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효백 경희대학교 법학과 교수]
▲서울의 28배 면적…수도 베이징
오늘날 베이징(北京)과 난징(南京)은 서울 경(京)자를 쓰는 중국의 유이무삼(有二無三)한 도시다.
중국의 수도 베이징은 서울이나 워싱턴처럼 특별시가 아니다. 상하이·텐진·충칭과 더불어 4개 직할시 중의 하나다. 베이징은 특별하지 않다. 직할시 중의 '원오브뎀'(one of them)에 지나지 않는다.
중국인들은 타 지역에서 베이징으로 갈 때 ‘상경’(上京)한다는 말을 쓰지 않는다. 중국에는 서울과 지방, 즉 ‘경향’(京鄕)이라는 단어 자체가 없다.
베이징은 강이 없어 메마른데다가 봄이면 서북쪽의 사막과 황토고원에서 몰아치는 황사의 습격으로 백주(白晝)대낮이 아니라 ‘황주’(黃晝)대낮이 된다. 또한 북쪽으로 불과 60㎞ 떨어진 만리장성 너머 이민족의 침입 가능성을 자나 깨나 잊으면 안 되었기에 살벌한 느낌마저 든다.
베이징의 면적은 1만6808㎢로 서울 면적의 약 28배, 즉 서울과 경기도, 충청북도를 다 합한 넓이 정도다. BTV (베이징 TV)는 베이징을 여러 개 지역으로 구분해 일기예보를 한다.
중국에서 살면서 한국을 바라볼 때마다 가장 한심하게 느껴졌던 건 다름 아닌 중국의 96분지 1, 중국의 1개 직할시(충칭직할시, 8만2000㎢)와 엇비슷한 좁은 남한 땅(9만9000㎢)에서의 망국적 지역갈등이다.
우리나라에서 행정수도 문제가 핫이슈가 되었을 당시 중국에서도 관심이 많았다. 필자가 베이징에서 여름방학을 보낼 당시 한 중국인 친구가 수도를 어디로 천도하느냐고 물었다. 그래서 지도를 꺼내 공주 부근을 가리키며 여기라고 했더니 중국친구의 했던 대답이 기억에 남는다. “흐응, 거기서 거기네.”
거기서 거기라니 일순, 당황했지만, 금방 수긍이 갔다. 그도 그럴 것이 서울에서 공주로 천도하는 건 베이징으로 치자면 제일 북쪽 구(區)에서 제일 남쪽 구(區)로 가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베이징은 춘추전국시대 연(燕, BC11~BC222세기) 나라부터, 요(遼, 907~1125년), 금(金, 1115~1234년), 원(元, 1260~1368년), 명(明, 1402~1644년), 청(淸, 1644~1911년) 나라의 수도로서 천년의 역사를 이어왔다. 요 나라이후 수도로 베이징에 도읍을 정한 제국은 최소한 100세가 넘는 장수를 누려왔다. 더구나 베이징은 분열기 지방정권의 수도가 아니라 원∙명∙청, 현재 중화인민공화국(1949~)에 이르기까지 합계 약 700년간 통일국가의 명실상부한 수도였다는데 여타 중국의 고도(古都)와는 차원 자체가 다르다.
▲요절하는 도읍지 난징
중국의 또 하나 서울이자, 남쪽 서울이라 할 수 있는 난징으로 가보자.
난징 북쪽으로는 중국 제1의 강인 '어머니강'인 창강(長江, 일명 양쯔강 약 6300㎞)이 동에서 서로 흐른다. 우리나라 김제평야보다 수백 배 넓은 대평원 지대의 중심에 위치한 난징은 물산이 풍부하며 교통이 편리하고 미녀도 많은 도시로 이름이 높다.
난징의 면적은 6597㎢로 서울 면적의 10배 가량이다. 난징의 여름날씨가 충칭, 우한(武漢)과 더불어 중국의 3대 찜통으로 손꼽힐 만큼 무더운 것을 빼놓고는 사계절이 뚜렷하고 기후도 쾌적한 편이다. 특히 난징의 가을은 우리나라 가을 못지않게 아름답고 날씨가 좋다.
하지만 난징에서 주목할 부분은 이런 지리적 개황보다 수도로서의 역사다.
