문학적 조예를 겸비한 문학가이기도 하였다.
12세 때 기하학에 관심을 갖고 독자적으로 공부하여 「유클리드의 제1권 제32명제」를 증명하였고 16세 때 평면기하학의 “파스칼의 정리”를 발표하였으며, 30세에 “유체역학에서 파스칼의 원리”등 그 외 많은 발명품도 내 놓았다.
“인간은 자연 속에서도 가장 가냘픈 한 줄기의 갈대와도 같다. 그러나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 “클레오파트라의 코가 조금만 낮았더라도 세계의 역사는 달라졌을 것이다”라고 한 유명한 명구(名句)를 담은 ‘팡세’의 저자라는 것은 잘 알면서, 과학사에서 누구보다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 파스칼과 동일인이라는 것은 너무도 쉽게 관과해 버린다.
10대의 어린 나이에 촉망받는 수학자로 주목받기 시작한 파스칼은 이미 어린 시절부터 하나님에 관한 믿음도 함께 자라고 있었다. “내가 연구하는 일들이 가치가 있는 일이라면 하나님께서는 이 일들을 계속 할 수 있는 힘을 주실 것이다. 그분이 주시는 능력만큼만 밀고 나가면 된다.” 이 얼마나 놀라운 신앙 고백인가!
파스칼은 “자연은 창조주 하나님의 뛰어난 솜씨”라고 믿었으며 그는 양피에 자기 신앙체험서를 써서 외투 안쪽에 꿰매어 늘 입고 다녔다 그가 죽은 다음에야 발견된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불!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의 하나님이 아닌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확신, 감격, 기쁨, 평안함.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곧 당신의 하나님. -중략-
의로우신 하나님 아버지,
세상은 당신을 알지 못하였어도 나는 당신을 알았네 -중략-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나는 떠나 있었네.
나는 그분을 떠나 있었고, 부인하였네.
그리고는 십자가에 그를 못 박았네, 이제는 결코 떠나지 않으리라.
나는 당신을 잊지 아니 하리이다.
아멘.
“인간에게는 두 부류만이 존재한다. 하나는 자기를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의로운 사람이며, 다른 하나는 자기를 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죄인이다.
(파스칼의 「팡세」중에서)
● 뉴턴 (Issac Newton, 1642~1724 AD)
1642년 유럽에서는 위대한 과학자 한 분이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그로부터 10개월이 지난 같은 해 성탄절에 다른 과학자 하나가 태어났다. 세상을 떠난 과학자는 망원경을 발명한 갈릴레이였으며, 태어난 과학자는 아이작 뉴턴이었다.
경건한 청교도이며 칼빈주의자로 하나님의 주권을 확신한 신학자, 물리학자, 천문학자요, 미분 적분학의 창시자인 수학자이면서, 그는 생전에 과학보다도 신학에 더 많은 시간을 쏟았다고 한다.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에서 우주의 경이를 수학적으로 표현했으며, 「만류인력의 법칙」「빛의 스펙트럼 발견」「다니엘서」「요한계시록 주해」를 남겼으며, 당시에 영국 천문학자인 할레이가 기독교를 비난한다는 소식을 듣고 뉴턴은 그에게 “할레이, 자네가 천문학과 수학을 말할 때는 내가 들어 주지. 그러나 자네가 기독교를 말할 때는 안 듣겠네. 자네는 그것을 시험도 안 해보고 그러지만 나는 시험을 해 본 결과 참인 것을 알고 있네 (그의 깊은 신앙 체험이기도 하다).”
● 코시 (Cauchy, 1789~1857 AD)
신자로서 프랑스의 대수학자이며 극한 개념에 도전하여 성공하였다.
※ 그 외에 현대 수학의 개척자 오일러(1707~1783, 스위스)와 독일 수학자인 바일(Hermann Weyl, 1885~1955), 수학자이며 천문학자인 바로우(Issac Barrow), 수학자이며 근대 화학의 아버지 로버트 보일러(1627~1691), 미적분을 발견한 라이프니치(1646~1716), 등등 수없이 많이 있으며, 수학자 이외에 물리 화학 생물학자 중에도 신앙의 인물이 많이 있으나 여기서는 수학자만 소개하고 그 외에는 생략하고자 한다.
