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깡패 이정재의 죽음 >
- 1961년 10월 19일 -
그는 경기도 이천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기골이 장대했고 동네 씨름판만 나갔다면 황소를 쓸어
오는 건장한 청년이었다.
집도 유복하게 살아서 휘문고보를 나오는 등 당시로서는 꽤 고등교육
을 받았다.1917년 생이니까 태평양 전쟁 당시 징용에 끌려가기 합당한 나이였고 징용장이 나오자 이정재는 징용을 피하기 위해 김두한이 조직
하고 있던 ‘반도의용정신대’ 에
들어간다. 휘문고보라는 학벌은 일자무식의 김두한 이하 여러 주먹
들 가운데 튀어 보였고 그는 해방 이후로도 계속 경찰복을 입는다.
하지만 그는 새삼 운위되는 ‘친일경찰’과는 결이 달랐고
반민특위 특경대원으로서 악질
친일 경찰을 솎아내고자 하는 움직임
에 가담했지만 반민특위가 와해
되면서 곤욕을 치르는 경험을 하고 경찰을 그만두게 된다. 기운도 있고 능력도 있는 사람이 뭔가 옳은 일을
해 보려다가 처참하게 좌절됐을 때
밟는 코스는 대개 두 가지다.
반골이 되거나 아니면 아예 세상은
그런 것이라며 힘 있는 쪽으로
붙든가. 이정재는 후자 쪽이었다.
그는 운도 나쁘지 않은 사람이었다. 전쟁 때 전직 경찰이라는 죄상으로 인민재판에 부쳐져 죽을 뻔 했으나
후일 매제가 된 김홍중의 필사적인 구원으로 목숨을 구했고 부산으로 피난을 갔을 때는 토착 주먹들에게
걸려 박살이 날 위기에서 시라소니 이성순에게 구원받는다. 하지만 이정재는 결과적으로 이 두 은인과
모두 결별하게 된다. 김기홍과 함께 동대문 시장을 배경으로 한 ‘동대문 사단’을 꾸리지만 지나치게 정치에 유착하는 이정재에게 경고를 보내던 김기홍이 그 곁을 떠났고, 스스럼없이 이정재에게 와서 “덩대. 나 돈 좀 주라우” 하던 시라소니 이성순은
이를 못마땅해하던 동대문 사단의 깡패들에게 린치를 당한다.이정재는 이를 묵인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병원
에 입원해 있던 이성순을 찾아가
다른 발까지 쇠몽둥이로 두들겨
부숴 고장낼 만큼 철저한 응징이었다.
동대문 시장의 ‘나와바리’를 관리
하면서 이정재는 기존의 깡패들처럼 상인들 돈을 갈취하거나 폭력을 휘두르지 않아 인심을 샀다. 하지만 그는 그 이면에서 돈을 긁고 있었다. 싸게 불하받은 대지를 비싸게 내준다든가 가구당 300환 정도 되는 관영 요금 (전기세 등)을 2500환을 걷는다든가 턱없는 시설 교체 비용을 뜯어내든가 하는 등 푼돈 보호하고
목돈 갈취하는 식의 ‘합법적 조폭’의 원형을 보여 준다. 그 보호(?) 하의 상인만 1만 2천명이 넘었던 동대문 사단의 양아치들 (그들이 자처하는 건달이라는 말 쓰지 않는다) 은 깔끔
한 양복과 포마드 기름 묻어나는
‘단정한 복장’을 하고 다녀야 했고
중간 보스 이하 쫄다구들은 이정재
의 얼굴조차 쳐다볼 수 없는 엄격한 분위기였다고 한다.
왕년의 반민특위 특경대원 이정재는 이제 완연한 정치 깡패로, 권력자의 주구로 정치에 개입하기 시작한다.
그의 동대문 사단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와 아울러 수학(數學)계를 하수구에 빠뜨렸던 사사오입 개헌 때 국회에 난입했고 , 이승만에 반대하는 의원들의 자유당 집단 탈당 때에는
직접 국회에 들어가 한때의 은인이자 형님 김두한과 맞선다. 일설에 따르면 김두한 앞에서 권총을 들이밀었고 김두한은 “권총을 쏘는 사람은 뒤에서 쏘지 앞에서 쏘지 않아!”라고 일갈하자 스스로 물러섰다고 한다. 그 외 이승만 그리고 특히 이기붕의 꼬붕이 되어 별일을 다 감행하던 이정재였다.
