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3월4일
사순
제2주간 수요일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이다.” (마태
20,17-28)
The Son of Man did not come
to
be served but to serve and to give his life as a ransom
for many."
말씀의 초대
하느님의 말씀을 거부하는 이들은 예언자를 박해한다. 예레미야가 유다와 예루살렘의 죄악을 고발하며
그들을 심판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자 사람들은 그를 없애려 한다. 예언자는 자신이 그들의 구원을 위해 일했음을 하느님 앞에서
토로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도 구약의 예언자들과 같이 당신께서 박해와 죽임을 당할 것임을 아셨고, 당신을 따르려는 이들에게도 그러한 삶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많은 이들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러 오셨다(복음).
☆☆☆
오늘의
묵상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마태 20,26). 세상 사람들이 모두 같은 방향의 길을 가고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더라도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따르려면 세상의 반대에 직면할 수밖에 없습니다. 예언자의 말은
듣기도 받아들이기도 버겁고 싫습니다. 세상은 모두 태평성대라고 하면서 괜찮다고 말할 때, 예언자는 거꾸로 이 세상의 썩은 구석을 들추어내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위협을 느껴 가면서도 예언자는 이렇게 몸이 썩어 가고 있으니 이제 죽음이 임박하였다고 알려 주지만, 세상은 그 썩은 부위를
보지 않으려 합니다. 예언자의 쓰디쓴 비난은 바로 당신 백성을 살리시려는 하느님의 손길과 배려였지만, 그들은 애써 외면하였을 뿐 아니라 오히려
예언자를 죽이려고까지 합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의
길과 운명이 어떠하였는지 잘 알고 계신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받으셔야 할 잔이 어떠한 것인지 내다보십니다. 그 잔을 마시지 않고서는 참된 예언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도 잘 아십니다. 그리고 당신을 따르겠다고 나서는 이들에게도, 그 길이 평탄하고 아름다운 장밋빛 길이 아니라는 점을 결코
감추지 않으시고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에 대해, 잘못된 환상을 갖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제자들처럼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청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종처럼 다른 이들을 섬기고,
필요할 경우 그들을 위해 목숨까지도 바쳐야 하는 것이 내가 마셔야 할 잔임을 알고 계십니까? 진정으로 알고 있다면 아마도 감히 청하지 못할
것입니다. 주님께 그 잔을 청한 야고보와 요한은 순교한 사도들이었습니다. 안일한 생각을 접고 두 사도처럼 주님을 따라나설 준비가 되셨습니까?
아주 어렸을 때,
저는 해와 달의 크기를 비슷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낮에 바라본 해의 크기나 밤에 바라보는 달의 크기는 거의 비슷했으니까요. 단지 차이가 있다면
해가 더 밝다는 것뿐이라고. 하긴 해가 저녁에는 식어서 달이 되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해와 달은 똑같은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제 생각이 잘못 되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지요. 그리고 해가 엄청나게 크다는 사실도 배웠습니다. 태양의 지름이 달의 4백 배 크다고
하지요. 똑같이 보이는 이유는 단지 태양이 달보다 지구에 더 멀리에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지요.
똑같은 거리에서는
크다 작다라는 구분을 할 수 있지만, 거리의 차이가 있을 때에는 크다 작다의 구분이 무의미해집니다. 우선은 얼마나 멀리 있느냐, 아니면 가까이
있느냐에 따라서 그 크기의 진실이 밝혀지니까요.
우리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을 크신 분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런데 얼마나 크다고 말하고 있는 것일까요? 하느님께 원망을 던지면서 이제 그분을 떠나겠다고 고백하시는
분들을 종종 뵙니다. 무엇 하나 주시지도 않고, 그래서 왜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분은 하느님과 사람을
비교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하느님을 멀리 둔 채 인간의 관점으로만 생각하니 하느님이 사람과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마치 어렸던 제가
해와 달이 똑같다고 생각했던 것처럼 말이지요.