7. 결 론
지금까지 우리는 「성경과 수와 수학」을 연구함에 있어 성경말씀을 찾아보고 수학의 속성인 산술성, 논리성, 추상성과 그 외에 고대인들의 수에 대한 신비적인 개념과 상징성을 들추어 내 보았다. 우리는 보통 「A와 B」라는 논제가 주어지면 「A와 B는」 부분 집합 관계가 아니면 사돈 관계인가? 아니면 형제간인가? 하고 추측을 하면서 도식적인 관계를 찾다보니 오류를 범할 때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성경과 그리고 창조와 수학」이란 논제는 필자가 기독교 신자이기 때문에 기독교적 측면에서 수학을 논한다거나 수학의 측면에서 기독교를 논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기독교의 모든 것이 있는 성경말씀 그 자체가 논리의 바탕 위에 있고 정확무오 하기 때문에 수(數)와 수학(數學)이란 학문을 통하여 위대한 성경 말씀에 접근화 시키고 설명하기 위한 것이며, 그리고 성경의 수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도와 그냥 무심코 지나쳤던 진리를 찾아내는데 도움이 되기를 원한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 만물을 지으심은 우리는 성경을 통해 알 수 있으며, 그 지으신 만물의 조화와 질서에서는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실 때 수학적인 언어를 사용하셨다는 흔적을 남겨 두셨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본 글의 제목을 「성경과 그리고 창조와 수학」이라 했다. 이러한 강의를 통하여 지금까지 여러분이 한쪽 면인 「수학의 산술성」이 수학의 전부인양 생각해온 오류를 버리고, 논리성 추상성 신비적 상징성 등 모든 면을 보는 참된 수(數)와 수학의 모습을 보면서, 성경에 나타난 숫(數)자를 볼 때 그 숫자를 기록한 기자의 신학적 의도, 문장의 문맥 전후 관계 및 성서 해석의 일반적 유추법(類推法), 그리고 수학적인 사색을 통하여 전체적으로 조명해 봄으로서, 특히 구약 성경의 수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갖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앞에서도 이야기했듯이
「수(數)는 만물의 근원이며, 자연 법칙이 수(數)의 질서이고 조화」라는 것을 알았던 피타고라스나, 「기하학을 모르는 자는 이 문 안에 들어오지 말아라」했던 플라톤이나, 「나의 자식들이 역사를 읽고 수학과 우주론을 공부해 주었으면 한다. 그것은 신에 따르는 일이며 인간의 사명이기도 하다」고 했던 크롬웰이나, 「수학의 수준은 그 나라의 국력에 비례한다」라고 했던 나폴레옹, 이 외에도 「약간이라도 시인이 아닌 수학자는 완전한 수학자라고 할 수 없다」라고 했던 독일의 스트라스(Strass, 1815~1897),「수학은 과학의 여왕이다」라고 했던 독일의 가우스(Gauss, 1777~1855), 「음악은 감각의 수학이고 수학은 이성의 음악이다」라고 했던 영국의 실베스터(Sylvester, 1814~1897)의 경우에서 알 수 있듯이, 수학은 단순한 계산이 아니라, 수학은 우리의 사고나 생활 교육 등의 모든 영역에서 어떻게 그 바탕이 이루어져 있으며 필요하고 중요한가를 인생을 살고 간 그들이 남긴 말에서 알 수 있다.
본인은 이러한 이들이 남긴 말보다도 창 1:28「땅을 정복하라」, 빌 4:13「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는 믿음 위에 본 글을 다음의 성경 말씀으로 결론지으면서 끝내고자 한다.