삼국시대 손권의 동오(東吳, 220~280년)부터 시작하여 동진(東晋, 317~420년), 송(宋, 420~479년), 제(齊,479~502뇬), 양(梁, 502~557년), 진(晉,557~589년), 남당(南唐,937~975년), 명(明, 1368~1402년), 홍수전의 태평천국(太平天國,1853~186년), 쑨원과 장제스의 중화민국(中華民國, 1912~1949년)까지, 모두 10개 왕조·정부의 도읍기간을 다 합쳐도 기껏해야 300여년 정도다.
명 나라 초기의 35년간을 제외하면 죄다 분열기 또는 지방정권의 수도에 지나지 않아, 고도(古都)로서의 질적 차원에서 볼 때 난징은 베이징에 비할 바가 아니다.
▲'각성'의 도시 베이징 vs '이완'의 도시 난징
난징에 도읍을 정했다하면 제국이건 공화국이건 간에 평균수명이 30여년이며 3대를 못넘기고 요절하는 등 말로가 비참했다. 한마디로 ‘도읍지로서의 난징’은 승지가 아니라 패지요, 축복이 아니라 저주받은 도시다. 명나라도 3대 황제 영락제가 1402년 수도를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옮겼기 망정이지, 그대로 난징에 주저앉았다면 단명하고 말았을지 모른다고 한다. 쑨원과 장제스의 가장 큰 실책 중 하나가 난징을 수도로 삼은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도읍지로서 '풍요의 난징'이 '결핍의 베이징'에 비해 훨씬 못한 까닭은 무엇일까?
다산 정약용은 “중국이란 만리장성 이남에 있는 나라를 말한다.”라고 '아방강역고'(1811년 저)에 썼다. 그렇다면 만리장성은 휴전선이나 다름없고 베이징은 항상 깨어있어야 하는 최전방 국경도시나 다름없다. 베이징을 사람에 비유하면 엄숙하고 절제된 언행에 근엄한 표정에 칙칙한 색조의 관복을 입은 초로의 남자 같은 분위기다.
반면 난징은 머나먼 남녘 후방 깊숙히 자리한 안락하고 풍요로운 도시다. 게다가 중국 제1의 강 창강이 도시 북쪽을 막아주는 천연의 장벽이 되어주고 있다.
그래서일까. 베이징이 '각성' 상태의 도시라면 난징은 '이완' 상태의 도시라 할 수 있다. 왠지 모르게 난징에서는 낮잠을 즐겨도 되고 시도 때도 없이 게으른 하품이 나올 것 같은 분위기다.
남성적인 베이징과는 대조적으로 난징은 여성적인 도시다. 난징을 사람에 비유하면 단아한 몸매와 기품 있는 용모, 우아한 미소를 담은 표정에 약간 관능적인 전통의상 치파오 차림의 중년 여성이라고나 할까.
포난생음욕(飽暖生淫慾), 편안하게 잘 살면 방탕해진다고 했다. 물 좋고, 땅 좋고, 경개 좋고, 인물 좋고, 어디 하나 빠진 곳 없이 살기 좋은 땅, 난징(南京)은 풍요로움 그 자체다.
하지만 평생을 치열한 혁명의지로 살고 죽기를 각오한 영웅이라면, 난징은 오래 머물 땅이 아니다. 항상 깨어있어야 하는 영웅이 풍만한 난징의 품속에 일단 안기면 오묘한 안온감에 도취되어 정신이 혼미해지는걸까. 청신한 상무기풍(尙武氣風)이 넘치던 영웅이 난징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시나브로 부패한 탐관으로 전락되어져 간다.
난징은 영웅에게 죽기 전에 이미 죽는 곳이며 육체는 살이 찌나 정신은 썩어지는 곳이다. 부패삼매경에 빠져 정신적으로 죽은 지 이미 오랜 영웅이 육신의 생을 마감하면 그 시체의 온기가 식기가 무섭게 무수한, 무고한, 무심한 백성들의 대학살의 혈하가 창강(長江)으로 흘러나왔던 곳 난징이다.
그러한 영웅의 타락으로 인해 난징의 평민 백성은 19세기와 20세기 두 차례의 ‘난징대학살’을 겪어야 했다.