하느님께 가까이
가보십시오. 그제야 우리 나약하고 부족한 인간과 비교할 수 없는 한 없이 크신 분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분께 하고 있는 모든
불평불만이 얼마나 의미 없는 것인지를 비로소 알 수 있습니다. 대신 그 큰 분께 대한 감사의 마음을 간직할 수 있으며, 그분께 온전히 희망을 둘
수 있습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께서 하늘 나라에서 왼쪽과 오른쪽에 앉게 해달라는 특별한 은혜를 예수님께 청합니다. 그리고 다른 제자들은 이런 청을 했다는 사실에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기지요. 전쟁을 모르는 사람에게 전쟁은 신나는 일이지만, 겪어 본 적 없는 사람에게 죽음의 시련은 별 것 아닌 일처럼
여겨집니다. 그래서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겠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제자들이 쉽게 “할 수 있습니다.”라고 자신 있게 대답한
것은 굳은 믿음에서 나왔다기보다는 크신 주님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님을 알아가면서
그분께 가까이 갈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더 많이 기도하고 묵상하면서, 더 많이 주님의 뜻을 따르면서 살아갈 때 그분 앞에 조금씩
가까이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야 비로소 ‘하느님은 크신 분’임을 고백하게 될 것이며, 당신께서 마시려는 잔을 마실 수 있다고 자신 있게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을 알고 따르는
일은 분명히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어떤 영예를 구하는 것은 하늘 나라와 어울리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들에게 깨우쳐 줍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직접 이 세상에서 최고로 여기는 것들을 멀리하고 대신 하늘 나라의 기쁜 소식인 사랑의 실천에만 온 마음을 다하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낮아져도, 우리의 주님께서 낮아지신 것만큼 낮아질 수 있을까요? 어쩌면 아주 많이 낮아지셨기 때문에 반대로 우리 모두의 지위가 올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의 영광은 이처럼 아주 깊은 저 아래에서부터 비쳐 올라왔습니다.
용기란 자신이
두려워하는 것을 하는 것이다. 두려움이 없다면 용기도 없다(에딘 리벤버거).
여전히 갖고
있는 것(탈 벤 샤하르, ‘행복이란 무엇인가’ 중에서)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은 중증 장애인의 몸으로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업적을 이루었다. 호킹은 스물한 살이 되던 해 불치병에 걸린 사실을 알고 크게 절망했다.
의사는 앞으로 2년밖에 살지 못할 거라고 했다.
그런데 2년 뒤에도
병세는 크게 나빠지지 않았다. 그는 입원한 지 하루 만에 사망하는 환자를 보며 자신이 최악의 상황은 아니라고 위로했다. 게다가 그는 열일곱 살
때 케임브리지 대학에 합격할 정도로 비상한 두뇌를 가지고 있었다.
호킹은 사랑하는
가족과 꿈을 위해 ‘움직여 보기로’ 하고 공부를 시작했다. 그는 자서전에서 불치병이 자신의 인생에 미친 영향은 크지 않다고 썼다. 매일 자기만의
세계에 빠져 살았고 불치병을 앓고 있다는 사실을 잊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일반인과 똑같이 생활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애썼다. 또한
삶에 낙관적이고 유쾌한 태도를 취했다. 병에 걸리고 나서 여섯 번이나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지만 언제나 활기찼다.
하루는 연설을 마친
그에게 기자가 물었다.
“병마가 당신을
영원히 휠체어에 묶어 놓았는데 운명이란 녀석이 너무 많은 것을 빼앗아 갔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호킹은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세 개의 손가락을 이용해 타자를 두드렸다. 화면으로 그의 말이 전해졌다.
“내 손가락은
여전히 움직일 수 있고, 두뇌로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나는 꿈이 있고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이
있습니다.”
대답을 마친 호킹은
힘겹게 다음 문장을 완성했다.