○ 사 40:26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각각 그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 (Lift your eyes and look to the heavens: Who created all these? He who brings out the starry host one by one, and calls them each by name. Because of his great power and mighty strength, not one of them is missing.)」
○ 욥 38:4~6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에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 찌니라 누가 그 도량을 정하였었는지 누가 그 준승을 그 위에 띄웠었는지 네가 아느냐? 그 주초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이 돌은 누가 놓았었느냐? (Where were you when I laid the earth's foundation? Tell me, if you understand. Who marked off its dimensions? Surely you know! Who stretched a measuring line across it? on what were its footings set, or who laid its cornerstone)」
○ 롬 11:3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For from him and through him and to him are all things. To him be the glory forever! Amen.)」.
성서(聖書) 속에 등장하는 숫자의 의미
1은 여호와, 유일신, 신성(神性), 지고자를 뜻한다.
2는 예수 그리스도를 뜻한다. 예수가 신성과 인성(人性) 그 두 가지를 겸비했기 때문이다.
3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와 믿음, 소망, 사랑의 3덕(德)이다.
4는 육체인데 3이 영혼이기 때문이며, 에덴동산에 있는 4개의 강, 4복음서(마태, 요한, 누가, 마가), 4천사(미가엘, 가브리엘, 라파엘, 우리엘), 4악마(사탄, 마왕 벨제브브, 벨리아르, 모로크), 4대 교부(성 암브로시우스, 성 히에로니무스, 성 아우구스티누스, 성 그레고리우스), 4대 예언자(이사야, 예레미아, 에스겔, 다니엘), 4덕(신중, 용기, 절제, 정의) 등이 있기 때문이다.
5는 타락 후의 인간의 모습, 5감, 십자가의 다섯 개의 점, 십자가형을 받은 예수의 몸에 난 상처, (산상 수훈에서의 오병이어의 기적에 나타나는)다섯 개의 떡을 의미한다.
6은 완전, 완성, 우주 창조에 필요한 6일간을 의미한다.
7은 천지창조의 7일, 소아시아의 일곱 개의 초대 교회에서 연유를 하며 여러 의미를 가진다. 인 간의 일생도 유아기, 소년기, 청년기, 성인, 성숙기, 초로, 노인의 7단계로 보며, 인간의 아름다운 일곱 가지의 행동 즉 7대 미덕(美德)<기독교의 신앙(信仰), 희망(希望), 자애(慈愛)와 플라톤의 견신(堅信), 절제(節制), 사려(思慮), 정의(正義) - 우리가 흔히 부르는 믿음, 사랑, 소망이 여기서 나옴>과 7대 악덕(惡德)<오만(傲慢), 탐욕(貪慾), 색욕(色慾), 격노(激怒), 대식(大食), 질투(嫉妬), 나태(懶怠)>을 의미한다.
8은 낙원의 회복, 부활의 날, 재생을 의미하며, 세례반(盤), 성수반(盤)은 거듭남의 의미로 8각형이다. 산상수훈의 여덟가지 축복(마태복음 5장 3-10)도 있다.
9는 천사의 9계급을 의미한다.
10은 모세의 십계명과 10일조를 의미한다.
11은 완전인 10을 넘었으므로 죄, 과실을 의미한다.
12는 3×4이므로 완전을 뜻한다. 즉 3은 신이고 4는 인간으로서 성스러운 것과 세속적인 것의 결합인 것이다. 또 성령의 열매(갈라디아서 5장 22-23)인 사랑, 기쁨, 평안, 관용, 친절, 선의, 성실, 온화, 자제, 인내, 겸허, 정결을 뜻한다.
13은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의 사람 수이므로 불길(不吉)함을 뜻한다.
18은 기도이다. 4복음서에는 모두 예수의 기도가 18번 나온다.
40은 예수의 40일간의 광야에서의 고난과 부활절로부터 승천축일까지의 40일, 모세가 시내산에 머문 기간 40일, 요나가 니느웨 주민들에게 준 경고의 기간 40일, 다윗과 솔로몬의 통치기간 40년을 뜻한다.
66은 성서의 수(구약 39권, 신약 27권을 합한 66권)을 뜻한다.
666은 히브리어로 짐승의 수, 좌천사 하가트리엘의 수이다.
888은 예수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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