1853년 2월 11일 태평군의 영웅 홍수전(洪秀全, 1814~1864년)은 210만명의 태평군(여군 30만명)을 이끌고 난징을 점령했다. 홍수전은 국호를 태평천국으로, 난징을 ‘하늘의 서울’이라는 뜻으로 '천경'(天京)이라 정했다. 대륙의 남반부를 12년간 점령 통치하며 내걸었던 기치는 원시 기독교적 평등주의였다. “땅이 있으면 모두 똑같이 농사를 짓고, 밥이 있으면 모두 똑같이 먹고, 옷이 있으면 모두 똑같이 입고, 돈이 있으면 모두 똑같이 쓴다”는 사회다. 태평천국에서는 의식주는 물론 관리의 임면, 등용, 파직, 재판에 이르기까지 균등하고 공평하게 행해진다.
그러나 태평천국은 철저히 실패했다. 그 실패의 원인을 요약한다면 혁명정부의 '공약 제1조'라고 할 수 있는 토지의 평균주의적 분배 약속의 불이행에 따른 농민들의 실망 및 혁명 지도세력의 내부분열, 의병의 형태로 무장한 사대부 세력의 반발과 외세의 개입이다.
무엇보다도 난징 정착이 가져다 준 무사안일과 무사태평 속에서 태평천국은 지도층의 내분과 기존 왕조와 다를 바 없는 사치와 방탕, 부패와 타락의 삼매경에 빠졌다. 홍수전은 옥새를 만들고, 백성들에게 만세를 부르게 하고, 천왕으로서 권위를 과시하고자 미녀 18명을 뽑아 후궁으로 삼는 등 중국의 역대 제왕과 같은 형태를 추구하였다. 혁명군 지도층의 부패는 그들에게 타도됐던 구지배층을 훨씬 능가했다.
청 나라의 진압군은 1864년 7월 19일 ‘하늘의 서울’ 난징을 함락한 청나라의 진압군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대학살을 자행하니 이때 죽은 사람이 20여만 명이다. 하늘의 서울이 ‘지옥의 서울’로 변하였다. 이러한 ‘19세기 난징대학살’ 후 몇 십 년이 탄환처럼 흘렀다.
1927년 4월 18일 국민당 혁명군 총사령관 장제스(蔣介石, 1887~1975)는 난징을 중화민국의 수도로 정하였다. 그로부터 10년간 지도층은 부정부패와 흥청망청에, 서민층은 안분지족·안빈낙도·태평세월에 빠져있었다. 하지만 지난 1937년 12월 13일 일본군은 난징을 점령하였다. 일본군은 단 한 달 만에 30여 만명의 무구한 인명을 살해하고 9만여 명의 여성을 강간했다.
중국 장기체류 시절의 어느 여름날, 필자는 ‘태평천국 역사박물관’을 방문한데 이어 관광객들의 대열에 섞여 무심코 또 다른 관광지 ‘난징 대학살 기념관(1)*’을 찾았다. 거기서 필자는 매일 평균 1만명 살육, 3000명 강간이라는 천인공노할 '악마의 굿판'을 벌인 일제 만행의 거증물을 목도했다.
거기서 필자는 지옥을 보았다. 악마를 보았다. 임산부의 배를 도려내면서도, 일본도(刀)로 소년의 목을 잘라내면서도, 그들은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기념관 앞 광장으로 뛰쳐나온 필자는는 명치께 부근 뭔가 심하게 엉키고 뭉친 걸 풀어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한 줄기 눈물로는 쉽게 뽑아낼 수 없었다. 인간에 대한 절망을, 역사에 대한 분노를, 창자까지 쏟아낼 듯한 토악질로 마구 해댔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난징에서였다.
◆주석:
(1)* 중국 정부는 2014년부터 12월 13일을 난징 대학살에 따른 ‘국가 추모일’(國家公祭日)로 지정하고 매년 국가차원의 추모행사를 열고 있다. 2014년에 개최된 첫 번째 추모식에는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이 직접 참석해 “일제 침략의 엄중한 범죄를 잊지 말아야 하고 침략전쟁을 미화하는 어떤 행위도 인류 평화를 해치는 것으로 단호히 반대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유네스코는 2015년 10월 일본 측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난징 대학살 관련 자료들을 중국측의 신청에 따라 세계유산으로 등재했다.
첫댓글 의미있는 분석에 무릅을 칩니다. 적당한 긴장과 부족함이 삶의 원동력이듯이...
아~~ 그렇군요. 각별한 감정이 듭니다. 감사합니다.
또 다른 관점에서 재밋게 읽었습니다.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