“아, 그리고 나는
감사할 줄 아는 마음을 가졌습니다!”
순간 현장엔 벅찬
감동의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가지고 있는 것에
감사하지 못하고, 가지고 있지 못한 것에 불평불만을 던지는 우리들의 모습을 깊이 반성하게 됩니다.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이기정신부-
세상의 사고방식과
천상의 사고방식은 말 그대로 하늘과 땅차이입니다. 죽음후 ‘다시 살아난다.’는 주님말씀을 제자들이 이해불가한 사항이었듯. 예수님과 제자들과의
차이는 언제나 하늘과 땅차이었다고 봅니다.
몸값도 섬김도
목숨에 대한 생각도 하늘과 땅 차이니까 신앙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믿음을 갖도록 예화를 주셨지만 그래도 쉽진 않았습니다. 오늘도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려면 신앙의 힘없이는 실수하기 마련입니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태오
20,28)”
< 내가
주려는 것이 나를 채운다 >
-전삼용신부-
‘지식채널
e’에서
‘욕’에 관해
연구하였습니다.
욕은 친한
친구들끼리 일상적으로 하는 경우도 있고 혹은 의도적으로 상대를 기분 나쁘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하기도 합니다.
학생들의
73%
정도가 일상에서
욕을 사용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욕이 얼마나
안 좋은 영향을 미치는지 실험을 해 보았습니다.
제시되는
‘긍정단어,
부정단어,
금기어,
중립단어’를 듣고 나중에
기억나는 단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험에서
대부분이 욕을 듣는 순간 정신이 멍해져서 그동안 들었던 단어를 다 잊어버렸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욕은
다른 단어들보다 4배나 강하게 뇌에
기억되며,
분노,
공포 등을 느끼게
하는 ‘감정의
뇌’를 자극하여
‘이성의
뇌’의 활동을 막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강한 욕설을 듣는
순간 이성이 통제력을 잃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욕은
듣는 사람에게만 안 좋은 것일까요?
욕을 하는 순간
침이 만들어내는 ‘분노의
침전물’이 있다고
합니다.
보통의 침은 색을
내지 않고,
사랑한다는 말을
하면 분홍색으로 가라앉는데,
욕을 하면 갈색의
침전물이 생깁니다.
그 욕을 할 때
만들어진 타액을 모아 쥐에게 주사를 했더니 쥐가 바로 죽어버렸습니다.
욕은 그 대상이
누구이거나에 관계없이 ‘말하는 동시에
자신이 가장 먼저 듣고,
쓰는 동시에 자신이
가장 먼저 읽으며 결국 자기 자신에게 해를 입힌다는 결론’입니다.
남에게 해를
입히려고 하면서 자신이 해를 입지 않는 경우는 없습니다.
남을 눈물 흘리게
하려면 자기는 반드시 피눈물을 흘려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남에게 주는
것이 해로운 것이라면 자신 안에 먼저 해로운 것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주기 위해서는 먼저
가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독서에서 두 부류가 나옵니다.
그 하나는 예언자
예레미야입니다.
예레미야도 물론
이스라엘 백성에고 독설을 퍼 붓습니다.
예수님도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근본 이유는 그 안에 ‘사랑’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오늘 독서의
예레미야의 말을 들어보면 이렇습니다.
“제가 당신 앞에
서서 그들을 위해 복을 빌어 주고,
당신의 분노를
그들에게서 돌리려 했던 일을 기억하소서.”
사실 어떤 사람이
고민을 털어놓을 때,
“그건,
네가
문제야,
네가 먼저
바뀌어야해!”라고 말해주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 사람과의 영원한
관계단절을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사랑하는
사람에게라면 계속 그 사람 편을 들어주어야 하는지,
아니면 진실을
말해주어야 하는지 갈등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예언자직은
목숨을 내어놓는 사랑의 길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은 그 말을 듣기를 거부합니다.
