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鄕愁病患者]
옅은 회색 양단 저고리에 자지빛 베르벹 치마를 백연숙은 입고 있었다. 거지반 십년이 가까운 세월이 흘렀으나 백연숙의 젊은 조금도 변함이 없는 것같이 화려한 모습이었다.
『아, 영훈씨!』
기다림에 지칠 대로 지쳐 있던 연숙이가 어머니를 기다리던 어린애처럼 뛰쳐 왔다.
뛰쳐오다가 그러나 연숙은 영훈의 앞까지 다다르지 못한 채 오뚝 걸음을 멈추고 무슨 기적이나 눈앞에 보는 것처럼 덤덤히 영훈을 바라보았다.
옛날 그대로의 영훈의 모습이었다. 뭉클하고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감정대로 곧장 달려가서 영훈의 품에 안길 수 없는 자기 자신을 연숙은 깨닫는 것이다.
『안 오시는 줄……영영 안 오시는 줄 알았어요.』
닥아오는 영훈을 빤히 쳐다보며 연숙은 말했다.
『………………….』
영훈은 묵묵히 연숙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볼 뿐, 대답이 없다.
환영보다는 훨씬 풍부해 보이는 연숙의 얼굴이었다. 세 시간 동안을 한길 가에서 기다린 연숙의 얼굴을 영훈은 물끄럼이 바라보았다.
다소 지나친 학대였다. 그러나 이 여인은 지금 그러한 학대를 달갑게 받고있는 것이다.
『와 주셨네요! 영훈씨가…….』
표정 없는 영훈의 모습을 꿈꾸는 사람 모양 멍하니 바라보며
『조금도 달라지지 않으셨어요. 꿈길에서 보던 모습과 꼭 같으셔요.』
그러나 끝끝내 대답이 없는 영훈을 발견하고 연숙은 후딱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톡톡톡……말간 눈물이 몇 방울, 옥색 고무신 코끝을 적시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둘이의 모양을 힐끗힐끗 바라본다.
『영훈씨가 저를 반갑게 맞아 줄 줄 알고 찾아온 건 아니예요. 그저…… 그저 제가 영훈씨 모습을 한번 보고 싶어서…….』
『사람들이 봅니다. 눈물을 거두시오.』
연숙은 손수건으로 눈물을 꼭꼭 찍어 내며
『과히 바쁜 일 없으시면 같이 좀 걸어요.』
둘이는 광화문통으로 걸어갔다.
『지금도 댁이 사직동인가요?』
『네.』
『아까 사무실로 찾아 갔댔어요.』
『알고 있습니다.』
『왜 안 오셨어요?』
『……………….』
『일·사 후퇴 때부터 지금꺼정 쭉 영훈씨를 찾고 있었어요.』
『……………….』
『그러다가 바루 어저께 잡지 「신여인」을 우연히 펄쳐 보았아요. 거기서 편집 책임자로 있는 영훈씨를 발견했어요.』
대꾸 없는 말을 연숙은 혼자서만 했다.
『어찌나 기쁜지, 어제 하룻밤 저는 통 잠을 못 잤어요.』
『……………….』
『영훈씨!』
『……………….』
영훈은 얼굴을 돌려 나란히 걷고 있는 옛날의 애인을 바라보았다,
『영훈씨가 그처럼 아무런 말도 건너 주지 않는 것이 제게는 무척 좋아요.』
『무슨 뜻입니까?』
『영훈씨의 감정이 지금까지도 저를 용서해 주지 않았다는 그 사실이 저를 지금 무척 행복하게 만들고 있어요.』
『어디까지나 연숙씨는 소설의 히로인이군요』
『십년 만에 만난 사람에게 인사말 한마디 없이……그처럼 무뚝뚝하게 대해 주는 영훈씨가 제게는 한없이 좋아요. 좀 더 경쾌하게, 좀 더 반갑게 대해 주었던들 제 행복은 훨씬 덜 했을꺼야요.』
『마음대로 좋아하고 마음대로 행복하세요. 옛날부터 당신은 제멋대로 슬퍼하고 제멋대로 행복한 사람이었으니까요.』
『흐응 ——─.』
백연숙은 비로소 가는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그것은 영훈의 한 마디를 자기 자신 그대로 승인하는 웃음이기도 했다.
『연숙씨가 어째서 나를 그처럼 찾았습니까?』
『보고 싶으니까, 찾은 거 아냐요.』
연숙의 어조가 차차 생기를 띠우며 옛날의 그것으로 돌아가기 시작하였다. 대꾸 없는 독백을 하던 아까 와는 차츰차츰 달라져 왔다.
『보고 싶을 때는 찾아오고 보기 싫은 떄는 버리고 가고……아주 마음이 편해서 좋겠습니다.』
『……………….』
둘이는 이윽고 광화문 네거리까지 왔다. 네거리를 건너 그냥 곧장 걸어가며
『결혼 생활이 불행했습니까?』
영훈이 물었다.
『그렇지만 영훈씨를 늘상 생각하면서 살았으니까, 별반 불행한 삶은 아니었어요.』
『흥 ——─.』
영훈은 빙그레 웃으며
『연숙씨는 옛날부터 배우의 소질이 풍부했었지요.』
『어쨌든 저는 그렇게 살아왔어요.』
연숙도 쓸쓸히 웃었다.
