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나무를 심는 까닭
류창희
사민전률 (使民戰慄)
애공이 재아에게 토지신을 모시는 것에 대하여 묻는데 재아가 대답하기를 하나라의 임금은 사수(社樹)로 소나무를 심었고, 은나라 사람들은 잣나무를 심었고, 주나라 사람들은 밤나무를 심었습니다. 밤나무를 심은 까닭은 백성으로 하여금 두려워하게 함입니다. 공자께서 들으시고, 이루어진 일이라 다시 말하지 아니하며, 끝난 일이라 충고하지 아니하며, 이미 지나간 일이라 허물하지 않겠다.
哀公이 問社於宰我한대 宰我對曰 夏后氏는 以松이오 殷人은 以栢이오 周人은 以栗이니 曰 使民戰慄이니이다. 子聞之하시고 曰 成事라 不說하며 遂事라 不諫하며 旣往이라 不咎로다 –논어 팔일편-
애공은 노나라의 군주이지만 애(哀)라는 시호로 짐작할 수 있듯이 힘이 없는 비극적인 임금이다. 재아는 공자 제자 중에 언어와 웅변에 뛰어난 제자다. 본래 나라에 심는 사수는 각각 그 토질에 적합한 나무를 심는 것이다. 부산은 동백을 심고 서울은 은행나무를 심는 것과 같다. 그런데 근사하게 말을 잘하는 재아가 주나라에서 밤나무를 심은 까닭은 백성들에게 겁주기 위해서라고 함부로 말했다. 공자께서는 ‘이미 지나간 일이니 어쩔 수 없다.’ 고 말씀하시나 사실은 재아를 심하게 꾸짖는 말이다.
그리하여 후세에 밤나무는 공포정치(恐怖政治)의 상징이 되었다. 우리나라도 밤이 많이 나는 마을은 포악한 현령이 다스리던 곳이다. 최명희의 혼불에 나오는 율촌 댁은 어떨까. 법도에 한 치의 어긋남도 없다. 죄지은 것 없이 보기만 해도 서늘하다. 그래서일까. 여자를 생각하게 한다는 시(媤)자가 무섭다. 나는 가훈이 삼강오륜인 집안의 증손녀로 태어났다. 제사 때마다 제상에 올릴 밤을 팔각형으로 치는 양반 타령을 보며 자랐다.
포천의 현감 또한 날씨처럼 혹독했던지 나는 밤 깎는 일에 한해서는 급수가 높다. 어려서부터 밤이 아주 친숙하다. 그중에도 아직 덜 여문 풋밤의 뽀얀 살은 저절로 침이 고인다. 고놈의 속 껍질은 어린 엄지손톱으로 밀어도 곧잘 벗겨진다. 조금 더 여물면 떫은 속 껍질을 “퉤퉤” 벗겨가며 밤 살을 깨물어 먹는다. 그러나 엄마들은 그 모습을 싫어한다. 무명 러닝셔츠나 흰 블라우스에 묻으면 영락없이 갈색의 흔적을 남기기 때문이다. 삶아도 지지 않는다. 상처처럼 가슴 언저리에 남는다.
일본에서 자라신 어머님은 밤으로 요리를 잘하셨다. 밤을 깎아 곤약을 넣고 간장과 청주와 물엿을 넣고 밤 조림을 잘하셨다. 금세 하는 쉬운 조리법이지만 밤을 깎는 시간이 걸린다. 요즘은 밤의 겉껍질을 깎는 기계도 나오고 속 껍질을 깎는 기능성 작은 칼도 나왔지만 내가 새댁시절에는 한 톨 두 톨 …, 겉과 안을 깎아야 한다. 나는 늘 어머님 곁에서 밤을 깎아드렸다. 그런데 밤이란, 모름지기 깎으면서 한두 개 먹어야 제맛이다. 새 며느리가 일부러야 어찌 먹을까. 간혹 벌레 먹은 밤이 나오면 나머지 살을 도려내다 부서지면 먹는다. 더러는 속살이 단단하고 노란색이 도드라지면 멀쩡한 한 톨을 냉큼 집어먹는다. 밤 까는 재미다. 그런데 매사가 정확한 우리 어머님은 밤을 내어주시고 다 깎고 난 다음에는 항상 저울에다 무게를 다시 재신다. 1킬로를 깎으면 어느 정도 속살이 나오나 가늠해보시는 일일 텐데, 나는 늘 조마조마하다. “요만큼밖에 안 되드나?” 물으시면, 벌레 먹은 부위를 보여드리면서도 한두 개 집어먹은 내 꼴이 홀라당 껍질 벗겨 낸 알밤 마냥 부끄럽다.