그리고 예레미야를
없앨 계략을 꾸밉니다.
“자,
예레미야를 없앨
음모를 꾸미자.
그자가 없어도
언제든지 사제에게서 가르침을,
현인에게서
조언을,
예언자에게서 말씀을
얻을 수 있다.
어서 혀로 그를
치고,
그가 하는 말은
무엇이든 무시해 버리자.”
그들의 마음엔
미움이 있습니다.
그들은 예레미야를
없애려고 하겠지만 스스로 자신들 안에서 독을 만들어 자신들을 죽이는 것입니다.
우리 또한 우리가
이웃에게 사랑을 주려고 하는지 미움을 주려고 하는지 살펴보아야합니다.
결국 내가 내
자신을 죽이기도 하고,
내가 내 자신을
살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내가 남에게 주려고
하는 것이 생명이면 나도 살고,
내가 남에게 주려는
것이 죽음이면 나도 죽습니다.
그렇다고 좋은 말만
해 주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에겐 상대의 안
좋은 면을 지적해 주어야 하는 예언자직무가 있습니다.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는 계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참 사랑은
그 두려움을 넘어서서 해야 할 말을 할 수 있게 합니다.
예언자직은 언제나
그 근본이 ‘사랑’에서 나오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할 것입니다.
사랑이어야 살 수
있습니다.
외적 행동이야
어떻든 우리가 주려는 것이 생명이면 나도 살고 남도 살게 됩니다.
-조재형신부-
‘살신성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몸을 바쳐서 세상을
이롭게 하는 분들입니다.
모든 생명체는
‘생존과
번식’이라는 메커니즘을
따르게 돼 있습니다.
이것은 오랜 세월
터득한 생명의 진화입니다.
또한 인간은
‘행복’을
추구합니다.
행복이란 자신이
원하고 바라는 것을 채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류의
스승들은 이런 보편적인 삶을 뒤로 하고,
타인을 위해서
희생하고,
목숨을 바치는 것을
더욱 소중한 가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희생과 헌신을
통해서 인류는 문명과 역사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에덴’은 하느님께서
사람을 위해서 만들어 놓은 낙원입니다.
사람은 그 낙원에서
살 수 있었는데 교만함과 욕심 때문에 ‘에덴’에서 더 이상은 살
수 없게 되었습니다.
에덴은 어느 장소가
아닙니다.
에덴은 사람들의
마음입니다.
탐욕과 욕망 때문에
자신은 물론 타인까지 못 살게 하는 사람들은 늘 ‘에덴의
동쪽’에서 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을
낮추고,
남을 위해서
희생하며,
양보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현실은 각박하고 힘들어도 늘 ‘에덴’에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예레미야
예언자의 이야기입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이렇게 이야기
했었습니다.
‘나는 아이라서 말을
잘 못합니다.
그때 주님께서 말을
하십니다.
아이라는 말을 하지
마라.
너는 내가 보내면
누구에게나 가야하고,
내가 명령하는
것이면 무엇이나 말해 주어야 한다.
그들 앞에서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너를 구해 주리라.”
예레미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박해를 받았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일들을 만났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았기 때문에 그의 삶은 ‘에덴’에서의
삶이었습니다.
오늘의 복음도
비슷한 이야기를 합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자식을 사랑하기 때문에 예수님께 특별한 부탁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왕국을
이루시면 한 아들은 예수님의 오른편에 다른 한 아들은 예수님의 왼편에 앉게 해 달라고 합니다.
자식의 성공을
바라는 어머니의 생각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만 그런 것은 아닐 것입니다.
모든 어머니는
자식의 성공과 행복을 바라면서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것은 행복과
성공의 기준이 무엇인가입니다.
행복과 성공의
기준이 명예와 권력,
부와 건강에 있다면
그것은 절반의 행복과 성공입니다.
진정한 행복과
성공은 무엇인지를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중에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습니다.’