야당 정치인 암살을 계획하다가
그 행동대원이 일을 폭로하고 잠적
하자 그에 대한 살해지시를 내린
것도 다름아닌 그였다.
그에게도 꿈이 있었다. ‘형님’ 소리 보다는 ‘의원님’ 소리를 듣고 싶었던 것이다. 국회에 부하들 데리고 난입
하는 것이 아니라 정중히 인사받으며 국회의원 전용 통로로 입장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고향 이천에 열심히 공을 들인다. 어차피 13대를 살아온 토박이 집안 이었고 그 기반 위에 이정재는 이천 내에서 벌어지는 거의 모든 대소사
에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거나’
금일봉을 전달하여 환심을 샀다.
이정재 명찰을 단 강아지를 출마
시켜도 될만큼 터를 닦아 놨을 때
그는 매우 강렬한 뒤통수를 맞는다. 이기붕의 몽둥이였다.
아무리 경찰력을 동원하고 깡패를 늘어세워도 이기붕이 서울에서 당선
될 가능성은 없었다. 그만큼 자유당 정권은 인기를 잃고 있었던 것이다. 이기붕이 복안으로 택한 것이 경기도 이천이었다. 거기에 이기붕의 선산이 있었다나.이정재도 기가 막혔을
것이다. 아니 세상에 이런 양아치가 있나 말이다. 처음에는 저항했지만 이기붕이 온갖 압박을 가해 오자 이내 손을 들고 정치 입문의 꿈을 버린다. 주인에게 이빨을 보인 개는 아무리
그 뒤에 꼬리를 늘어뜨린들 이전의 귀여움을 회복하지 못한다. 이정재도 그랬다. 이정재는 권력의 끈을 잃고 집안에 칩거하며 세월을 보내게 된다. 그런데 그의 칩거 기간 역사는 엄청난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4.19가 일어나기 하루 전 교문을
박차고 나섰던 고대생들은 광화문
까지 나가 시위를 하고 돌아오는 도중 동대문 사단의 습격을 받는다. 이때 현장에 있었던 ‘낙화유수’ 김태련은 계획된 습격이 아니라 우연한 충돌 이었고 이정재는 집에 있었다고 주장하지만 어쨌든 몇 명이 죽었다는 소문이 날만큼 참혹하게 당한 건 학생들이었다. 이정재의 아들에
따르면 이정재가 “남의 집 귀한 자식
을 왜 때리느냐?”라고 격노했다고 하지만 그 부하들을 정권의 개로
길들인 것은 다름아닌 이정재 자신이었다.
4.19 이후 붙잡혀 들어갔다가 풀려나왔지만 5.16 쿠데타 이후 민심 수습용 본보기로 그는 체포당한다. 쿠데타군의 살기는 무서웠다.
4.19 의거 이후의 서슬푸른 분위기 에서도 별 일 없이 풀려나왔던 그는 깡패의 원흉으로 규정돼 ‘깡패 이정재’
가 쓰인 종이칼을 쓰고 서울 시내를 행진해야 했다. 주변에는 완전무장한 공수부대가 여차하면 총으로 갈길 준비를 하고 있었고. 그리고 1961년 10월 19일 동대문 사단의 큰형님이자 현대식 조폭의 원조, 한때의 반민특경대원이자 인생 태반을 깡패로 살았던 이정재의 목이 매달린다.
그래도 죽음 앞에서 “먼저 갑니다. 세상에 태어나 신세 많이 졌습니다. 잘들 계시오. 저 세상에서도 만납시다.”라고 담담하게 얘기할만큼 호방한 면이 있었던 이정재는
그 자신이 경무대 경찰로 넣어 주었던 곽영주, 자신이 자리를 물려주었지만 자신을 사형에 이르는 중대한 증언을
한 임화수, 전 내무장관 최인규 등과 함께 교수대의 이슬로 세상을 마쳤다. 이날 함께 죽은 사람 가운데는 좌익 혐의를 받은 민족일보 사장 조용수도 있었다.
타고난 용력이 있었으나 그를 옳은
일에 쓰지 못하고 죽음 앞에서도 의연할만큼의 용기가 있었으나
이를 찌질한 이들을 위해 썼던 한 깡패가 1961년 10월 19일 죽었다.
***옮긴이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