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데요시의 조선 출병] 임진왜란(분로쿠*케이쵸의 역~토도 다카토라의 시각으로 보다 / 7/21(일) / 쿠사노미도우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천하통일을 완수한 후 한반도에서 대륙으로 영지를 넓히고자 조선 출병을 하였다. 이 싸움은 외국에서 일어난 일로, 대하드라마 등에서 거의 그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일본 전국 다이묘의 상당수가 조선에서 싸우고 활약했다는 사실은 변함이 없다.
이번에는, 수군으로서 활약한 토도 타카토라의 시점으로부터 해설하고 싶다.
◇ 두 차례에 걸친 조선 출병과 타카토라의 수군
히데요시의 조선 출병은 두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다.
분로쿠의 역[임진왜란(1592년~1593년)]과 케이쵸의 역[임진왜란(1597년~1598년)]이다.
일본에서 천하통일을 완수하고 명나라 정복을 목표로 한 히데요시는 우선은 당시 명나라의 속국인 조선에서 쳐들어왔다. 그리고 일단은 화목하려고 하지만 교섭이 결렬되어 다시 한반도로 쳐들어갔다. (케이쵸의 역)
토도 다카토라가 오랫동안 섬겼던 주군 도요토미 히데나가(히데요시의 동생, 조선 출병에는 반대했다고 전해진다)는 임진왜란 전 해에 사망했다.
다카토라는 히데나가의 양자인 히데야스(14세)를 섬기고 그의 대리로 조선에 출병하게 된다. 37세였다.
다카토라가 이끈 것은 기이의 해적 무리, 즉 「쿠마노 수군」이다.
수군을 이끌고 싸운 싸움은 인생에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 부산해전 '조선의 영웅 이순신을 격퇴'
토도 다카토라가 한반도로 건너간 정확한 날짜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처음부터 참전했던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첫 전투인 옥포해전에 참전했다는 설도 있지만 그런 사료는 존재하지 않는다.
최초로 바다를건넌 것은 구키요시타카(九鬼嘉隆),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 가토 요시아키(加藤嘉明)와 같은 무장들이었고, 이들은 조선의 명장 이순신과 대치했다.
이순신은 일본의 무장들과 싸워 전과를 올린 것으로 지금도 영웅으로 칭송받고 있다.
일본군은 수군과 육군으로 나뉘어 있었고 육군의 가토 기요마사와 고니시 유키나가가 한반도를 순조롭게 북상하는 가운데 수군이 이순신에게 고전하는 상황은 히데요시에게 큰 우려였다.
다카토라에게 히데요시의 주인장(공식문서)이 주어진 것은 7월 16일이며, 이로써 다카토라는 수군의 총대장으로 출진하게 되었다. 수군 지휘는 처음이었지만, 히데요시는 다카토라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었던 것 같다.
임진왜란 1년 8월 29일(1592년 10월 4일) 부산 해전이 시작됐다. 이순신이 승리하면 일본군은 보급로가 끊기고 육군의 철수로도 사라지는 절대로 질 수 없는 싸움이었다.
이 해전은 특이한 것으로 일본군은 육지로 배를 연결해 그대로 움직이지 않고 이순신의 맹공을 견뎌냈다. 이어 연결한 배의 포대를 그대로 이용해 육상에서 포격을 감행한 것이다. 육지 vs 바다 구도로 만든 것이다.
이순신은 야습도 시도했지만 결국 철수했다.
이 전투의 공적에 의해, 타카토라는 이요우와시마 7만석을 부여받았다.
◇ 칠천량해전 조선군 상대로 대승
임진왜란 2년여 만인 임진왜란 4년(1595년) 4월 16일 다카토라의 주군 히데야스가 급사했다. 향년 17.
다카토라는 한 번은 출가하지만, 히데요시의 부름을 받고, 직신으로서 다시 무사의 세계에서 활약하게 된다.
그 무렵 일본과 명나라의 화목 교섭이 결렬되어 다시 조선 출병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것이 게이초의 역이다.
다카토라는 42세로, 이번에는 세토 내해적의 전통을 따르는 「이요수군」을 동반한 출병이었다.
게이초 2년 7월 15일(1597년 8월 27일) 칠천량 해전이 시작된다.
조선국의 지휘관은 원균(元均)이었고, 그는 이순신을 대리하였다.
이순신은 지난 부산 해전에서 패한 것, 다시 부산 출병을 거부한 것 등이 원인이 되어 경질되었으며, 원균도 마지못해 출병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만큼 부산 부근에서의 해전은 어렵다고 여겨졌던 것이다.
칠천량해전은 조선 측에 불운의 연속이었다.
먼저 이순신이 없는 것, 바다가 거칠었던 것, 움직임이 일본군에게 통탈한 것, 그리고 내해인 칠천량이라는 곳에 정박해 버린 것이다. 이 칠천량은 길쭉한 내해 때문에 양쪽 끝에서 공격당하면 쥐벼룩이 되어버릴 만한 장소였던 것이다.