희생과
봉사,
겸손과 사랑이 바로
진정한 행복과 성공의 기준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 사람들이 바로
‘에덴’에서 살 수 있다고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서 살고 있을까요?
할 수
있습니다
-반영억신부-
많은 사람이
으뜸으로 인정받고 그에 상응하는 대접을 받고 싶어 합니다. 그렇지만 그렇게 충분한 대접을 받는 사람은 흔하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그렇게 보인다
하더라도 진정한 존경과 사랑으로 인정을 받는 사람이 많지 않음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세속 안에 있으면서도 세속을 떠나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진정 존경을 받을 사람입니다. 세상은 높아지라고 하지만 오히려 섬기는 사람, 세상은 첫째만을 기억하지만 오히려 종이 되는 삶을 사는 사람이야말로
하느님께로부터 인정을 받는 사람입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어머니는 자기 두 아들이 주님의 오른편과 왼편에 앉기를 소망하였습니다. 어머니가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는 것을 어찌 탓할 수
있겠습니까마는 아무 정성과 노력이 없이 좋은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하면 그것은 욕심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욕심을 지니게 되면 반드시 적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이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 한다는 낌새를 알아챈 다른 열 제자가 그 두 형제를 불쾌하게 생각한 것에서도 바로 그러한
마음을 대변해 줍니다.
예수님께서는“무엇을
원하느냐?”물으셨습니다. 물론 우리는 영광을 원합니다. 그러나 영광은 고통 없이 주어질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죽음을 통하여 부활의
영광에로 나아가십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수난을 예고하시지만 제자들은 딴청을 부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마태20,22)하고 물으시자 “할 수 있습니다.”하고 대답하였지만 사실 그들은 의미도 모르고 대답한 것입니다. 그 잔은 모욕과 천대,
고통과 십자가의 죽음을 뜻했습니다. 종이 되어 남을 섬기는 낮아지는 삶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덥석 대답해 놓고는 딴전을 피우는 그들의 모습이
우리에게도 여전합니다. 분명 예수님의 길은 장차 어떤 '자리'에 앉기 위해서 가는 길이 아니라 다만 그것이 아버지 하느님의 뜻을 이루고 완성하는
길이기에 그리로 갈 따름입니다. 무엇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이기에 행할 수 있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주어지길 기도합니다.
제가 어느 본당에
있었을 때의 일입니다. 정초가 되면 평협회장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점 보러 가는 사람이 없기를 바란다. 철학관에 찾아가서 일 년 운수를 보는
일은 미신행위다'라는 것을 환기시켜 주십시오." 점 보러 가서는 사람이 많으면 묵주기도를 바치면서 기다린답니다. 양다리 걸쳐서 무엇을 얻고자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세례성사를 받으면서
마귀를 끊어버리겠다고 선언해 놓고서는 어려운 일이나 우환이 닥치면 하느님 보다는‘어디 용한 사람이 없나?’살피게 됩니다. 허례허식을 버리겠다고
맹세하고는 주님을 바라보지 않고 주변 사람에게 잘 보이려는 행동을 합니다. 남이 나를 섬겨주기를 바라는 허영의 마음이 가득할 때도 있습니다.
오로지 주님을 믿으며 주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삶을 믿는다고 고백하고서는 미사참례를 소홀히 할 때도 있습니다. 모처럼 손님이 오면 함께 미사
참례하자고 권유하면 좋으련만 그를 배려한다는 빌미로 주일미사까지 궐합니다. 약속된 영생에 대한 희망을 말하면서도 눈앞에 것에 흔들리는 것이
우리의 마음입니다.
주님께서는 오늘도
“무엇을 원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아직도 아무 수고와 땀도 없이 영광을 바라느냐? 고 물으십니다.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고 물으십니다. 기꺼이 “할 수 있습니다.” 대답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대답에 항구 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군림해서 힘으로
내리누르는 삶이 아닌,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는 삶을 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열어주소서,
깨닫게 하소서!