『소생은 몇이나 되지요?』
『둘 낳았다가 둘 다 잃어 버렸어요.』
또 잠자코 얼마동안 걷다가
『그래 결혼 생활이 왜 불행했습니까?』
『바람을 수없이 피웠으니까요. 계집 한둘은 늘 끼고 돌았지요. 해방이 되자 토지는 송두리채 몰수를 당하고 반동분자로 몰리워 다니다가 단신 삼팔선을 넘어 월남해 왔어요.』
『그게 언젠데요?』
『그러니까 그것이 해방 후 삼년 째 잡히는 해 봄이었어요. 소문을 듣자니, 처음엔 고생도 한 모양이지만 무역인지 뭔지를 해서 돈도 착실히 빌었다구요. 그래 이번 일·사 후퇴 때 제가 이리로 밀려 나와 보니까, 벌써 어떤 여자와 결혼을 했어요.』
『흔히 있는 일이지요. 그래 어떻게 했습니까?』
『잘 살라고 내버려 뒀지요. 그랬더니 이즈음 와서는 그 여자와는 곱게 헤어질테니 다시 살자구요.』
『다시 살면 되지 않습니까?』
『누가 영훈씨더라 그런 말 해 달랬어요?』
그것을 계기로 둘이는 또 잠자코 걸었다. 동양극장 앞까지 와서
『영훈씨, 놀래지 마세요.』
『무얼 놀래요?』
『일한(一韓)무역 사장 김석호(金石豪)를 영훈 씨는 잘 아실 꺼야요.』
『아, 김사장?……』
백연숙의 말투로 보아 김석호가 그의 남편인 것을 영훈은 짐작했다. 일한무역의 김석호는 동시에 영훈이가 봉직하고 있는 「신여인」사의 사장이기도 했던 것이다.
『역시 놀래시는군요.』
『그랬습니까?……』
『그 사나이, 해방 전에는 평양으로 진출하여 태양신보라는 주간 신문을 경영한 적이 있답니다.』
『잘 알고 있습니다.』
실로 뜻밖의 일이었다.
일한 무역에서 경영난으로 쓰러져 가는 「신여인」을 맡아가지고 새로운 출발을 한 것은 환도후 부터의 일이었다. 사장 김석호는 영훈보다 오륙년 연장자였으나 채림 채림이 화려한 탓인지 그런 연세로는 통 보이지 않았다. 태반은 일한 무역에 들어 배겨 있었고 「신여인」사에는 한 주일에 한 번 정도로 밖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사장의 신임이 아주 두터운 영훈이었다.
그래서 지금은 편즙만을 맡아 보고 있지만 멀지 않은 장래에는 「신여인」의 운영 책임자로 등용할 단계에까지 다달아 있는 영훈이었다.
『그래 그동안 연숙씨는 어떻게 지냈어요?』
『혼자 지냈지요. 쭉 대전에 있다가 환도하면서 집 한채 사 주길래 거기서 먹구 자구…….』
『집은 어딘데?……』
『아현동이예요.』
연숙은 약간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이 커다란 환경의 변모를 옆에서 생각하는 것처럼 괴로워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
『모두가 다 제 운명이예요.』
그리고는 영훈을 핼끔 쳐다보면서 쓸쓸히 웃었다. 말과 태도는 침울에 가까우리만큼 고요한 연숙이었으나 그러나 어딘가 마음의 여유가 엿보이는 것 같아서 영훈의 적지 않게 안도의 염을 품는 것이다.
서대문 네거리에 둘이는 다달았다.
네길 어름을 건너 마포 쪽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오른편으로 깨끗한 중국요릿집이 하나 있다. 둘이는 무슨 약속이나 하고 온 사람처럼 그리로 들어갔다.
『어서 오십쇼』
목소리가 낯익어 바라다보니, 이 집 주인 장서방이 옛날 그대로의 그 무뚝뚝한 얼굴로 둘이를 맞이했다.
『아, 장서방!』
연숙은 억제할 수 없는 깊은 감동을 가지고 다소 늙어져 보이는 장서방을 향하여 외치듯이 불렀다.
『오오, 난 또 누구시라구?……옛날의 학생 아가씨 아니오?』
오십이 훨씬 넘은 장서방이었다. 그 장서방이 십년 전의 연숙과 영훈을 알아주었다.
사람이란 오랫동안 보지 않다가 만나면 누구나가 다사로워지는 것일가? ……장서방까지도 이처럼 반가히 맞아 주는 십년이란 세월의 흐름이었다. 그렇건만 마음의 애인 고영훈은 아직까지 단 한 마디의 다정한 말도 건너주지 않았다.
『장서방, 좀 늙었네요.』
『아가씨는 조금도 늙지 않았습니다. 그때보다 더 이뻐졌는데…….』
연숙은 순간 눈물이 핑 돌았다. 장서방이 반가워하면 할수록 연숙은 서글퍼진다. 영훈은 자기를 원망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통 관심이 없는 것이라고, 연숙은 자꾸만 서글퍼지는 것이다.
지나간 시절, 이북서 청요리를 먹을 때마다 부처님처럼 표정이 없는 이집 주인 장서방의 얼굴을 머리에 그려 보던 연숙이가 아니었던가. 남편 김석호가 기생 오입을 하면서부터는 한층 더 자주 연숙의 기억에 오르내리던 장서방의 얼굴이었다.
『그 장서방은 옛날과 변함없이 나를 맞아 주건만…….』
영훈의 뒤를 따라 방으로 들어가면서 연숙은 자꾸만 울고 싶어졌다.
<계속>