다카토라가 이끄는 일본 수군은 칠천량 양 끝에서 조선군을 에워싸고 공격했다. 조선군은 황급히 바다로 뛰어들어 뭍으로 도망치는 자도 있었는데, 그곳에는 시마즈 요시히로가 이끄는 사쓰마병이 기다리고 있었다.
바다에서도 육지에서도 공격당한 조선군은 속수무책으로 적전도망한 대형선 12척을 제외하고 전멸했다. 바다를 새빨갛게 물들였다는 이 해전은 일본의 대승이 된 것이다.
◇ 명량해전 복귀 영웅 이순신과 재전
칠천량 해전 두 달 후 이순신이 경질을 풀리고, 지난 전투에서 적전도망한 조선군 12척을 이끌고 다시 다카토라와 대결하게 되었다.
이것이 명량해전이다.
명량은 매우 복잡한 조류를 가진 난소로 땅의 이치는 온전히 조선군이 쥐고 있었다. 여기서 일본군은 대고전을 치러야 했다.
아군무장인 쿠루시마 미치후사(来島通総)는 무라카미 수군 출신 해전의 프로였으나 선봉으로 돌격했다가 조류 등 지리를 살린 조선 수군 판옥선의 공격을 받고 전사했다.
다카토라 자신도 상처를 입었고 이순신의 강인함이 다시 한번 증명된 순간이었다.
그러나 다음날 조선 수군은 자취를 감췄다. 이순신이 철수한 것이다.
일본군은 여기서 깊이 쫓아갈 수도 있었지만 하지 않았다. 이는 육군이 북상을 중단했기 때문에 그에 맞춘 것으로 보인다.
이듬해 5월 다카토라는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일단 귀국하게 되었다. 이순신은 그 3개월 후, 사쓰마군 상대의 노량 해전에서 전사했다.
◇ 마지막으로
조선출병은 히데요시의 사망으로 종전되고 일본군은 철수하게 되었다. 그 철수의 총지휘를 맡은 것도 토도 다카토라이며,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추천이 있었다고도 전해진다.
다카토라는 시종일관 일본 수군의 대장으로 활약했던 것 같다. 그러나 수군 지휘 경험이 없던 다카토라가 어떻게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그의 임기응변에 대응할 수 있는 유연함 때문일지도 모른다.
토도 다카토라 하면 「축성 명인」으로, 또 주군을 일곱 번 바꾼 「이직 다이묘」로 유명하지만, 그 전투 능력도 더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 역사가도 2017년 7월호, 전국인물전 토오도오타카토라
투고 [히데요시의 조선 출병] 임진왜란~토도 다카토라의 시점에서 본 하쿠사노미치도 에 처음에 표시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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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秀吉の朝鮮出兵】 文禄・慶長の役 ~藤堂高虎の視点から見る
7/21(日) 14:04配信
草の実堂
画像 : イメージ
画像:『朝鮮戦役海戦図屏風』 wiki c 太田天洋(1884~1946)
豊臣秀吉は天下統一を果たした後、朝鮮半島から大陸に領地を広げようと朝鮮出兵を行った。
この戦いは外国での出来事であり、大河ドラマなどでほとんど描かれないため、一般的には詳しく知られていない。
しかし、日本の戦国大名の多くが朝鮮で戦い、活躍したという事実は変わらない。
今回は、水軍として活躍した藤堂高虎の視点から解説したい。
二度にわたる朝鮮出兵と高虎の水軍
画像 : 豊臣秀吉 public domain
秀吉の朝鮮出兵は二度にわたって行われた。
文禄の役(1592年〜1593年)と、慶長の役(1597年〜1598年)である。
日本で天下統一を果たして明の征服を目指した秀吉は、まずは当時、明の属国であった朝鮮から攻め入った(文禄の役)。そして一旦は和睦しようとするが交渉が決裂し、再び朝鮮半島に攻め入った。(慶長の役)
藤堂高虎が長年仕えた主君、豊臣秀長(ひでなが、秀吉の弟、朝鮮出兵には反対していたと伝わる)は、文禄の役の前年に亡くなっていた。
高虎は、秀長の養子である秀保(ひでやす、14歳)に仕え、彼の代理として朝鮮に出兵することになる。37歳であった。
高虎が率いたのは紀伊の海賊衆、つまり「熊野水軍」である。
水軍を率いての戦いは、人生で初めての事だった。
釜山海戦 「朝鮮の英雄・李舜臣を撃退」
画像:九鬼大隅守舩柵之図 public domain
藤堂高虎が朝鮮半島に渡った正確な日付は不明である。しかし、最初から参戦していたわけではないようだ。
初戦である玉浦(ぎょくほ)海戦に参戦していたという説もあるが、そのような史料は存在していない。