-인영균신부-
마냥
따를 것 같았습니다. 주님을 쉽게 따를 것 같았습니다. 막상 십자가 앞에 서니 숨이 탁 막혀버립니다. 고난 앞에서는 도망칠 마음만 생깁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제자들처럼 우리는 장미빛 환상 속에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환상은 신기루일 따름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길은 현실입니다. 지금
여기서 부딪치는 십자가를 외면하지 않고 직시해야 합니다. 남의 종이 되어야 하는 현실입니다.
반성합니다.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산다는 것이 실상 내 자신의 위신과 자존심을 세우고자 하는 도구일 때가 많습니다. 형제 안에서 섬김을 받으시는 주님을
깨닫는 것이 십자가를 포옹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님, 마음의 눈을 열어주소서. 그래서 형제들 안에서 당신을 보게 하여
주소서. 형제를 섬기면 당신의 십자가를 질 수 있다는 진리를 깨닫게 하소서.”
광야의
하느님
-고독과
연대-
-이수철신부-
삶의
본질은 광야입니다.
어제의
지난 안식년에 대한 깨달음이 새롭습니다.
제
안식년은 '하루하루 살았습니다'라는 좌우명 그대로
수도원을
떠나 하루하루 살았던 광야순례여정이었습니다.
홀로이자
함께, 고독과 연대중에 하느님만을 찾았던
광야순례여정이자
자기비움의 '겸손의 수련기'였습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에 일어나
그날의
독서와 복음을 묵상하며 강론을 써 인터넷에 올려 형제자매들과 나눴고
이어
아침미사를 봉헌함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을 확고히 하며
자신의
삶을 하느님과 튼튼히 연결시켰습니다.
장충동
수도원에서도, 산티아고 순례중에도, 뉴튼수도원 중에도 한결같았습니다.
말그대로
하느님 사랑의 기적입니다.
무수히
자연스럽게 형제자매들과 나눴던 카톡의 메시지나 사진도
저를
하느님과 연결시켜주는 '관계의 끈'이자
보이지
않는 '광의(廣義)의 공동체'였음을 깨닫게 합니다.
미사의
중심끈과 더불어 무수한 형제자매들의 '사랑의 끈'이
저를
하느님께 단단히 연결시켜 준 것입니다.
밤이
어둬질수록 밤하늘의 별들은 무수히 나타나 반짝이듯
광야순례여정
중의 별빛같이 빛났던 무수한 형제자매들의 사랑이었습니다.
이제
수도원에 들어오니 더 이상 '관계의 끈들'은, '사랑의 별들'은 사라져
보이지
않지만 여전히 존재함을 느낍니다.
광야의
하느님입니다.
세상이,
공동체가, 마음이 광야입니다.
하느님과
형제들을 만나야 할 곳도 광야입니다.
어제
수도원을 찾아 면담성사를 받았던 두분 자매들의 불우한 내적환경도 그대로 광야였습니다.
바로
광야세상에서 하느님을 만나려고 오아시스 요셉수도원을 찾았던 것입니다.
놀라운
것은 그 힘든 광야여정중에도 두분 자매의 얼굴은 평화로 빛났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상황이나, 독서의 예레미야 예언자의 상황은 똑같이 광야임을 깨닫습니다.
함께
이지만 홀로의 고독한 광야입니다.
예수님
제자들의 공동체는 말 그대로 동상이몽(同床異夢)의 공동체입니다.
스승이자
주님이신 예수님의 수난예고에도 불구하고 동문서답, 자기만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고독이 참으로 깊었을 것입니다.
고독과
연대입니다.
고독과
연대는 한 실재의 양면이요 함께 갑니다.
이런
고독이 공동체와의 연대를 깊게 합니다.
