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중국사회과학원 중국 변강사지연구 중심주임(中国社科院中国边疆史地研究中心主任)인 려성의 주장을 번역해 보았습니다.
[고구려, 고려 와 조선족을 혼동해서는 안된다]
고구려는 우리나라(중국)동북 역사상의 일개소수민족이다.
고구려족의 기원은 단일하지 않다. 주류와 비주류의 차이가 있다.
고구려족의 주류는 예맥(秽貊)족 해체후에 동쪽으로 이동한 각각지의후예 : 고이(高夷),부여, 옥저, 소수맥(양맥),예등이다. 고구려는 예맥족계열에서 나왔으며, 漢안제 건광원년의 조서(詔書)에 이르기를 고구려를 예맥이라했고, 또한 5세기후기에 남제관원이 칭하기를 "동이소맥(東夷小貊)이라 했다. ”(《册府无龟·外臣部·备御二》、《南齐书·高丽传》)。
이외에, 비예맥족계 성원들이 차례로 고구려족에 융합되었다. 고조선유민, 한족, 선비인, 숙신인, 그리고 행인(荇人), 개마(盖馬), 구다(句茶), 거란(契丹) ,백제인 등이다.
고구려인이 가장 먼저 사용한 명칭 역시 고구려이다. 고구려의 옛날기록에도 고구려로 나온다. 고구려라는 칭호는 기원전 109년 한무제가 고조선을 정벌하기 이전에도 있었다. 최초는 한사군 동북 현도군의 일개 현의 명칭이다. 후한서.고구려전에 이르기를 : 한무제가 고조선을 멸하고, 고구려를 현도군에 속하게 하였다. 현도군 설립시 고구려,서개마,상은태 삼현이 있었다. 고구려현의 명칭은 당연히 고구려인이 모여사는 거주지이다. 그후 현도군은 부단히 고구려현등 지방의 관리에 힘썼다.
또한 고구려인이 이미 한무제시 현도군내에 漢정권 관할하에 편제된 주민으로 생활했다고 말할 수 있다. 한무제 건소이년(기원전37년), 고구려인들은 그들의 거주중심지에 민족정권을 건립하기 시작했다.
비록 고구려국이라 칭했지만, 계속해서 현도군과 요동군의 관할구역을 이탈한 적이 없다.
중원정권의 대북방 관리 정책의 변화에 따라, 고구려정권은 현도,요동지구에서 발전,확장했으나 시종 우리나라(중국) 동북역사상의 소수민족정권이라는 성격을 벗어난 적이 없다.
고구려는 중원의 정치,경제,문화와 연계되어 있으며 부단히 중원, 심지어 강남정권의 책봉을 받았으며, 계속해서 신하의 지위에 있었고, 조공을 바치는 등의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唐 고종원년 (서기668년), 고구려는 당의 뜻을 따르지 않고, 당의 다른 속국인 신라(지금조선반도동남부에 위치)로 세력을 확장하려 하여, 당과 신라연합군의 공격에 패했다. 고구려가 망한후, 고구려민족의 절대다수는 중원한족에 융합되었으며, 나머지는 동북지방민족중에, 소수는 조선반도에 들어가 그곳의 민족에 융합되었다.
고구려정권 존재시, 사가(史家)들은 구려,고려라 기록했고, 수당시기에 이르러 중원사가와 고구려인 대부분은 고구려를 고려라 칭했다.
고려는 실재상 당시 고구려를 편하게 이르는 말이었다. 사서에 고려라는 명칭이 최초에 나오는 것은 서기398년이다, 그후 고려라는 명칭은 빈번히 사서에 출현한다. 고구려라는 명칭과 교대로 사용한 것이 백여년이다. 수당시기에 이르러 고려가 고구려를 대신하는 보편적 명칭이 된다. 그래서 기본사실은 서기668년 이전의 고려는 고씨(高氏)고구려의 간편한 칭호인 것이다.
250년의 차이를 두고 조선반도에 건립되는 왕씨고려가 계승하는 관계가 아니다. 그런데 서기918년 조선반도에 또다시 출현하는 고려왕조란 명칭에 역사상과 현실중의 사람들이 왕왕 그것을 혼동한다. 사실은 분명히 다른 정권입니다.
918년 건립된 고려왕조는 일대왕이 왕건이므로 사람들이 칭하기를 왕씨고려라 합니다. 우리는 왕건정권이 고려라 명명한 뜻을 부정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고구려정권이 멸망한 후 250후에 건립되었고, 도성은 개경(지금의 조선개성), 그 활동범위가 조선반도를 떠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고구려의 간칭인 고려와 왕건의 왕씨고려는 시간상,활동지역상,왕족성씨상, 백성의 조성상 모두 근본적 구별이 있고, 마땅히 이것을 혼동해서는 안됩니다.
현대의 조선족은 고구려 국가 멸망이후, 장시간의 민족융합과 교류중, 신라인이 주체가 되어 형성되었으며, 융합과정중에 조선반도에 남아 있던 소수의 고구려인,말갈인,漢人등 포함되었습니다. 19세기 중엽이후, 일부분의 조선인이 조선반도에서 우리나라(중국)로 이주했으며, 지금의 우리나라 경내의 조선족이 되었습니다.
이상의 서술로 고구려,고려와 조선족이 구별되고 혼동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 수있습니다.
고구려민족과 국가는 7세기 이전의 오랜세월과 역사발전중, 우리나라 동북지구에서 찬란한 문화를 창조하고, 지금에 이르기 까지 대량의유적유물이 유지되어 있습니다.
요녕성환인현에 고구려의 제일도성유적의 고성자(古城子), 오녀산성이 있고, 이 안에 고구려 고묘,벽면,유적,유물이 있습니다.
길림성 집안시에 고구려 도성 국내성,환도산성의 고묘군, 호태왕비와 대량출토문물이 있습니다.
길림성의 연변,길림,통화,백산, 요녕성 본계, 무순, 철령,심양, 단동등이 일정 수량의 고구려 고성을 보존하고 있고, 고묘와 각종유적,유물이 있습니다.
다년간의 고고발굴이 증명하는 것은, 고구려문화는 漢문화이 위에 있는 것입니다. 이 유적,유물는 현대 조선족의 문화가 아닐 뿐 아니라, 왕씨고려의 문화유적도 아니고, 우리동북고대민족 고구려인의 문화 유산이므로 당연히 우리나라(중국)의 문물 고적입니다.
1961년이래, 국무원이 호태왕비,환도산성,오녀산성,봉황산성등을 중화인민공화국국가급 중점문물 보호단위로 공포하였습니다.
요녕,길림 양성 각급정부 역시 고구려유적지를 성,시 중점문물 보호단위로 공포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