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클래식을 잘 모른다
가끔 듣기는 하지만 집중해서 듣기보다는
편안하고 익숙한 곡 위주로 틀어놓기는 한다
그것도 잠시
내가 클래식을 가장 많이 들었던 때는
1984년 3월 중순이후 9월까지
포항의 유일한 고전음악감상실 쇼팽에서
하루종일 시간 보낼 때 그때였다
고등학교 졸업 후 갑자기 찾아온 병의 징후로
크리스마스 이브에서 졸업식 이틀 전까지 입원하고 퇴원 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6월과 9월 포스코 입사를 위한
신체검사 재검을 기다리던 그 백지 같았던 시간
송도 앞바다에서 들고나는 오징어배의
눈부시게 작렬하는 백열등을 보면서 밤을 보내고
새벽에 집에 들어와 잠깐 눈 붙였다
10시쯤 문 여는 쇼팽 이모 기다리며
이층 계단에 쪼그리고 있다 같이 문열고
점심 때 끓여주는 라면 먹으며 하루종일
어스름한 갓등 놓인 주홍색 탁자보 덮힌 내 책상에서
책을 보다가 뭔가를 끄적거리다가 졸다가 자면서
하루종일 음악을 들었다
대부분 무슨 음악인지도 모르고 들었으나
지금 내 귀에 들어오는 모든 클래식 음악은
그때 내 귀에 익은 것은 분명하다
하나뿐인 손님인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어쩌면 이모 자신을 위해서
곡이 바뀌고 음반을 새로 걸 때마다
정성들여 곡을 소개하고
더러 설명도 해주던 이모 덕분에
가끔 귀도 열고 마음도 열고
감은 눈 앞에 흐르는 선율을 느꼈다
그때 내게 음악은 괄호안의 지문 같은 것이었다
침묵이 내 친구고 음악은 그 침묵의 배경이었다
음악이 침묵의 아주 좋은 친구란 건 그때 알았다
입사해서 월급을 타서 제일 먼저
세달치 월급의 인켈 전축을 사고
클래식 엘피 교향곡 전집과
러시아 국립 오케스트라 연주 녹음 전집을 산 것도
쇼팽의 그 시간덕이었음에는 틀림없다
음악은 내게 침묵이 필요할 때의 친구였고
그럴 때는 아주 좋은 친구가 되어주기는 했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곡명을 기억하지 못하고
책상 옆에 모로 누운 저 음반들은 침묵한 지 오래 되었다
임윤찬, 걸으면서 잠깐 들어볼 생각이었다
클라이번 우승, 어린나이, 속 깊고 순수한 놀라운 천재의 탄생...
걸으면서 듣기 시작했는데 5분 뒤 나는 밴치에 앉았고
10분 뒤 나는 밴치에 누워 구름 가득한 자정의 하늘을 보다
눈을 감고 들으며 천변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그의 연주를 느꼈다
21분쯤 되는 곳에서 전율하고 28분쯤 되는 곳에서 가슴이 뛰고
28분을 지나 38분이후 마지막까지 가만히 누운 내 몸이
별 하나 보이지 않는 하늘 위로 둥실 떠오르는 것 같았다
20분 이후 천변 바람도 거세지더니 약한 돌품처럼 달려왔다
연주가 끝나고 이 글을 쓰는 지금 바람에 비가 묻어 떨어진다
시원하다
이대로 저 하늘 위로 훨 날아가도 좋겠다
두 번째 듣고 있다
그때 포항의 송도 밤바다와 쇼팽의 어둑한 갓등 켜진 탁자
주황색 테이블보와 조용히 곡을 설명하던 이모의 목소리와
눈 감고 벽에 머리 기댄 채 꾸벅이는 길 잃은 소년이 떠오른다
방금 두 번째 연주가 끝났다.
https://youtu.be/DPJL488cfR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