주님은
광야같은 상황에서 군림이나 통치가 아닌
상호섬김의
공동체 삶을 강조하시며 공동체와의 연대를 깊게 합니다.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된다.
너희
가운데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한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
(마태20,26-28).
광야세상에서
하느님 중심의 공동체를 이루어 주는 유일한 영성이
바로
종(servant)과 섬김(servive)의 영성임을 깨닫습니다.
예루살렘
주민들의 공동체에 좌절한 고립무원의 광야같은 환경에서
하느님께
탄원의 기도를 바치는 예레미야 예언자입니다.
"주님,
제 말씀을 귀담아들어 주시고, 제 원수들의 말을 들어 보소서.
제가
당신 앞에 서서 그들을 위해 복을 빌어주고,
당신의
분노를 그들에게서 돌리려 했던 일을 기억하소서.“
(예레18,19.20ㄷ).
구원은
하느님께로부터 옵니다.
기도를
통해 자신의 광야 삶을 재점검하는 예레미야 예언자입니다.
주님은
매일, 사막의 오아시스와 같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광야순례여정중인
우리에게 섬김의 은총 공동체를 선사해 주십니다.
아멘.
<그러나
너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마태 20,26) -오상선신부-
어떤
사람은 자기보다 좀
못하다고 여기면 무시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래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별로 아는 것도
없으면서 많이 아는 체
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래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남들도 다
하는데 나는 왜 못하나
하며 해서는 안 될
일도 별 부끄럼 없이
행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래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제 꼬라지는
모르고 남을 흉보고
뒷담화를 즐깁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래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고 쌍스런 욕설을 쉽게
내뱉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래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가 한 일을
자랑하길 좋아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그래서는 안 됩니다.
. . .
왜냐하면 여러분은 하느님의
자녀요 예수님의 제자이기
때문입니다. 맞지요?
~~~~~
여러분이 계속해
만들어 보세요.
섬기며 오르는 하늘 나라
-기경호신부-
우리네 삶을 보면
온갖 수단을 다 동원해서 남보다 튀려하고 드러내려 하고 높이 오르려 안달하는 '무한 상승 중독환자'가 적지 않다. 바벨탑처럼 높이 치솟는 빌딩과
더불어 욕망의 탑도 올라만 가는 것일까? 때로는 자신만 높이 올라가려고 주변 사람들을 짓밟아버리는 일도 다반사로 일어난다. 오늘 성경 말씀들은
진정 높은 사람이 되는 길을 알려준다. 제1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하느님을 사랑하여 순종하였음에도 예수님처럼 이스라엘 백성의 죄와 불순종
때문에 고통을 당했으며, 또 그들을 위해 용서를 구하고 두둔하기까지 했다. 그에게는 백성에게 파멸을 선포해야 하는 소명 자체가 고통이었다. 그는
희망만을 예언하고 싶었지만 주로 ‘밟고 무너뜨리고 멸하고 헐어버리는 것’에 대해 예언하였다. 그래서 그에게 목숨까지 노리는 많은 적들이 생겼고
하느님 처사에 항의까지 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의혹과 불만에도 불구하고 끝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길을 걸었다. 그는 하느님 때문에 고통의 저
밑바닥 심연으로 내려가 못나고 죄 많은 백성을 섬긴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세 번째로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시면서 당신께 다가올 십자가, 모욕, 죽음을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제자들은 아무것도 알아채지 못한
채 출세욕에 사로잡혀 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까지 와서 치맛바람을 일으킨다. 그들은 예수님께 뭔가를 청할 양으로
엎드려 절을 하였다. 그리고는 “스승님의 나라에서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20,21) 하고 말하였다. 야고보와 요한은 다른 제자들을 제치고 가장 높은 자리를 차지하여 재림하신 예수님과 함께 이 나라를
통치하겠다는 야심을 드러냈다. 그들은 명예와 지위, 권력을 얻으려고 욕망을 키우고 있다.