最初に渡海したのは九鬼嘉隆(くきよしたか)、脇坂安治(わきざかやすはる)、加藤嘉明(かとうよしあき)といった武将たちであり、彼らは朝鮮の名将・李舜臣(りしゅんしん)と対峙した。
画像:李舜臣 public domain
李舜臣は日本の武将たちと戦い、戦果を挙げたことで今も英雄として讃えられている。
日本軍は水軍と陸軍に分かれており、陸軍の加藤清正や小西行長が朝鮮半島を順調に北上する中、水軍が李舜臣に苦戦する状況は、秀吉にとって大きな懸念であった。
高虎に秀吉からの朱印状が与えられたのは7月16日であり、これにより高虎は水軍の総大将として出陣することとなった。
水軍指揮は初めてであったが、秀吉は高虎に大きな期待を寄せていたようだ。
文禄1年8月29日(1592年10月4日)、釜山(ぷさん)海戦が始まった。李舜臣が勝利すれば日本軍は補給路が断たれ、陸軍の撤退路も失われるという絶対に負けられない戦いであった。
この海戦は特異なもので、日本軍は陸地に船を繋ぎ、そのまま動かずに李舜臣の猛攻に耐え抜いた。さらに、繋いだ船の砲台をそのまま利用して、陸上から砲撃を行ったのである。陸vs海の構図にしたのだ。
李舜臣は夜襲も試みたが、最終的には撤退を余儀なくされた。
この戦いの功績により、高虎は伊予宇和島七万石を与えられている。
漆川梁海戦 「朝鮮軍相手に大勝」
画像 : 藤堂高虎 public domain
文禄の役から約2年後の文禄4年(1595年)4月16日、高虎の主君・秀保(ひでやす)が急死した。享年17。
高虎は一度は出家するも、秀吉に呼び戻され、直臣として再び武士の世界で活躍することになる。
その頃、日本と明の和睦交渉が決裂し、再び朝鮮出兵が行われることとなった。これが慶長の役である。
高虎は42歳で、今回は瀬戸内海賊の伝統を引く「伊予水軍」を伴っての出兵であった。
慶長2年7月15日(1597年8月27日)、漆川梁(しっせんりょう)海戦が始まる。
朝鮮国の指揮官は元均(げんきん)であり、彼は李舜臣の代理であった。
李舜臣は先の釜山海戦に敗れたこと、再度の釜山への出兵を拒否したことなどが原因で更迭されており、元均もいやいや出兵していたようだ。
それほど釜山付近での海戦は、難しいと思われていたのである。
画像 : イメージ
漆川梁海戦は、朝鮮側にとっては不運の連続であった。
まず李舜臣がいないこと、海が荒れていたこと、動きが日本軍に筒抜けであったこと、そして内海である漆川梁という場所に停泊してしまったことである。この漆川梁は細長い内海のため、両端から攻められれば袋の鼠になってしまうような場所だったのである。
高虎率いる日本水軍は、漆川梁の両端から朝鮮軍を取り囲んで攻撃した。朝鮮軍は慌てて海に飛び込んで陸に逃げる者もいたが、そこには島津義弘率いる薩摩兵が待ち構えていた。
海からも陸からも攻められた朝鮮軍はなすすべがなく、敵前逃亡した大型船12隻を除いて全滅した。海を真っ赤に染めたというこの海戦は、日本の大勝となったのである。
鳴梁海戦 「復帰した英雄・李舜臣との再戦」
画像 : 板屋船(朝鮮水軍の主力艦) public domain
漆川梁海戦から二ヶ月後、李舜臣が更迭を解かれ、先の戦で敵前逃亡した朝鮮軍の12隻を率いて、再び高虎と対決することとなった。
これが、鳴梁(めいりょう)海戦である。
鳴梁は非常に複雑な潮流を持つ難所であり、地の利は完全に朝鮮軍が握っていた。ここで日本軍は大苦戦を強いられた。
味方武将である来島通総(くるしま みちふさ)は、村上水軍出身の海戦におけるプロであったが、先鋒として突撃したものの、潮流などの地の利を生かした朝鮮水軍の板屋船の攻撃を受け、戦死している。
画像 : 来島通総の肖像 public domain
高虎自身も手傷を負い、李舜臣の強さが改めて証明された瞬間であった。
しかし次の日、朝鮮水軍は姿を消した。李舜臣が撤退したのである。
日本軍はここで深追いすることもできたが、しなかった。これは陸軍が北上を止めたため、それに合わせたと考えられる。
翌年5月、高虎は秀吉の命令で一旦帰国することとなった。李舜臣はその三ヶ月後、薩摩軍相手の露梁海戦(ろりょうかいせん)で戦死している。
おわりに
朝鮮出兵は秀吉の死去により終戦し、日本軍は撤退することとなった。その撤退の総指揮を執ったのも藤堂高虎であり、徳川家康の推薦があったとも伝えられている。
高虎は終始、日本の水軍の大将として活躍していたようだ。しかし、水軍の指揮経験がなかった高虎がなぜそのような役割を果たせたのだろうか。それは彼の臨機応変に対応できる柔軟さによるものかもしれない。
藤堂高虎と言えば「築城名人」として、また主君を七度変えた「転職大名」として有名だが、その戦闘能力ももっと高く評価されるべきだろう。
参考文献:歴史街道2017年7月号、戦国人物伝 藤堂高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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