어느 해, 시어머님이 편찮으셔 친정엄마가 서울에서 부산까지 문병차 오셨다. 친정엄마가 오셔도 감자나 마늘 혹은 고구마 줄거리 등 일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딸이 안되어 보였든지, 놔두고 어서 병원에 다녀오라고 채근하신다. 그날도 밤을 까고 있었다. 나는 보온그릇에 죽을 담아 나서며 “엄마, 밤 깎으면서 먹으면 안 돼요.” 라고 말했다. “얘는, 안 먹는다.”라고 하셨지만, 서운한 기색이 역력하다. 그깟 밤 한 톨이 뭐라고 이토록 단속하나. 하지만 며느리에게 밤은 언제나 무서운 물건이다. 밤 률(栗)자의 음과 두려울 률(慄)자의 음이 같은 연유다.
오죽하면 예로부터 시어머니와 시아버지를 처음 뵙는 현구고례(見舅姑禮)의 현장, 초례청(醮禮廳)에서 밤과 대추를 던져주었겠는가. 흔히 아들딸 잘 낳아 기르라고 주는 뜻으로 알고 있지만, 그 본뜻을 알면 그토록 긴장하여 정성껏 받지 않을 것이다. 대추 조(棗)와 음이 같은 아침 조(朝)자와 밤률(栗)과 음이 같은 두려울 률(慄)자는 며느리에게 아침부터 시부모님을 두려워하며 효(孝)를 다하라는 뜻인데 후에 자녀로 와전되었다.
호랑이 없는 굴에 토끼가 왕 노릇 한다더니, 어머님이 안 계시니 다시 복병이 나타났다. 나는 밤 깎는 일에 대하여는 달인이라고 했다. 그런데 밤 깎는 내게 껍질이 두껍다는 타박이다. “아까워서 그런 게 아니다.” 라고 몇 번을 못 박아 말한다. 차라리 밤 살이 떨어져 나가는 것이 아깝다고 했다면 평정심을 찾았을 것이다. 제사음식 34년 차, 내가 손에 잡는 일마다 나무란다. 아직 불도 켜지 않은 프라이팬 위의 동그랑땡 전은 탄다고 한마디, 부추전은 두텁다고 한마디, 습관적인 구설이 밤송이 가시처럼 콕콕 찌른다. 약이 오르고 화가 나는 것만큼 저급한 감정은 없다. 어언, 나도 며느리를 둘이나 맞이했다. 그런데 그들 앞에서 지적을 받으면, 여태까지 잘 참아왔는데도 온몸이 밤 가시에 찔린 것처럼 전율(戰慄)한다. 이제 부뚜막 앞에서 물러날 때가 다가왔음이다.
제사의 과일 조 률 이 시(棗栗梨柿), 대추 밤 배 감은 씨앗의 숫자를 상징한다. 자손이 잘 성장하여 임금, 영의정 우의정 좌의정, 좌청룡 우백호, 육 판서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 등의 벼슬에 대한 염원이다. 그중 밤을 제사상에 올리는 것은 밤이 다른 종자와 달리 싹을 틔우고서도 아주 오랫동안 껍질을 달고 있기 때문에 근본, 즉 조상을 잊지 말라는 의미이다. 나만 보면 나의 수신을 시험하시는 그분도 내가 모셔야할 조상일까?
나는 지금 시(媤)자 앞에 날 밤을 까며 떨고 있다.
첫댓글 밀양의 밤은 密栗이라고 하여 전국적으로 유명하여 해마다 임금님께 진상했는데...
밀양밤...밀율 ,,,아주 옛부터 밀양에 밤나무가 많았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