예수님께서 두
제자에게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할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우리도 경솔함이나
입으로만 자신을 드러내는 교만을 버려야 한다. 이렇게 자신만만하던 제자들은 결국 예수께서 체포되자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쳤다(마르
14,50). 다른 열 제자들은 이들의 말에 두 형제를 불쾌하게 여겼다(20,24). 자기들은 제쳐놓고 앞서 나가려는 그들에게 불평과 질투가
표출된 것이다. 세상은 사회적 지위와 부와 권력을 지난 사람을 높이 평가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20,26)고 하신다. 가치판단의 기준이 전혀 다르다!
예수님 당대의 종교
지도자와 정치 지도자들은 비민주적 악제와 폭정을 일삼았다. 압제와 폭정의 정치 세계와는 반대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단과 공동체에게 지위가 올라갈수록
봉사하고 종노릇하는 삶을 살아야 함을 강조하신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다른 사람들의 봉사자가 되고, 작아지고 형제들을 위하여 생명을 버릴 줄
알아야 한다. ‘높은 사람’이 되려면 생명을 바쳐 섬기는 종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대조사회의 삶이다. 예수님의 일생은 남을 섬김의 삶이었다.
우리도 예수님의 제자들처럼 머리로는 잘 알면서도 실제 살아내지 못하고, 섬기는 수고로움보다 섬김받고 대접받는 걸 훨씬 좋아한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당신의 생명을 바쳐서 모든 인간적이고 세속적인 가치 체계를 뒤집으시며 인간을 섬기셨듯이 우리도 ‘밑바닥 심부름꾼’이 되어야 할
것이다. 참 봉사자는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자신의 생명을 버리는 사람이다(20,28). 하늘나라는 섬기며 오르는 산이요 사랑하며 함께 오르는
산이다.
이제부터라도 현세
재물이나 사회적 지위, 능력을 앞세워 거드름을 피우는 악취 나는 교만한 행동을 멈추도록 하자! 예수님의 제자로서 진정 ‘높은 사람’ 되기
위하여, ‘아무것도 아닌 사람’, ‘그 누구보다도 낮은 사람’이 되어보자! 그렇다! 우리는 늘 무엇인가 되고 싶고 이루고 싶고,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우리는 진정 ‘남을 위하여 모든 것이 되고 자신을 위하여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남아 ‘다른 이들을 사랑으로 섬길 때’
비로소 예수님의 참 제자임을 잊지 말아야 하리라. 현세에서 ‘예수님과 함께’ ‘하느님 때문에’ ‘죽어야’ 종말에 함께 다스릴 수 있다. 사랑을
위하여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려는 것이 바로 우리네 믿는 이들의 삶의 목표가 되었으면 좋겠다. 저 높은 곳에 오르기 위해 저 낮은 곳으로
내려가자! 그것이 진정 높아지는 행복의 길이기에.
-한상우신부-
"저의 이 두
아들이
하나는 스승님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을 것이라고
말씀해
주십시오."
우리
자신이 앉을 자리는
있어도 예수님께서 앉으실
자리가 우리에겐 아쉽게도
없습니다.
십자가와
함께 하지 않는
자리는 또다른 욕망의
자리로 전락할
뿐입니다.
자리는
언제든지 뒤바뀌지만 십자가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은 결코 바뀐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있어야 할
자리는 예수님처럼 십자가의
자리 섬기는
자리입니다.
십자가는 고통과
함께하는 생명을
가르쳐줍니다.
생명의
새싹은 얼었던 땅을
뚫고 올라오는
고통또한 생명임을 일깨워
줍니다.
십자가는 하느님께 흘러가야
할 우리의
길입니다.
십자가를
통해 비로소
보이는 생명의
시간들입니다.
십자가의
목숨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주님의
사랑임을 다시 깨닫게
됩니다.
고통과
함께하는 생명의
자리 십자가의
자리되시길 기도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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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 합니다. 행복 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